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28화 (28/56)

#28.

07-18-THU-14: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아침엔 어쩌다 지각한거야?

넌 시간 하나는 칼 같이 지키잖아.

솔직히 말해봐.

리암이랑 잤지!

* * *

07-18-THU-14:42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넌 내가 아는 사람 중 제일 눈치가 없어.

아니다, 두번짼가.

어쨌든 추리는 그만하고 그냥 로미오나 찾아다니는 게 낫겠다.

리암이랑은 잠자리는 커녕 키스도 아직이야.

그 사람, 너무 신사다워서 손 하나 마구 잡지를 않아.

가만히 그 커다란 손을 내게 내밀고, 본인 손에 내 손이 얹혀지기를 느긋이 기다리지.

빅토리아 시대 여인이라도 된 기분이 드는 건 제법 괜찮은 느낌인데, 이러다가 키스할때도 내게 물어볼까봐 걱정이야.

'키스해도 돼요?’ 하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해야 고상해보일까?

이게 요즘 내 최대 고민이란다, 친구야.

* * *

07-18-THU-14:5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키스 해..” 까지만 나왔을 때 바로 입술로 돌격해야지, 바보야.

근데 진도가 그 정도 속도면 자기도 전에 무덤에 들어가겠다.

그냥 네가 선수치는 건 어때?

기다려봐, 지금 작업 중인 앤드류 마블 시선에 괜찮은 작업 시가 나온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하다면 당신의 아름다운 두 눈을 찬미하는 데 100년,

두 젖무덤을 동경하는데 200년을 보내겠지만, ... 시간 마차 박차를 더 해 우리에게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유한한 시간 속의 우리 함께 서둘러 쾌락을 찢어봅시다.”

어때? 이 정도 시면 리암도 너와 쾌락을 찢다못해 부수려 들지 않겠어?

그런 고전주의자들 꼬시기에는 낭만시만한 게 없다니까?

* * *

07-18-THU-15:0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1.줄리엣, 리암에겐 두 젖무덤이 없어. 대신 단단한 가슴팍은 있지만, 아 정말 그 사람이 몸도 좋다는 거 내가 얘기했나?

2.앤드류 마블의 시를 좋아하진 않지만 쾌락을 찢자는 말은 좀 마음에 든다. 내 친구가 좋아할 것 같아. 그 시 좀 전문으로 보내줘.

3.아침에 보내 준 산딸기 바닐라 크림 레어 케이크 레시피 말야. 정확한 거 맞지? 내가 찾아보려다 너에게 연락한건데, 제대로 보내주긴 한건지 갑자기 의심스럽구나, 친구야.

* * *

07-18-THU-15:12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아, 맞다.

새벽에 뭘 하고 있었길래 갑자기 케이크 레시피를 찾은거야? 설마 리암에게 그거 만들어주려다 지각한 건 아니지?혹시 그랬다면 너에게 어울리지 않는 짓이니 더는 하지 말길 권할게, 친구야.

그리고 내 레시피를 의심하는 건 좀 관둬줄래?

게다가 그 레시피, 나름 전문성을 띄고 있단다. 빨간 머리 앤 100주년 때 출간 작업 하다 엎어진 레시피 책 있었거든. 그 책 원고를 뒤져서 찾은거야. ‘산딸기 바닐라 크림 레이어 케이크’. 그거 앤이 목사님 부인에게 잘 보이려고 만들었다가 바닐라 시럽대신 진통제를 넣어서 망해버린 케이크 맞지?

정 먹고 싶거든 나한테 잘 보여봐, 코델리아. 레시피고 뭐고 내가 만들어 줄테니까. 너에게 만들라고 헀다간 진통제보다 더 한 걸 넣어먹겠지. 집에 오븐은 있니?

* * *

07-18-THU-15:13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오븐?

당연히 없지.

제대로 된 토스터도 없어서 식빵을 다리미로 다려볼까 하는 참인데 내가 설마 케이크 만들 생각을 하겠니?

그냥 어떤 귀여운 꼬마애한테 부탁받아서 그래. 그애한테 〈빨간 머리 앤〉을 선물해준 참인데, 그 케이크를 직접 만들어보고 싶어하더라. 너랑 만나게 해준다면 환상의 짝꿍이 되겠지만, 시간적 물리적 거리가 있으니 말이지.

