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아치 앨버트 왕자님께.
난 당신이 준 편지는 모두 서책보관함에 꺼내어 내 오래된 보물상자에 간직해둔답니다. 상자의 맨 밑바닥엔 기숙학교 시절에 후원자님이 보내주신 편지들이 들어있고, 그 위로 차곡 차곡 당신의 편지가 쌓여있지요. 베데르의 것도, 노엘이 보낸 그림도 함께요.
딱 한 장, 어제 당신이 보내주신 장난 편지만 빼고요.
처음부터 그 편지를 찢으려했던 건 아니었어요.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술이었죠. 글쎄, 줄리엣이 그러잖아요?
“코델리아, 맨 밑에 찢으라고 써있잖아. 찢어버리라는 편지를 안 찢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잘 보관할 수 있겠지.”
“죽어. 네가 죽는다고. 하란대로 안해서 죽은 미스테리 소설 속 주인공만 내가 142명은 댈 수 있어.”
저 역시 술에 좀 취해있어 그 말이 유달리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둘은 편지를 갈기 갈기 찢어 템즈 강변에 버리고 왔지 뭐예요.
그리고나서 집에 오는데 문득, 이것이 베데르가 보낸 것도, 유령이 보낸 것도 아니라 아치 당신이 친 장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당신 역시 필사실에서 다져진 아름다운 필체를 자랑하니, 재주좋게 내 글씨체를 흉내내셨을 수도 있겠고 말예요. 당신 편지를 하나 잃었다는 것이 아쉽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주워담을 순 없네요. 뭐 어차피 당신이 찢으라고 명하신 편지기도 하고 말예요.
사실요, 아치. 난 장난편지를 보내기 직전의 당신 편지가 더 좋았어요.
진지한 고백이라도 듣는 것 같아 괜히 설레였지요. 당신은 어쩜 그렇게 여자들이 좋아할 말을 잘 알아요? 이렇게 물으면 당신은 또 ‘난 여자가 아니라 코코, 당신을 잘 아는 거지요’ 같은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겠죠?
정말이지, 당신이 다프네를 꼬시지 못했다는 게 믿을 수 없네요.
추신: 솔직히 말하면 그 편지를 벌써 열 번째 읽는 중이에요. 그래,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고요? 플린이 어어엄청 예쁜데 나때문에 사랑엔 빠지지 못할 거라고요? 네. 그것 참 안타깝네요, 흥!
추신2: 그런데 내가 종이 찢기 방식에 대한 남다른 집착이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7.23. 밤.
-템즈강에서 막 돌아온 술 취한 코코.
* * *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께.
당신이 수도원으로 들어올 날을 기다리며 서책보관함 앞에서 시집을 들고 있는 코델리아예요.
네, 글씨만 봐도 알겠지만 오늘도 조금 취했고요. 줄리엣이 어제는 네 얘기를 들어주었으니 오늘은 자기 얘길 들어줄 차례라면서 고집을 부리지 뭐예요? 게다가 마침 당신도 부재중이시니, 내겐 집으로 재깍 달려갈 핑계도 없었답니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왕자님. 당신 벗은 취한 김에 극적인 일을 벌이기엔 너무도 소심해요. 내가 술기운에 하는 일이라곤 책을 읽고 편지를 쓰며 조용히 당신께 주사를 부리는 것 뿐이네요. 어쩌면 지금쯤 당신도 다프네의 결혼식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계실지도 모를텐데 말예요.
있잖아요, 왕자님. 다음 번에 또 멀리 가실 땐 그냥 우리의 마법 상자를 들고 가시면 안될까요? 험한 길이라 해도 둘둘 싸매어 잘 보관해가시면 되잖아요?
사흘, 어쩌면 나흘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자꾸만 상자 안을 들여다보게 되어요. 하릴 없이 들여다보아봤자 아무것도 나오질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예요.
베데르 역시 바쁜 모양인지, 우리의 서책보관함을 몰래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있네요.
왜 그런 장난을 쳤냐는 나의 물음이 적힌 편지는 베데르를 부르는 편지와 함께 정답게 쓸쓸하고요.
당신이 돌아올 날까지 아직 이틀이나 남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일찍 돌아오실까 나는 책 한장을 읽을 때마다 한번씩 상자를 열어보지요.
