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별궁에 갇혀 지내던 저희에게만 한정된 이야기였지만요.
로이틀링엔의 미친 황제가 벌이는 전쟁은 윈저튼 북부를 넘어 발레아, 밑으로는 알다르까지 뻗어나가고 있었고, 윈저튼 남부 지역의 사람들 역시 그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그곳에 갇혀 있던 저희로서는 그런 소식을 알 턱이 없었지요.
전쟁의 여파가 로이틀링엔의 중심부까지는 미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황궁은 연일 이어지는 승전보와 함께 하는 무도회들로 여전히 들떠 있었고, 언제나 분주했으며 호화로웠습니다.
그 속에서 혼자만 궁핍하던 우리 별궁 사람들은 공주님 놀이를 하느라 바빴고요.
매일 아침, 자기 차례를 맞은 시녀는 공주님이 벗어두신 옷을 입고, 베일을 쓰고, 몇 안되는 낡은 윈저튼식 패물을 몸에 걸칩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 계신 공주님이 시녀복 입는 것을 돕습니다.
“내가 하면 돼.”
우리 공주님이야 무엇 하나 남에게 맡기는 법이 없으시지요. 그런 성격이어서, 이 역할놀이도 할 수 있었겠거니 하고 이제 와서 생각합니다. 허나 그때는 우리 모두 공주님을 거들지 않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지요.
“앉아보라니까요?”
나는 오래된 소꿉친구의 특권으로 공주님을 강제로 앉히는데 성공하지요. 이제 우리 시녀들이 모두 정성을 쏟아 공주님의 아름다움을 시녀복 안으로 감춰드릴 차례입니다.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을 숨기려 관자놀이까지 땋아 올리고, 최대한 낡고 허름한 옷을 입혀드리면, 그제야 라이너 황자님이 도착하십니다. 언제나 웃을 작정이 되어있는 입술이 열리면 예의 어눌한 말투가 나오지요.
“에드위나야. 머리를 그렇게 하니 아이같고 귀엽구나.”
“라이너, 네가 더 예뻐.
공주님이 언제나처럼 무심한 어투로 그렇게 답하시면 황자님의 얼굴은 소녀처럼 달아오릅니다.
힐다 할멈은 킬킬대며 다가와, 식사 시중을 드는 시늉을 하고, 시녀 한 애가 앉아 공주님인척 눈가리고 아웅 하며 열심히 밥을 먹습니다.
황자님에, 힐다 할멈에, 별궁 문앞을 지켜주던 틸버트까지 있어도 우리가 역할 놀이를 계속 했던 것은 제국의 사방에 있는 듣는 귀, 일러바치는 입 때문이었습니다. 미친 황제는 언제 황궁에 돌아올 지 몰랐고, 귀환할 때마다 한 두 사람은 죽어나갔으니까요.
별 것도 아닌 일로 심기를 거슬렀다 하여 참수되는 희생자역을 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는 그렇게나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황자님 조차도 먹을 것을 가지고 오실 때면 새끼고양이보다 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몰래 몰래 오셨지요.
그러나 조마조마함 덕분에 우리가 갖는 평화로운 시간들은 더욱 달콤하게만 느껴졌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라이너 황자님은 주인에게 칭얼거리는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이밉니다.
“에드위나야, 내가 가져온 것들이 맛있지 않았니? 얼른 칭찬해다오. 책을 읽어주련?”
거기에다 대고 안 된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공주님 역시 무뚝뚝해보이지만 마음은 제법 다정한 분이시지요. 공주님의 낭송이 시작되면 황자님은 스르륵, 공주님의 어깨에 기댑니다.
삽화라도 훔쳐보려 하는 것인지, 공주님의 작은 어깨에 머리를 걸치고 고개를 갸웃 거릴 때도 있고, 가끔은 그러다 스르르 자세가 무너져 그대로 우리 공주님의 무릎팍을 베고 누워 버릴 때도 있습니다. 기분이 좋으실 때면 공주님도 잠자코 그 앙탈부리는 고양이같은 모습을 그대로 허락해주십니다.
익숙함이 참 무섭지요. 가랑비에 옷 젖 듯, 라이너 황자님은 슬며시 우리 일상에 끼어들었고, 어느새인가 공주님의 무릎은 매일같이 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공주님, 사랑 같은 것은 할 여유도 할 생각도 없다 하시면서도 어찌 그리 몸짓은 살가우신지, 내가 라이너 황자님이라면 정말이지 이런 고문이 따로 없었을 겁니다.
