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라이너 황자님이 에드위나 공주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이야기를 듣는 시간, 그 시간은 어느덧 두 분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우리 윈저튼에서 온 식솔들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야기에 푹 빠져 있을 때면 우리가 가족도 만날 수 없고, 언제 돌아갈 지도 알지 모르는 머나먼 타국에서 배를 곯고 있다는 사실 마저 잊어버릴 수 있었지요.
그런 현실을 살아갔기에 우리는 슬픈 이야기보다는 행복한 결말을 듣고 싶어했는데,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마음도 우리와 같았던 것 같습니다.
공주님은 언제나 책에 나와 있는 장엄하고 슬픈 이야기들을 한 두 마디 덧붙여 손색없는 행복한 결말로 끝내곤 하셨지요. 그런 공주님의 개작 솜씨를 아는 것은 공주님과 한 방을 쓰며 서책을 공유하던 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공주님이 바꿔놓은 이야기 중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외발 기사와 종이 무용수 아가씨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날에 한 나라의 왕자가 50개의 기사를 목각으로 깎은 인형을 선물 받았어.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나무가 부족해 그만 다리가 하나 없지 뭐냐? 라이너, 너 듣고 있어?”
“그래 듣고 있단다, 에드위나야. 네 목소리가 듣기 좋구나.”
“눈은 왜 감고 있어? 자는 줄 알았잖아.”
“눈까지 뜨고 있으면 내 아름다움이 눈에 부셔 에드위나 네가 큰 일이라도 날까봐 그랬단다. 내 푸른 눈이 오죽 아름답니?”
전 그렇게 너스레를 떠는 때의 라이너 황자님이 좋았습니다. 그러다가도 바로,
“그래, 네가 아름답기는 하지.”
그렇게 수긍하며 우리 공주님이 그 보드라운 볼을 잡아당기면 금새 또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도요.
“에드위나야, 흠, 어, 그러니까 계속 읽어봐라아. 으응? 기사가 어떻게 되었다구우?”
“왜 일어나고 그래? 놀랬잖아.”
“미안하다아. 계속 이야기해보련.”
“그래. 외발 기사는 밤마다 일어나 절뚝절뚝 외발로 땅을 짚고 다녔어. 그러다 어느 날 한 발을 들고 춤을 추는 종이로 만든 무용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되었지. 다리 한쪽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저와 같이 외다리라고 착각한 거야.”
“저런.”
“종이 인형 아가씨는 자신이 춤을 추고 있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어. 그럼 외다리 기사가 실망할 것 같았거든. 아가씨는 외다리 기사가 저 혼자만 외다리라 외롭다 느끼는 걸 원하지 않았어. 그래서 매일같이 한쪽 다리를 높이, 더 높이 들어 올리고 빙그르르 아름답게 춤을 추었지.”
“마음씨 깊은 아가씨로구나.”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한쪽 다리가 없는 채로 서로의 손을 잡고 매일 밤 춤을 추었어. 그러다 어느 날 외다리 기사는 사랑을 고백해.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이제 그만 거짓말했으면 좋겠어. 나를 위해 다리를 숨기는 일은 그만둬. 나는 당신의 두 다리를 사랑해.’ 무용수 아가씨의 뺨은 붉게 달아올랐어. 이제 두 다리로 선 무용수 아가씨는 기사의 입술에 키스해.”
“귀여운 이야기로구나. 그래, 그렇게 두 사람은 행복하게 살았느냐?”
“그렇게 끝나면 좋았겠지. 하지만 이 이야기는 좀 슬퍼. 장난감들의 주인인 왕자님이 와서 종이 인형 아가씨를 찢어놓거든. 이제 무용수 아가씨의 몸에 걸려있던 작은 보석은 너덜너덜해졌고, 아가씨는 정말로 한쪽 다리가 없어지고 말지. 아가씨는 낙담해. 두 다리가 있는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기사가 이제 더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봐서.”
“그럴 턱이 있니?”
“그래, 기사의 사랑은 그렇게 변하지 않아. 기사는 울면서 종이 인형 아가씨는 찢어진 다리를 모아 기워주려 하지. 너덜너덜해진 보석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이어 붙여주려고 하고. 그런데 그때 언제나 둘을 고깝게만 보던 어릿광대 인형이 두 사람을 벽난로로 밀어 넣는단다?”
“세상에 그렇게 나쁜 놈이 있나! 에드위나야, 빨리 말해다오.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니?”
“두 사람은 벽난로에 가서 활활 불탔어. 목각 인형인 기사도, 종이 인형인 무용수 아가씨도 그대로 재가 되었지.”
그렇게 말하고 에드위나 공주님은 이야기책을 덮습니다. 이제 무르팍에서 일어나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이야기를 듣던 라이너 황자님은 어린아이라도 된 듯 흐느끼십니다.
“에드위나야, 대체 왜 이렇게 슬픈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니이?”
“또 좋은 이야기를 해줬다간 네가 다시 듣겠다고 시간을 돌릴 지도 모르니 이제 슬픈 이야기만 해주려고.”
