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지금에 와서 생각건대, 우리가 그 시절을 그리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에드위나 공주님 덕분인 것도 같습니다. 공주님은 늘 활기찼지요.
제일 먼저 일어나 공주옷을 입을 시녀들을 두드려 깨웠고, 불안에 떠는 아이가 있으면 다독여주었으며, 때로는 굶주린 시종 애를 불러다가 자기 옷을 손수 입혀 주기도 하셨습니다.
하얀 시녀복을 앞치마 두르듯 아무렇게나 걸치시고는, 감자 한 알이라도 주워 보겠다며 별궁 바로 앞에 있는 창고에 가서 생쥐처럼 기웃거리기도 했고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건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우리 공주님이 감자를 줍다 말고 걸려 감옥에까지 가게 된 사연은 베데르에게 이미 들으신 줄로 압니다.
소식을 알리러 뛰어온 것은 새파랗게 질린 틸버트였습니다.
언제나 유창한 로이틀링엔어로 끊임없는 수다를 떨던 그가 그렇게 더듬거리는 것은 그날 처음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에드위나 공주가, 어, 감자를, 아 하필 감자를 거기서, 그게 감옥이, 아 이 일을 어째!”
가뜩이나 로이틀링엔어가 서툰 레미가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틸버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나를 불렀습니다.
겨우 틸버트가 내뱉어내는 낱말들을 조합하여 ‘에드위나 공주님이 감자를 줍다 걸려 감옥에 끌려갔다’는 문장을 만들어냈을 쯤엔 시종 하나가 달려와 윈저튼에서 보낸 알피어스 경이 막 도착했다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모든 것이 하필 그 날에 한꺼번에 일어나다니, 신은 우리 곁에 계시지 않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내겐 그런 것을 탓하고 있을 새가 없었지요.
“벗어, 레미.”
공주님이 없었기에, 내가 공주님처럼 지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애들보다는 그래도 내가 제일 나이가 많았고, 오늘 공주가 된 레미는 정말이지 벌벌 떨고 있었으니까요.
“벗으래도! 네가 이대로 불러가면 우린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야.”
레미는 떨리는 손으로 겨우, 로브를 풀고, 베일을 벗으려고 허둥지둥하였습니다.
그 애가 벗어던진 로브를 내가 입으려고 하던 때였지요.
별궁 문이 열렸습니다.
로이틀링엔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레미의 앞에 섰지요.
“불러오라는 분부시다.”
로이틀링엔어라면 겨우 인삿말 정도만 하는 레미는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한 채 떨리는 오른 손을 반대쪽 손으로 꽉 붙잡고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병사와 레미 사이에 섰습니다.
“공주님께서는 지금 옷을 갈아입으려 하는 중이었다. 물러가라.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정신이 번쩍 드는 통증이 뺨에 몰려왔습니다. 불덩이라도 올려놓은 듯 온 얼굴이 아파왔지요. 로이틀링엔 사람이 사정없이 제 얼굴을 처내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만 주춤, 주저앉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몇 초가 지났을 때였습니다.
레미가 벌벌 떨며 윈저튼어로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내가..내가..갈게요.. 가겠다. 괜찮다. 지금 가겠다.”
레미는 우리 중 가장 어렸고, 제일 소심하고 말없던 애였습니다.
감자 창고에 지나가는 생쥐만 보아도 혼절할만큼 겁많던 그 아이가 그리 용기를 내는 모습에 저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로이틀링엔의 병사 하나가 그 작은 목소리를 보며 비웃듯이 낄낄대고 ‘로이틀링엔어로 말해’ 라고 했어요. 나는 얼른 레미의 곁에 가서 작게 로이틀링엔어를 중얼거려주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모두 아시겠지요.
알피어스 경은 곧 바로 레미가 공주님이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베일을 벗겨내고는 공주님 대신 다른 아이가 공주 노릇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화낼 정도의 배포가 그분께 계신 건 다행인 일이었으나, 그 후에 벌어질 일을 예상치 못하신 그분의 경솔함에는 지금까지도 화가 삭혀지지 않습니다.
