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조금 느긋한 데가 있어 늘 저를 팔짝팔짝 뛰게 만드는 아치 왕자님께
설마 지금 가만히 앉아 내 편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건 아니겠죠?
얼른 노엘을 레이디 조세핀에게 보내세요.
필경사 베데르의 가호가 언제나 레이디 조세핀과 함께 하여, 조금 더 많은 수다를 늘어놓으시길.
왕자님의 필담 벗은 에드위나 공주님과 라이너 황자님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 잠을 못잘 지경이랍니다.
라이너 황자님은 어쩌다가 기사 아서길런이 되신 걸까요?
‘기사 아서 길런’ 이라는 건 혹시 둘만의 암호같은 것이었을까요?
나와 당신의 ‘살아있어요’ 처럼 말예요.
추신: 그런데요. 레이디 조세핀께서 에드위나의 딸과 아델라이드의 아들에게만 허락하신 이 편지를 제가 몰래 훔쳐봐도 되나요? 사랑스러운 도둑, 아치 앨버트 왕자님. 전 당신보다 훨씬 높은 도덕기준을 가지고 있거든요.
열매달의 초입에
-오랜만에 당신의 편지만큼이나 재밌는 편지를 읽고 들뜬 코델리아.
* * *
생각보다 의리없는 나의 필담 벗 코델리아 양께.
안녕하세요, 레이디 조세핀보다 재미있는 편지를 쓸 수 없음에 낙담한 당신의 필담 벗, 아치입니다.
거두절미하고 당신이 분부한 바에 대하여 먼저 이야기하죠.
노엘은 이미 레이디 조세핀의 성에 가 있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명하실 줄을 알고, 편지를 받자마자 내가 보내놓았지요. 지금쯤 아마 수도원의 침대와는 비교도 안되게 푹신한 곳에 뛰어들어 레이디 조세핀을 놀래키고 있을 거랍니다.
사실요, 코델리아.
당신께 자세히 설명한 적은 없지만 우리 꼬마 아가씨 노엘은 레테 수도원 모두의 사랑과 집착을 듬뿍 받고 있는 막내 딸같은 존재예요.
베데르 그 양반, 말은 더 크기 전에 노엘을 어디 좋은 집으로 보내야 합네 뭐네 하지만, 행동하는 걸 보고있자면 평생 결혼도 시키지 않을 태세지요.
지난 번에도 마을의 어느 고약한 부인이 노엘을 데려가 허드렛 일을 시키고 아이를 돌보는데 쓰는 것이 어떠냐고 찾아왔는데, 노엘은 귀한 댁에서 맡긴 아이라 그런 일을 하게 할 수 없다며 딱 잘라 거절하더군요.
그뿐입니까.
우리 수도원의 제일가는 먹보 필립이랑 루이스는 그 부인이 가져온 닭고기마저 입에도 안 대고는, 실수인냥 가장하여 양동이로 물까지 끼얹어 쫓아내버렸지 뭡니까?
베데르와 일곱 필경사의 노엘 아끼기가 이 정도이니, 우리 꼬마를 서신 심부름꾼으로 보내달라는 레이디 조세핀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 예상했습니다. 그래도 일단, 한번 말이나 해보자 하고 베데르 그 늙은이에게 찾아갔지요.
그런데 제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어요. 레이디 조세핀이 노엘을 다시 보기를 청한다고 말하자, 베데르는 묘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러고는 틸버트를 불러 열심히 속닥거리는 겁니다. 틸버트는 오로지 베데르만이 알아듣는 손짓 발짓을 해가면서 열심히 자기 의견을 타진하고요.
대체 무슨 작당들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두 수도사의 엄정한 회의를 거쳐 우리 노엘은 난생 처음, 수도원 밖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노엘 혼자 길을 나서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니, 플린이 동행자 노릇을 하기로 하였고요. 그렇게 두 사람이 레이디 조세핀의 성으로 출발한 것이 벌써 이틀 전의 일이랍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아직까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요. 레이디 조세핀의 성은 수도원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편이라, 하루만에도 다녀올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곳에서 성대한 대접이라도 받고 있는 모양이지요.
