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38화 (38/56)

#38

참을성 없는 나의 벗 코델리아에게

우리에게 서책보관함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내가 서신을 보낸 후 당신께 닿는 날까지 며칠이 걸렸더라면,

아마 당신은 무슨 수를 써서든 내 곁으로 왔겠지요?

어쩌면 수도원에 들어와 플린처럼 남장을 하고는 필경사라도 되려 할 수도 있었겠어요. 그러나, 베데르 그 늙은이가 그래봬도 필경사의 자질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꼼꼼히 판단을 한답니다. 당신 글씨면 아마 나와 함께 깃펜대나 깎아야 할 처지겠지요.

어쩌면 우리 사이는 내가 당신 세계로 가는 쪽이 맞을 거예요. 전 어려서부터 어딜 가도 굶어죽지는 않을 놈이라는 왕자란 위치로서는 듣기 힘들 말을 매우 자주 들어왔으니까요.

지금쯤 쓸데없는 소리만 하냐며 분통을 터뜨리고 계실까요? 하지만 레이디 조세핀의 서신을 모두 읽는다면 당신도 나와 같은 상상을 하게 될 거랍니다. 언젠가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거슬러, 우리가 서로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상상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신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둔채, 일단은 레이디 조세핀께서 보내주신 편지를 보여드려야겠군요.

열매달의 다섯번째 날 밤.

-당신 인내심 줄이 끊어지기 전에 이 서신이 당신 손에 닿기를 바라며, 아치 앨버트.

* * *

에드위나의 딸,

그리고 아델라이드의 아들에게.

아치볼트 왕자님께서는 지금쯤 편지의 서두를 보며 화들짝 놀라고 계시겠지요. 지난 날, 플로리안 공작님이 내게 와 부탁한 것은 에드위나의 딸이 읽기 위한 편지를 써달라는 것이였으니 말이에요.

그러나 왕자님.

찰스 웰즐리 공작을 빼닮은 당신의 눈동자가 나와 플로리안 공작님을 쳐다보던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답니다. 내가 무엇을 쓰든간에 그것을 제일 먼저 읽으실 분은 당신이라는 것을요.

앤과 아델과 내가 신부수업을 함께 하던 어린 시절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그 시절, 찰스 웰즐리 공작님은 아델과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윈저튼 왕국 어디를 보아도 그리 근사하고 우아한 남자는 웰즐리 공작 말고는 보지 못했으니까요.

그 분의 우아한 몸놀림은 춤이나 검술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답니다. 능글맞은 웃음으로 우릴 홀리시고는 한눈 판 틈을 타서 아델의 손수건이며 겨우 완성해낸 자수 작품 따위를 슬쩍 해가시는데에는 특히 빛나는 재능을 선보이셨지요.

“네가 잃어버릴 줄 알고 챙겨두었지.”

그렇게 말하면서 다음날 돌려주면 아델은 모르는 척 고맙다고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웰즐리 공작과 아델은 서로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앤이 그것을 알았을까는 또 다른 문제겠지만요.

앤은 늘 아델이 웰즐리 공작에게만 유해지는 것을 못마땅해하긴 했으나, 그것은 질투라고 하기엔 좀 과격한 감정이었어요. 앤은 늘 웰즐리 공작을 이렇게 불렀지요.

“저 도둑놈의 자식.”

아델과 나는 약혼자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어딨냐고 앤을 나무랐지만, 앤이야 그런 말에 기죽을 위치도,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죠. 저야 아델과 웰즐리 공작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고, 앤처럼 줏대있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그저 웰즐리 공작님의 잘생긴 얼굴에 반했다가, 또 앤과 같이 그를 흉보았다가 할 뿐이었지요.

아치 볼트 왕자님, 당신은 어쩌면 그리 찰스 웰즐리 공작과 아델을 빼닮으셨는지,

플로리안 공작님, 당신은 또 어쩜 그리 앤을 그대로 판박이 해놓은 것 같은지,

두 사람 모두 죽고 없는 지금, 나만 남아 이 편지를 쓰게 되는 것은 또 얼마나 황망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자식을 두고 일찍 죽는 운명에 처하지 않는다 해도 부모들이란 족속은 자신들이 젊었을 때의 이야기를 어지간해선 털어놓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제대로 이야기의 주인을 찾아온 셈이에요. 당신네 둘의 부모의 이야기를 모두 알고, 어느 누구에게든 그것을 털어놓을 날만 기다렸던 내게 왔으니 말입니다.

