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술 취한 나의 아가씨께.
나는 당신을 안달내게 할 요량으로 태어난 사람은 아닌 듯 합니다.
당신이 편지를 써보내자마자 바로 받아보게 된 걸 보면요.
지금 막 수도원에 도착한 참이에요.
내 말은 다 불타버린 마굿간에 몸을 뉘이기도 전에 날 필경소로 안내했죠.
난 알다르 사막을 건너온 낙타가 물을 마시는 것처럼 급히 서책보관함을 열어, 당신의 편지를 손에 쥐었구요.
두장 모두 베데르에게 쓴 편지더군요.
그 노인네, 어찌나 좋아하던지.
난 아픈 어깨를 (네, 잊지 않으셨죠. 아프다니까요. 좀 더 내 어깨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축 늘어뜨리고 내 방으로 상자를 들고왔습니다. 그리고 사흘 내내 답장 하나 없는 당신을 탓하려는 결심을 했답니다.
그런데 상자를 열자 바로 스르르, 종이가 세 장 밀려오더군요. 당신이 새 편지를 쓰려 서책보관함을 탈탈 털었다가 다시 집어 넣은 것이겠죠. 그렇게 사흘 간 당신이 술 취해 쓴 세 장의 편지가 한 꺼번에 내 손에 쥐여졌습니다.
이 마법같은 순간에 느끼는 희열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당신과 나만이 알고 있지요. 이제 나는 당신 입술 대신 종이에다 대고 미친 사람처럼 연달아 입을 맞춥니다. 아껴 볼새도 없이 열심히 당신 편지를 읽습니다.
아직 거기 앉아있나요, 나의 아가씨?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짧게 답장을 먼저 할까요.
네, 저는 무사히 도착했어요.
당신께 들려줄 제법 재밌는 이야기도 가지고 왔지요.
하지만 늘 그렇듯 내 얘기를 하는 것보단 당신 편지를 감상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첫 장엔 술 취해 쓴 편지답게 무슨 내용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말들만 늘어놓으시더니
둘째 장엔 ‘사랑하는 왕자님’ 이란 말로 나를 온통 뒤흔들어 놓고는 시인의 편지를 따라 썼다 말씀하시는군요.
당신이 쑥맥 아버지만 닮았다는 말은 이제 믿을 수 없네요. 편지의 첫 구절 하나로 나를 가지고 노는 걸 보면 어머니를 쏙 빼닮으셨습니다.
초열달 스물 다섯번 째날 밤.
-막 달려와 먼지에 휩쌓인 채 책상에 앉은 당신의 아치 앨버트.
추신: 더이상 베데르와 내통하지말아요. 이제 베데르가 당신을 부르는 아가씨라는 호칭마저 내가 가져가 버리겠습니다.
추신2: ‘글씨만 봐도 알겠지만 술에 취했다’ 는 말에 대해 언급하는 걸 잊었군요. 아뇨, 코델리아. 글씨만 보고선 당신이 취했는지 술 한방울 마시지 않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답니다. 당신 글씨는 늘 술에 취해 비틀거리니까요. 난 그 비틀거림마저 사랑하지요.
* * *
* * *
비틀거리는 나의 글씨를 받아 줄 안정적 필체의 소유자 아치 앨버트 왕자님께.
내 세 장의 편지에 한꺼번에 답하려드는 당신의 호기 넘치는 답변 잘 읽었습니다.
여행 이야기를 묻는 것은 뒤로 하고 일단 당신의 불타는 독점욕에 응답해드리자면 베데르 필경사님께 편지를 쓴 건 3일 전 밤이었어요. 내용도 별 것 없고요.
난 그저 당신이 쓴 ‘장난 편지’가 베데르 필경사님이 쓰신 것인 줄 착각하고 그걸 여쭈어보았을 따름이랍니다. 하지만 편지는 사흘 내내 사라지지 않고 내내 서책보관함 한 켠에 있었고, 베데르 필경사님의 답변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베데르에 대한 끝없는 의심은 이만 거두셔도 될 것 같네요. 그는 더이상 우리 서책보관함을 훔쳐보지 않아요.