지금쯤 울상을 짓고 있을 나의 코코,
그래도 당신의 벗은 어떻게든 레이디 조세핀의 서신을 손에 넣었답니다. 사실 내가 한 것은 없고, 이게 다 레이디 조세핀의 배려심 때문이지요. 두 사람을 보내는 대신 다른 사람을 시켜, 서신을 보내주었거든요.
“성질 급한 에드위나의 딸을 위한 편지”
...라고 봉투에 적혀 있는 것을 보면 플린이 재촉이라도 한 모양입니다.플린 만큼이나 성질이 급한 당신께도 잘된 일이지요?
그럼, 이 재미없는 편지는 접으시고, 돌돌 말아 예쁜 리본까지 묶어 보낸, 레이디 조세핀의 서신을 펼쳐주십시오. 지금 막 다 읽은 참인데 당신 말을 부정할 수는 없더군요.
이건 내가 쓴 편지보다 배는 재밌어요. 당신의 리암이 쓴 속편이 재미없다면, 레이디 조세핀의 편지를 묶어 책으로 내는 건 어떠신지 여쭙고 싶을 정도랍니다.
-궁금한 것이 많으나 모두 참고 있는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당신의 그 높은 도덕적 기준은 집어치워요.
서신을 받은 주인인 플로리안이 직접 ‘코델리아에게 꼭 보여줘라’라고 말했다니까요.
* * *
아델라이드의 아들과 함께 이 편지를 보고 있을 에드위나의 딸에게.
지난 번 내 편지가 당신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었다니 다행입니다.
그 다음 일을 궁금해할 줄 알았으면서도, 더 말하지 않은 것은 나이를 먹으며 점점 더 영악해지는 나의 잔꾀라 여겨주세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노엘 그 아이를 다시 볼 일이 소원해질 것 같았답니다.
내 속셈이 잘 들어맞아, 지금 그 애는 푹신한 침대가 풀밭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위에서 팡팡 뛰며 놀고 있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옆방에서 서신을 쓰고 있지요. 당신네들의 관대함에 보답을 하기 위해서요.
그래, 라이너 황자님이 어쩌다 기사 아서길런이 되었는지가 궁금들 하시다고요?
그 이야기를 하려면 일단, 다시 로이틀링엔에서의 그 시절로 돌아가야만 한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라이너 황자의 비밀을 알게 된 후로 우리 윈저튼 사람들의 생활은 한층 더 나아졌어요. 일단은 배를 곯을 일이 없어졌으니 말이지요. 라이너 황자님은 약속하신 대로 매일 같이 감자며 빵이며, 고기까지 열심히도 들고 오셨답니다.
그분은 커다란 키에 작지 않은 덩치를 하고 있어, 그 정도를 혼자 들고 오는 것이 영 무리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듯 허약해보이는 낯빛이나, 온실 속 화초처럼 곱디 고운 얼굴때문인지, 나는 그분이 힘쓰는 일을 하는 것이 아주 어설프고 괴로워만 보였답니다.
반면, 황자님이 열심히 이고 온 것을 받아드는 우리 공주님은 체구는 작아도 몸놀림이 아주 야무져, 라이너 황자님보다는 훨씬 미덥게 느껴졌지요.
공주님이 식재료를 정리하여 아래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때면, 라이너 황자님은 턱을 괴고 앉아 아주 황홀한 광경이라도 보는 듯이 그윽한 눈빛으로 넋을 잃고 공주님의 마법같은 손놀림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무심한 공주님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시선을 깨닫고 소리를 질렀지요.
“안 도와? 뭐하냐, 너?”
“어,어어, 에드위나야. 내가 다 하련다아. 저리가아.”
그제야 급하게 계단을 내려와 공주님을 거드는 라이너 황자님의 모습에 우리 모두 웃음을 지었습니다. 상대는 적국의 황자였어요. 하지만 이렇게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깔깔대고 웃는 데에도 기분 나쁜 기색 하나 없이 말간 미소만 짓는 그분을 대체 누가 미워할 수 있었을까요?
“많이 먹어라, 부족하면 말하구우. 있잖아, 고기는 말야. 그냥 가지고 오기는 힘들어서 내 것을 다 뺴왔단다아? 으응, 괜찮다아, 나는 원래 고기를 좋아하지도 않구우...”
