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27화 (27/56)

#27

친애하는 벗 코델리아 그레이 양께.

안녕하세요, 기억은 하십니까? 당신의 어깨가 너덜너덜한 벗, 아치 앨버트 윌리엄입니다.

슬슬 다시 격식을 차려 인사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간 격조하였군요.

...계속 이렇게는 못 쓰겠네요. 궁정식 편지쓰기 수업에서 졸아, 인사 다음에 무얼 써야 하는지는 아무것도 모르겠거든요.

날씨 이야기?

여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마물의 핏냄새가 도는 화창한 여름입니다.

당신 안부?

편지 쓸 일도 없으니 건강한 손목을 유지 중이겠지요?

나요?

침대가 삐걱이는 소리만 들려도 내 뼈라도 부러진 듯 바로 울음을 터뜨리는 과잉 보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휩쌓여 침대에 있지요. 오늘 베데르를 시켜 침대로 서책보관함을 가져오라 명했을 땐 사실 좀 걱정을 했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의 서책 보관함이 그러했듯이 상자를 열자마자 우수수 당신의 편지가 쏟아질 줄만 알았거든요. 아주 정중한 태도로 네 편지는 네가 걸어가서 보라는 의도를 전달 중이던 베데르에게도 내가 얼마나 우쭐 대었는지 몰라요.

코델리아가 나의 부재를 못 견뎌하며 어마어마한 양의 편지를 넣어두었을거라고,

더 지체했다가는 상자가 터져버리고 말 거라고까지 설명했다니까요.

그런데요.

상자 안이 비어있더라고요.

베데르 그 노친네가 눈치껏 사라져준 것이 다행이었어요.

나의 서책 보관함은 넘쳐나는 종이들에 뻥 터지기는 커녕 바닥이 뚫린 상자처럼 텅텅 비어있었습니다. 빈 상자처럼 내 마음도 휑해지고 말았고요.

어떻게 된 거예요, 나의 귀여운 재촉쟁이, 코코.

이제는 내가 물을 차례가 온 것 같군요.

당신, 살아있어요?

초열달의 열 다섯번째 날 밤,

당신의 수 많은 독촉장들을 그리워하며, 아치 앨버트 윌리엄.

* * *

코델리아,

정말 영영 나와는 편지하지 않을 거예요?

구미 당기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요?

당장 답장을 준다면, 기사 아서 길런 얘기를 해드릴게요.

-정확히 한 시간을 기다린 후, 다시 한번 재촉하는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윌리엄.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전하.

답장을 재촉할 때면 괜히 이름을 길게 쓰는 그 버릇,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요.

그러게 세금 독촉장처럼 밀려들던 내 재촉 편지들을 조금 더 소중히 여기지 그랬냐고 툴툴거리고 싶으나 당신을 잃을 뻔 했다는 생각에 농담도 잘 안나오네요.

심각한 상황일 수록 농담을 섞어 말하는게 아치 앨버트식 화법이란 걸 알지만 지금의 저로선 당신께 유쾌한 편지를 쓰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에요.

지금은 좀 괜찮아진거예요?

앉을 수는 있나요?

7.15.

-코델리아 그레이.

* * *

사랑스러운 나의 코코,

아뇨, 앉지 못하고 누워서 입으로 펜을 물고 편지를 쓰는 중입니다.

...당연히 앉아있지요. 펜은 손으로 들고 있고요. 하지만 입으로 쓴다고 해도 당신 글씨보다 나을 것은 장담드릴 수 있어요.

그런데, 코코. 당신의 자유로운 필체가 오늘은 조금 주눅들어 있는 것 같군요. 마침표는 왜 그렇게 조그맣게 찍었어요? 물음표도 주눅들어 내려가 있잖아요. 날아갈 듯 높이 찍은 쉼표들로 날 경쾌하게 만들었던 나의 코코는 어디로 간거죠?

기사 아서 길런 이야기도 꺼냈는데도 어떻게 된 거냐고 묻지도 않고요.

우리의 서책보관함이 여름 휴가에 가 있는 동안, 당신이 내게 갖던 열렬한 흥미도 사라진 건가요?

내게 위문 편지 한 통 안 쓰며 뭘 한거예요?

마크는 잘 지내요? 당신을 또 괴롭히는 건 아니죠? 리암이랑은 어디까지 진도가 나갔지요? 내가 질투할 정도예요?

그래요, 당신이 빨리 답장을 안 준다면, 난 더 많은 물음표로 당신을 괴롭힐 수도 있답니다.