아무리 황자님은 키우는 개이며, 어린 남동생 쯤으로 생각하셨다해도 그렇지, 언젠가는 심지어 입까지 맞췄지 뭡니까? 그래, 이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군요.
우리 공주님이 기사 아서 길런과 기네비어 왕녀의 이야기를 해주셨을 때 일입니다.
“그러니까 에드위나야, 정말 기사 아서 길런이 기네비어 왕비의 성 앞에서 100일을 기다렸니? 먹지도, 자지도 않구우?”
“그래, 건국왕 랜슬롯이 말했거든. 100일을 그 앞에서 꼼짝않고 기다린다면, 왕비를 내주겠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다 있니? 왕비면, 거, 랜슬롯의 아내 아니냐? 아내를 친구에게 주겠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리더냐?”
“기네비어는 랜슬롯 왕과 결혼해 왕비가 되기 전부터 기사 아서길런을 알았거든. 두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어. 기사 아서 길런의 첫사랑은 기네비어였고, 기네비어 역시 아서 길런을 사랑했지. 랜슬롯은 그것을 알면서도 기네비어를 탐냈어. 친구의 연인에게 왕의 이름을 결코 청혼해서, 기어코 자기 아내로 만들어버렸지.”
“그거참 고약하구나. 아니, 에드위나야, 내가 네 선조를 욕하고 싶지는 않다만 거 참 망할 놈이다.”
“괜찮아, 라이너. 난 네 아빠도 욕하는데. 랜슬롯 왕은 네 아버지같은 놈이었던 거지.”
누가 들을세라 제가 문틈을 확인해보는 사이 두 사람은 얼굴을 맞대고 씩 공모자의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웃음이 잦아들자, 라이너 황자님께서 다시 이야기를 재촉하셨지요.
“그래, 에드위나야. 그런데 그 망할 네 선조는 그렇게 얻은 아내를 왜 또 친구에게 주겠다고 했다니?”
“강제한 결혼이니 부부 사이의 신의가 있을 턱이 없었지. 기네비어는 아내의 역할에 충실했지만 랜슬롯은 기네비어가 아직도 아서 길런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까바 언제나 노심초사였어. 승전보가 울리는 날이면 윈저튼의 아를리 궁에서는 언제나처럼 연회가 벌어졌지. 그런 때 기사 아서길런과 기네비어가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그날 기네비어는 죽도록 얻어맞았어. 하얀 얼굴에는 멍이 가실 날이 없었지.”
“그건, 그건...정말 우리 아버지 같은 짓이구나.”
“그래, 그렇게 불안과 질투에 떨면서도 랜슬롯에게는 기사 아서 길런을 내치고 벌 줄 배짱은 없었어. 누가 뭐래도 아홉 부족이 다스리던 연맹을 토벌해 하나의 왕국으로 만든 일등 공신은 아서였으니 말야. 그러니 언제나 흉흉한 질투만 마음에 품다가 술에 취한 어느날 밤 아무렇지 않은 척 넌지시 친구에게 물은 거야. ‘자네, 아직도 기네비어 왕비를 사랑하는가?’ 하고. “
“추잡하구나. 그래, 그래서 기사 아서 길런은 뭐라고 했느냐?”
“이 바보 멍청이 같은 개국 공신께서는 또 거짓말은 절대 못하는 작자였어. 아서는 ‘아니, 사랑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지 뭐야. 북쪽의 야만인들을 소탕하고 피를 뒤집어 쓴 채로 거하게 취한 랜슬롯은 잔뜩 흥분한 상태로 말했지. ‘내 아내를 너에게 주랴?’”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니?”
“라이너 네가 가져온 그 아서 길런 이야기에 나오는 대로 그렇게 된 거지. 랜슬롯은 말했어. 100일을 꼼짝도 하지 않고 왕비의 성 앞에서 기다리라고. 그렇게 한다면 기네비어를 가져도 좋다고.”
“기네비어 왕비도 동의한 이야기느냐아!”
라이너 황자님이 흥분해서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어지러우신지 잠시 휘청이셨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웃으며 그런 라이너 황자님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는 큰 강아지를 쓰다듬 듯이 부스스 머리를 흐뜨리셨죠.
“아니, 너희 남자놈들이 그렇지. 순 자기 맘대로야.”
그들의 이야기를 생각하자 갑자기 분통이 터진 듯, 라이너 황자님 머리를 쥔 에드위나 공주님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아, 아프다 에드위나야. 내 너에게 그러지는 않으마. 이야기나 계속 해주려언?”
