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32화 (32/56)

#32.

베데르?

당신이에요?

* * *

필경사 베데르 랭님께.

베데르, 방금 전에 보내신 이상한 편지가 당신의 것이라면 대답해주세요.

궁금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답니다.

초열달, 스물 세번째 날 새벽에.

-코델리아 그레이

* * *

07-23-TUE-AM 11:5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엄청나게 글씨를 잘 쓰는 줄리엣 캐플런 보아라.

글씨를 잘 쓰는 사람들은 자유자재로 못쓰는 글씨체를 흉내낼 수도 있니?

예를 들어 중세 필경사 급으로 아름다운 글씨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말이야.

* * *

07-23-TUE-AM 11:57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나의 악필 친구 코델리아 그레이 보아라.

뭐 하길래 그런 걸 물어?

지난 번에 말했던 중세 그림책 작업해?

아니면 문서 위조 범죄 모의라도 하니?

나 같은 사람이 너 같은 사람의 글씨를 따라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절대 ‘아니오’야. 네 글씨체는 정말 예술적으로 엉망이지. 그래도 뭐 우리같이 천부적으로 아름다운 글씨체를 타고난 사람들은 대충 이것저것 따라할 수 있긴 해.

* * *

07-23-TUE-PM 1:5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질문을 모욕으로 돌려주는 나의 오래된 친구야.

이상한 질문 하나만 더 할게.

너 혹시 내가 좋아하는 종이 찢기 방식 아니?

전에 한번 얘기해준 적 있는 거 같은데.

* * *

07-23-TUE-PM 2:14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너희 팀 되게 한가한가봐.

시간이 남아돌면 빨리 달력과 시계를 봐줄래?

휴일까지 장장 나흘이나 남았고, 퇴근까지 무려 4시간이나 남은 이 시점에 너의 엉망인 글씨체에 이어 종이분쇄에 대한 특별한 고집을 대화거리로 삼아야할까? 네 친구는 갑자기 지루해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단다. 그러지 말고 리암과 너의 비밀의 남자에 대해서나 얘기해볼래?

수다를 떨기 전엔 수위부터 말해주렴.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뜬다면 산더미같이 쌓인 교정고를 치워두고 네 얘기를 들어줄 용의도 있단다. 아니라면 너의 메일을 네가 가렛 메일 취급하듯 할거야.

* * *

07-23-TUE-PM 2:42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19세미만 관람불가.

..라고 첫 줄을 쓰면 네가 열어보겠지?

이 메일에는 네가 기대한 어떤 음흉한 내용도 들어있지 않지만, 일단 읽어보면 너도 이 이야기에 흥미가 생길걸?

있잖아, 누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마지막 줄엔 ‘다 읽고 네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찢어, 코델리아’ 라고 써있었고.

줄리엣, 너는 모르겠지만 난 나만의 종이 찢기 방식을 가지고 있단다. 그건 돌아가신 우리 엄마밖에 모르는 이야기고.

어렸을 때 우리 엄마는 고지서나 신문에 끼워온 전단지, 쓸데없어진 종이를 버리지 않고 다 모아두셨어. 엄마 어렸을 때는 종이 한 장 한 장이 중요했다나 뭐라나.

그런 것들이 내 키만큼 쌓였을 때쯤엔 난 다 모아서 그걸 서너장씩 모아 두번 접은 후 세 번 찢고, 다시 모아 한번 더 찢었지. 그렇게 찢으면 완전히 산산조각이나서, 고지서에 쓰인 내 이름이나 엄마 이름이 보이지 않았거든.

엄마는 그런 내 방식을 야무지다면서 좋아했어. 상점가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할 때도 “얘는 자기가 좋아하는 종이 찢기 방식도 있는 애야” 라면서 자랑하듯 말씀하셨지.

그래, 그건 정말 우리 엄마랑 나만 알고 있는 일이야.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게 편지를 보내놓고는 마지막 줄에 이렇게 말하는 거야.

“코델리아, 네가 좋아하는 종이 찢기 방식으로 찢으렴.”

오싹하지 않니?

* * *

07-23-TUE-PM 4:12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나의 사랑스러운 변태 친구야.

너 정말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애였구나. 네가 좀 더 좋아지려고 해. 우리집에 모아둔 고지서도 와서 좀 찢어줄래?

어쨌든 그 편지, 그냥 행운의 편지 같은 거 아니야?

코델리아, 너 설마 그게 너희 어머니라고 믿는건 아니지?

* * *

07-23-TUE-PM 4:33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그 한 줄 가지고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오셨단 생각을 할 정도로 돌아버리진 않았어. 아직은 말야.

그리고 우리 엄만 아주 달필이셨거든. 이 사람은 글씨를 더럽게도 못쓰더라. 그런 주제에 볼펜도 아니라 잉크펜으로 쓴 건지 엉망진창으로 흔들리고 튀기고 해서 무슨 내용인지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어.

그런데 더 오싹한 게 뭔 줄 알아? 자세히 보니 그 글씨가 꼭 나같더라. 동그라미 그리는 방향도 나랑 똑같고.

어때, 이제 좀 무섭니?

* * *

07-23-TUE-PM 4:42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세상에 너같은 글씨체가 하나 더 있다니, 그거 정말 무서운 일이긴 하네.