추신: 내 첫 번째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고요? 마지막 줄에 ‘다 읽고 찢으라’ 쓴 그 편지, 당신 장난이 아니었나요? 그럼 정말 베데르가 친 장난일까요?
추신2: 제일 중요한 이야기를 잊었네요. 그거 알아요? 지난 사흘간 오로지 당신만을 기다렸어요. 이렇게 당신과 편지할 날만을요.
* * *
달콤한 추신으로 나를 현혹하는 나의 아가씨.
다프네의 결혼식을 위해 떠나던 날 아침, 난 필경소로 와서 우리의 서책보관함에 자물쇠를 달아두었답니다.
그 전날 대장간 지기에게 튼튼한 자물쇠 하나를 만들어오라 했던 참이거든요. 내가 떠나기 전에 완성되어 다행이었죠.
당신은 지금 그렇게까지 해야겠냐며 나의 집착에 눈초리를 보내고 계실텐데 꼭 베데르만을 의심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새 시도서 주문이 들어와 레테 수도원의 여덟 필경사들이 좀 바빠졌거든요. 덕분에 요즘 들어 제 1스크립토리움에도 여러 사람이 드나들고요.
그렇다고 해서 내 방에 가져다두기엔, 플린과 노엘이 뻔질나게 나를 찾아대니, 나로서는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느꼈던 것이랍니다.
어쨌든 당신이 찢었단 그 편지는 내가 자물쇠를 채우기 전날 새벽에 베데르가 부린 장난 같네요. 고약한 양반 같으니라고.
그 편지를 냉큼 찢어 버렸다는 당신의 친구 줄리엣 양께 찬사를 보냅니다. 정말로 우리가 만날 날이 온다면 어쩐지 난 그녀와 영혼의 벗이 될 것만 같군요.
-그래도 육신만은 당신의 것일 아치 앨버트.
* * *
이제 법적으로 나의 소유가 되신 아치 왕자님께.
편지에 그렇게 써놓은 말은 실제로 법정구속력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당신의 영혼을 내줄리엣에게 헐값에 넘기는 대신 그 아름다운 몸을 제게 주신다니 이렇게 기꺼울때가요. 서책 보관함이 조금만 컸더라도, 이 속으로 들어가 당신께 닿아 쾌락이든 뭐든 찢고 말았을텐데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아치, 베데르가 부린 장난인지 뭔지하는 편지요.
그게 날 사흘 밤낮을 고민하게 만들었거든요.
여독이 아직 풀리지 않으셨다면 죄송한 말이지만, 잠깐 우리의 서책보관함 앞에 베데르를 불러오시면 안될까요?
그에게 내 편지를 보여주세요. 그리고 내 글씨체를 똑같이 흉내내라고 해보세요. 왜냐고 물으면 그저, 코델리아가 간절히 청했노라고만 전해주세요.
7.25일 밤,
-오늘 부로 당신의 소유자, 코델리아가 명합니다.
* * *
나의 당당한 점유자시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장 분부대로 하지요.
뭐, 당신이 시키신다면 이유가 있을테니 얼른 베데르에게 가볼게요.
그 늙은이가 자고 있으면 깨워서라도 데려올테니 조금만 기다려봐요.
초열달, 스물다섯번째 날 밤.
-오늘 부로 당신의 것인 아치 앨버트 윌리엄.
* * *
나의 코델리아께.
만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우리의 우정은 솔직함을 기반으로 해야한다는 것 알고 있지요? 그러니 부디 내 말을 불쾌하게 듣지 말아줘요. 자, 마음의 준비됐어요?
베데르는 당신의 글씨를 흉내내기엔 너무 멋진 필체를 가지고 있네요!
이렇게 아름다운 글씨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당신의 술 취한 글씨를 따라할 수 없을 거랍니다.
혹시나 이 말을 모욕으로 들을까 베데르가 애써 모사하려 든 당신 글씨체를 동봉하겠습니다.
추신: 갑자기 수수께끼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데, 대체 이게 뭐하는 거예요. 나도 같이 재밌자고요.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왕자님께.
자, 당신의 이름을 길게 불렀으니 진지한 얘기를 하려 드는 걸 아시겠죠?