내가 나의 친구 앤, 그러니까 에드위나 공주님의 시녀로 들어간 것은 열 두살 때의 일입니다.

당시 에드위나 공주님보다 고작 두살 위였던 내가 시녀의 자리에 앉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고, 모두 에드위나 공주님과 나의 특별한 친분 때문에 이루어진 일이었지요. 왕궁 출입이 약속되었으며, 공주님의 옆 자리를 지키며 예법을 몸에 익힐 좋은 기회인데다, 시녀일을 맡은 이상 좋은 혼처마저 예비 된 일, 우리 옐링 가문으로서는 영광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나를 시녀로 정한 일을 두고 그 후로 몇년을 내내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렇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로이틀링엔까지 볼모로 끌려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로이틀링엔 제국으로 가게 되었는지, 그곳에서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얼마나 기묘한 방식으로 이곳에 돌아왔는지는 이미 베데르에게 들어 알고계시리라 생각됩니다.

그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은 참혹한 경험으로 점철되어있어, 가끔은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오니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괴로운 시간 속에도 그럭 저럭 즐거웠던 순간은 존재하는 법이지요. 에드위나 공주님과 기사 아서길런이 처음 만났던 때는 바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내게 부탁한 것을 너무 미안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국에서의 볼모 생활은 윈저튼에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초라하고 궁색했습니다. 윈저튼과는 다른 로이틀링엔의 관습에 적응할 새도 없이, 우린 일단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특히 ‘먹을 것이 주어지지 않는다’ 는 어려움에 몸을 맞추어야 했지요.

그런 상황을 이겨내게 해준 건 내 머릿 속에는 띄워져 있는 싱싱한 물음표였답니다. 바로 로이틀링엔의 제 2황자, 라이너 셀리네 폰 로이틀링엔에 대한 열 여섯 소녀다운 호기심이었지요.

그는 누가 봐도 조금 이상한 사람이었습니다. 허우대만 컸지, 앙상한 몸은 제 나이보다도 한참 어린애처럼 보이게 만들었고 비뚤빼뚤한 걸음걸이는 어딘가 모자란 사람같아 보이게도 만들었습니다.

제국의 황제가 그토록 어여삐 여긴다는 제 어미를 닮아 여자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 얼굴이 주는 인상은 그런 허술함이 잘도 지워내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 더 수상한 것은 그의 거처였습니다.

당시 우리 윈저튼 사람들이 묵던 별궁은 제국의 드넓고 화려한 성 안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후미진 곳에 자리잡아 있었습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북쪽의 감옥같은 곳. 그 바로 옆에 있는 짓다 만 것 같이 이상한 모습을 하고 지붕 위에 다시 지붕을 얹고 창문 하나 없이 꽉 막힌 기괴한 잿빛 별궁, 그곳이 천사처럼 아름다운 제국의 제 2황자, 라이너 폰 로이틀링엔이 사는 곳이었지요.

그렇게도 예쁨을 받으신다는 황비의 아들이 이런 곳에 내몰려 산다는 것도 수상쩍건만, 더 이상한 것은 라이너 황자님이 거의 매일 같이 우리 거처에 놀러오신다는 점이었습니다.

그의 방문은 계기도 알림도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제국에 도착한 바로 그 날부터, 그분은 우리의 감옥같은 거처로 오셔서 방실 방실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에드위나야, 거기 있니?”

도착 할 때 에드위나 공주님과 마주치시기라도 하신 걸까?

혹시나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첫 눈에 반하기라도 했나?

그날 밤, 소녀시절로 돌아가 그런 수다를 떨며 잠에 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실 인형같이 아름다운 황자님의 얼굴을 두고 수다를 떨 던 것은 저였고, 에드위나 공주님은 시큰둥하실 뿐이었죠.

“별 미친 놈을 다 보겠네.”

하고 말 없이 주무셨던 때를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 미친놈의 뜬금없고 맥락도 없는 방문은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되었답니다.

잘못 대답하여 무슨 고초라도 겪을까 두려움에 떨던 것도 하루 이틀이었습니다. 우리 중 기민한 자가 제 2황자가 황제의 미움을 톡톡히도 사고 있다는 것이며, 후계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나 자신만의 궁을 만들어 쳐박혀서는 이상한 실험이나 반복하고 있다는 것 등의 정보를 물고 왔지요.

