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25화 (25/56)

#25.

지금쯤 우리 왕자님의 편지를 읽으며 한심해하고 계실 코델리아 아가씨께.

안녕하세요, 필경사 베데르입니다. 그간 건강히 지내고 계셨습니까?

수도원에서의 왕자님의 장기체류가 결정된 후 제가 제일 먼저 걱정한 건 코델리아 아가씨였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말로 걱정되는건 코델리아 아가씨와 나누는 편지에 중독된 우리 아치 왕자님이지요.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몇번을 말했는데도 기어코 서책보관함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하며 아를리 궁으로 가시는 왕자님 모습을 보니, 이건 정말 ‘중독’ 이라 부를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아를리에 서책보관함을 가지러 다녀오신 후 보인 왕자님의 모습은 더욱 대단했습니다. 상자를 양손으로 꼭 안고 제 필사실 문을 뻥 차고 들어오더니 꼭 세실리아 공주님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떨어뜨리거나 망가뜨렸다간 방금 만든 시도서를 다 찢어두겠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극악무도할데가!

지금쯤 코델리아 아가씨께서도 우리 왕자님의 집착에 조금 질려버리셨을까요?

하지만 지금 저쪽으로 달려나가 노엘과 플로리안 공작님과 잘도 놀고 계시는 모습은 또 천사처럼 아름다우시니 부디 우리 왕자님을 용서해주시길 청합니다. 저 예쁜 얼굴에 속는 것도 그만해야 할 일이지만요.

노엘과 플로리안 공작님은 아치 왕자님이 잠시 아를리 궁으로 떠나신 동안 더욱 친해졌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엘 그 아이는 세실리아 공주님을 제외하고는 어른 여자를 처음 접했으니 말입니다.

네, 코델리아 아가씨.

이 늙은 여우는 바로 알아차렸답니다.

플로리안 공작이 사실은 여자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처음엔 긴가 민가 하기도 했습니다.

얼굴이며 자태가 모두 여자인 것이 틀림없긴 한데 설마 우리 아치 왕자님처럼 기민한 분께서 그걸 모르고 계실리가 있나 싶었거든요.

그러나 이런 일에 대한 제 촉은 틀리는 법이 없어, 세실리아 공주님이 마탑으로 떠나시기 전에 넌지시 물어보았지요. 공주님은 놀라지도 않으시고 제게 바로 대답해주시더군요.

“베데르, 당신이 보기에도 바로 보이지?”

“네, 공주님. 저 앳된 뺨을 보면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역시 아치 저 놈은 한심해.”

“...아치 왕자님께서도 아는데 모른 척 하고 계시는 건 아닐까요?”

“아니. 쟨 몰라. 어머니도 대충 눈치채신 거 같은데 쟤만 몰라.”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아치 왕자님께서는 음, 여자를 잘 아시고, 그러니까 음, 머리도 나쁘시지는..아니 총명하시고..”

제가 당황해서 더듬더듬 묻자 세실리아 공주님께서는 그저 고개만 절레 절레 저으셨답니다.

“그냥 입 다물고 있어, 베데르. 저 한심한 놈이 대체 언제 알아차리나 보자고. “

세실리아 공주전하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훌쩍 말을 타고 떠나셨습니다.

그래도 전 설마 우리 왕자님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셨을까 싶어 얼른 왕자님께 가서 넌지시 플로리안 공작님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그러나 우리 왕자님께서는 순진한 얼굴로 다만 이렇게만 말했답니다.

“플로리안 저 녀석은 비밀이 하나 있지. 그게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아서 그게 고민이야. 나의 영민한 코코는 이미 알아챈 것 같지만 말이지.”

“코델리아 아가씨께서 알아차리셨다고요?”

“그래, 대단하지? 편지만 보고 모든 것을 알아차린다니까?”

그러고는 또 신이나서 한 시간 쯤 당신 자랑만 하셨답니다.

