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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장을 주세요,왕자님-31화 (31/56)

#31.

욕심 많은 나의 벗, 코델리아.

기사 앨리엇 경이야 물론 꽤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뭐, 옐링가의 외동딸이 자신의 5년을 걸 정도는 된다고 말해둘게요.

하지만, 얼굴이야 나를 따를 자가 있겠습니까. 이제 미남을 글로 수집하려는 욕심은 그만 접어둬요. 당신 옆에는 나보다도 잘생겼다는(그것은 불가능하지만) 리암도 있잖아요?

초열달 스물두번째날 밤.

-윈저튼 최고의 미남,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올림.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렌다이크 왕자님.

당신과 다프네는 마치 앤과 길버트처럼 어린 시절부터 알아온 소꿉친구였잖아요.

5년만에 재회하여 계약 연애를 제의하는 데까지 와서는 종래에 없던 긴장감까지 생겼을 터예요.

남들 눈에도 연인처럼 보이기 위해 하는 짓들을 당신은 퍽도 잘 수행했겠죠.

다프네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 손을 붙잡고 춤을 추기도 하고 말이죠. 그런데 사랑이 생기지 않다니요.

그건 기사 앨리엇이 당신보다 훨씬 잘생겼을 때만 말이 되는 이야기예요.

이제 윈저튼 최고의 미남 칭호는 그에게 양보하셔야겠네요, 아치 앨버트 윌리엄.

-당신의 예리한 벗, 코델리아 올림.

추신: 당신 벗을 위해 기사 앨리엇의 초상화라도 얻어 줄 생각 없나요?

* * *

바보같은 코델리아.

아름다운 남자와 용감한 여자가 서로에게 느끼는 오래된 친밀감이 꼭 사랑으로만 귀결되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아시잖아요?

-아름다운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 * *

바보같은 나의 왕자님.

우리처럼요?

-용감한 당신의 벗, 코델리아.

* * *

사랑스러운 나의 코코,

우린 조금 열외지요. 나는 다프네를 매일 생각하지는 않으니까.

* * *

거짓말쟁이 아치 왕자님.

당신은 진정한 의미의 바람둥이시네요.

다프네에게는 다프네가 원하는 답을,

루시와 엘로이즈에게는 루시와 엘로이즈가 원하는 답을,

이제는 내게도 내가 원하던 답을 주고 계시니 말예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나를 매일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은요.

이 게임에서는 늘 내가 승자일 거라는 게 분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용서해드리죠. 당신의 달콤한 말을 들어왔던 모든 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추신: 자정이 넘었네요. 이제 자야할 시간이에요. 잘자요, 나의 왕자님.

* * *

오늘따라 나를 괴롭히고 자러 간 코델리아 그레이에게.

초열달의 따뜻한 밤 아래, 이틀 전의 이야기를 해볼까요? 어쩌면 그 짧은 편지를 길게 풀어놓는다면 이 순결한 꽃에 대한 당신의 괴롭힘이 덜해질 수도 있으니 , 그날 내가 얼마나 당신을 생각했는지를 털어놓아 보지요.

당신이 예측하신 대로 십이야 연극이 있었던 날 드디어 플린의 정체를 눈치챘습니다. 노엘이 그애가 걸친 튜닉을 거둬들였을 때, 그래서 그 안에 겹겹이 껴입은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날리기 시작했을 때, 그애가 초록눈을 꽉 감았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짜맞춰졌어요.

사내녀석이라고 하기엔 너무 상그럽던 얼굴,

춤출 때 자연스레 여자 스텝을 밟으려 하던 것,

세실이 유난히 그 애를 감싸 돌던 행동들,

당신이 내게 십이야를 읽어보라 했던 말,

그외에도 당신 편지에 숨어있던 수 많은 단서들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플린은 비올라 그 자체였어요.

세사리오로 분장해야만 했던 비올라.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스스로가 한심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애는 죄 지은 사람처럼 눈꼬리를 늘어뜨리고 날 쳐다보더군요. 당장이라도, 왜 그랬냐고 묻고 싶었던 마음이 그 눈을 보자마자 쑥 들어갔어요.

‘너, 여자였구나’ 하고 말한다면 바로 울어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내가 먼저 저를 외면해주기를 원하기라도 하는 듯이 아래를 보았다가, 나를 보았다가, 다시 곁눈질을 했다, 이윽고 내게 돌아오는 불안한 눈동자가 애처롭게만 느껴졌지요.

그 표정이란 참 묘해서 한참을 들여다보았지요. 보고있자니 여러 생각들이 뒤엉키더군요.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름답다는 것이었어요.

남자라 생각했을 때도 예쁜 얼굴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제와 다시 보니 맑은 피부도, 콧잔등에 작게 찍힌 주근깨들도, 그 위로 커다란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도 참으로 미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얼굴이더군요. 왜 여자인걸 몰랐을까, 새삼스레 그런 생각도 한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엔 필연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군요.

대체 왜 남장을 했을까, 어려서 부터 그렇게 살아온 걸까, 아니면 왕궁에 오고자 일부러 그렇게 한 걸까, 살다보면 어차피 밝혀질 것을.

거기까지 생각하다보니 갑자기 낯이 붉어오더라고요. 그애 옷을 벗기려고 했던 것, 하얀 셔츠 위로 물을 끼얹으려고 했던 것, 붉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리던 것, 동굴 안에서 추위를 피하게 해 줄 요량으로 그애를 그냥 끌어안았던 것, 그런 것들이 생각나며 모든 것이 미안해졌습니다. 뒤늦게 떠올린 미안하단 말을 입에 담자 그애는 나를 빤히 보며 무엇이 미안하냐 묻더군요.