그렇게 들으니 괴인같이도 느껴지건만, 직접 대하는 그 분은 조금...

...하찮아보였습니다.

황자고 뭐고 이 분은 좀 편하게 대해도 되겠다, 그러니까 좀 무시해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다 들었지 뭐예요. 무슨 짓을 해도 절대 물지 않을 개처럼 순한 구석이 많은 분이셨답니다.

그런데도 이분에 대한 호기심이 지워지지 않던 것은 황자님이 하시는 독특한 행동들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우리에게 다가와 시작한다 소리도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또 그 이야기라는 것이 기가막히게 에드위나 공주님의 취향에 맞는 것들이었어요.

갑자기 와서 에드위나 공주님이 좋아하던 기사 아서길런의 이야기 책을 던져준다던가,

공주님이 즐겨 마시던 차를 가지고 와서 저가 늘 마시던 것인데 마셔보지 않겠냐고 한다던가,

공주님이 제일 좋아하는 백포도를 매일 두어송이씩 가져다 준다든가,

철도 지난 복숭아며, 자두며, 살구를 가져와 너 좋아하는 것 아니냐, 좋아할 것 같이 생겼길래 가져와봤다 하고 툭 던지고 가신다던가,

공주님께서 타시던 흑마와 똑같은 말을 데려와서는 자기는 검은 말이 좋다면서 말을 타는 시늉을 하다 갑자기 떨어진다든가...

모두 저희의 궁핍한 살림에는 그럭저럭 도움이라고 봐도 좋은 것이었지요.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으로서는 자신이 기뻐할만한 것들만 기가 막히게 찾아 오는 것이 신기하실 법도 했고요.

그러나 옆에서 보고 있자면 어쩐지 어색한 기운이 많이도 나는 행동들이었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자면 그것이 다리가 부실한 자의 외줄타기를 보는 것 같을 때도 많았지요.

공주님의 툭툭 내뱉는 말 역시 척척 받아 이야기를 나눌 때면 정말이지 두 사람이 이렇게나 잘 맞을 수가 있을까 싶은데, 어떤 때면 그 이야기가 갑자기 멀찍이 저리로 혼자 내달려버리는 겁니다.

라이너 황자님께서 흥에 겨워 갑자기 마법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던 때가 특히 그랬습니다.

“에드위나야, 너는 정말 이 시간이 빨리 흘러가서 다시 윈저튼으로 돌아가고 싶니?”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그러지 말구우, 편히 말하래두우.”

여느 여자 뺨치는 미색을 지니신 분인데, 그렇게 졸라대는 입술은 아이처럼 유치한 구석이 있었지요. 그러면 또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세상 무뚝뚝한 사내라도 되는 듯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싫어요.”

“그러지 말구, ‘싫어’ 해보아. 그러면 내가 너를 윈저튼으로 가게 해줄 수도 있단다?”

“싫어.”

“윈저튼으로 돌아가는 것이 싫니?”

“네가 ‘싫어’라고 해보라면서?”

에드위나 공주님도 참, 그럴 때는 정말이지 제국의 제 2황자의 심기를 어떻게 거스르든 하나도 무섭지 않은 듯이 으르렁 거리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면 또 라이너 황자님께서는 작은 공주님이 내뱉는 말 하나 하나가 두렵기라도 하다는 듯이 ‘그래, 그래’ 하고 얼른 이야기를 시작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드위나야, 너 속성 마법이라고 들어봤니?”

“내가 바본 줄 알아?”

“그래, 바보가 아니지. 맞아. 너는 엄청 똑똑하다. 그런데 내가 이 이야기를 여러번 하다 보니 자꾸 이렇게 시작하게 되는구나.”

“사족이 길어서 듣기 싫네.”

“잠깐만, 들어보래두우, 에드위나야. 그.. 속성마법에서 보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가 있다는 것 알지? 내가 그것을 잘한다고 너에게 자랑했었니?”

“그거 속성마법사면 누구나 다 하는거잖아?”

“그래, 에드위나야. 그런데 그거, 나는 아주 빨리 할 수 있단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빨리 움직여서 윈저튼에 탈출이라도 시켜주려고? 뒷감당은 누가하고?”

“그게 아니다, 에드위나야. 정말로 빨리 움직여서, 아주 아주 아주 빨리 움직이면, 공간이 뒤틀리고 시간이 멈춘단다. 반대로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느리게 움직이면 공간이 뒤섞여서 시간이 앞으로 가지.”