기운 차려요, 코델리아.

초열달의 열다섯번째 날 밤,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묻진 않았지만 궁금해할까봐 얘기하는데 사실 기사 아서 길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요. 그저 당신의 답장이나 얻으려 던져본 말입니다.

* * *

바보 아치 앨버트

왕자님은 모르시죠?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건 서책 보관함에 당신 편지가 왔는지 확인하는 거예요.

지난 번에 당신이 소식이 없었을 때는 무슨 일이 있나 몰라 심지어 직장에까지 낑낑대며 저 무거운 상자를 들고 갔다고요.

차마 발치에 둘 수도 없어 조그만 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일했죠. 다들 힐끔힐끔 제 책상을 보았지만, 뭐 보라죠? 직장에 나무 상자를 가져왔다고 해서 자를 수 있는 법은 없으니까요.

당신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는 거의 10분에 한번씩 서책보관함을 열어보아요. 집에 오면 혹시라도 한눈 판 새 당신이 날 찾을까 침대가 아니라 책상에 앉아 책을 읽죠.

그거 알아요? 우리 같은 침대 독서파들에게 이건 정말이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드는 정도로 커다란 일 이라니까요. 앉아서 책 읽기는 정말 거지같아요.

그게 다인가요. 나의 올빼미 왕자님께서는 밤이 깊어올 쯤에 주로 편지를 보내시니, 캄캄해질 수록 내 마음은 부풀어만 오죠. 창문가에 턱을 괴고 앉아 달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 사는 곳이 달라도, 지금 당신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하고요.

심지어 리암과 만날 때조차, 그가 무지막지하게 섹시해보일 때도, 당신에게 오늘 리암이 얼마나 잘생겼었는지를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고요. 정말 구제불능이죠.

내가 왜 위문 편지 한통을 안 썼냐고요?

당신이 내게 답장이라도 하겠다고 낑낑거리다 다시 아플까봐 그랬어요.

물론 내가 그러건 말건 당신은 신나게 움직여 대며 멋진 필체로 내게 농담을 던지실 수 있지만요.

그래요, 난 이렇게 당신을 소중히 생각해서 지금도 당신이 편지를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할 수 있었죠.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래봤자 언젠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또 속수무책일텐데 말예요.

마물이 당신 팔을 덥썩 물 때쯤 다시 섹스 이야기나 적고 있을테고, 잘생긴 당신을 삼켜 꿀떡 삼킬 때쯤엔 줄리엣이랑 펍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겠죠.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져요. 전쟁터에 연인을 보낸 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통한 심정이 된다고요.

아치 앨버트, 난 당신과 이렇게 편지를 나누는 시간을 정말 사랑하지만 우리의 마법 상자는 가끔 너무도 쓸모없게 느껴지네요.

그러니 내 물음표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죠. 농담을 할 수 없는 걸 용서해줘요.

7.15.

-코델리아 그레이.

* * *

나의 천사 코코에게.

마물은 사람을 먹지 않는대요.

맷돼지도, 소도, 양도, 심지어 고양이랑 사슴마저도 잡아먹는데 사람만 먹지 않는다니, 그것 참 고급스러운 입맛이지요?

...아직도 농담 따먹기나 하냐고 나를 구제불능이라고 욕하며 편지를 찢어려고 했다면 잠시만 참아요. 나도 왜 내가 펜만 들면 실없는 이야기를 지껄이는 지 정말 모르겠어요.

당신 말대로 진심을 드러내는 것보단 돌아 돌아 농담부터 하는게 더 내 취향이지요.

하지만 가끔은 직구로 던져야 할 마음도 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답니다.

오늘도 난 그런 마음을 하나 가지고 있지요.

그거 알아요, 코코?

정말 보고 싶었어요.

이상한 일이죠. 단 한번도 당신을 본 적이 없는데, 죽을 것 같은 순간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당신이라는게.

-당신의 충실한 벗, 아치 앨버트.

* * *

왕자님.

왕자님은 정말 정말 나쁜 사람이에요.

만나지도 않고서 날 울리고, 웃기고, 화나게 만드는 사람은 당신 밖에 없을 거예요.

보고싶단 말 한마디로 나를 완전히 녹였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요.

난 아직도 당신에게 무척 화났으니까요.

-아직도 (그냥) 코델리아 그레이.

* * *

벌써 세번째 (그냥) 코델리아 그레이라고 쓰는 나의 코코에게.

그래요, 내가 잘못했어요.

그런데 내가 뭘 잘못했었죠?

