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29화 (29/56)

#29.

나의 앤, 나의 코코께.

깨어났어요?

오늘도 친구가 깨우러와서 겨우 일어난 건 아니죠?

나는 아침부터 당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저녁, 느즈막히 서책보관함을 열어보면 당신의 편지가 들어있는거죠. 거기엔 아침엔 바빠 서책 보관함을 열어볼 시간도 없었다고, 이제야 편지를 읽었다고 써있고 말예요.

그래도 상관없어요. 바쁜 아침부터 편지는 사치이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코델리아. 만약 당신이 아침부터 내 편지를 꺼내보았다면, 내 생각을 저리 치워두고 앤 셜리를 생각해봐요. 그 아이는 매일 아침, 세상에 이런 좋은 날이 또 있냐고, 오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안타깝다고 이야기하는 아이잖아요.

나는 당신의 오늘이 그렇게 빛났으면 좋겠답니다.

물론 우리가 사는 삶은 그렇게 살기는 좀 힘들긴 하죠. 사실 오늘도 내겐 좀 괴로운 아침이었어요.

당신이 지난번에 앤 셀린 작가의 원고 이야기를 했지요? 나와 플린이 아델라이드 여왕에게 찾아가는 장면을 읽었다고요.

그땐 아니, 플린과 내가 어머니를 찾아갈 일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는데 오늘 새벽에서야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깨달았답니다. 우리 귀여운 노엘 아가씨께서 당신의 빨간 머리 앤을 읽고나서부터 역할놀이에 빠진 참이거든요.

어제 오늘은 여왕이 되려고 하시는 중이죠. 자신이 아델라이드 여왕 폐하이니까 나와 플린에게 어서 알현을 오라고 하더라고요.

“노엘, 너 우리 어머니가 아델라이드 여왕 폐하인건 아니? 이게 왕족 모독인건 알고?”

제가 그렇게 말했더니 이 야물딱진 녀석은 아니, 이렇게 대답하지 뭐예요?

“맞아요. 왕자님 어머니가 여왕님이에요. 왕자님은 엄마가 있어요. 왕자님, 저는.. 엄마가 없어요.”

거기에다 대고 제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저 노엘이 시키는대로 해야지요.

그렇게 오늘은 새벽같이 일어나 여태껏 여왕 놀이를 하고 있는 참입니다.

노엘 말이 여왕의 알현실은 분주한게 당연하대요. 그러니 저와 플린은 교대로 끊임없이 여왕 폐하께 아뢸 내용을 지어가 그 아래 무릎 꿇고 앉아 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열심히 이것저것 설명을 하면 노엘은 멋지게 눈썹을 찡그리며 이렇게 말하지요.

“거절한다, 물러가라!”

네, 사는 건 정말이지 앤 만큼 즐겁기만 하지는 않네요.

초열달, 열아홉번째 날.

-고단한 삶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 * *

나의 길버트, 나의 아치 앨버트께.

다행히 내가 당신보다 더 잘 각운을 맞춘 것 같죠?

바쁜 아침이지만 당신의 글을 읽고 있자니 도저히 답장까지 쓰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가 없네요.

당신의 아침 편지가 내 하루를 벌써부터 완벽하게 만들었어요.

덕분에 하루종일 노엘의 ‘거절한다, 물러가라!’ 소리를 상상하며 웃을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죠.

좋은 하루 보내요, 나의 왕자님.

7.19. 아침.

-휘갈겨 쓴 글씨에 대한 감상은 사양할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노엘이 역할극을 그렇게나 좋아한다면 차라리 연극을 해보지 그래요? 마침 당신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각본가가 쓴 책이 있잖아요. 맥베스부터 햄릿, 리어왕, 십이야까지 말예요.

* * *

나의 사악한 조언자 코델리아.

베데르가 틈틈이 서책보관함을 몰래 본다는 것 당신, 알고 있었어요? 그 못된 늙은이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 추측으론 거의 매일 우리 편지를 훔쳐보고 있다는 게 확실해요.

그걸 어떻게 알냐고요?