“그래서 네가 3년을 훌쩍 뛰어넘을 수도 있다는거야?”

“아직 해보지는 않았지만 오늘 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어 오늘 네게 자랑하러 온거란다.”

그렇게 말하시며 라이너 황자님은 또 신난 아이처럼 알아듣지 못할 말을 떠들어대다가 공주님의 면박을 잔뜩 받고 제 방으로 들어가셨지요.

라이너 황자님은 어려서부터 몸이 매우 약해 황제의 예쁨을 받지 못했다는 소문이 윈저튼에 까지 돌고 있었지요. 그러니 한참을 멀쩡히 떠들다가도 금새 콜록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그리 이상해보이진 않았답니다.

그 때문인가 방문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매일같이 오다보니 우린 어느새 그 존재에 익숙해졌습니다. 간혹 안 오시는 날이면 제가 다 심심해지기도 했지요.

에드위나 공주님 역시 라이너 황자님이 안오시는 날이면 문까지 열었다 닫았다 하며 그를 기다리셨는데 그것은 황자님과 친해져서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황자님은 포도며, 복숭아, 자두, 살구 같은 에드위나 공주님이 좋아하는 과일을 들고 오셨거든요. 그렇게 보내던 매일매일이 벌써 100일가까지 지났던 시점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퍽도 굶주리고 있었고 무언가 방책을 내긴 내야했지요.

“너 이런거 말고 감자나 빵 좀 들고와라.”

넌지시 에드위나 공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 때는 가슴이 아프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라이너 황자님께서는 눈치도 없이 그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답하셨지요.

“너 입이 짧아 그런 것 먹지도 않지 않니, 에드위나야. 네가 좋아하는 것은 내가 다 안다.”

그러고는 또 예의 천사같은 미소를 지으시며, 에드위나 공주님께 백포도와 살구가 든 바구니를 떠안기시는 것이였습니다. 그날은 유난히 배가 곪던 날이었습니다. 그만큼 에드위나 공주님의 신경도 날카로워져있었지요. 아직 공주님께서 우리와의 역할 바꿈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때기도 했습니다.

백포도와 살구라, 그런 것으로 배를 채우기는 힘들겠지만 입에 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황자님이 돌아가시면 우리 모두 그것을 나눠 먹을 참이지요. 그런데 황자님은 그날따라 기운이 나시는지, 제 방으로 돌아가시지 않고 기어코 에드위나 공주님이 먹는 것을 보겠다 하시더군요.

“먹어라, 에드위나야.”

“됐어, 나중에 먹을게.”

“아니야, 나는 안다. 너 백포도가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노래를 부르지 않았니?”

가끔 황자님께서는 그렇게 있지도 않았던 일을 진짜로 벌어지기라도 했던 일인냥 지어내 말씀하시곤 하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하여 몇번 에드위나 공주님께 말씀을 드리긴 했으나 공주님은 ‘사람이 몸이 건강치 못하면 정신도 좀 맛이 가나보지’ 하며 그냥 넘기셨지요.

그런 것이, 그날은 왜 그 말을 걸고 넘어지셨나 모르겠습니다. 얼른 황자님을 보내고 우리에게 백포도를 나눠줄 생각에 마음이 퍽도 초조하셨나보지요.

“난 포도 먹고싶다고 노래 부른 적 없어.”

“아니다, 너는 포도를 좋아하잖아. 그 중에서도 백포도를 제일 좋아하구우.”

노래하듯이 뒷 구절을 길게 늘어뜨리며, 라이너 황자님은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벙글이었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에드위나 공주님의 얼굴은 그와 정 반대였지요.

“나중에.”

“나중에 말구우.”

“나중에 먹는다니까? 그리고 감자나 그런 건 없어? 밀빵도 괜찮아. 흑빵도. 그런 걸 좀 가지고 와줘. 요기가 되는 걸로.”

“너, 그런 건 맛도 없어서 잘 안먹지 않니?”

“내가 언제.”

“지난 번에 그랬어. 밀빵이고 흑빵이고 감자고 싫어한다고. 그런 것 말고 백포도나 복숭아, 자두나 살구 같은 과실이 제일 좋다고.”

“그런 적 없는데?”

“먹어봐아. 그러지말구우.”

“나중에 먹을게.”