일이 이렇게 흘러 저는 당신마저도 플로리안 공작님이 여자라는 걸 눈치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고나니 갑자기 마음이 아파져오더군요. 제가 아들처럼 생각하며 아끼던 우리 왕자님께서는 혹시 제 생각과 달리 좀... 모자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으니까요.

어쨌든 전 이런 의심과 싸우며 여전히 성실한 필경사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만들던 시도서 작업이 아가씨께서 주신 종이 덕분에 쉽게 끝나 이젠 좀 한가해진 참이니, 옛 이야기를 꺼내기에도 제일 좋은 때이지요.

제가 지난 번에 에드위나 공주님께서 로이틀링엔에 볼모로 잡혔다가 3년만에 윈저튼으로 돌아오신 것까지 이야기했지요? 그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서책보관함을 여기 수도원에 두고 갔다는 것도 말입니다.

공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 이 서책보관함을 필경소 제 1스크립토리움 한쪽에 소중히 보관한 채 먼지라도 앉으랴 매일같이 닦았답니다. 하지만 그 안까지 열어 닦을 생각은 한 적이 없었지요.

괜히 만졌다가 어디 고장이라도 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있기도 했고, 처음 공주님께서 보여주셨을 때 안에 사슬처럼 세 고리가 이어진 팔찌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굳이 그 안쪽에 대한 호기심도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이 보관하긴 했지만 공주님이 그것을 찾으러 다시 오실 줄은 몰랐지요. 공주님은 늘 그렇게 수도원에 제 보물을 던져두고는 절대 찾으러 오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요. 제 1스크립토리움 한쪽엔 에드위나 공주님의 인형이며, 보석, 책 따위를 보관하는 상자가 있을 정도라니까요.

이런, 공주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계속 곁다리로 말이 흘러가는군요. 이게 다 늙은이에게 추억을 상기하게 한 탓이라 여기시며 너그럽게 용서하고 너무 재촉하진 말하주십시오. 이제서야 전 아가씨께서 정말로 듣고싶어하셨던 바로 그 이야기를 하려하니까요.

코델리아 아가씨,

지금부터 제가 해드릴 이야기는 정말이지 이 늙은이가 오래도 혼자만 간직한 비밀이랍니다.

이 이야기 안에는 어쩌면 왕족 모독으로 잡혀가 바로 죽임을 당할만한 불경스러운 말들이 섞여 있을 것이고요.

그러니 부디, 누구에게도 이 편지를 보여주시지 마시고, 혹여 계신 곳이 안전하지 않다면 읽고 바로 태워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자, 이제 긴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기사 아서길런을 찾아 떠나신 후 선왕께서는 하나 남은 자식을 찾으러 방방곡곡을 헤매셨지만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항간에는 제국에서 다시 공주를 볼모로 잡아간 거라는 유언비어를 퍼지기도 했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공주님을 되찾기 위해 또 전쟁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었지만, 선왕께선 절대 그러실 수 없었습니다.

질 것이 분명해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왕국의 실권은 이미 찰스 웰즐리 공작이 장악하고 있었고, 귀족회에서 공주를 찾겠단 명분으로 일으키는 전쟁을 허락해줄리가 없었거든요.

일이 이렇게 된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제국과의 전쟁은 선왕께서 벌이신 무모한 일이었고, 그로인해 윈저튼의 많은 국민이 희생되었습니다.

에드윈 왕자가 죽은 후 선왕은 왕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갔지만 찰스 웰즐리 공과 군대는 끝까지 남아 궁을 지켰고요. 게다가 전쟁의 끝에 선왕 알프레드 폐하는 로이틀링엔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찧으며 패배를 시인해야만 했으니 윈저튼 왕가의 위엄은 산산조각 나버렸지요.

100년을 넘게 이어온 윈저튼의 이름이 갑자기 지워지고 다른 이가 왕위에 오른다는 것도 말도 안되는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왕의 권위를 세우기엔 선왕폐하께서는 너무 많이 무너지신 겝니다.