추신: 그 엎어진 원고, 아직 있으면 줘봐. 대신 내가 밥살게.

* * *

07-18-THU-15:5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원고는 첨부파일로 첨부했어.

늦장부리지 말고 퇴근 전에 회사에서 컬러인쇄하도록.

추신: 리암, 애 아빠였어! 그애는 리암 애인거지! 맞지, 내말?

* * -

07-18-THU-17:0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설마.

리암이 수수께끼의 남자긴 하지만 딸린 애는 아직 없는 걸로 확인되고 있으니 안심해.

그애는 그냥 내 친구의 애야. 아니다 내 친구가 아는 애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있잖아.

줄리엣, 너 혹시 한 번에 두 사람을 완전히 똑같은 크기로 좋아해본 적 있어?

* * *

07-18-THU-17: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이런 질문은 제발 대체 시간이 왜 이렇게 늦게 가나 싶은 월요일 오후 두시 쯤에 다시 해주겠니? 퇴근 시간 한 시간 전에 이렇게 재밌는 얘기를 꺼내면 어떡해?

그 친구란 놈, 설마 가렛은 아니겠고.

마크야?

마크랑 아직도 만나는 거야?

마크가 이제 회사가 아니라 너희 집으로 장미를 보내니?

* * *

07-18-17:01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미쳤어? 그 사람 진짜 싫다니까.

진짜 싫을 건 또 뭐냐고 네가 물을까봐 하는 얘긴데 지난 번에 우리집 앞까지 쫓아온 거 알아?

왜 전화를 안받냐고 그럼 자기가 해준게 뭐가 되냐더라. 그래서 비밀 금고인지 뭔지를 꺼내서 주고 그냥 가라고 했더니 갑자기 지난 번에 에든버러에 간 일을 들먹이는 거야.

여행까지 가서 안 잔 것도 그냥 넘어갔는데 그거 정말 매너없는 건 줄은 알기나 아냐고 나한테 따져대더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무시하고 계단으로 올라갔지. 그런데 날 따라올라와서는 자기가 날 좋아해서 그랬는 줄 아냐고, 책이나 얻어보려고 그런거라고 소리까지 지르는 거 있지.

07-18-17:0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헐, 충격. 그래서 어떻게 했어? 나한테 전화하지.

마크 로플린, 진짜 웃긴다.

걔 쫄리니까 괜히 책 핑계 댄거야.

책 때문에 너한테 접근했다고 말하면 뭐 자존심이라도 설 줄 알았나보지?

너한테 접근하다가 안되니까 책 핑계 댄 것처럼만 안보인다고 전해주고 싶다.

07-18-17:2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몰라, 더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도 메리앤을 통해 따로 연락이 안 오는 걸 보니, 이 후로 다시 만날 일은 없어보여.

그날 줄리엣 네가 있었더라면 내가 당연 전화했겠지. 그런데 너 그때 한창 네 로미오와 여행 중이었잖아?

달리 연락할 데도 없고. 리암은 너도 알다시피 “고전주의자”시라 전화기 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그날 밤엔 그냥 나 혼자 울다가 잤어.

리암이 전화기를 안 쓰는 거, 평소엔 참 좋았단 말야.

전화같은 게 없으니까 늘 말로 약속을 잡아야하는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약속은 지켜야만 하는 일이되는 게, 매일 밤 전화할 수는 없지만 대신 가끔 그가 날 찾아와 로미오라도 되는 듯 창문에 조약돌을 던지는 게, 정말 낭만적이고 특별하게 느껴졌거든.

그런데 그 날은 괜히 화가 나더라. 마크가 그따위 짓을 한게 리암에게 화낼 일도 아닌데 말야. 마침 다음 날이 만나기로 한 날이라, 화를 삭힐 새도 없었지. 때마침 아주 기다리던 편지가 오지 않아 마음이 불안하던 때이기도 했었거든.

그래서 난 그에게 가 모든 화를 쏟아부었어. 마크한테는 아무 말도 못했던 주제에, 편한 사람한테 스트레스를 푸는 최악의 짓을 한거지.

그런데, 그 사람 날 이해해주더라. 미친 여자처럼 화를 내는 나한테 같이 화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고 그냥 미안하다고 해줬어. 전화기가 없어서 미안하다고, 옆에 있어주지 못해 미안했다고. 그리고 바로 눈에 보이는 아무데나 들어가 전화기를 샀어.