“그런...! 너는 나쁘다, 너는 참말로 나쁜 아이로구나아!”
그렇게 말하고 라이너 황자님은 또 투명한 눈물을 한참 쏟아내십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엽고 또 귀엽던지, 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얼른 말을 보탭니다.
“하지만 공주님, 그 다음 이야기가 있잖아요? 두 사람이 살아났죠. 그렇죠? 모든 이야기책은 다 행복하게 끝나잖아요? 네?”
내가 공주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렇게 말하면 우리 공주님은 나를 향해 눈을 흘기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십니다.
“그래, 라이너.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만 좀 울어, 이 울보야.”
“다음 이야기? 둘이 다시 살아나는구나! 다시 해보렴.”
사실 다음 이야기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까만 재가 되어 타버린 두 인형의 비극일 뿐인걸요.
그러나 언제나처럼 에드위나 공주님은 순발력 좋게도 이야기를 이어내십니다.
“라이너, 내가 그랬지? 그 종이 인형의 가슴에 작은 보석장식이 붙어있었다고.”
“그래 그래, 그랬지이.”
“그런데, 목각 기사의 검도 사실은 주석으로 만든 것이었어. 난로 속에서 두 사람은 불타 없어졌지만, 금으로 만든 보석 장식과, 주석으로 만든 기사의 검은 그대로 남았지. 그리고, 그것들은 불에 녹아, 한데 합쳐져 작은 심장 모양이 되었단다. 자, 이것 좀 봐. 이게 바로 외다리 기사와 종이 무용수 아가씨가 남긴 심장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에드위나 공주님이 내민 것은 윈저튼의 시녀들이 가슴에 걸고 있는 심장 모양의 싸구려 주석 목걸이입니다.
“이게 그것이라고? 네가 어떻게 이걸 가지고 있니?”
“그야... 이 이야기에 나온 왕자님은 윈저튼 사람이었으니까...? 누군가 난로에서 발견한 주석 조각 꺼내어 왕자님에게 다시 바쳤지. 그리고…. 음…. 그건 대대로 윈저튼에 보물처럼 내려왔고…. 그러니 윈저튼의 공주인 내가 이걸 가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그렇지, 조세핀?”
머리는 좋으시지만 거짓말에는 영 서투신 우리 공주님이 더듬 더듬 그런 말을 하실 때 라이너 황자님이 우리를 쭉 둘러보십니다.
감자를 떨구었다고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야단 맞을 때의 맹한 눈이 아니라, 시간이며 공간이며 하는 말을 늘어놓을 때의 총명한 눈동자가 우리 시녀들에게로 향하지요.
눈치 없는 레미가 멍하니 있다가 다급히 제 목에 걸린 심장 모양 목걸이를 감추려 듭니다.
손짓은 서툴었고, 그래서 더 눈길이 갔겠지요. 라이너 황자님도 분명 그것을 보셨던 것 같은데, 황자님은 말없이 씩 웃더니 공주님에게로 시선을 돌리십니다.
“그럼 에드위나야, 그것 나 다오.”
“이거?”
“그래에. 기사와 아가씨의 심장 말이다. 그것 나 주련?”
공주님이 오늘의 공주로 당첨되었던 나를 향해 슬쩍 곁눈질을 하십니다. 저는 얼른 고개를 끄덕입니다. 나의 목걸이가 그분에게 간다면, 자의 작고 소심한 동경인지 짝사랑인지 모를 감정도 조금이나마 이루어지는 셈이니까요.
공주님은 그렇게 내 허락을 받고 나서야 목걸이를 빼내어 황자님께 주십니다.
“그래, 네가 기사와 아가씨를 가졌어. 그러니까 울지마. 뭔 책을 못 읽겠다. 라이너 로이틀링엔. 한 나라의 황자란 애가 그렇게 울음이 많아서야 되겠니?”
“그 이야기가 너랑 내 얘기같아서 그랬단다? 그러니까아..”
“왜, 내 처지가 다리 잘린 종이인형 같아서? 동정을 할 거면 감자나 더 가져와라.”
우리 공주님이 발길질 하는 시늉을 하며 거칠게 타박하시자, 라이너 황자님은 가끔만 보여주는 그 어른스러운 미소를 보여주십니다.
“그럴리가 있니, 에드위나야? 네가 목각 기사란다? 이렇게 발길질도 잘 하구우, 너는 아마 칼도 잘 들 거다. 50명의 목각 기사들과 같이 온 외발 목각기사가 너란다.”
“우린 51명인데?”
“그러니? 얘야, 조세핀아, 너를 빼자구나, 네가 어릿광대 역을 해라.”
“네? 싫어요, 황자님. 왜 제가 악역이에요?”
서운한 마음에 제가 그렇게 불경한 반박을 시도하면 황자님은 허허 웃으며 말하십니다.
“그러게다. 조세핀아. 악역을 시켜도 순해게 할 너이니 맘 편히 맡기나. 부디 우리를 불구덩이로 밀지는 말아다오. 으응?”