죽을 뻔했더니 까먹어버린 것 같아요.

-당신의 아치.

* * *

바보 아치 앨버트.

그래요, 당신 잘못은 바로 그거예요.

내가 그렇게 보고싶었으면 몸 간수를 제대로 했어야죠.

왜 쓸데 없이 다치고 아프고 죽을 뻔하고 그래요?

다음부터는 마물의 뿔만 보여도 바로 줄행랑을 내놓아요. 아니면 다른 사람 뒤에 숨던가요. 알았어요?

7.15. 밤.

-그렇게 약속한다면 당신의 벗으로 돌아올 코델리아 그레이

* * *

나의 천사 코코,

그래요,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있으면 베데르 영감을 방패막이로 쓸게요.

이제 살만큼 산 양반이니 그렇게 해도 크게 한은 없을 거에요.

그러고보니 갑자기 괘씸하네요.

지금 당신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다 그 걱정많은 노친네가 당신께 잔뜩 겁을 줘서겠죠?

베데르 그 양반, 나이 먹고 눈물만 많아져서 원, 이제 멀쩡한데도 몸 하나 일으키질 못하게 한단 말이죠. 이러다가는 정말 욕창이 생겨 죽을 것 같아요.

네, 이렇게 펜을 놀리는 것을 보면 알겠지만 전 직접 본다면 당신의 걱정이 좀 부끄러워질 정도로 멀쩡해요. 다음주 쯤이면 다시 필경소 제 1스크립토리움에 앉아 당신과 은밀한 시간을 갖을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렇게 말하고 나니, 밀실에 갇혀 밀회라도 나누는 연인이 된 기분이 드는 군요.

코델리아, 당신은 상자에서 튀어나와 내게 키스라도 해주는 거죠.

내 이 야릇한 상상이 어디까지 갈 것과 상관없이, 실제로 그렇게 될 일은 영영 없겠지만요.

하지만 난 똑똑히 기억합니다.

당신이 말했지요, 내 영민한 벗.

당신이 울고 있을 때 이 아치가 옆에 있어줄 수 없어도, 내 마음만은 기억해두겠다고요.

나 역시 그럴거에요, 코코.

그러니 마물의 이빨 자국 난 어깨가 부끄러워지기 전에 그만 눈물을 삼가고 전처럼 사악한 벗으로 돌아와줘요. 그래, 뭐가 제일 궁금하다고 했죠? 내가 이제 뭘 해야한다고요?

-당신이 시키는 대로 할 아치 앨버트.

* * *

나의 왕자님께.

어쩔 수 없는 일로 한탄하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죠. 당신을 만나지 못하지만 이렇게 편지만으로 나눌 수 있는 우리 우정도 충분히 소중하다는 걸 알고 있고요. 그런데도 당신이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너져버린 내 마음은 속절없이 아픈 당신께 어리광 부리려 하고 있었네요.

이제 그만할래요. 뭐, 다음에 마물이 또 오면 당신 말대로 베데르에게 맡기기로 하죠.

베데르를 사랑하긴 하지만...뭐, 그 일은 다음에 또 생각날래요.

그래요,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음, 플린이랑 노엘은 다 괜찮아요?

혹시 침대에 누워 읽을만한 다른 책이 필요하진 않고요?

-당신의 벗, 코코.

추신: 기사 아서 길런에 대한 추리 같은 건 당신이 침대에서 일어나신 후로 미뤄둘래요.

* * *

천사라고 부르니 정말 천사같은 짓만 골라하는 나의 벗,

지금 다른 책 이야기를 한거예요?

책이야 언제든 좋죠.

절대안정을 요구하는 미친 노인네덕에 아무것도 못하고 죽을 판인 지금은 더더욱 좋고요.

사정없이 그림책을 장마다 잘라 보내주는 당신과 달리 그 양반은 레테 수도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책들을 필경소 도서관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도 못하게 해놨어요.

게다가 그곳에 있는 책들은 당신이 주는 작고 가벼운 책과는 달리 누워서 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요.

자, 나의 천사님.

어서 책을 주세요. 그림책이면 더 좋겠어요.

노엘은 요즘 전에 없이 자주 내게 방문하거든요. 플린 그 녀석 역시 노엘을 쫓아온 척 쭈삣거리며 내게 오죠. 그 녀석은 꼭 당신 같이 마음 약한 구석이 있어서 언제나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본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워 죽을 노릇이에요. 아니, 다치고 깨어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만 보면 운답니까? 당신네 빨간 머리들은 다 이렇게 눈물이 많습니까?