그 날 밤엔, 무서워했던 내가 걱정된다며 날 바래다주고는 결국에 내 방까지 들어왔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깜짝 놀라더라고.

“진짜로 세 발자국 밖에 안되네요.”

성큼 성큼 큰 걸음으로 걷고선 그렇게 말하고 웃는데, 뭐 아주 얄밉지도 않더라고.

네 말대로 돈 많은 귀족가문집 한량 자식이 맞는 것도 같아.

딱히 하는 일도 없어보이는데 여유가 넘쳐 흐르는 것도 그렇고, 그 고상한 옛날식 발음도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이해가 돼.

어쨌든 그 부잣집 도련님 같은 철없는 ‘세 발자국’ 발언을 빼곤 그는 참 신사다웠어.

내가 씻는 걸 기다려줬다가 나를 침대에 뉘이고 이불을 덮어주는 것 까지 모두 완벽하게 우아했단다.

07-18-17:21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미쳤어? 잤네. 잤어.

그렇지? 아, 제발 잤다고 말해줘, 코델리아.

안 그러면 널 죽이고 리암도 죽여버릴 거야.

빨리 말해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데?

추신: 잤으면 좀 상세하게 체위와 횟수를 적어주길 바람.

07-18-17:3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자기는 커녕 키스도 안했다고 아까 말했잖아.

미리 말해두는 데, 이 이야기에 네가 기대하는 부분은 없을거야.

난 침대에 누웠어. 그날은 비가 많이 와서 날이 좀 서늘했거든. 창문가에서 여름 바람이 살랑 살랑 불더라. 그는 내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공주님을 지켜주는 기사라도 되는 듯 날 쳐다보더라.

그리고 그냥 잘 자라고 하는거야.

내가 잠들면 갈거냐고 물었더니, 오늘은 그러지 않겠대. 그냥 아침까지 여기 있겠대. 너도 알다시피 우리집 크기에 소파가 가당키나 하니. 침대 빼곤 어디 잘 데도 없잖아. 어쩔 수 없니 네 안에 ‘줄리엣’ 이 발동했어. 그래, 나도 모르게 이리로 들어와 같이 눕자고 이야기한거야. 그는 조금 당황했지만 거절하진 않더라. 지금 생각하니 거절하면 내가 민망할 거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해.

커다란 덩치가 내 침대에 들어오니 괜히 긴장이 되더라. 침대가 좁은 탓에 몸이 조금 닿았어. 편하게 누우려면 끌어안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지. 내가 먼저 그의 목에 내 팔을 걸었더니 그 역시 나를 끌어안아왔어. 그의 품은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고 따뜻해서 스르르 잠이 오더라.

잠깐 꾸벅 졸았던 것도 같은데, 깨고나서 그와 안고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랐지. 그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쩌려고 함부로 자길 침대까지 끌어들였냐고 말하는거야. 하지만 다른 남자들처럼 보채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그냥 정말 내 긴장을 풀어주려고 던지는 농담같았어.

내가 아직 끝까지 가려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그 역시 아는 듯 했어. 그는 그저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내 등을 쓸어주고 잘 자라고 말했지.

“잘자요, 나도 잘거니까 덮치지 말고.”

그 말에 킥킥거리며 웃다가 나도 모르게 잠에 든 것 같아.

줄리엣, 넌 나한테 바보라고 하겠지.

리암에게도 그렇게 말할테고 말야.

하지만 난 거기서 안해서 더 좋았어. 거기서 했더라면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도 같거든.

그리고 자진 않았지만 그 후로 리암과 조금 더 가까워진 건 사실이야.

전화기가 있으니 연락도 더 자주 할 수 있고 말야.

리암은 주로 아침에 전화가 와. 잘 일어났냐고, 출근 잘 하라고, 늦지 말라고 말하고 어색하게 끊지. 정말로 평생 전화기라는 걸 안 써본 사람처럼 말하니까 그와 통화하는 건 괜히 웃음이 나와.

어떤 때는 퇴근 길에 같이 걷겠냐는 전화가 오지만 늦은 밤에 전화하는 일은 거의 없어. 내가 전화를 걸면 기다렸다는 듯이 재깍재깍 받지만 자신이 먼저 전화한 적은 한번도 없지. 그런 패턴이니 내 밤 시간이 완전히 비어있다는 게 제일 큰 문제야.