글쎄, 아침 산책을 하고 있는데 이 양반이 노엘을 제 앞에다 앉혀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노엘, 우리 이제 여왕놀이는 그만두고 연극을 해보지 않겠니? 우리에겐 마침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각본가가 쓴 책이 있단다. 십이야 말이다.”

네, 코델리아. 당신이 오늘 아침에 내게 써준 편지의 맨 마지막줄에 써 있는 말을 그대로 읊은 것이죠.

베데르 그 노인네는 처음엔 절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저의 추궁에 못이겨 결국 실토하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서책 보관함에 자물쇠가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어쨌든 당신 조언이 내가 고려해볼 시간도 없이 노엘에게 받아들여졌답니다.

노엘은 당장 오늘부터 연극을 해보겠다네요. 그애가 고른 첫 작품은 당연히 십이야예요. 그것 외에는 읽어본 것이 없으니까 말예요.

“연습은 언제 할건데?”

“음, 지금이요?”

“옷은?”

“그것도 지금...?”

“무대는 언제 올릴 거야?”

“지금...은 아니고 이따 저녁이요?”

이 아이에게 내일이란 건 아예 없는 단어인가봐요.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나도 당장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깥은 노엘과 플린이 연극 준비 하는 소리로 소란스럽기 짝이 없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몸도 괜찮아진 참이라, 거절할 도리가 없답니다.

하긴, 나 말고 또 누가 오시노 공작을 하겠어요?

부디 축하해주시길. 당신의 필담 벗은 곧 연극배우가 되게 생겼습니다.

초열달 열아홉번 째 날, 다시 아치 앨버트가.

* * *

나의 오시노 공작님께.

연극데뷔는 성공적이었나요?

7.19.

-저녁의 코델리아

* * *

저녁의 코델리아께.

예상하고 계셨겠지요.

십이야를 다시 읽는다 했을때,

연극으로까지 하겠다 말했을 때,

당신은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셨을 거예요.

네, 나의 영특한 벗,

나도 이제 모든 것을 안 참입니다.

내일 다시 편지 드릴게요.

초열달, 열아홉번째 날 밤.

사랑을 담아, 당신의 아치.

* * *

코델리아 아가씨께.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의 긴 편지 이후, 오랜만에 인사를 드리는 것 같군요. 다시 필경사 베데르 랭입니다.

고약한 아치 왕자님께서 냉큼 일러바치신 것과 같이, 그간 저는 가끔 몰래 서책보관함을 열어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믿어주십시오. 맹세코 당신이 쓴 편지를 몰래 읽은 적은 없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강한 독점욕을 갖게 되신 건지 알 수 없는 우리 왕자님께서 서책보관함을 보물상자라도 되는 양 꽁꽁 싸매고 다니시니, 그저 조금 궁금해 들춰보았을 뿐이지요.

코델리아 아가씨께서 이 베데르에게 보내신 안부 인사 같은 것을 빼돌리시지는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어 서책 보관함을 한 두번 열어본 것이 그리 큰 죄라고는 생각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가끔 왕자님의 편지를 쓱 눈에 담게 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혹여 아가씨께 이상한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흘깃 보았을 뿐이지, 절대로 두분의 서신을 몰래 훔쳐 볼 생각은 없었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 와버렸군요.

제가 그렇게 서책보관함을 슬쩍 슬쩍 봐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오늘 말입니다.

우리 왕자님, 정말 이상한데서 말이 짧아지시지요? 청산유수처럼 떠들어대시다가도 아주 묘한 데서 말수가 적어지는 것은 대체 어떤 연유일까요?

지난 번 마물의 습격 때도 제가 편지하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우리 왕자님은 아마, 그냥 뭐 잠깐 칼에 스쳐 어깨라도 베인 것이 다라며 별 것 아니라 말하고 지나가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 베데르가 나서서 펜을 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더라면 코델리아 아가씨께서는 우리 왕자님이 죽을 뻔한 것도 모르고 계셨겠지요.

오늘 일도 생각해보면 그때와 똑같습니다.

저 편지, 저, 저!