한참이 지난 후, 윈저튼에 돌아간 우리가 아를리 궁에서 그와 마주쳤을 때, 그자가 뻐기듯이 자신 때문에 목숨을 구제한 것을 알기나 하느냐고 떠벌리던 꼴을 생각하면 더더욱이요.
아직도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지요.
알피어스 경이 에드위나 공주님을 살렸다고요.
하지만 우리에게 벌어진 일은 그렇게 동화 같지만은 않았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황제는 잔뜩 붉으락푸르락 해가 진 얼굴로 직접 별궁 문을 열고 왔습니다. 그 옆에는 당연히 알피어스 경이 있었고요. 그들은 우리 시녀들을 모두 불러다놓고 그중 어디에도 에드위나 공주님이 없다는 걸 직접 확인했지요.
“그럼 우리 공주님은 대체 어디 계시단 말이냐!”
알피어스 경은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노하여 황제에게 대들었습니다. 미친 황제는 광기를 숨기고 평온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여기 있는 것이 전부냐?”
“네?”
“여기 너희의 전부가 모였냐는 말이다.”
“폐하, 오전에 시녀 가 감자 한알을 주우려다 감옥에 붙잡힌 일이 있습니다.”
로이틀링엔의 병사 하나가 급히 끼어들어 그렇게 말했습니다. 황제는 그것을 뒤늦게 말한 책임을 불어 그 자리에서 그 병사의 목을 베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공주님이 감옥에서 불러 나오셨습니다. 우리와 꼭 같은 시녀복장을 한 채, 피비린내 나는 별궁으로요.
알피어스 경은 공주님을 함부로 대한 것을 좌시하지 않겠다며 길길이 날뛰어 제 성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황제는 관대한 미소를 얼굴에서 지우지 않으며 답했지요.
“내, 너희 윈저튼 것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을 사과한다.”
우리 모두는 입술을 꾹 깨물었습니다.
미친 황제를 황궁 끄트머리에 있는 이 누추한 곳까지 발길을 하게 한 일,
저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받아낸 일,
그 모든 일에 대한 대가는 모두 우리가 짊어지게 될 것을 알았으니까요.
알피어스 경은 그날 밤 깨지도 않고 푹 잠들었을 겁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해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윈저튼으로 돌아가 우리의 근황을 전달하는 것 뿐이었고,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윈저튼에서 이 상황을 안다고 해서 달리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알피어스 경이 돌아간 그 날, 시녀 레미가 즉결 처분을 받고 별궁 안에서 참수당했습니다. 감히 공주 흉내를 내어 제국의 황제를 능멸했다는 죄였지요.
윈저튼 왕국으로도 그 소식은 전달되었을 겁니다. 왕궁 사람들은 시녀 하나가 윈저튼의 공주 노릇을 하다가 죽은 것 따위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겠지만, 우리 모두는 많이도 울었습니다.
너희 중 누가 또 이 일을 알았느냐는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목숨을 지키고 있었기에, 그 눈물은 자괴감과 수치심이 섞인 맛이었지요.
황제의 보복은 그것으로 끝나진 않았습니다. 황제가 들어닥치던 때에, 마침 별궁에 와 있던 틸버트는 변명을 하다 말고 말이 길다는 이유로 황제의 칼에 혀가 잘렸습니다. 별궁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책과 식량, 허락되지 않은 물건을 가지고 있던 윈저튼의 시종, 시녀들 5명이 레미의 뒤를 이어 목이 잘렸고, 12명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힐다 할멈이 어떻게 되었는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의 횡포를 막으려다 아랫것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발길질을 당하던 라이너 황자님은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가신 후에 한달이 넘게 별궁으로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살아돌아온 이들은 치유술사는 커녕 지혈할 깨끗한 수건 하나 구하기 힘든 환경에서 시름 시름 앓다 한달에 한 명 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해가 가기 전에 51명 중 도합 26명이 죽었습니다. 단촐해진 식구들이었건만 지나친 감시로 먹을 것을 구해내기가 더 힘들어졌고, 살아남을 길은 더더욱 요원해졌습니다.