나는 얼른 가서 공주님과 황자님을 동시에 밀어버리는 시늉을 합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외다리 기사라도 되듯, 멋지게 황자님을 끌어안으시고요. 그것이 뭐라고 라이너 황자님의 얼굴은 다시 붉어집니다. 한 쪽 손으로는 떼를 써서 받은 주석으로 만든 녹슨 심장을 소중히 쥔 채 말입니다.
그 날 이후로도 아주 오랫동안 라이너 황자님은 언제나 놓으면 사라질 새랴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려 한쪽 손으로 잡고 다니셨지요.
어느 날엔가는 레미가 황자님께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황자님 기분 상하지 않으셨어요? 그 목걸이는, 그러니까 그거는….”
“너도 가지고 있고 저기 르네도 마리아도 소피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냐? 그래서 뭐 어떻다는 말이니이?”
“그러니까, 공주님이…. 거짓말을 하셨잖아요. 그게 윈저튼에 대대로 공주한테만 내려오는 것이라고.”
“얼마나 좋으냐, 레미야. 에드위나가 나를 위해 이야기도 만들어주구우. 얘야, 에드위나가 나를 위해 거짓말까지 하며 심장을 선물해 주었단다. 그럼 이 이야기는 내게는 진짜가 된 거란다.”
라이너 황자님은 그렇게 말하고 진심으로 흡족하신 듯 웃으셨습니다.
네,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당신 아버지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아이처럼 무구한 눈동자로 슬픈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시는 분,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 모습을 찾아 어른스럽게 슬퍼하시는 분,
공주님의 거짓말이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에 마냥 기뻐하시는 분,
격 없이 우리 시녀들과 둘러앉아 감자나 깎으며, 우리들 이름 하나 하나를 불러주시던 분 말입니다.
아, 당신네들은 아실까요? 그분과 함께 보냈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한없어 슬퍼지는 내 마음은, 행복 만에 푹 적셔있던 시간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때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 * *
아치 왕자님,
거기 있어요?
있다면 빨리 좀 대답해보세요.
당신의 빗, 코델리아.
* * *
나의 벗 코델리아
아마 당신, 침대에 한가롭게 누워 레이디 조세핀의 두툼한 편지들을 한 번에 다 읽어내릴 욕심에 차 있었겠죠?
그러다 세 번째 장에서 급하게 책상으로 달려오셨고요.
어찌나 마음이 급하셨는지, 나의 벗이 아니라 ‘빗’이 되셨군요.
열매달의 다섯 번째 날 밤,
-당신의 충직한 ‘벗’…
...아니면, 뭐 ‘빗’ 도 괜찮은 아치 앨버트 윌리엄.
추신: 당신이 부르실 줄 알고 책상 앞에 앉아 기다렸답니다.
* * *
시끄러워요, 아치.
지금 열매달 어쩌고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요.
정확히 ‘세 번째 장’에서 내가 끊고 올 것을 알았다 하시니 당신도 그 부분보고 놀라긴 하신거지요?
레이디 조세핀이 내 이름을 불렀어요!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라고 말했다고요!
마치 내가 에드위나 공주님의 딸이라도 되는 것 처럼, 이 편지가 처음부터 당신이나 플린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쓰인 것처럼 말예요!
아치, 제발 설명해봐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날짜 같은 걸 적을 겨를이 없는 코델리아 올림.
* * *
오늘따라 느낌표를 커다랗게도 찍은 나의 벗, 코코!
그래요, 나도 보았어요.
그걸 읽다 놀란 당신을 진정시켜 주려고 지금 여기, 책상 앞에 앉아있잖아요.
그런데요, 코코. 당신이 아직 레이디 조세핀의 편지를 쥐고 있다면, 그 다음 이야기가 아주 많이 남은 것도 알고 있겠지요?
일단 읽어봐요. 남은 편지들을 모두 읽고 와서 어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고요. 나도 당신께 물을 말들이 무척이나 많답니다.
-당신의 속독 능력을 믿고 있는 아치 앨버트!
* * *
가끔 소리 없이 사라지는 얄미운 아치 앨버트 윌리엄씨.
알았어요.
당신이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당신 말을 믿어볼게요.
그러니 책상 앞에서 기다려야 해요.
다 읽고 돌아왔을 때 당신이 없다면 당신의 코코는 몹시 쓸쓸할 거니까요.
-성질 급한 당신의 벗, 코델리아 그레이.
추신: 미처 찍지 못한 느낌표 수만개를 첨부합니다.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느낌표까지는 바라지도 않습니다. 온점 하나 정도는 찍어주시고 다음편으로 건너가주세요. 저는 조용히 찍어주시는 온점과 온점 사이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추신: 외다리 기사와 종이 인형 무용수 아가씨의 이야기는 안데르센이 수집한 덴마크 설화를 조금 개작하였습니다. 원내용은 ‘꿋꿋한 외다리 병정’ 으로 검색하여 확인해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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