이제부터 당신이 궁금해하시는 속사정을 이야기해드릴게요.
당신이 매일같이 나를 생각한다는 말 한마디로 나를 홀려버린 사흘 전 새벽, 우리의 서책 보관함에는 이상한 편지가 한장 더 도착했습니다.
그 편지를 쓴 사람은 돌아가신 엄마와 나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내 버릇을 언급했습니다. 엄마는커녕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닥쳐올 미래를 예언했고요.
제일 중요한 건 그 편지를 쓴 이가 내 글씨체를 흉내내고 있었다는 거죠. 뭐, 나보다 좀 못쓰긴 했지만 거의 똑같았어요.
처음에 난 베데르가 친 장난이라 생각했어요.
나중엔 아마 당신이 당신답지 않게 치밀한 농담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고요.
그러나 지금 우리가 확인해본 바, 둘 모두 아닌 것이 확실해졌군요.
이제 내 머릿 속 화살표는 오로지 한 방향만 가리키고 있는데, 난 그 길을 걷기가 퍽도 겁나네요.
-당신의 불안한 벗, 코코가.
* * *
나의 셜록 아가씨께.
당신답지 않게 치밀한 농담이라는 말은 편지에서 삭제시켜주겠어요? 이 편지가 모두 법적 효력이 있다면, 그 말도 언젠가 법정에서 울려퍼질테니 말입니다.
네, 당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내 서툰 농담이었어요. 답장이 좀 늦어 미안해요.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파악하는데 한참이 걸렸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술김에 줄리엣과 같이 찢어버렸다는 그 편지에 대해 말하는 거죠?
베데르가 쓴 것도 아니고 내가 쓴 것도 아닌 편지가 이 서책보관함에 들어있었다고요?
나 역시 어떻게 된 노릇인지를 이해하기 힘들군요. 제 1스크립토리움에 요즘 이 사람 저 사람이 드나든다고 말하긴 했지만 다 합쳐봤자 노엘과 플로리안 그리고 여덟명의 필경사 베데르, 루이스, 피터, 필립, 틸버트, 제레미, 도시, 오즈딘 뿐이에요.
그들은 모두 당신의 매력적인 필체를 본적도 없을테고 말예요. 난 항상 당신께서 주신 편지를 서책보관함에 빼두어, 나만 아는 장소에 보관해두니까 말이죠.
대체 누가 당신의 필체를 흉내내어 그런 장난을 친 걸 까요?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요.
더 이상한 것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나의 셜록 아가씨.
나는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하겠건만, 영민한 당신께서는 이미 범인이 누군지 알고 계시는 것 같다는 거지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요?
코델리아, 왜 그렇게 무서워하고 있죠?
초열달의 두려운 밤에.
영원히 당신의 신실한 벗이 될 아치 앨버트.
* * *
횡설수설 하고있는 나의 편지 속에서도 알아야할 모든 것을 알아내신 나의 영민한 벗께.
있잖아요, 아치. 그거 아세요?
당신의 다친 어깨며 부러진 손목이 감쪽같이 치유되는 곳,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이 마탑이란 말을 하는 곳,
마물이 결계를 부수고 들어오는 그곳과 내가 사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곳이라는 사실을요.
당신이 사는 세상에선 어느날 서책 보관함으로 툭 편지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래 그럴 수도 이지 하고 넘어가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픽픽한 인생에서 이건 정말 기적같은 일이랍니다.
네, 당신과 편지하는 건 내겐 정말이지 마법과 같은 일이에요.
난 언젠가 이것이 끝날까 무척 두렵습니다.
끝나버려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앉아있을까, 그것이 제일 무섭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아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나중에 잘 설명해줄게요.
일단 지금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봐주시겠어요.
오늘은 여독을 풀고 자요, 나의 사랑스러운 왕자님.
그리고 아침이 오면 사람들을 모두 깨워, 이 서책보관함 앞으로 불러 모아주세요.
여덟명의 수도사, 노엘, 플로리안까지 모두 말예요.
그리고 한 명, 한 명씩 제 1스크립토리움에 들어가 종이에 아무 말이나 써서 서책보관함 안에 넣으라고 해주세요.