여하튼 적절한 책을 주신다면 얼른 읽고 두 사람에게 넘겨야겠어요.

플린 그 녀석은 노엘을 제 작은 무릎에 앉혀두고 실감나게 연기라도 하면서 읽어주겠지요?

그 모습을 보는 건 제법 재밌는 일이랍니다.

-요 며칠 간 가장 기운이 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사 아서길런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게된다면요, 코델리아. 언젠가 그런다면... 어쩌면 우리가 만나게 될 일도 있지 않을까요?

* * *

순결한 꽃같은 나의 아치,

야한 책이라도 드려 당신께 즐거움을 드리려 했어요.

마침 내 침대 한 켠에는 D.H.로렌스의 〈레이디 채털리의 사랑〉이 있고, 그건 엄청나게 외설적이며 수준 높은 대작이니 당신의 심심함을 해결하는 한 편, 문학성에 대한 야망도 채워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나의 순수한 벗께서 노엘과 플린을 위한 그림책을 원하신다면야.

그 주문에 꼭 맞는 작품이 마침 제 손 안에 있지요.

어쨌든 이 이야기는 앤이라는 아주 상상력이 풍부하고 귀여운 고아 소녀가, 초록색 지붕 집에 도착하면서 생기는 여러가지 일을 담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드린 〈리디아의 정원〉 처럼 그림이 많은 책은 아니지만, 그래도 안에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 괜찮은 삽화가 곁들여 있지요.

이 책은요. 아마 노엘의 보물이 될거예요.

모든 소녀는 한 때 〈빨간 머리 앤〉을 마음 속에 품고 살기 마련이라 저는 확신하고 있거든요.

당신은 이 책을 비웃으시며 〈레이디 채털리의 사랑〉이나 내놓으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으나,

소녀의 마음을 무시하지 마세요.

이야기가 끝날 쯤엔 분명 당신도 감동에 젖어, ‘이야, 대단한 책이였어’ 하실 걸요.

후속편은 없냐고 제게 애걸복걸 하실 당신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요.

7.15. 밤.

-당신의 벗, 코델리아.

추신: 제가 이야기 했나요? 앤은 등장하자마자 바로 마릴라 아주머니에게 자기를 ‘코델리아’라고 불러달라고 해요. 그 이름이 완벽하게 우아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나요. 그 부분부터였죠. 제가 그 애에게 반한건요.

* * *

영혼의 벗, 코델리아께.

당신께 애걸복걸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웃음 짓는다는 사악한 당신의 모습을 보니, 이제는 내가 조금 착해질 차례인 것 같더군요. 우리는 그렇게 악과 선의 균형을 지키며 영혼을 공유하는 친구 사이이니 말예요.

내 남은 착함을 모두 끌어모아, 당신이 빌려준 책은 일단 먼저 노엘에게 넘겼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알겠죠? 빨리 레이디 채털리나 내놓아요.

-침대에 누워만 있기가 영 따분한 아치 앨버트가, 당신께 애걸복걸하며.

* * *

아치 앨버트,

꿈도 꾸지 마요, 나의 왕자님.

레이디 채털리는 물 건너 갔어요.

나의 순결한 꽃을 사악한 에로티시즘으로 물들일 순 없죠.

-당신을 지켜드릴 벗, 코델리아.

* * *

나의 천사님께.

이렇게 아부하는 내 영혼을 정녕 돌봐주지 않을 건가요?

...뭐, 어차피 호락호락하게 줄 거라는 기대는 안했어요. 당신은 나를 약올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같으니까요.

그나저나 앤이라는 애는 대체 어떤 애길래 플린이 저렇게 열광하는 거예요?

책을 주자마자 신이 나서 가슴에 껴안고 난리가 났어요. 스물 넘은 남자애가 저러는 판이니 노엘은 당신 말대로 아주 껌뻑 죽었네요.

오늘 노엘은 플린을 졸라 그 빨간 머리를 풀어헤치게 해놓고는 양 갈래로 땋아두었어요. 그렇게 해야 앤 셜리 같을 거라나요.

플린 그 녀석도 참 웃기죠. 사내녀석이 머리를 그렇게 해놓으면 우스꽝 스러울 것이 당연하건만, 그것이 제법 잘 어울리는 거예요.

베데르는 그저 허허 웃고 수도원 사람들도 차마 놀리지도 못합니다. 양갈래로 땋은 머리가 이렇게 어울리는 남자애도 또 없을 거예요.