저게 대체 뭡니까?

아가씨의 영민함을 믿어서 그렇다해도 이건 너무 하지요. 서신을 받고 수수께끼 같은 문장 속에 휩쌓여 어리둥절 하셨을 아가씨의 얼굴이 이 늙은이의 눈에는 훤합니다. 아니, 사람이 생각이 있으면 저렇게 알아먹지 못할 편지는 안쓰느니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평소같았으면 왕자님을 후드려패...지는 못하고 정중히 깨워 편지란 무릇 어떻게 써야하는 것인지를 가리키며 다시 쓰라 청하였겠으나, 오늘일은 왠지 그러는 것 보단 이 베데르가 직접 코델리아 아가씨께 말해버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네, 다시 이 외로운 늙은이의 수다 떨고 싶은 욕구가 동한 것이지요. 이렇게 까만 밤에 몰래 서책 보관함 앞에 앉는 마음을 이해해주십시오.

그러니까 모든 일은 다 노엘에게서 시작되었지요. 아가씨께서도 노엘의 여왕놀이가 연극욕으로 번져 결국 십이야를 연극으로 올리게 된 사연은 아시지요?

연극이라고 해봤자 별 것은 아닙니다.수도원에 제대로 된 무대 같은 것이 있을 턱이 없고, 관객 역시 우리 수도원 사람들이 다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좋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레테 수도원의 수도사 일동은 모두 노엘을 자기 애처럼 귀여워하는데다 아치 왕자님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무리들이니 말입니다.

이른 시간부터 사람들은 많이도 모였답니다. 수도사 한 명이 마을 사람까지 몇 데려온 통에 앞뜰이 꽉찰 정도였으니까요.

우리 노엘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어쩔 줄을 몰라하더군요. 하지만 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연극의 1막 1장을 장식한 인물이 바로 오시노 공작님, 우리 아치 왕자님이셨으니까요. 왕자님은 보는 사람이 많을 수록 신이 나는 듯 해요.

단 한번도 성공 못하신 일도 남들 앞에 서면 번드르르 원래 부터 잘했던 것처럼 재주 좋게 해내시거든요. 타고나길, 무대 체질이신가봅니다.

그럼 연극이 어떻게 시작했는지부터 이야기해드릴까요?

시간이 되자 수도사 필립이 종을 치며 무대가 시작되었답니다. 아치 왕자님께서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걸어나오셨습니다.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계속 연주하라. 과도하게 다오, 물릴 정도로. 하여, 입맛이 시들고 없어지도록.”

왕자님의 낮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수도원에 울려퍼지자 왁자지껄 하던 관중석이 고요해졌습니다. 앞뜰에 종종 난 꽃들이 지워졌습니다. 풀숲이 갑자기 연두색 카페트라도 된 듯이 보였습니다.

네, 이제 레테 수도원은 오시노 공작의 저택으로 변하였지요.

1막은 왕자님의 독무대였습니다. 오시노 공작의 대사는 하나의 아름다운 낭송시와 같았죠. 그래서 사람들은 더 잘 몰입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왕자님, 뭐든 보면 바로 외우시거든요. 외워서 그대로 말하는 것만큼은 윈저튼에서 제일 잘하는 분이 왕자님이실 거라니까요.

그렇게 1막이 끝나고 나자 숨을 몰아쉬며 아치 왕자님이 퇴장하신 무대엔 드디어, 플로리안 공작님이 등장하셨어요. 그분이 맡은 역할은 너무 뻔하여 코델리아 아가씨께서도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남장을 하고 오시노 공작의 하인이 되는 여인, 비올라 아가씨 역할이지요.

플로리안 공작님이 무대에 등장하셨을 땐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숨? 아니 이건 탄성이지요. 숨이 턱 막혔을 때 사람들이 입 밖으로 겨우 내뱉는 신음 같은 소리 말입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무대를 보고는 저도 그만 아, 하고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를 내짖고 말았습니다.

플로리안 공작님이 어여쁘시다는 것이야 모르는 일이 아니었어요. 지난 편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여자분이라는 것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엿한 숙녀의 모습을 하고 계실 줄은 미처 몰랐지요.