“나중에 언제 먹으려고, 에드위나야? 지금 막 따온 과실이야. 아주 시원하고 싱싱하단다?”

라이너 황자님의 말투이 점점 어리광 부리는 아이같은 초조함이 섞여갔습니다. 그럴 수록 에드위나 공주님의 태도 역시 차가워졌지요.

‘그래, 그럼 가겠다’ 하고 말했더라면 내일이면 또 황자님을 반길 에드위나 공주님이였건만, 거기서 고집을 꺾고 물러가기엔 라이너 황자님은 너무도 아이같은 구석이 많은 분이셨지요.

“그래, 그럼 물러갈게. 대신 나 그말 해다오.”

“무슨 말.”

“너 그러잖아. 내가 뭐 가지고 오면. 잘했다, 잘했어. 하고. 자, 잘했으니 머리도 쓰다듬어 다오.”

그렇게 말하며 키우는 개라도 되듯 얼굴을 들이미는 그 꼴을 보고있자면, 어떤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피식 웃음을 터뜨릴만 하건만, 우리 공주님께는 그 귀여움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얼른 그를 보내고, 우리에게 백포도를 먹일 생각만 하시고 계셨으니까요.

“치워.”

“해줘라, 에드위나야.”

“치우라고. 치우고 꺼지라고.”

“그러지말구, 그렇게 말하면 내 마음이 아프단다? 그냥 한번만 쓰다듬어 주면 갈게. 잘했다고 해줘, 에드위나야.”

사랑을 조르는데 상대가 내 응답을 들어주지 않고 냉대할 때면 이상한 초조함이 들기 마련이지요. 그만 물러나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스물 스물 고개를 쳐드는 불안에 어찌할 수 없어 자꾸만 조르게 되는 그 심정이, 저에게는 퍽도 가엾게만 여겨졌습니다.

어쩌면 라이너 황자님처럼 저 역시 비슷하게 나약한 사람이라 그럴지도 모릅니다.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처럼 강인하신 분께서는 한심해만 보이는 모습이었겠지요.

공주님은 다시 한번 라이너 황자님께 말했습니다.

“가. 다음에 감자 가지고 오면 해줄게.”

“감자 가지고 올게. 지금 해줘라, 에드위나야.”

“야! 가라고!”

참다 못한 에드위나 공주님께서 소리를 지르신 것은 그때였습니다. 공주님으로서는 화가 날 만한 상황이었어요. 우리에겐 그렇게나 절실한 것을 가지고, 장난치듯 조건이나 거는 라이너 황자님의 모습이 유치하게만 보이셨을테고요.

그러나 라이너 황자님의 입장에선 제가 쏟아붓는 정성에 고맙다 소리 하나를 못해주는 에드위나 공주님이 미우셨을 겁니다. 두분은 자기 고집을 꺾지 않으시고 한참 서로를 노려보고 계셨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물론 라이너 황자님이었지요.

“대체 왜 그러는거야. 지난 번에는 좋아했잖아! 포도가, 포도가 제일 좋다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 나간 라이너 황자님은 말을 꺼내고 나니 억울함이 사무쳐 몰려오는 듯, 다시 에드위나 공주님의 앞으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대로 다 했다. 네가 좋아한다고 말한 것을 다 외웠고, 내가 해주면 네가 웃던 대로 다, 다, 몇번이나 했다. 똑같은 것을 열 일곱번 씩이나! 그게 얼마나 힘든지 너는 아니? 그것이 얼마나 지치는지 알아? 돌아갈 때마다 형님한테 맞는다. 그런데도 매번 돌렸다. 그런데도 나를 안 봐? 그런 데도 머리 하나 못 쓰다듬어 줘? 그것도 모르면서 너는, 너는 내가!”

울컥 해서 그렇게 말을 쏟아내시고는 숨을 몰아쉬면서 주저앉은 라이너 황자님을 보면서 에드위나 공주님은 무언가를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듯한 표정으로 한참 서 계셨습니다.

저 역시 저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싶었지요. 시끄러운 소리에 몇몇 시종들이 문을 열어보았으나, 공주님은 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시고 문을 닫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라이너 황자님을 향해 이렇게 물었지요.

“너 무슨 짓을 한거야?”

========== 작품 후기 ==========

레이디 조세핀의 편지가 다음편에서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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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분량 조절에 실패하는 것에 심심한 사과를 드리며.

여름 끝물에

-독자님들을 사랑하는 유폴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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