그래도 선왕 폐하께서는 에드위나 공주님이 볼모에서 돌아오고 후계구도가 완성된다면 일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나, 정작 돌아온 에드위나 공주님은 선왕께 돌처럼 차가웠습니다.

오랜만에 재회한 부친에게 왜 그랬냐고요?

뭐, 뻔한 일이지요.

에드윈 왕자님이 살아계실 때 선왕께서는 공주님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거든요.

두번째 왕비님을 만나신 후에 그분에게 빠져서 없던 이혼법까지 만들어 왕비님을 내치셨고, 결국 두번째 왕비님과의 사이에서 낳은 에드윈 왕자님에게만 후계자 교육을 시키시며 에드위나 공주님의 어머님은 완전히 무시하셨지요.

네, 우리 공주님이 로이틀링엔에서의 볼모기를 그렇게 잘도 견디실 수 있었던 것은 애초에 윈저튼에서 부터 그리 귀애받지는 않은 까닭이 클 것입니다. 공주님은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방치되어, 좋게 말하면 자유롭게 자라셨지요.

그런데 이제와 공주님께 가서 네가 아비를 도와 윈저튼 왕가의 기틀을 잡아야하며, 찰스 웰즐리와 결혼해야한다고 말한다고 씨알이나 먹히겠습니까?

로이틀링엔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와서 머리가 더 커다라진 딸이, 이제 이빨 잃은 호랑이가 된 아버지의 말을 들을 턱이 있겠습니까?

공주님과 선왕 폐하의 반목은 점차 심화되었죠. 기사 아서 길런이 아를리에 나타나기 직전, 이미 공주님께서는 찰스 웰즐리 경과 결혼하지 않겠다 선언하다 선왕 폐하와 크게 다투셨습니다.

이럴 거면 나가버리라는 선왕 폐하의 말에 알겠다며 정말로 시녀 하나 없이 혼자 나와 레테수도원으로 왔다가 며칠 후 끌려가듯 다시 아를리 궁으로 불려가기도 했고요.

그런 일들이 있었으니, 이제와 공주님을 위해 로이틀링엔에게 싸움을 걸겠다고 한들, 뒤늦은 아비의 후회에 누가 가담하겠습니까? 계속 고집하다간 초라한 꼴로 왕좌에서 쫒겨날 것이 뻔한 일이었죠.

상황이 이러했던 것을 알고 있었던 저는 공주님께서 떠나신 것이 어쩌면 기사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아를리를 떠나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답니다.

이런 제 생각은 완전히 틀리진 않았지만 아주 들어맞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에드위나 공주님이 레테 수도원을 찾아오신 것은 실종되시고 반년이 지났을 시점입니다.

저를 찾아온 공주님께서는 어딘가 예전과는 달라보이시더군요.

밝기만 하던 샛초록색 눈에는 전에 없던 깊이가 서려있었고, 말수는 전에도 많지 않던 것이 더 적어지셨더군요.

하지만 제일 많이 달라진 건 바로 얼굴빛이었습니다. 그 작은 얼굴엔 보는 사람마저도 괜스레 두근거리게 만드는 희망의 빛이 환히 어려있었거든요.

“공주님, 아를리를 나오신 것이 그리 기쁘십니까?”

저는 아마 제일 처음엔 이렇게 물었던 것 같습니다. 공주님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가끔 생각나. 우습지. 그렇게 꼴보기 싫던 아버지마저도.”

“그럼 왜 떠나신 겁니까, 공주님. 저는 공주님이 아를리가 지겨워 떠나신 것인 줄만 알았어요. 정말로 다른 사람들 말대로 기사 아서 길런을 따라 가신 거예요.”

“아마도.”

“그 자를 사랑하십니까?”

“아니. “

“그런데 왜요, 공주님. 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셨나요? “

제가 그렇게 묻자 공주님은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더듬 더듬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내 성 앞에서 99일을 기다렸어. 마지막에는 먹지도 자지도 눈을 감지도 못했어. 그렇게 오래 그곳에 서있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거든. 그런데 99일을 기다리다가 하루를 남기고 날 떠났어. 나는 그냥 궁금했어. 왜 그랬는지.”

