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은혜도 모르는 우리가 아프신 황자님 걱정대신 주린 배나 쥐어싸매고 있을 동안 황자님은 침상에서도 오로지 우리 걱정만 하신 것 같았습니다.
힐다 할멈은 황자님이 우리에게 보낸 천사였지요.
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것인지, 힐다가 온 후로 로이틀링엔 사람들이 가져오는 식사의 양이 많아졌어요.
힐다는 황자님처럼 풍성히는 아니지만 가끔 감자 몇알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가기도 했고, 우리의 역할놀이가 수월할 수 있도록 식사 내내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공주님 시중을 자청하셨지요.
물론 힐다 할멈이 시중을 드는 공주님은 때로는 제가 되었고, 때로는 레미가 되었으며, 때로는 르네가 되었지만 말이에요.
그렇게 궁핍한 살림이지만 굶는 일은 없이 살아가던 우리에게 다시 라이너 황자님이 방문하신 것은 두달여가 지났던 때였습니다. 그간 많이도 아프셨던 모양인지, 소년답게 차올라있던 얼굴살이 쏙 빠져 헬쓱해지셨는데, 그것이 제법 남자다운 선을 드러내더군요. 하지만 칭얼거리는 버릇은 두달 전이나 그때나 여전했답니다.
“에드위나야, 내가 보고싶지는 않았니이? 어찌 한번을 찾아오지 않아?”
마치 처음 오셨던 때처럼 살며시 문을 열고 고개만 빼곰히 내놓고는 ‘에드위나야’ 하고 부르시는 모습을 보고도 반갑지 않은 모양인지 우리 공주님은 목석처럼 조용히 응대하셨지만요.
“그래, 라이너. 나는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몸이라 마음껏 병문안을 갈 수 있지. 근데 그냥 있었어.”
그렇게 비꼬는 것에도 이제 이력이 나신 라이너 황자님은 헤헤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맞아, 그렇지. 너는 여기에만 있어야지. 딱하기도 하지이.”
아마 그때쯤 공주님도 자기도 모르게 라이너 황자님이 그립기라도 하셨던 걸까요? 그날은 괜히 심술이라도 난 듯이 이렇게 시비를 거시더군요.
“너는 말투가 왜 그래?”
“으응?”
“어쩌다 열일곱살 짜리 남자애가 그런 말투가 된거야? ”
“에드위나야, 내 윈저튼어가 이상하니이? 나는 제법 잘한다구 생각했는데에..”
“윈저튼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말투좀 봐. 힐다 할멈이랑 똑같잖아?”
“그야아, 힐다 할멈이 가르쳐줬으니까 그러지. 나 제법 잘 배우지 않았니이? 에드위나야, 나아 있잖아아.”
“너 또 머리 들이대려고 그러지?”
“으응?”
“칭찬해주련, 하고 고개 들이밀고 개처럼 굴려고 그러는거잖아. 저리가. 징그러워.”
은근슬쩍 머리를 들이밀며 쓰다듬어 달라는 시늉을 하는 라이너 황자님을 질색하고 밀어내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모습이 얼마나 재밌었는지는 두분 모두 상상도 못하시겠지요. 공주님이 뭐라시든, 기죽지 않고 계속 가까이 가는 라이너 황자님의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운지요.
“징그럽다니, 너무하구나 에드위나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칭찬해주련?”
“됐다. 저리 가라.”
“으으응, 그러지말구우.”
그러면서 속 없이 웃는 그분은 이제 공주님의 타박에도 익숙해진 상태였답니다. 저는 그게 그렇게 좋아보일 수가 없었어요. 몸도 약하고, 말투도 우습지만, 속은 참 단단한 분이구나 싶었어요.
그래요, 제가 그분의 공주님에 대한 진심을 깨달은 것은 아마 그날이었던 것같습니다. 그분께는 우리 공주님이 뭐라고 해도 제 마음은 천천히 들이 미는 그 마음에는 어쩐지 속 깊은 구석이 있었어요. 게다가 그 말투에 대한 이야기를 더 캐보자니, 정말이지 보통 사랑은 아니지 싶었답니다.