지금 읽던 책은 시인 존 키츠의 서간문 모음집이니 당신께도 옮겨 써 드릴게요.
[사랑하는 나의 아가씨, 나 자신이 당신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걸 느껴요. 몇 줄이라도 좋으니 답장을 써주세요. 어제처럼 날 사랑으로 대해주겠다고.]
네 맞아요. 이 시를 따라 나도 사랑하는 나의 왕자님이라 불러보았죠.
시인이 사랑했던 그 아가씨보다도 아름다울 나의 왕자님,
빨리 당신 여름을 다시 내게 바쳐요. 나는 이미 당신께 내 밤을 모두 바치고 있으니.
7.24. 당신 없이 술취한 두 번째 밤,
당신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을 느끼는 코델리아.
* * *
욕심많은 아치 앨버트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당신은 아주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툭 하면 이런 저런 이유로 서책보관함 앞을 떠나는 주제에 내가 며칠 편지를 소홀히 하면 토라진 척을 잔뜩 하며 날 죄책감으로 옴싹달싹 못하게 한단 말이죠.
돌아온 당신이 편지 한 장 없는 것에 서운해할까, 매일같이 서책보관함 앞에 앉아있는 제 모습을 보라죠. 이건 제 친구 줄리엣이 알면 아주 기함할 일이에요.
줄리엣이 말하길 우리가 아주 좋아하는 사람과 잘 안되는 건 좋아하는 마음을 미처 감추지 못해서래요.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면 차이기 쉽상이라나요?
좋아하면 좋아할 수록 그 마음을 감추라고, 그래서 상대를 안달복달 못하게 하라고, 너무 전전긍긍하면서 한 사람에게만 매달려 있지 말라고, 그게 줄리엣만의 성공비결이랍니다.
내가 조금 더 능숙한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겠죠?
당신이 바라는 대로 매일같이 편지를 써서 서책보관함에 넣어두는 대신 당신의 지난번 편지를 못 받은 척 할 수도 있었겠고,
매일같이 내 생각을 한다는 그 말을 살짝 외면하면서 ‘그런 편지를 보냈다고요?’ 하고 당신을 놀릴 수도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런 일엔 영 잼병이네요.
갑자기 떠오른 재밌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게요. 우리 엄마랑 아빠의 얘기예요.
줄리엣은 이런 얘기는 절대 들어주지 않거든요. 부모님의 연애 얘기같은 걸 자세히 듣고 싶어하는 딸은 이상하다면서 그런 건 상상도 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대요.
줄리엣의 심정도 이해는 가요. 캐플런 아줌마와 아저씨는 제가 보는 앞에서도 엄청나게 찐한 키스를 하시면서 틈만 나면 줄리엣이 생겼던 그날 밤 차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시는데... 네 그런건 저도 정말 알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왕자님도 아시잖아요. 나의 경우는 줄리엣과 완전히 다르다는 걸요. 우리 엄마 아빠는 내 앞에서 찐한 키스를 하시지 않아요. 그러려면 일단 살아계셔야 하는데, 저희 엄마 아빠는 모두 죽어버렸답니다!이건 농담이니까 침울한 표정은 짓지마세요, 왕자님. 전 그냥 재밌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니까요.
저같이 아빠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딸은 필연적으로 엄마를 붙들고 조르게 되어있지요.
'아빠는 어떤 분이셨어요?’
'엄마랑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요?’
그런 질문을 끝없이 쏟아놓던 어린 시절, 엄마는 그때마다 제각각 다른 대답을 해주셨어요. 어떤 때는 아빠가 얼마나 잘생겼는지를, 어떤 때는 아빠가 얼마나 끈덕지게 엄마를 쫓아다녔는지를, 어떤 때는 아빠가 했던 아주 바보같은 실수 같은 걸 이야기해주기도 했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빠의 편지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가게에서 물건이 하나라도 팔리는 날, 그래서 엄마의 기분이 아주 좋은 날이면 전 엄마를 졸라 이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지요.
엄마는 지겹지도 않냐고 투덜거리시다가도 ‘그래, 좋은 건 다시 보아도 좋은 법이니까’ 라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해주셨지요.
아주 오래전에 아직 엄마가 아빠의 마음을 받아주기 전에, 아빠가 엄마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대요. 엄청나게 긴 편지를 써서 어딘가에 맡겼는데 엄마는 그 편지가 온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한참을 지나서야 그 곳에 가서 편지를 찾았다네요.