그저 궁금해서 떠났다니 그것도 참 공주님다워 저는 그만 실소를 흘리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기사 아서 길런이 우리 공주님을 잘도 파악했나보다 하는 생각도 했고요. 에드위나 공주님은 어려서부터 아주 독특하고 총명한 분이었고, 많은 똑똑한 사람이 그렇듯 호기심도 지대했으니까요.

어쨌든 전 우리 공주님께서 기뻐보이시는 것에 기분이 좋아져서 그래 될대로 되라 싶었습니다.

이 불경스러운 필경사는 공주님이 아를리로 돌아가지 않아도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럼 공주님, 이제 기사 아서 길런을 찾고 궁금증을 푸신겁니까?”

공주님은 고개를 저으셨습니다. 아직 발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하면서요.

저는 다시 공주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기뻐보이시나요, 공주님.”

“찾아낼 방법이 생각났거든.”

네, 코델리아 아가씨. 당신같이 총명한 분이시라면 여기서 바로 예감하셨겠지요.

그 찾아낼 방법이란 바로 서책보관함이었습니다.

어쩌면 서책 보관함 안에 든 팔찌일지도 모르고요.

볼모기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공주님이 제게 친히 주었던 바로 그 팔찌 말입니다.

저는 얼른 제1스크립토리움에 들어가 고이 모셔두었던 서책보관함을 가져왔어요.

그런데 이것이 오랜만에 들어보니 제법 묵직하더군요. 게다가 바스락 거리면서 안에 무언가 들어있는 것 같은 소리가 들었습니다. 혹시나 지난 여름에 몰래 들어간 나비라도 죽어있다면 어쩌나 싶어 저는 공주님께서 놀라실까 얼른 열어보았지요.

그런데 상자를 열자마자 건드리면 터지는 여름 열매처럼 종이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저도 모르게 아, 하고 탄성을 질러버렸지요. 그 소리에 놀란 에드위나 공주님이 제1스크립토리움으로 들어오셨고, 공주님은...

공주님은 소리를 지르시진 않으셨습니다.

다만 커다란 초록눈이 평소보다도 더 커다래지시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입만 벌린 채 상자안에 들어있던 종이들이 쏟아지는 꼴을 바라보고 계셨죠.

공주님은 바닥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주섬 주섬 종이를 주으셨어요.

코델리아 아가씨, 당신도 아시지요. 이 서책보관함은 그리 큰 사이즈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 두세권은 넣을 정도 크기이니 종이 한장쯤이야 천장도 넘게 들어가지요. 그런데 그 상자가 터질만큼 종이가 많았습니다. 모든 종이가 빼곡히 채워져있었고요.

한참 후에야 전 그것이 편지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누군가가 우리 공주님께 보낸 편지들이요.

아마, 공주님은 그런 것이 여기 들어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요.

공주님이 가지러 온 것은 그저, 팔찌였을 뿐 서책 보관함까지 가져갈 생각은 하지 않고 계셨으니 말이지요.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은 채 편지를 한 장 한 장 읽으셨습니다. 저는 차마 무슨 내용인지 물어보지도 못했지요.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쯤 지났을까.

공주님이 움직이시지 않으니 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동안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습니다.

겨울 햇빛이 환히 드리우던 필경소 위로 소복하게 흰눈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저쪽에서는 이제 슬슬 저녁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지 고소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지요.

그러나 저녁을 먹으러 갈 수는 없었습니다. 편지는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날 처음 저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눈물을 봤습니다.

왕비님이 선왕 폐하께 버림받고 레테 수도원으로 공주님을 데려오셨던 그 어린 시절에도,

여름 나들이 삼아 오셨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피가 났을 때에도,

그 모진 볼모기를 거치고 돌아오신 때에도,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공주님의 울음을요.