“아, 미안. 그래, 기네비어의 동의도 없이 기사 아서 길런과 랜슬롯은 그렇게 자기 둘만의 내기를 시작했어. 아서 길런은 기네비어 왕비의 성 앞에서 꼼짝도 않고 기다렸다고 해.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나.”
“그게 말이 되니이?”
“말이 안 되지. 이건 그냥 전설일 뿐이니까. 사실은 물도 먹고 밥도 먹었겠지. 하지만 잠을 잘 때든 식사를 할 때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지킨 것만은 사실일거야.”
“그것만 해도 사람이 죽겠구나.”
“그래, 100일을 그렇게 서 있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힘든 일이긴 했을 거야. 90일이 지났을 때, 아서 길런은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했대.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물만 흘릴 뿐, 정말로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실 수 없었어. 앉은 채, 발코니에 나와있는 기네비어를 바라보고 우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
“미련한 놈같으니이...”
“그래, 하지만 그 미련한 놈은 그래도 랜슬롯 왕보단 훨씬 나은 사람이었어. 99일이 지났을 때, 단 하루를 남겨두고 떠나버렸거든.”
“대체 왜?”
“글쎄. 설이 분분하지. 그대로 100일을 기다렸다가 기네비어를 얻게 되면, 랜슬롯 왕의 분노를 살 수는 없었기에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다면 애초에 떠났을 리가 없잖니이? 처음부터 100일을 기다리지도 않았겠지.”
“그래, 그래서 나는 다른 설을 믿어. 미련한 기사 아서길런이 99일이 지나서야 겨우, 그렇게 100일을 기다린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도 되는 듯, 왕비를 얻어봤자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떠났다는 이야기 말야.”
“그것 참 늦은 깨달음이구나.”
“그래도 깨닫지 못한 것보다는 낫지. 아마 기네비어 왕비도 그렇게 생각한 것 같고.”
“그건 또 무슨 이야기니?”
“왕비는 말야, 99일을 기다리다 자신의 곁을 떠난 기사 아서 길런을 쫓아 길을 떠났어.”
“랜슬롯 왕을 떠났다니 그것참 잘된 일이구나. 두 사람은 필시 다시 만났겠지?”
“모르지. 우리가 아는 건 두 사람 모두 숲으로 사라져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야. 그 후로 멀지 않아 랜슬롯 왕은 너희 아버지처럼 돌아버렸고, 결국 제 아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런 소릴 윈저튼 사람 앞에서 했다가는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걸, 라이너 셀리네 폰 로이틀링엔?”
“방금 전에 로이틀링엔의 황제를 욕한 사람은 또 누구였더냐, 에드위나 윈저튼아.”
이제는 좀 공주님에게 익숙해지셔서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 라이너 황자님을 보고 공주님이 웃으셨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어쨌든 멍청한 놈과 덜 멍청한 놈의 대결은 그렇게 윈저튼 초대 왕조에 든 망조로 끝나버렸다는 이야기야. ”
“그런데 에드위나야, 어쩌면 아서 길런은 처음부터 99일만 기다리려 했을 수도 있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야?”
“아서 길런은 정의롭고 용맹하며, 우는 아이 하나의 목숨을 구하려 몇백 시간을 달려왔던 기사 아니었더냐.”
“그래, 윈저튼 사람들은 모두 기사 아서길런을 좋아하지.”
“그가 정말 100일을 기다렸다가 기네비어 왕비를 받으려 했겠니? 그는 알았을 것이다. 기네비어 왕비가 랜슬롯 왕의 옆에서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알았을 것이며, 왕성이 그녀에게 감옥같은 곳이란 것도 알았을 것이다.”
평소처럼 말을 늘일 새도 없이 열심히 자기 생각을 설파하는 라이너 황자님의 조곤조곤한 말투에 무심했던 에드위나 공주님의 초록눈이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그럼 100일을 기다렸다가 왕비를 꺼내오면 되잖아. 왜 99일을 기다리다가 떠나?”
“글쎄다. 나라면, 내가 아서 길런이었더라면 100일을 기다리고 기네비어를 얻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는구나아. 99일을 기다렸다가 떠나겠지. 나를 따라오길, 나를 따라온다는 명분으로 이곳을 떠나기를, 그렇게 왕을 떠나는 왕비를 모두가 이해할 빌미를 마련해주며, 멀리서 왕비를 지켜보았을 것이다아.”