나는 그냥 다, 모든 것이 미안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만 말해도 알아들을 것이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애는 그냥 고개를 젓더군요.

“왕자님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 있는데, 그건 아마 지금은 모르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웃는 표정이 퍽도 쓸쓸했는데, 그때 나는 우습게도 에드위나 공주를 사랑했던 기사의 마음이 어땠을지 이제야 알겠단 생각을 했답니다.

당신은 비웃으시겠으나 내게 반해 고백해왔던 많은 여자들의 마음도 그제야 헤아려지더군요. 사람이 사람에게 겉모습 하나 만으로 반하여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플린은 내게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이 이런 힘이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그저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어요. 얼굴 하나 바라보았을 뿐인데 괜스레 마음이 저릿저릿하는 겁니다.

조금만 더 일찍 플린을 만났더라면, 어쩌면 이 연민이 그대로 사랑이 되어, 그애에게 홀딱 반해버렸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을 보며 느끼는 쓸쓸한 감정을 이길 것이 없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고나니 마지막으로 당신이 떠올랐습니다.

당신 역시 쓸쓸한 밤엔 저런 표정을 지을까.

그렇다면 내 마음은 얼마나 아파올까.

딸기빛 금발이 되고싶다던 당신 머리카락은 저것만큼 붉을까.

초록빛 눈동자는 마노같을까, 여름풀같을까.

아마 당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당신 같은 여자와 밤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플린에게 홀딱 빠져 이 여름 내내 그애 꽁무니만 쫓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의 상상대로 다프네의 결혼 소식에 눈물을 흘리진 않더라도, 다른 아름다운 이를 눈으로 쫒으며 사랑을 시작하기엔 참으로 적당한 여름이지요.

그러나 난 이미 늦었습니다.

책을 읽고 흥분에 못 이겨 섹스를 하러 떠난 청년과 같지 않은 나는,

그보다는 밤새어 가죽에 책을 옮겨 적는 바보와 닮은 나는,

이 여름를 온통 당신을 아는 데만 써버렸습니다.

이제 난 당신을 알아버렸고, 당신 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영원히 만날 수 없으니 이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도 없군요.

이제 내게 남겨진 몰락이 눈 앞에 선합니다.

어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도 당신 생각만 하면서 시름 시름 앓고 어느 고운 여자를 데려다주어도 누구도 코코같지는 않다며 불평만 늘어놓은 끝에 결국 베데르 같은 노친네가 되어 필경소에서 썩어버리겠지요.

그러니 나의 벗, 매일같이 당신을 생각한다는 나의 마음에다 대고 아니라 말하진 마시길.

당신은 리암 앞에서 이런 적이 없을 터이니, 이 게임은 내가 이겼습니다.

-당신의 아치 앨버트.

추신: 내일 아침에 다프네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떠날 참입니다. 서책보관함을 들고 가기엔 불안한 여정이니, 삼사일 연락이 없다해도 걱정하지말아요. 나의 코코. 설령 깨어있더라도 점 하나 찍을 생각말고 푹 자요.

* * *

여전히 우울해하고 있을 코델리아에게.

여기 숨어 들어오는 때까지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지 몰라. 짧게 적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기억나는대로 모든 것을 적을테니.

첫째, 사람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법이지. 베데르는 베데르가 보고 싶은 것을 아치는 아치가 보고싶은 것을, 너는 네가 보고 싶은 것을 보았어. 그리고 네가 본 것은 틀렸어. 상처받지마.

둘째, 그러니 지금 드는 생각은 잊어. 그는 나를 그렇게 보지 않았어. 나에게서 너를 보았지. 그것이 나를 기쁘게도 하고 우습게도 한다는 걸 너는 모르겠지.

셋째, 언젠가 여기로 오게 될거야. 더이상 편지를 할 수 없는 때가 오면 리암을 찾아가. 다만 그때까진 그냥 있어. 아무에게도 얘기하지말고, 아무 것도 하지마.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는 건지 오래도록생각해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편지는 내가 쓰는 것이 맞는 것 같았어. 오늘에서야 그런 생각이 든 나도 바보같지. 하지만 언젠간 너도 이해할거야.

7.23. 새벽.

-너의 가장 좋은 친구가.

추신: 이 편지는 네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찢어 버리렴.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첫째, 바뀐 표지 넘 아름답죠. 흑 자랑하고 싶어서 두번 말하네요.

둘째, 넘치는 후원 쿠폰 주신 Rakrak 님, 몰두님 모두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서평과 댓글, 선작, 추천 모두 저의 글쓰는 힘이 되네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셋째, 연재주기가 늦춰지며 불안해하는 분들이 계실까 전언: 이 소설은 계약작이며 조아라에서 완결까지 연재한 후 출간될 예정입니다. 텍본 등의 문제는 저 역시 두렵고 유료연재가 주는 이점 역시 알고 있으나 짧은 분량 상 이렇게 하는 것이 저에게 맞으며... 제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하는 관종이라(아시죠.. 침만 뱉지 않으시면 욕도 좋다고 했어요) 새벽에 두근거리며 독자님들과 무연하는 맛을 놓지 못하고...흑흑. 또 말이 베데르처럼 길어졌네요 어쨌든 안심하고 읽어주세요.

추신: 이번 편이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독자님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찢어주세요..

<-- 줄리엣의 교육 -->

연참(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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