내가 말한 그 ‘다른 남자’는 주로 밤에 나에게 연락해오거든.

* * *

07-18-17:3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정말 다시 한번 원망하고 싶다. 이 재밌는 얘길 왜 이 시간에 하는거야?

퇴근까지 30분은 남았으니까 빨리 더 말해봐.

마크와 리암 말고 다른 남자가 하나 더 있다고?

그 남자는 밤에만 널 찾아온다고?

축하한다, 코델리아. 지금이 네 전성기구나.

추신:혹시 그 ‘다른 남자’랑은 섹스만 하는 사이니?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그럼 네가 널 존경해줄게, 친구야.

* * *

07-18-17:4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날 그렇게 몰라?

엄청나게 잘생기고 몸도 좋은 남자가 네 방에 들어왔다고.

침대에 같이 누워있는데도 주저 하는 게 네 친구라고.

그런 내가 섹스만 하는 사이인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아?

제발 네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하고 잘 좀 들어봐줘.

내가 너말고 또 누구에게 이런 얘기를 하겠어?

리암이랑 있을 때는 다른 생각이 안들어.

유리막에라도 감싸인 것 처럼 우리 둘만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아.

가끔 그 사람이 너무 좋아서 가끔 가슴에서 울컥 무언가가 치밀기까지 해.

너무 좋아서, 그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런데 그렇게 좋다가 말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거야.

아, 이 마음을 이야기해야겠다. 바로 ‘그 남자’ 에게.

이건 줄리엣 너랑 수다 떨고 싶다는 그런 감정이랑은 달라.

요즘 난 매일 밤 시간만 기다려.

어두워지고, 그 사람에게 연락이 오면,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으니까.

리암이랑 있었던 일조차.

가끔은 그 사람이 리암이랑 나 사이를 질투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어떨 땐 그 사람에게 리암과의 이야기를 철저히 숨기고도 싶어.

그 사람이 내 연애 이야기에 별 질투도 안하고 날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는 건 정말 짜증나는 일이니까.

그리고 있잖아 가끔은 리암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해.

리암이 그 사람이랑 아주 비슷하다는 생각.

그래서 내가 리암에게 빠졌나 하는 생각 말야.

* * *

07-18-17:45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결론은 내려졌네.

첫째 넌 리암보다 그 사람을 더 좋아해.

둘째, 그런데도 그 사람에게 가지 않는 걸 보니 그 사람은 유부남이야.

셋째, 아까 그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한다는 꼬마애가 그 사람 애구나!

넷째, 맞다면 끝나고 펍에 가자.

위험한 사랑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코델리아.

추신: 모두 아니라면 그냥 리암도 사귀고, 그 사람도 사귀어버려. 네가 좋아하는 빨강 머리 앤이 말했듯이 세상에 영혼이 같은 사람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란다. 코델리아, 넌 운 좋게도 그런 사람을 동시에 둘이나 만난거지.

* * *

07-18-17:55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말을 말자, 줄리엣.

첫째부터 셋째까지 모두 틀렸어.

다섯째는 놀랍도록 불경스럽고 말이야. 감히 빨간머리 앤을 양다리의 정당화에 쓰진 말아줄래?

저녁 사는 건 다음으로 미룰게. 오늘은 네가 준 레시피를 꼬마애에게 전달해야해.

퇴근이나 같이 하자.

* * *

07-18-18: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그래, 네 덕분에 오늘은 여섯시가 빨리도 왔다.

내일은 수다를 좀 일찍 시작해줘.

* * *

나의 왕자님께.

우리의 새벽 메일엔 제한이 필요해요.

오늘은 아주 개운하게 자고 일어나자마자 소리를 질렀어요. 완전히 늦잠을 자 버리고 말았으니까 말예요. 친구가 매일 아침 전화로 날 깨워주기로 하지 않았더라면 전 아마 점심때까지 자버렸을 거예요.

그래요. 그런 와중에도 전 줄리엣에게 케이크 레시피를 달라고 해서 우리의 마법 상자에 얼른 두고 갔답니다. 함께 보낼 편지를 못 쓴 것은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감사 인사 한통을 보내지 않다니, 당신의 신사답지 못함이 통탄스럽기 그지 없네요!

...혹시 제 레시피가 너무 늦은 바람에 잘못된 케이크를 먹고 몸져 누우신 건 아니죠?