“지켜보기는 왜 지켜봐.”
“그러니까 그게 여자 혼자 길을 나서면 위험하기도 하구우...”
“이 응큼한 놈아. 위험은 무슨.그냥 좋으니까 지켜보겠지. 여하튼 넌 믿을 수 없는 로이틀링엔 놈이라니까. “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우리 공주님, 그 이야기가 퍽도 마음에 들었는지 목소리는 전에 없이 다정합니다.
“그래, 응큼하다. 하지만 그런 것이 사랑아니겠느냐. 혼자 떠날 기회를 주려고 애쓰다가도, 또... 혼자는 못 두겠어서 멀리서 몰래 지켜라도 보는 것 말이다.”
“쪼그만한게 뭘 안다고 사랑을 말하니?”
“너보다 두배는 크단다, 에드위나야아.”
두 사람의 티격 태격 하는 것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공주님께서 귀엽다는 듯이 라이너 황자님의 볼을 잡아당기더니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이제 제법 남자다운 선을 드러내는 턱에다가 입을 맞춥니다.
“..뭐, 뭐하는 거니이?”
“그냥. 라이너 폰 로이틀링엔, 네 해석이 제법 마음에 들어서 말이지.”
그건 연인들 사이의 입맞춤이라기보다, 무릎 아래에서 발라당, 배를 까 보이는 작은 고양이에게 해주는 것 같은 살가운 몸짓입니다.
그러나 라이너 황자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누구든 그 사람을 조금은 더 골리고 싶어지지요. 우리 공주님, 이번에는 황자님의 이마에, 그리고 볼에 쪽쪽 입을 맞춥니다.
그런데 당황해서 기절이라도 할 줄 알았던 라이너 황자님은 어린 신부처럼 가련한 모습으로 조신히 제 뺨을 에드위나 공주님께 바치고만 있더군요.
에드위나 공주님의 웃음기 띤 눈빛에 노기가 어린 것은 그때였습니다.
뽀뽀세례를 중단한 공주님이 묻습니다.
“라이너.”
“으으응?”
“너 떨지도 않는구나?”
“으응? 왜 그러니이?”
“야, 이 미친놈아.”
그러고는 에드위나 공주님께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지르십니다. 그런데 라이너 황자님은 당황도 않고 그저 야단맞는 어린 아이같은 표정으로 공주님을 올려다볼 뿐입니다.
“이 바보 같은 놈, 이딴 걸 또 돌리고 또 돌리는 법이 어딨어?”
그제야 저는 깨닫습니다. 황자님께서 방금 그 키스를 받고 또 받으려, 1분전으로, 다시 1분 전으로 돌리고 또 돌렸다는 것을요.
이 둔감한 조세핀이 느끼지 못했던 것을 에드위나 공주님은 눈치 빠르게도 바로 아셨다는 것도요. 전에 라이너 황자님이 말씀하셨듯이, 시간이 이렇게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돌려진 시간을 파악하고 반복된 시간 속의 모든 기억을 가져갈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니이, 그게 나도 모르게에.”
“한심한 놈, 그런걸 너도 모르게 하는 법은 어딨어?”
“그러니까아, 이게에 그게 나도 모르게 너무 좋아서 그마안.”
라이너 황자님이 그렇게 통하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 사이에 내 머릿속으로 한 번, 두 번, 세 번 반복되던 입맞춤의 기억들이 돌아옵니다. 정말로 저도 모르게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입맞춤은 끝나자마자 다시 돌아갔다가, 이번엔 기사 아서길런의 이야기 전으로도 돌아가고,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때로도 돌아갑니다. 급작스레 밀려오는 기억들에 머리가 어질어질 하는 것을 참고 저는 른 에드위나 공주님을 말립니다.
“공주님, 뭐 어때요. 행복한 시간인데요, 완벽한 하루였잖아요. 세 번 정도 반복하면 또 어때요.”
“다시는 돌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이 바보같은 놈아.”
공주님은 제 말은 듣지도 않고 라이너 황자님을 향해 으르렁 대십니다. 황자님은 공주님이 어딜 후갈겨 때리기라도 할 듯이 얼른 팔을 들어 제 머리를 막습니다. 많이 맞아본 자만 취하곤 하는 그 모습은 어딘가 불쌍한 데가 있어, 공주님의 화는 곧 누그러듭니다.
“때, 때릴 꺼니이?”
“누가 때린대?”
“괜찮다, 때려라, 때려어.”