코델리아 아가씨,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렇게 울지 않는 사람들은요. 한번 울면 정말이지 거하게 운답니다.

주체할 수 있을 정도의 감정이라면 그따위 눈물은 삼켜버리고마니, 이런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울때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커다란 울음이 터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공주님은 그렇게 세상이 무너져라 우셨습니다.

저는 꼼짝도 못하고 그 울음이 끝나는 때를 기다렸지요.

필사실 밖으로 내리는 눈이 잦아들고, 사방이 캄캄해져 이제 울고있는 모습마저 보이지 않았을 때에서야 공주님의 끝없는 눈물은 거두어졌습니다.

공주님은 서책보관함을 뒤적여 팔찌를 찾더니 주섬주섬 바닥에 놓인 종이들을 모아 아주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꾸러미 안에 넣으시고는 바로 길을 떠나셨지요.

마지막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는 공주님을 붙잡고 저는 물었습니다.

“서책 보관함은, 서책 보관함은 가지고 가지 않으십니까?”

밤이라도 지나고 출발하시라는 부탁,

가지 말라는 청언,

어디로 향하시냐는 물음,

모두 소용없을 걸 알아 그렇게만 말했던 것 같습니다.

공주님은 절 빤히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가지고 있어.”

그리고 잠깐 생각하다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가 언제 안부를 전할 지 모르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어리석게도 한달이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필사실을 청소하다 말고 상자를 열었는데 그곳에 다시 종이 몇장이 들어있더라고요.

그리고 그곳엔 익숙하지 않은 필체로 쓴 짧은 메시지가 들어있었습니다.

네, 에드위나 공주님의 편지였어요.

오해는 마세요. 코델리아 아가씨. 저는 당신처럼 총명치 못하는 필경사 늙은이일 뿐이니, 공주님과 저 사이엔 아치왕자님과 당신이 그러하듯 살가운 편지가 오가진 못했답니다.

편지에는 기사 아서 길런을 찾아 잘 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전언과 함께, 이후 도착하는 서신은 모두 공주님이 유일하게 친구로 생각하는 어느 한 공녀님께 전달하라는 전언이 적혀 있었습니다. 로이틀링엔에서의 볼모기까지 함께 따라가셨던 공주님의 첫 시녀이자 가장 친한 벗이었던 분이시지요.

저는 혹시라도 이렇게 하면 공주님께 닿지 않을까 싶어 짧게 편지를 적어 보냈지요.

선왕폐하께는 전하지 않아도 되냐는 물음이 적힌 정말로 짧은 편지였습니다.

제 짐작이 맞았는지 공주님께서는 며칠 후 바로 답을 두 장이나 보내주셨답니다.

[아니야, 말하지마. 아무한테도, 아무 말도 하지마.

내가 잘 살고 있다는 건 베데르 당신만 알고있어. ]

그 다음 장은 좀 무서웠어요.

[말하면 죽여버릴 거야. 알아들었어?

정 딱해보이면 당신이 재주껏 타일러.

그리고 다시는 내게 편지하지마.

당신은 다 좋은데 말이 많은게 흠이니까. ]

..제가 말씀드렸나요? 공주님은 아치 왕자님처럼 다정하신 대도 있지만 대체로 세실 공주님처럼 절대로 빈말은 하지 않으시는 대쪽같은 성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고요. 그러니 이 힘없는 늙은이가 별 수 있었겠습니까. 말 수를 줄이고 사는 수밖에요.

그리고 한달여가 지났을 때, 에드위나 공주님이 다시 서신을 주셨습니다.

저는 에드위나 공주님이 말씀하신 그 공녀께 은밀히 이 사실을 알렸고요.

그 공녀께서는 당시 높은 분과 결혼하셔 쉽게 수도원을 드나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지만 거의 매달 새 시도서를 주문하겠다는 핑계를 대며 우리 수도원을 방문하게 되었지요.

그분은 가끔 제게도 공주님 소식을 알려주셨습니다.

공주님은 기사 아서길런과 함께 살 집을 찾았다고 했고, 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고도 했습니다.