이윽고 아빠의 편지를 받은 날, 엄마는 책상에 앉아 답장같은 걸 쓰는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셨어요. 언제 전해질 지 모르는 편지를 쓰느니, 직접 달려가 아빠를 끌어안고 싶었다니, 엄만 저랑은 정말 다른 사람이지요?
엄마가 아빠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던 아빠는, 내내 낙담만 하고 계셨대요.
기나긴 편지에 마음을 담아 맡겨두었는데 도통 찾아가질 않더니, 겨우 찾아갔다는 기별을 듣고언제 답장이 오려나 하고 있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편지 잘 받았다는 짧은 답장 하나 오질 않으니 얼마나 슬프셨겠어요?
왕자님, 당신도 이제 아시겠지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기다리는 그 심정은 아주 애가 타거든요.
그렇게 해서 우리 엄마가 기차도 버스도 타지 않고 직접 발로 걸어 아빠를 찾아갔을 땐, 아빠는 아주 단단히 삐져있었더랍니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랜만에 만났고, 엄마는 조금 벅찬 마음으로 아빠 앞에 섰죠.
그런데 아빠가 다짜고짜 이렇게 묻더래요.
“내 편지를 읽기는 한거야?”
엄마는 말씀하셨어요.
입을 비죽이며 그렇게 묻는 아빠가 너무 귀여웠다고요.
그래서 하려던 말을 모두 뒤로 하고 아빠를 좀 더 놀려보고싶었대요.
“무슨 편지?”
엄마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아빠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죠.
“그럼 그게 대체 어디갔지?”
아빠가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자기가 쓴 편지의 행방이라도 찾아보려 하는 순간, 엄마가 아빠를 멈춰세웠죠. 아빠의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로 돌려세웠고요. 그대로 엄마의 입술이 아빠에게 돌진했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첫키스를 했다네요.
서툰 입맞춤의 끝에 아빠는 소녀처럼 파들파들 떨고 계셨대요.
예쁜 얼굴이 귀까지 새 빨개진 것을 보며 엄마가 생글 웃으며 말했답니다.
“다 읽었어. 읽고나니 네가 보고 싶어져서 달려온 참이야.”
엄마는 거기까지 말씀하지 않았지만 저는 가끔 생각합니다. 그날, 엄마가 아빠를 덥쳤던거야.
그래, 그날 내가 태어났겠지 하고요.
네, 왕자님.
우리 부모님의 경우엔 책을 읽고 밤을 새 필사를 하는 쪽이 아빠, 달려나가 섹스를 하는 쪽인 엄마였던 거죠. 이렇게 행동력 넘치는 엄마에게서 태어난 주제에, 아빠를 더 닮아버린 전 늘 서럽습니다.
제가 당신께 달려갈 수 있다면 저도 그런 장난을 칠 수 있었을까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고도 날 생각한다면서 들끓던 내 질투를 모두 잠재워주는 당신의 달콤한 편지를 다 읽고서도 ‘어머 그런 건 받지 못했는데요?’ 라고 말하며 당신을 놀릴 수 있었을까요?
글쎄요. 전 그냥 우리 아빠의 딸처럼 당신에게 애걸복걸하겠어요.
부디, 돌아오자마자 편지를 써요.
무사히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아있다고, 사흘 동안 내가 쓴 세 장의 편지를 모두 읽었다고요.
그렇게 저를 안심시켜준 후에야 옷을 갈아입고, 씻고, 여독을 푸세요, 나의 왕자님.
7.25.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코델리아.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저도 좀 더 요령이 좋았더라면 다른 작가님들처럼 작가후기없이 묵묵히 글만 쓸 수 있었을텐데,
전 그냥 독자님들께 애걸복걸할게요. 이번편이 재미없으셨어도 다음편을 봐주세요. 다음편은 재밌을 수도 있답니다....진짜예요...
추신:
빨리 당신의 선추코를 제게 바쳐주세요. 전 이미 모든 비축을 당신께 바치고 있으니..! 네.. 매번 죄송합니다. 글에서 안되면 작가후기에서라도 웃겨보고 싶은 욕심에..
<-- 편지의 주인 -->
(연참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