제가 일하고 있던 8시간 동안 노엘이 케이크 만들기에 성공했다고 이야기해주세요.

저에겐 퍽도 보람있는 일이 될테니까 말이죠.

추신: 줄리엣이 노엘이 좋아할만한 것을 선물해줬어요.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모든 요리의 레시피가 나와있는 책이라네요.

7.18. 저녁.

-노엘과 플린이 부디 더 많은 요리에 도전하길 바라며, 당신의 코코.

* * *

나의 사랑스러운 벗, 코코에게

내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누락시킨 것 같네요.

노엘과 플린은 둘 모두 공평하게 요리에 재능이 없습니다.

스튜 하나를 끓이더라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만큼 창의적인 재료를 넣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맛을 창조해내지요.

그래서 당신이 준 레시피 책은 노엘과 플린 몰래 수도원 식사 담당자에게 은밀히 넘긴 참이에요. 덕분에 저녁 식사 메뉴가 조금 더 풍성해질테니, 당신께는 큰 감사를 드려야 하겠네요.

노엘은 오늘 만든 여덟번 째 레이어 케이크를 마지막으로 요리계를 은퇴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우리 수도원 일동은 모두 환호를 했고요.

그래도 코코, 당신이 준 레시피 덕분에 마지막이 아주 나쁘진 않았답니다. 이건 당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바쁜 아침에도 내게 레시피를 던지고 간 보람을 느끼셔도 됩니다.

오늘 마지막 케이크를 먹으며 노엘이 아주 오싹한 말을 했거든요.

“어젯밤엔요, 왕자님. 해도 해도 안되니 그냥 앤처럼 진통제를 케이크에 넣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당신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난 지금 펜을 들지도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쯤 당신은 그렇게나 고마워하면서 어찌 답장 하나 하지 않았냐고 하시겠죠? 괜찮아요. 마음껏 날 책망하세요. 난 그 책망을 그대로 당신께 돌려드릴터이니.

코델리아, 오늘 드디어 나도 앤을 읽었어요.

당신이 왜 이 책을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알았고요. 책 속 주인공 앤 셜리는 당신과 아주 똑 닮았지 뭐예요?

물론 앤보다는 당신 쪽이 훨씬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지만, 똘똘하고 상상력 풍부하며 언제나 발랄한 앤은 꼭 당신만 같아서, 앤을 홍당무라 놀려대며 머리를 잡아당겼던 길버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놀리는 것으로 표현하면 안되는 법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관심을 끌어보고 싶은 것이 우리 미성숙한 남자들의 변이니까 말예요.

내가 그랬다간 당신도 석판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시곤 10년이 넘게 용서하지 않으시겠죠?

그런 당신과 한 마을에 살고 십대 시절을 온통 당신께 바치며 짝사랑만 내내 간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요, 난 이미 완전한 길버트 블라이스가 된 참입니다.

그런데요, 코델리아. 앤의 그 엄청난 폭력성과 밝음을 똑같이 닮은 녀석이 내 주변에도 한 명 더 있다는 것 아나요?

세실리아는 물론 아니에요. 내 누이는 그냥 폭력적이기만 한 사람이죠. 내가 지금 말하는 건 플로리안 녀석입니다.

그 녀석, 은근히 발끈하는 기질이 있어서 당장 오늘만 해도 저한테 크게 화를 낸 참이거든요.

노엘이 목마를 태워달라고 해서 알았다고 했더니, 완전히 회복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런 식으로 함부로 몸을 굴리지 말라며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더군요. 그 소리에 다시 내 어깨가 부서지겠다 싶었습니다.

그 성미가 아니라 다른 면을 봐도 그애는 가끔 앤 셜리 같아요. 수도원에 도착해서도 제비꽃길을 보며 바로 보랏빛 융단길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어제는 별 것도 아닌 수도원 옆뜰을 달빛 자작나무 길로 만들어버렸죠.

그건 정말 그곳에 딱 들어맞는 이름이었어요. 낮엔 초라하기만 한 그곳은 밤이 되어 환한 달이 자작나무의 흰껍질에 부딪힐 때면 세상에 다시 없을 아름다움으로 빛나거든요.

밤에 그곳에 가본 사람이라면 모두 플린이 붙인 그 이름에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보잘 것 없는 공간에 그런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 플린 혼자의 재능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린 다음부터는 나는 바로 앤이란 아이가 좋아졌어요.