머리로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플린 뿐만은아니예요. 노엘은 저보고는 머리를 검게 물들여 보래요. 길버트 블라이스는 검은색 머리카락이라고요. 네가 검은 머리니 네가 하면 되지 않냐 말했다니 자신은 다이애나 라나요? 노엘이 말하길 검은 머리 여자애는 누구든 다이애나가 될 권리가 있대요.

그럼 또 플린은 웃으면서 옆에서 말합니다.

“다이애나가 되려면 볼이 좀 더 토실해져야겠어, 노엘.”

당신이 짐작하실지 모르겠지만 수도원의 식사라는 것이, 아주 형편없는 수준이거든요. 맛있는 음식은 커녕, 먹을 만한 것이 식탁에 나오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요.

그래도 노엘은 먹성이 꽤 좋은 편이었는데 앞니 두개가 빠지고 나서는 영 먹는 게 시원찮아지고 식사투정까지 생겼던 참이에요.

그런데 요즘은 뭘 먹다 마려 하면 바로 플린이 옆에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볼이 더 포실포실해져야 다이애나를 시켜줄거야.”

그 말만 나오면 노엘의 숟가락질이 갑자기 바빠지지요. 그렇게 정신 없는 식사를 마치고나서는 수도원 앞에 난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옵니다. 그리고 저에게 하나를 건네 줘요. 그런데 베어 물려고 하면 또 막아섭니다. 먹지 말고 그냥 가지고 있으래요. 길버트는 늘 사과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나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빨리 책을 읽으라고 엄포를 합니다. 책을 보면 다 알게되는 사실이래요.

하지만 노엘은 절대 그 책을 제게 주지 않아요. 그 책을 베고 자고, 안고 다니고,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 것 같이 굴죠. 오늘은 식당에까지 그 책을 들고 가겠다길래 그러다 더럽혀지면 어떻게 하냐고 했더니 저에게 혀를 내밀고 우스꽝 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왕자님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중에 들어보니 책에 나온 레어 케이크인디 뭔지를 만들 참이었대요. 그것도 앤이 만들었던 케이크라고 하니까 아마 저보단 코델리아, 당신이 더 잘 알아듣겠지요.

그렇게 절 놀려놓고는 좀 미안했는지 저녁엔 자기가 만든 케익을 가지고 와서 맛보여주더군요. 그걸 먹고 병세가 조금 더 악화된 저는 지금 시름 시름 앓고 있답니다.

어때요, 이제 좀 죄책감이 드나요?

'아, 우리 왕자님께 레이디 채털리라도 드려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나요?

나의 친애하는 벗, 이제 당신을 졸라서까지 야한 책을 볼 생각은 없어졌으니 그냥 제대로 된 레어 케이크 레시피나 주시면 안될까요? 당신이라면 분명 괜찮은 레어 케이크 만드는 법을 알고 계시겠죠.

노엘은 성공할 때까지 계속 산딸기 바닐라 크림 레어 케익을 만든다했고, 매일 밤 제게도 한 조각씩 가져다주겠다고 선언했어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제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될 판이랍니다.

초열달, 열 일곱번 째 날.

-당신의 병약한 벗, 아치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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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격일 연재를 한다고 해놓고 보니 제가 내일 바쁠 것 같았고, 내일 바쁠 것 같아서 서두르다 보니 오늘치를 오늘 모두 수정했지 뭐예요?

그래서 이렇게 또 찾아왔어요. 심지어 길기까지 하네요. 죄송합니다.

추신: 레이디 채털리의 사랑이 어떤 내용인지 말하려면 작가의 글을 노블란에 가서 써야해서 생략합니다....

추신2: 잠결에 뭘 잘못 눌렀더니 갑자기 작은 창이 뜨고, 그 안에 저에게 후원쿠폰을 주신 분들이 있더라고요. 네, 후원쿠폰 주신 분들이 있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네요ㅠㅠ죄송합니다ㅠㅠ. 그만큼 재밌게 읽어주셨단 뜻 맞지요? BYORVINA님, 소소가영님, Sen98님, 디네즈님, 바켠바켠님, 정말 감사합니다.

추신2: 가끔 독자님들 댓글 읽다가 벅차곤 해요. 서평은 또 어쩜 그렇게 잘쓰시는지. 좋은 감상 주신 분들, 선작, 추천 눌러주신 분들 모두 노엘이 만든 레어치즈 케익처럼 충격적으로 행복한 하루 되세요.

<-- 말하지마요 -->

(연참 아닌 연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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