수도원에 여자 옷이란 게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20여년 전 에드위나 공주님이 두고 간, 이미 허름해진지 오래인 드레스 몇개가 다였지요. 노엘은 플로리안 공작님께 그 옷을 입히고, 하얀색 아마포를 베일이라도 되듯 어깨에 걸쳐두었어요.

그런데, 그런 우스꽝스러운 차림을 하고도 그분은 아름답지 뭡니까? 별 것도 아닌 하얀 천이 공주님의 베일과도 같았지요. 색이 바래진 에드위나 공주님의 붉은 드레스는 그분의 빨간 머리를 더욱 빛나게 했고요. 그 모습은 십여년전 마지막으로 본 에드위나 공주님의 현신과 같았습니다.

우리 아치 왕자님이 이 모습을 보셨더라면,

보시고도 이 분이 여자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신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일이다, 사람이 그 정도로 눈치가 없으면 죽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답니다.

저의 그런 생각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치 왕자님은 1막을 마치고 안쪽으로 들어가 열심히 다음 막을 준비 중이셨습니다. 플로리안 공작이 뭘 하든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계셨지요.

그러는 동안 플로리안 공작님이 연기하는 비올라는 남장을 시작했습니다. 이제 에드위나 공주님을 똑 닮은 젊은 여인의 모습은 쏙 사라졌습니다. 앳된 뺨의 미청년, 세사리오가 된 플로리안 공작님은 드레스 위로 얼른 튜닉을 걸친 해 검을 차고 왕자님 앞에 섰지요.

연극은 쭉쭉 앞으로 치고 나아갔습니다. 재밌는 부분 몇 개만 짜집기한 엉망진창을 무대였지만, 그래도 모두가 연극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즐겼습니다. 우리 레테 수도원의 모두는 이 책을 몇 번씩이나 돌려보았고 더러는 대사마다 외우는 이까지 있었으니

가끔 우스꽝 스러운 장면이 나오면 껄껄 웃으며 누군가 무대로 올라가 그 모습을 따라했습니다. 감동적인 장면에서는 다 같이 한 마음으로 대사를 외워 외쳤답니다.

아치 왕자님이 기나긴 대사를 하나 발음이 꼬이면 노엘이 왕자님! 하고 씩씩 거리며 무대에 올라가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껄껄 웃으며 무대가 떠나가라 박수를 쳐댔고요.

코델리아 아가씨, 이 늙은이의 긴 인생에서 이렇게 즐거운 밤은 또 없었습니다.

불에 타 없어진 마굿간, 폐허가 된 뒤뜰이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데도 이렇게 웃고 즐길 수 있다는게 신기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많은 즐거움이 그렇듯이 이 밤도 쉬이 끝이 다가왔습니다. 해가 뉘엿 뉘엿 지기 시작하니 서둘러야 했어요. 캄캄해지면 더는 무대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왁자지껄 한판 벌였던 수도사들이 뒤로 물러갔습니다. 이제 무대엔 플로리안 공작과 아치 왕자님만이 남아 있었지요.

우리가 준비한 마지막 장면은 오시노 공작이 모든 것을 알게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자신의 충복이었던 비올라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것을 알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장면 말입니다.

우리 아치 왕자님은 우아한 손짓으로 플로리안 공작님에게 자기 손을 내밀었습니다.

“비올라, 네 손을 다오. 그리고 여인 차림의 너를 보여다오.”

그러시고는 다른 쪽 손을 올려 하나로 묶은 플로리안 공작님의 머리끈을 풀었습니다. 마침, 선선히 불고 있던 여름바람에 길고 곱슬 곱슬 거리는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제 자리를 잡았지요.

노엘이 뒤에서 다가와 플로리안 공작님이 입고 있던 엉성한 튜닉 끈을 풀어헤쳤습니다. 그 안으로 한때 에드위나 공주님의 것이었던 빛 바랜 붉은 드레스와 하얀 아마포 천이 드러났지요.