그때만 해도 마법이든 학문이든 용병술이든 뭐든 모든 것이 제국을 중심으로 흘러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 윈저튼에서도 내로라하는 가문의 자식들은 모두, 윈저튼어를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로이틀링엔의 문자를 배우기 시작했고요. 우리 공주님 역시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터라 로이틀링엔 어라면 제국사람 못지 않게 유창히 구사하셨습니다.
그러니 황자님이 처음에 ‘에드위나야, 거기 있니?’ 하고 윈저튼어로 말을 붙이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아마 아무렇지않게 로이틀링엔어로 황자님을 응대했을 터였어요.
네, 맞아요. 그렇게 되었겠지요.
17번의 생이 반복되기 전 우리 생애 첫 날들은 그렇게 흘러갔을 거예요.
라이너 황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한 번은 잘못해서 열 살 때까지 흘러갔단다?”
“그때로 시간을 돌렸단 말이야?”
“그래, 똑똑한 에드위나야. 찰떡같이 알아듣고 예쁘기도 하지! 너 내가 열 살때 얼마나 귀여웠는지 들어보련? 그때 형님이 나를 때리지만 않았어두 내 입이 이렇게 비뚤어..”
“됐고. 하던 말이나 해.”
“아, 그러니까 말이다, 그때 마침 내 침모가 죽고 유모가 새로 올 참이었어. 그래서 난 심술 궂은 여편네들 대신 힐다 할멈을 골랐지. 힐다 할멈은 윈저튼 어를 할 줄 알았거드은.”
“그래서 할멈에게 윈저튼어를 배웠어?”
“그러엄, 내가 너한테는 말 못했지만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아.”
“고생할 걸 뭣하러 배웠는데?”
“그야, 그야아.. 에드위나 네가 윈저튼어도 못하는 바보라구우.. 그런데, 에드위나야, 힐다 할멈의 윈저튼어가 이상하니이?”
이상한 것은 아니었어요. 남부 할머니들이 쓰는 오래된 사투리긴 했지만, 황자님의 발음이며 어법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라이너 황자님의 어여쁜 얼굴이나 미성과 합쳐졌을 때 얼마나 이상한지의 문제였지요. 우리는 얼른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자 황자님은 아이처럼 환히 웃으셨어요.
“나는 머리가 나빠서 윈저튼 어를 배우는 데도 한참이 걸렸어. 그래도 네가 칭찬해주니 기쁘구나.”
그러자, 에드위나 공주님은 키우던 개가 욕을 얻어먹었을 때의 주인처럼 화를 내셨습니다.
“누가 네가 머리 나쁘대?”
“내가 글을 잘 못 읽거드은. 검도 못다루고, 활도 잘 못 쏘는데 글까지 잘 못읽으니 아버지가 나를 미워하시는 것도 당연하지이. 그러니까 책장을 열면 글이 한꺼번에 눈에 박혀 차근 차근 글을 읽을 수가 없단다. 너처럼 노상 책만 보는 아이는 내 말을 이해못하지?”
“너, 그럼 시간이니 마법이니 하는 것은 어떻게 외웠는데? 윈저튼어는?”
“그야, 힐다가 늘 윈저튼어로 말하니 흉내내가며 배웠지이. 마법이야 그냥 대충 뚝딱거리다 보면 알수 있는거 아니겠니?”
우리 모두 입을 딱 벌리고 있었지요. 이걸 모자르다고 해야하는건지, 지나치게 뛰어나다고 해야하는건지.
“너 재수없어 저리가.”
..언제나처럼 그것을 명확히 정의내려주신 것은 에드위나 공주님이셨습니다.
“응?”
“라이너, 잘 들어. 너는 너무 똑똑해. 아무나 시간을 뒤엎고, 공간을 바꾸려들지는 않아. 네가 너무 똑똑해서...그래서 너희 형도 너를 그렇게 떄리는 거야.”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는 똑똑한 사람을 좋아하는데?”