딸기 쥬스를 처음 만들어보았다고도 하셨으며, 복숭아잼은 너무 오래걸리니 다시 만들지 않겠다고도 하셨어요.

쐐기풀에 쏘였을 때 어떻게 하냐고 물었을 땐 공녀님 대신 제가 약을 구해다 드리기도 했고 ,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면 어떻게 하냐는 말에는 우리 둘이 힘을 합쳐 책을 뒤져보며 감기차를 내리는 법, 닭고기 스프를 끓이는 법 따위를 알려드리기도 했답니다.

그러나 이 마저도 2년여가 지났을 때는 뚝 끊겼습니다.

공녀님의 말로는 언젠가의 편지에서 공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더군요.

[정말로 잘 살게되면 그땐 더 이상 편지하지 않을게.]

공녀님께서는 그래도 계속 편지해달라고 빌다시피 답장을 썼다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에드위나 공주님이 어디 남의 말을 들을 분인가요?

거짓말처럼 연락이 끊겼을 때 저는 그저 바랐답니다.

공주님이 기사 아서 길런을 만나 영원히 행복히 살기만을요.

두분이 돌아가셨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공주님께서 아들, 아니 딸을 낳으셨으리라고도 짐작도 못했죠.

...이야기가 길어졌군요. 늙은이에게 함부로 질문하지 말라는 말은 이래서 있는가 봅니다.

자, 이것이 제가 서책보관함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랍니다. 공주님의 편지가 오지 않게 된 후로는 저도 이 상자에 대해서는 잊기로 한 채, 저만치 치워두었지요.

물론 버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필경소는 좁았고, 저희 스크립토리움에서 소유하게 된 책은 점점 늘어났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계속해서 새로운 잉크와 갈대펜, 거위깃이 쌓여만 갔고, 종이도 늘어났지요. 그런 것들에 밀려 서책보관함은 한 구석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치 왕자님 이 망할놈.. 아니 그분께서 가져갔을 줄이야, 누가 짐작했겠습니까?

코델리아 아가씨, 어찌하여 당신이 그 서책보관함의 반쪽을 가지고 계신지는 저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아치 왕자님께서 당신과 편지를 교환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공주님은 틀림없이 기뻐하실 겁니다.

지금도 하늘에서 깔깔 웃으시면 잘했다, 베데르. 너에게 서책 보관함을 맡기기를 잘했어 라고

말하고 계실지도 모르는 노릇입니다. 암요, 그렇고 말고요.

-초열달의 저물어 가는 밤, 필경사 베데르 랭 올림.

* * *

친애하는 베데르,

출근 전에 당신 편지를 읽다가 지각할 뻔했네요.

당신의 긴 편지에 대한 고마움을 뒤로 하고 짧게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혹시 그 익명의 공녀님의 이름이 아델라이드는 아닌가요?

-레테 수도원 모두에게 사랑을 보내며, 코델리아.

========== 작품 후기 ==========

긴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을 독자님들께.

1일 1연재를 약속드렸는데 쓰다보니 만오천자라 부득이하게 두 편으로 나눠 올리는 것을 용서하세요. 대신 내일은 하루 쉬겠습니다 ㅠ베데르 이 말많은 영감탱이.... 가만안둬..

추신: 서간체 소설에 맞추어 편지로 댓글을 주시는 독자님들 너무 귀여워요. 그외에도 모든 댓글들이 제 글보다 훨씬 재밌는 것 같아 매일 아침 댓글을 보기위해 눈이 번쩍 떠집니다! 질문해 주시는 것들 중 제가 답할 수 있는 것들은 따로 한번 정리하여 공지에 올려둘게요. 조아라는 왜 댓글에 대댓글 기능이 활성화 되어있지 않은지!(저같은 사람들 때문이겠죠..)

추신2: 추천과 선작 진짜 감사합니다. 6000이 넘다니 믿을 수 없어요...ㅠㅠ 흑흑.

<--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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