산 허리를 내려가기 시작한 해는, 이제 자취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아직 검어지지 않았지요. 새벽녘 아니면 해질녘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어여쁜 파란색이 하늘을 잠식했습니다. 그 파란색을 집어삼킬 듯 강렬한 붉은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며 노을빛 물결을 만들어냈습니다.

갑작스레 벗겨진 가운이 부끄러운 듯 플로리안 공작님께서는 얼굴을 붉히셨지요. 머리색보다도 더 붉은 진홍빛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표정엔 긴장감이 역력히 보였습니다.초록색 눈은 노을빛을 받아 평소보다 조금 더 깊은 색을 띠며 우리 왕자님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왕자님께서는...

왕자님께서는 그저 플로리안 공작님을 쳐다보고만 계셨지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까 수도사 일동이 그랬듯 탄성인듯 한숨인듯 깊은 숨만 내뱉으면서 말입니다.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가 다시 커지더니, 아주 아름다운 빛을 내며 반짝이더군요. 입술을 꾹 깨물며 표정이 애달파졌습니다.

그렇게, 수도원 앞뜰에 모인 우리들은 다 함께 목격한 겁니다. 왕자님께서 플로리안 공작님의 정체를 눈치채는 장면을요.

보아선 안 될 남의 치부라도 몰래 본 듯, 괜히 낯이 붉어오더군요. 왕자님은 잠시 더듬다가, 다음 대사를 했습니다. 하지만 입술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오든, 왕자님의 눈은 그저 플로리안 공작님만 응시하고 계셨지요.

연극은 그렇게 조용히 막을 내렸습니다.

모두가 웃고 신나게 박수를 치며 끝났지만 마지막 인사를 할 때까지도 왕자님은 계속 멍한 표정으로 계셨지요. 혼자만 딴 세계 속에 들어간 듯, 정적을 지키며 말입니다.

어쩌면 내일 해가 밝을 쯤 왕자님께서도 정신을 차리시고 당신께 모든 것을 고할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 황당한 편지로 대신할 수도 있겠고요.

코델리아 아가씨, 당신께서는 영문도 모르고 수수께끼 투성이 편지만 붙든 채 긴밤을 지새운 후 허무해지시겠지요. 이 늙은이에겐 그렇게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몰래 수다를 떠는 것 외에는 도리가 있나요.

초열달의 스무번째 날 밤,

-베데르 랭 올림.

* * *

베데르,

이렇게 편지를 써주어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안부 하나 묻지 않은 것을 사과드릴게요.

아치가 보기 전에 당신께 답장을 쓰고 싶은 마음에 짧게 제 마음을 전해요.

당신이 오늘 쓰신 편지엔 이상한 설렘이 묻어 있어요.

저 역시 당신과 비슷한 마음으로 편지를 쓴 적이 있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차마 아치 왕자님께 보여드리지 못했지요.

전 오늘 당신이 본 광경의 정체를 알것 같아요.

그건 그저 한 사람의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을 겁니다.

당신이 목도한 것은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에 빠지는 모습이었어요.

가슴이 아파오네요.

그래도 이 편지가 아치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다행이에요.

적어도 그는 숨기려고는 했던 것이니 말이에요.

베데르, 이 편지는 아무래도 찢어주셔야겠어요.

7.20.

레테 수도원 모두에게 사랑을 담아, 코델리아.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비축분을 아껴둘까 오래 고민하다가 전편과 이어지는 감정선때문에 한꺼번에 가져왔어요.

연참이면 연참답게 올렸어야 했는데

오늘 오랜만에 금빛 매는 솔프리드를 붙잡았다 새 편이 올라오는 바람에..

검은 여인의 초상도 마저 읽어야하고..ㅠㅠ

네, 그런 독자의 사정으로 15분 늦은 것을 이해해주시길 바라며.

-유난히 불안한 어느 열매달, 작가 올림-

추신: 선작, 추천, 재밌게 보셨다는 댓글들 모두 감사합니다.ㅠㅠ 매일 말하니까 진심이 아닌 것 같겠지만 진짜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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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와 같은 연참(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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