무슨 말을 써도 상관없으니, 이 코델리아에게 쓰고 싶은 말을 쓰라고요.
어쩌면 내가 쓴 편지를 보여주며, 필체를 따라해보라고 해도 좋겠군요.
누가 무엇을 썼는지 같은 것은 절대 들여다보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시고요.
그리고 자정이 올 때까지 서책보관함을 그대로 두세요.
아치,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훔쳐보시면 안돼요.
제가 먼저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씀드릴게요.
절 믿고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초열달 25일날 밤,
여독도 풀지 못한 당신을 보채는 것이 미안한 당신의 코델리아가.
* * *
숨기는 것이 많은 나의 코코.
당신이 원하던 것이 내게 해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그러나 해가 된다해도 이제는 망설이지 않을 걸 당신은 아시겠죠.
네, 당신이 말한대로 해볼게요.
부지런한 수도사 녀석들은 해가 밝기도 전에 일어나니, 일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제일 참기 힘든 것은 자정까지 서책보관함을 들여다보지 말라시는 당신 말을 따르는 일이 되겠군요. 그럼 내일 자정에 봐요, 나의 벗.
7.25.
당신의 착실한 벗 아치.
* * *
안녕하세요.
틸버트 입니다.
* * *
청어조림 먹고싶다
* * *
아무거나 쓰라하시니 아무거나 쓴다.
* * *
코델리아 아가씨, 필경사 베데르입니다. 길게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아치 왕자님께서는 짧게 인삿말만 올리라 명하시네요. 아니, 루이스에게는 아무거나 쓰라 해놓고 왜 저에게는 그러신답니까? 어쨌든 인사 올리고 갑니다. 모쪼록 다음에 안부를 묻는 날까지 건강히 계시길 바랍니다. 그나저나 우리 왕자님이 지금 뭘 하시는 거랍니까? 나날이 미쳐가시니 이 늙은이는 정말 걱정이
* * *
하필 베데르 필경소장님 다음 순서라 힘들었다.
* * *
오직 신실한 주만이 나의 등불되시니
* * *
배고프다. 주여, 고기를 내려주소서.
* * *
배고프다. 필립도 배고프다고 쓴 것 같은데 똑같이 써도 되겠지.
주여 고기만 내려주시지 마시고 빵도 함께 내려주소서.
* * *
노엘 노엘 노엘 노엘
아치 아치 이치 아차
코댈리아 코델리아 코델리야 코델리아
플로리안 플루리안 플로리안 플로리안
* * *
코델리아,
내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랬잖아.
그저 잠자코 있다가 편지가 끊기면 그때 리암에게 가라고.
너는 정말 말을 안듣는구나.
이번에야 말로 내 말 좀 듣고 시키는대로 하렴.
* * *
나의 탐정 아가씨께.
맹세코 난 안봤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원한대로 됐나요?
초열달, 스물 여섯번째 날에서 일곱번째 날로 가는 자정에.
여독보다 당신과의 편지 시간을 기다리는 데에 지친 아치 앨버트 윌리엄.
* * *
네 왕자님, 다 해결 됐어요.
템즈강에 가서 갈기갈기 찢긴 종이를 다 모아왔거든요.
별 내용 아니었어요. 제가 쓴 낙서 같은 거였네요.
아무래도 제가 술김에 뭘 잘못 봤나봐요.
죄송해요.
7.27.
-코델리아 그레이
========== 작품 후기 ==========
세 편을 연달아 읽어주신 독자님들께.
지난번에 아치와 코델리아가 이틀을 편지를 안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이틀만에 왔죠.
이번에는 아치가 사흘을 떠나있었잖아요. 그래서 사흘만에 왔어요. 이쯤되면 아시겠지만 이 글은 제가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받아적고 있다...고 말하고 싶네요. 네, 죄송합니다. 다음 편지, 받아적기가 완성되는 대로 얼른 들고 올게요.
추신1: 듀둠칫님, himmelhalt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ㅠㅠ
추신2: 댓글과 서평, 선작, 추천도 모두 감사합니다. 여덟명의 수도사처럼 독자님들 쪼르르 한 분 씩 줄서서 댓글 쓰고 가시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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