당신과 플린같은 친구를 하나 더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레이디 채털리를 포기한 가치는 있었네요.

노엘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이 책은 아주 특별한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한 사람에게 더요.

요즘 세실리아가 결계를 고치러 레테 수도원에 들락거리고 있어요. 오늘도 잠깐 왔다 갔는데, 내 방에 들렀길래 〈빨간 머리 앤〉 책을 보여주었지요. 앤의 순수함이 내 누이의 정서 순화에 탁월한 효과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며 말입니다.

세실리아는 책을 펼치자마자 깊이 감명받은 얼굴로 ‘대단한 책이군’ 하더군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걸 또 어떻게 펼치자마자 알았나 하고 세실이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구절을 보았더니....

당신과 나의 친구, 앤 셜리 양이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야망에는 결코 끝이 없는 것 같아. 바로 그게 야망에 좋은 점이지. 하나의 목표를 이루자마자 또 다른 목표가 저쪽에서 반짝이고 있잖아?”

...하필 그런 구절이 나올 것은 또 뭐랍니까? 어쨌든 이제 〈빨간 머리 앤〉은 노엘과 플린, 나를 거쳐 세실리아에게로 갔어요. 참으로 책은 신비합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제각기 다른 답을 주니 말예요.

초열달, 열여덟번째 날.

-플린이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은 하얀 방에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플린이 아까 말하길 앤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닐 거 같다는 왠지 모를 날카로운 예감이 들었다네요. 분명 뒷 이야기가 있을 거라나요? 그 녀석, 당신처럼 똘똘한 구석이 있거든요. 어때요, 플린의 추리가 맞나요?

부디 맞기를 바라며 청합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을 보내주세요. 지금 당신에게 없다면 뒷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라도 말해줘요. 루시 모드 몽고메리 만큼 나의 침실 생활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코델리아, 당신 밖에 없을 테니까 말예요.

* * *

순결한 나의 왕자님,

'침실 생활’과 ‘즐거움’과 ‘코델리아’ 를 한 문장에 언급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정숙한 여인 코델리아 그레이 올림.

* * *

사특한 여인 코델리아 양께.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책’ 만큼 나의 침실에서의 ‘투병’ 생활을 ‘유익’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당신의 '편지’ 밖에 없을 거라고요.

-구둣점을 찍다가 지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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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병 생활이라는 단어를 굳이 사용하여 내 마음을 흔드는 아치 앨버트,

알았어요, 책을 드리죠.

부디 즐거운 “침대 생활”이 되시길 바라며 불경한 시가 잔뜩 들어있는 시선도 드릴게요.

레이디 채털리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남자들이 만족할만한 단어들이 잔뜩 들어있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에는 동그라미를 쳐놨어요. 요지만 말하면 뭐, 젖무덤 찬양할 시간에 쾌락이나 찢어보자는 시예요.

* * *

불경한 나의 벗, 코코.

당신은 야한 얘기하는 것을 너무 좋아해요. 나를 위해서 보낸다고 말하지만 그냥 ‘쾌락을 찢자’는 단어를 쓰고 싶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요?

덕분에 난 청소년기에도 하지 않았던 글을 읽다 누구에게 들킬까 화들짝 놀라 숨기는 짓을 해보았습니다. 어쨌든 이미 보내주었으니 고맙게는 읽죠.

잘자요, 코델리아. 내일은 당신의 친구처럼 나 역시 편지로 깨워드릴테니.

-사랑을 담아, 아치 앨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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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이라면

독자님들의 댓글을 찬양하는 데 백년,

선작에 감사하는 데 이백년,

추천을 구걸하는데 삼백년을 쓰겠지만...

완결 마차가 저를 짓누르고 있으니 우리 같이 쾌락을 찢..

...죄송해요. 오늘도 실패한 드립이었습니다.

장안의 화제 검은 여인의 초상을 보느라 하루 늦었습니다.

선작, 추천, 댓글, 서평 모두 감사드리는 것 아시지요?

부디 줄리엣의 메일로 점철된 이번편도 재밌게 읽으셨기를.

추신: 앤드류 마블의 시는 공지사항에 올려두겠습니다! 쾌락을 찢으실 때 잘 활용할 수 있으셨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추신2: 십분만 기다려주세요. 한 편이 더 올라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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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아닌 연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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