시종들의 옆에 주저앉아 어리광이라도 부리듯 자랑을 하는 그 예쁜 분을 누가 마다할 수 있었겠냐고요.
그렇게 라이너 황자님은 우리 윈저튼 사람들 모두의 친구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이 허술한 식량공급자 친구는 정작 제 먹이는 찾아먹질 못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은 말투는 무뚝뚝해도 자상하게 마음을 쓸 줄을 아는 분이시라, 라이너 황자님의 짧은 입을 퍽도 걱정하셨고요.
“너 왜 안먹는데?”
...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표정을 보면 누구나 공주님이 라이너 황자님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지요. 그러나, 황자님께서는 그렇게 권하여도 한 번에 먹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으응, 나는 되었다.”
“그러지 말고 너도 먹어.”
"에드위나야, 내 걱정은 말아라. 나는 너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단다아?”
그렇게 말하고 베시시 웃으시는 그 분의 고운 얼굴을 보고 있자면 제가 다 사랑에 빠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정작 에드위나 공주님은 황자님은 남자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는 뭐라고 할까, 키우는 개가 밥을 잘 먹지 않아 걱정하는 주인같았다고 할까요?
“너 먹을 거 까지 다 우리한테 주고 쫄쫄 굶는 건 아니지?”
“그럼 또 어떻겠니? 너희만 잘먹으면 되었지이, 무얼.”
“그래도 이리와봐.”
그렇게 말하고 목덜미를 잡으면 라이너 황자님은 쫄랑쫄랑 말 잘듣는 새끼개처럼 에드위나 공주님 곁으로 옵니다.
“으응?”
“감자라도 한 알 먹어봐. 그렇게 먹어서 퍽도 제국을 다스리겠다. 황자란 놈이.”
에드위나 공주님은 그렇게 말하시며 황자님 입에 감자를 쑤셔넣었습니다. 분명히 누가봐도 ‘처넣어’ 주시는 것인데, 라이너 황자님에게는 그것이 살포시 입가에 먹을 것을 넣어주는 사랑의 손길처럼 여겨지시는 것인지, 황자님의 얼굴이 발그레해집니다.
“에드위나야, 감자가 맛있다.”
“그래, 잘 좀 먹어라.”
“그런데에, 너도 참 바보다. 내 어딜 보아 황제감 같니이? 당연히 우리 형님이 황제지이. 형님이 황제가 되면 아마 나는 죽을지도 모른단다아.”
그럼 또 우리 공주님은 답답하다는 듯이 대답하십니다.
“으이구, 넌 대체 왜 그런 취급을 받니?”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에드위나야, 너도 꼴을 보아하니 나와 아주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에... ”
그것은 참으로 슬프고도 딱한 이야기라, 그럴때면 저나 다른 시종들은 아무것도 못들은 채 괜히 딴청을 부립니다. 그 이야기에 웃을 수 있는 것은 당사자인 라이너 황자님과 에드위나 공주님 두분 뿐이니 말이지요.
“그러게 말이다. 너나 나나 버려진 둘째기는 마찬가지구나.”
“그러게. 우리는 운명인가보아아. 그렇지이”
황자님은 그것도 공통점이라며 좋다고 헤벌쭉 웃으십니다. 공주님은 그런 라이너 황자님의 볼을 잡아 늘리뜨리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시고요. 옆에서 보고 있자면 참으로 말 잘 듣는 강아지와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라이너 황자님은 그때만 해도 딱 그 정도 존재였답니다. 졸졸 자길 따라다니니, 어쩔 수 없이 주워다가 밥도 주고 귀여워도 해주는 강아지 말이에요. 물론 밥이야 라이너 황자님이 공주님에게 주시긴 했지만요.
그러나 라이너 황자님에게 우리 공주님은 주인 그 이상이셨습니다.
제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아서의 일이었어요.
그즈음, 라이너 황자님의 발길이 유난히 드문드문해졌습니다. 하루를 오면, 다시 이틀을 오지 못하고, 다시 하루를 오면 사흘은 얼굴을 못보는 나날들이 줄을 이었지요.