...아무리 생각해도 글씨라고는 지지리 못쓰는 어떤 미친놈이 행운의 편지라도 보냈나보다 싶은데?

그 미친놈, 혹시 네 오래된 스토커일지도 모르니까 리암에게 에스코트라도 부탁하는게 어때?

이번에야 말로 그 미남을 눕힐 수 있는 제대로 된 기회라는 걸 인정해라, 나의 친구야.

* * *

07-23-TUE-PM 4:44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너의 한결같음에 일단 박수를 보낼게.

리암을 눕히든 세우든 하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신경끄렴.

일단 오늘은 리암 말고 너랑 저녁할래.

퇴근 후 펍 괜찮지?

편지도 들고 온 참이니 보여줄게.

* * *

07-23-TUE-PM 4:45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리암을 세우겠다고?

그래 그 일은 네가 알아서 해야할 일이지. 그렇고 말고!

* * *

07-23-TUE-PM 4:45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닥쳐, 줄리엣. 제발 좀.

* * *

07-23-TUE-PM 5:11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닥치긴.

퇴근길에 리암을 어떻게 세울지 하는 얘기나 더 해보자.

말이 나와서 말인데, 리암이랑은 당연히 아직일테고.

그 다른 남자는 어떻게 됐어?

아직도 열심히 바람피는 중이니?

* * *

07-23-TUE-PM 5:25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바람은 무슨.

그 남자. 그래, 그 남자 때문에 내가 지금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거야.

그 사람, 도통 어떤 마음인 줄을 모르겠어.

* * *

07-23-TUE-PM 5:26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가끔 보면 넌 좀 사악한 구석이 있어.

자꾸 왜 이런 이야기를 퇴근 직전에 하는건데?

아까 두시부터 했으면 좀 좋냐고.

그래, 30분 동안 격렬히 대화나 해보자.

그 남자가 뭘 어쨌길래 마음을 모르겠다는 말이 나와?

* * *

07-23-TUE-PM 5:27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다른 여자를 보고 그 여자가 너무 예뻐서 넋을 잃고 쳐다봤대.

사람 얼굴에 그런 감동을 느낀 건 처음이었대.

표정이 안 좋은 걸 보니까 괜스레 자기 마음까지 저릿저릿 아파왔대.

그리고..

잠깐만, 전화좀 받고 마저 쓸게.

* * *

07-23-TUE-PM 5:27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장난해?

그걸 왜 너한테 말한대?

개새끼네.

* * *

07-23-TUE-PM 5:4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아니야, 줄리엣. 마저 들어보라니까.

그런데 그 여자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떠오른게 나였대.

한참을 쳐다보는데, 내 생각이 들었대.

* * *

07-23-TUE-PM 5:41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그거 개수작같은데?

네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뭐?

07-23-TUE-PM 5:42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네 생각이 나서 그 여자와 사랑에 빠질 수 없을 것 같대.

앞으로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대. 왜냐면 누구도 나같지 않으니까.

알아,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너 지금 날 비웃고 있지?

너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잖아.

나는 그 사람을 알아.

괜히 날 넘어오게 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란걸.

날 꼬드겨서 좋을 것도 하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네가 그 사람을 봐야해. 그 사람이 날 생각한다는 말은 진짜가 아닐 수는 없었어.

* * *

07-23-TUE-PM 5:45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무슨 얘기하는 줄 알겠어.

그래, 직접 겪지 않으면 전달이 안되는 그런게 있지.

그리고, 누구도 너 같지 않을 거란 건 좀 로맨틱 하다.

네가 그 사람을 왜 좋아하는지 알겠네.

* * *

07-23-TUE-PM 5:46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그렇지? 그 말은 좀 로맨틱하지.

* * *

07-23-TUE-PM 5:46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응, 입 터는 솜씨가 예사 솜씨가 아니야.

* * *

07-23-TUE-PM 5:47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07-23-TUE-PM 5:47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아무튼 코델리아.

그 꼬드기기의 귀재께서 누구도 너 같진 않다고 하시고, 너 역시 그 사람 이야기로 오후 5시를 채우고 있는 판에 대체 뭐가 고민이야. 혹시 너 나한테 자랑하는 거였는데 내가 몰라본거니? 아니면 뭐, 자지도 않은 리암이 문제야?

* * *

07-23-TUE-PM 5:49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란 건 알아.

거짓말은 아닌데...

내 생각엔 그 사람, 눈치가 없어서 아직 자기 감정을 모르는거지 아마도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아.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리가 없어.

눈 앞에 있는 예쁜 여자를 좋아하게 되는게 더 말이 되는 얘기거든.

내가 내 눈앞에 있는 리암에게 끌리듯이 말야.

그래, 줄리엣 너한테 말하다보니 정리가 된다.

그 사람은 그 여자애를 좋아해.

아직 그 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야.

그럼 내가 얼른 말해줘야하는게 맞겠지?

* * *

07-23-TUE-PM 5:56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미쳤어?

훼방놓아도 모자랄 판에 응원까지 하게?

얼른 퇴근 준비나 해.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넌 오늘 나한테 좀 단단히 교육받아야겠다.

========== 작품 후기 ==========

이게 왠 월급루팡들이야 하고 계실 독자님들께.

설마 아치 왕자도 없이 끝내겠어요.

두 편 더 있습니다.

다음편을 눌러주세요.

추신: 선작과 추천 모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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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참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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