“…내가 언제 너 때리는 것 봤어?”
“괜찮단다, 에드위나야. 나는 아주 잘 맞아. 맞는 것도 기술이 있단다아..”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라이너 황자님에게로 공주님이 걸어가십니다. 그리고 머리를 막고 있는 자세와는 달리 이제 제법 남자다워진 그 긴 팔을 에드위나 공주님의 작은 손이 거칠게 붙잡습니다.
“바보야, 내가 널 때릴 일은 없으니까 팔 풀어.”
“정마알?”
“라이너, 내가 칭찬을 해 줘서기분이 좋았던 건 이해해. 하지만 그딴 칭찬은 시간을 돌리지 않아도 또 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런 짓에 재능을 낭비하지 좀 마.”
“치, 칭찬..? 네가 언제 칭찬을 해주었니. 응큼하다 타박했으면서.”
“네 해석이 마음에 든다고도 말했잖아. 그정도면 엄청난 칭찬이지.”
“으응, 그런데 에드위나야, 나는 칭찬이 아니라 네 입맞춤이 좋았단다. 그것도 또 해주려언?”
“입맞춤은 무슨 입맞춤이야. 그런건 다시는 안해. 그러니까 돌리지마.”
결국 라이너 황자님은 결국 그 말로 꿀밤 세례를 받고 울상이 됩니다.
“방금 때리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니이?”
시끌벅적한 소리에 몰려온 시종 시녀들을 위해 공주님은 결국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도합 네 번은 들었을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듣는데도 지겹지도 않으신지, 라이너 황자님은 여전히 귀를 기울여 열심히 이야기를 듣고는 제일 마지막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에드위나야, 기네비어 왕비는 기사 아서 길런과 만났겠느냐아?”
“모르지. 네 생각은 어때, 라이너?”
“글쎄다. 아까 말했듯이 내가 기사 아서길런이라면 멀리 떠나는 척, 기네비어 왕비를 지켜봤을 테니, 왕비가 출발하자마자 짠 하고 나타났을 거란다. 그리고...”
“그리고?”
“랜슬롯이 우리 아버지같은 사람이었더라면 사람을 붙여 왕비를 추적했다가 두 사람이 만나는 순간 둘 모두를 죽여버렸겠지.”
“아서 길런이 100일 째 밤까지 얌전히 왕비의 성 앞에서 기다렸다면 랜슬롯은 정말로 잠자코 기네비어 왕비를 그에게 주었을까?”
“글쎄, 그것도 우리 아버지였더라면 하고 생각해보니 말이다.왕비를 죽여 목이라도 잘라 아서 길런에게 주었겠다 싶구나아.”
그리 끔찍한 이야기를 하고나서도 라이너 황자님은 천사처럼 방긋 방긋 거리십니다. 그러니 우리 공주님으로서는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넌 아버지 무서운 줄 알고 얌전히 살아. 쓸데 없는 일 벌이지 말고. 알았어?”
“그래애, 알았다아. 난 네 말만 다 들으련다아. 네 말대로 모두 하마.”
“말을 듣기는. 돌리지 말라고 한 말도 안 듣는 주제에. 하긴 넌 100일은 커녕 열흘도 안 기다리고 시간을 앞당길 놈이지. 이 징그럽게 무서운 놈아.”
“에드위나야. 세상에 무서운 놈을 그렇게 구박하는 법은 또 어디에 있다든?”
그렇게 실컷 구박하시면서도 우리 공주님, 무르팍에 고개를 들이밀고 누워버리는 라이너 황자님을 내치지는 않으셨답니다. 다만 다정한 손짓으로 황자님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실 뿐이셨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었답니다. 공주님에게 역시 그날은 세 번을 반복해도 좋았을, 완벽한 하루였음이 틀림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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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살아있어요?
…뻔뻔스럽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다고요?
하나도 안 기다렸다고요?
까먹고 계셨다고요?
그래도 사랑합니다...
연휴가 끝나버린 월요일이 완벽한 날일리는 없겠지만,
하루의 끝에 찾아온 에드위나와 라이너가 독자님들의 일상에 쌓인 피로를 조금이라도 씻어주길 바라며.
추신: 그동안 후원 쿠폰 주신 재겸님, 치이이즈님, 초코벽돌님, 솔그루님, Sen98님, jinsol6765 님 모두 감사합니다.
추신2: 선작, 코멘트, 추천 주신 분들, 기다려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려요. 기다림에 보답하려 연참을 들고 왔으니 다음편을 눌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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