다행히 서책보관함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황자님이 오셔도 될 때를 살펴, 열심히 쪽지를 넣었습니다. 종이마저 귀해 책 귀퉁이를 찢어 작게 한 마디 정도를 썼습니다. 포도, 감자, 빵, 고기 같은 낱말 대신 긴급, 아픔, 진통제, 술, 깨끗한 수건, 붕대 같은 낱말들이 서책 보관함 안에 늘어났습니다.
황자님 역시 바쁜 분이고,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란 것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분이 조금이라도 늦게 답을 주시면 그것이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태연한 것은 언제나 우리 공주님 뿐이었습니다.
“두어라. 조세핀. 내일쯤 올거니까.”
“안오면요? 이제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마리아가 내일 밤을 넘길 수가 있을 지 모르겠어요.”
“올 거라니까. 라이너가 내일 아침 올거야.”
그러면 다음날 아침은 정말 마법처럼 라이너 황자님이 오십니다. 전보다도 더 비척비척해진 걸음과 힘없는 미소를 띠고요.
이번에야말로 정말 목숨과 지위를 다 내어두고 우리에게 오신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 모두는 열심히 그 사실을 외면한 채 속도 좋게 그분이 가져다준 식량을 탐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두 분은 저까지 떼어두고 방에 들어가 밀어를 나누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사랑의 속삭임 따위는 아니란 걸 알 수 있었습니다. 방에서는 가끔 에드위나 공주님의 노성이 들려오기도 했고, 나지막하여 잘 들리지 않는 라이너 황자님의 목소리 역시 달콤한 연애의 빛을 띠고 계시진 않았으니까요.
이야기의 끝에 방에서 나온 라이너 황자님은 가끔 많이 운 사람처럼 새빨개진 눈을 하고 나오셨습니다.
“무슨 말씀들을 나누셨어요? 라이너 황자님 얼굴이 운 사람 같던걸요.”
“그냥. 이야기.”
“무슨 이야기요?”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
그렇게 말하고 에드위나 공주님은 창도 없는 벽을 하릴없이 바라본 채 혼자 눈자위를 꾹꾹 눌러대시기만 했습니다.
한 시종은 공주님이 두통이 있으신가 보다고 저에게 귀엣말을 하더군요. 시녀 하나는 그게 아니라고, 공주님이 아주 아주 슬픈 이야기를 라이너 황자님께 읽어드렸고, 그래서 황자님은 울고 가시고, 공주님은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피로해지신 거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알고 있었지요.
눈을 꾹꾹 누르는 버릇, 그건 나의 어린 시절 벗, 앤 에드위나가 눈물을 꾹 눌러 담을 때마다 하던 일이라는 것을요.
그 일이 있고 다시 5년이 지났습니다.
그때까지도 미친 황제는 아직도 죽지 않았으며, 제국 전쟁 역시 계속 되었습니다.
윈저튼이 두 번째 전쟁을 포기하는 대신 북쪽 영지를 그대로 로이틀링엔에게 내주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영지가 윈저튼에서 로이틀링엔으로 넘어가기 직전, 남쪽으로 넘어오려고 했던 영지민들을 막으려 선왕 알프레드 폐하가 막대한 돈을 들여, 긴 벽을 쌓고 있다는 소식도요.
알프레드 폐하에 대한 성토가 곳곳에서 이어졌습니다. 귀족 회의에서 여덟 땅의 영주가 모여 선왕 알프레드 폐하를 내치고 다른 왕을 추대하려고 한다는 사실이 제 귀에까지 들어왔을 때쯤엔 이미, 왕좌가 찰스 웰즐리에게도 넘어갔던 때였겠지요.
찰스 웰즐리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아치 왕자님, 그대는 지금쯤 그런 적이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계시겠지요?
전쟁은 3년 만에 종식되었으며, 미친 황제는 제 큰아들의 손에 죽었다고. 다시 평화로워진 윈저튼에서 에드위나 공주가 기사 아서길런을 찾으러 사라진 후, 선왕 폐하께서는 아델라이드 여왕 폐하를 양녀로 삼아 왕위를 계승하셨으며, 당신 아버지 찰스 웰즐리는 엘링턴 영지를 다스리는 여왕의 남편으로만 남아있었을 뿐이라고요.