오더라도, 정말 형님께 맞기라도 하는 것인지 다리를 절뚝거리기도 하시고, 말씀하시다 콜록콜록 기침을 하거나, 열이 높이 올라 얼굴이 붉어지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앓던 중에도 우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평소보다 훨씬 많은 짐을 가지고 오셔서 챙겨주시곤 했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었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시켜 식량을 전달하기엔 보는 눈이 많은 때였고요.
그러다가 발 길이 끊긴 지 열흘이 넘자, 비축해둔 식량이 동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궁색하기 그지 없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정도를 굶자 라이너 황자님의 건강을 걱정하던 마음이 점차 엷어지더군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릴 그리 살뜰히 챙겨주시던 그분의 안위 같은 것이 아니라, 당장의 배고픔이었어요.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는 황자님을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무슨 수를 쓰긴 써야 했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시녀놀이를 시작했던 것은 바로 그때의 일입니다.
그러니까, 공주님께서는 기꺼이 우리 대신 굶겠다고 해주신 것입니다. 제일 먼저 공주님의 옷을 입고 공주님 대신 식사를 하게 될 사람은 저였어요.
그것은 제가 제일 신분이 높아서도, 몸이 약해서도, 욕심이 많아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우리에게는 부끄러움이나 겸양, 경외심같은 것이 남아있던 터라, 다른 시녀들은 차마 공주 옷을 입고 공주님 노릇을 하는 일에 동참할 수 없던 것이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자기 옷을 벗어 입히려 하나, 까무러치는 어린 시녀를 두어명 보고 나서야, 공주님은 혀를 차며 저에게 자신의 옷을 던져주셨습니다.
“그냥 네가 먼저 해. 네가 하면 다 할거야.”
저야 아무렇지 않게 공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친구 노릇을 하던 세월이 있었으니, 그런 것 따위 문제도 아니었지요.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엔, 공주님이 친히 왕관까지 벗어 저와 아델라이드에게 씌워주곤 하셨는걸요.
그렇게, 저희의 역할 바꾸기가 시작되었던 첫날이었습니다. 로이틀링엔 사람들이 아침 식사를 내어왔고, 저는 며칠 굶어 등가죽에 달라붙은 배를 열심히 채웠지요. 식사를 무르자, 모두가 제 쪽으로 와 빙 둘러 쌓고 이것 저것을 캐물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의심하지 않네?”
“맛있었어? 로이틀링엔 음식은 어떻니?”
“그 베일 좀 나 줘봐, 조세핀.”
그렇게 모두에게 빙 둘러 쌓인 채, 베일을 벗으려 하고 있는데 갑자기 쾅, 소리가 나더니 별궁의 문이 열렸습니다. 베일을 반쯤 벗은 저와, 저를 둘러싸고 있던 시녀들, 시녀 복장을 하고 있던 공주님은 모두 굳어버렸지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허리가 구부정한 노파였습니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꽤 높은 위치의 사용인 인듯 했고요.
적막 속에 벌벌 떨고 앉아있자니, 내 옆의 시녀아이의 쿵쾅거리는 심장 고동소리까지 들리더군요.
그 침묵을 깬 것은, 에드위나 공주님도, 우리 윈저튼 사람 중 그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꼬장꼬장하게 생긴 로이틀링엔의 노파가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답니다.
“다들 거기 그렇게 모여 뭐하니이?”
윈저튼어였어요.
억양도, 말투도 모두 라이너 황자님과 같았고요.
그렇게 우리는 라이너 황자님의 유모, 힐다 할멈과 만나게 되었답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이 글을 쓰는 지금 선작이 11111이 되었어요.
반복되는 숫자를 사랑하는 저를 설레게 해주신 11111명의 독자님들께 사랑을 전합니다.
추신1.선작과 추천, 정성스러운, 흥분하신! 코멘트들 모두 감사합니다! 저는 늘 베데르처럼 혼자 댓글마다 모두 내적 대댓글을 달으며 좋아하고 있습니다..
추신2. 네, 이번에도 분량조절을 못하고 연참으로 돌아왔답니다. 추천을 누르시고 다음 편을 눌러주세요.
<-- -->
연참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