“너희 아버지가 모자란 놈이라 네가 이렇게 똑똑한 걸 못알아보는거지.”
“에드위나 공주님!”
제가 듣는 귀가 없는지 살피며 그렇게 소리를 질러봤자 공주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으셨답니다. 라이너 황자님은 제 아뻐지를 욕하는 소리가 뭐가 그리 좋다고 깔깔 웃으시고요.
“그래, 에드위나야 내가 내가 그리 똑똑하니?”
또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사람처럼 라이너 황자님이 고개를 들이밀면, 에드위나 공주님은 멀찍이 물러나서 말하십니다.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우릴 1700일씩이나 굶긴 걸 생각하니 멍청한 거 같긴 하다. 열일곱번이나 시간을 돌려서 윈저튼어나 배워오는 것만 봐도 그렇고.”
“그러지 말고, 똑똑하다 해줘라. 으응?”
“그래, 이 멍청한 놈아. 너 똑똑하니까 이제 시간 돌리는 짓은 더는 하지마. 너 그럼 대체 몇살을 산거야?”
“몰라아.”
“그렇게 비실거리는 거, 오래 살아 그런 건 아니구?”
“그것도 몰라아.”
대책없는 그 대답에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한숨을 푹 쉬시고 물으십니다.
“라이너, 하나만 묻자. 너 열일곱번 살았던 기억이 다 있어? 처음부터, 여태까지? “
“그으럼, 그러니 네가 백포도를 좋아하는 것두 알구우, 나는 읽기 싫은 기사 아서길런 이야기 책을 보여주니 좋아했던 것도 기억하는 거 아니겠니?”
“그럼, 라이너. 나랑 약속하자.”
“뭐어?”
“난 지금 기억을 잃고싶지 않아. 그러니까 다시는 시간을 돌리지마.”
우리 공주님이 짐짓 진지한 어조로 그렇게 말하자 라이너 황자님은 웃으며 날 가리켰습니다.
“에드위나야, 너랑, 그리고 저애두 아마 다 기억이 날거란다? 내가 시계 돌리는 것을 알게된 사람은, 이 시계를 한번 본 사람들은 모두, 이제 내가 뭘 어떻게 돌려도 그런 의심을 잠깐만 하면 바로 예전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앞으로 라이너 황자님이 시간을 돌리신다면, 에드위나 공주님도, 저도 그 사실을 모두 알게 될것이란 이야기였어요. 저야 그 후로도 한참을 지나 그 말을 이해했지만, 기민한 에드위나 공주님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 말을 곱씹어 본 후, 바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그럼 더더욱 이제는 돌리지마. 나는 그런거 싫어. 두 개의 기억이 날 혼란스럽게 하는 건 싫어. 그냥 그대로 내 인생을 살고싶어.”
“그래, 돌리지않으마. 돌리지 않구두우 내가 너를 구해낼 수 있단다?”
라이너 황자님은 1초의 지체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구제불능의 말썽꾸러기 개라도 맡게 된 사람처럼 다시 혀를 차셨고요.
“날 구하기는. 네 몸이나 챙겨라. 아프지나 마. “
“그래애, 에드위나야. 네가 걱정해주기만 하면 나는 백살도 살련다아?”
“그 짐이나 내려놓고 살아.”
“언제 그 말을 해나 했지이?”
라이너 황자님은 이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며 등에 이고 온 보따리를 두고 가셨습니다. 그 안에는 한 달, 또는 두달을 못 오더라도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많은 알감자가 들어있었고 말입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베데르 다음으로 제가 미워하는 사람: 은근히 말 많은 조세핀 부인..
흑. 독자님들께서는 조세핀 부인을 너무 미워마시고, 다음 편까지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번 편보다 다음편이 재밌습니다.(아닐 수도 있으나, 일단 우겨봅니다. 괜히 세 편 가져왔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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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후기도 읽어주세요
연참(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