네, 맞습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도 분명 언젠가는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갖고 내 편지를 읽어주세요.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오라비가 나를 아이 잃고 광증에 걸린 여인이라 부른다 해도, 나 역시 슬픔에 허덕이던 내가 에드위나를 만났는지 아닌지를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이것만은 당신들께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대한 내 기억들은 아직도 미치도록 생생합니다. 잊으면 안 된다, 헷갈려서도 안 될 일이다 몇 번을 복기하고 또 복기했던 일들이니까요.
나의 세상에서, 1291년, 찰스 웰즐리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아델라이드와 정식으로 혼인하였고, 그들 사이에 있던 딸아이 하나가 윈저튼 왕국에 새 공주 아이로 왕관수여식을 치뤘다는 소식이 별궁까지 전달되어왔습니다.
선왕 알프레드 폐하는 왕국을 내어주고 거처를 옮겼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데도 에드위나 공주님께서는 별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 정을 붙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지 뭐야.”
“공주님!”
“뭘 또 공주님이야. 이제 공주가 아닌 거 아니니, 조세핀? 그냥 여기에서나 꺼내주었으면 좋겠다. 찰스가 양심이 있으면 옛 약혼녀를 위해 먹을 거라도 좀 넉넉히 보내주던가.”
농담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에 우린 또 속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옛 약혼자가 가장 친한 친구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은 일,
일국의 공주이기에 볼모로 붙잡혀 왔건만, 그 사이 아버지가 폐위되어 갈 길을 잃은 일,
그런 것들을 걱정하기엔 당장 내일의 끼니가 더 급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아델라이드가 로이틀링엔을 방문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약속한 볼모기간은 이미 끝난지 오래였으나, 전쟁이 계속되었기에 제국에서는 기간을 늘려가며 우리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로이틀링엔의 입장에서는 폐위된 왕의 딸과, 그 식솔인 우리는 처치곤란의 존재였겠지요. 그냥 돌려버릴 수도, 죽여버릴 수도 없기에, 어영부영 데리고 있는 존재들, 그런 지워진 존재로 몇 년을 더 제국에서 버텨온 우리에게 아델라이드의 방문은 마지막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그 희망의 불씨를 더 활활 타게 한 것은 그녀가 데려온 귀여운 딸 아이, 세실리아 였답니다.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우린 딱딱하게 굳어 의논 중이었습니다.
“세실리아 공주님? 그 아이가 공주님이면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은 뭐라고 불러야해?”
“그러니까. 그냥 에드위나 공주님을 잠깐 재워둘까? 공주님은 잠 하나는 아주 푹 주무시잖아.”
아직 시녀들에게 그런 유머가 남아있다는 것이 기뻐 웃고 있던 때, 아델라이드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렸지요. 별궁 문을 빵 차고 들어온 것은 아델라이드가 아니라 세실리아 공주님이었지만요.
고작 네 살짜리 아이가 어찌나 당찼던지.
그 소리에 나오신 에드위나 공주님은 그만 바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적막한 가운데 그분의 낭랑한 웃음소리만 들렸지요.
딸 아이의 손에 끌려오는 양처럼 눈을 축 늘어뜨린 아델라이드는 차마 우리 공주님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더군요.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마음이 참으로 여렸지요. 자신이 에드위나의 자리를, 사랑을, 행복을 모두 빼앗았다는 것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도 바로 그것을 눈치채셨을 겁니다. 그보다 먼저,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이 아델라이드의 선택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음도 아셨을 테고요.
“친구 남자를 빼앗아 결혼했으면 콧대 높은 얼굴을 할 줄 알아야지, 왜 그러고 있어.”
“앤!”
저도 모르게 공주님을 그렇게 부르며 주의를 시켰지만, 공주님은 제 손을 적당히 뿌리치고는 세실과 아델에게로 걸어가더군요.
“너는 가만히 있어. 조세핀. 아델라이드, 얘가 너와 찰스 웰즐리의 딸이니?”
“으응.”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너희를 왕과 왕비라 불러주길 바란 건 아니지?”
아델라이드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습니다. 옆에서 어린 세실리아 공주님이 에드위나 공주님의 무릎을 톡톡 쳤습니다.
“내가 몇 살이냐 물어보지 않느냐?”
에드위나 공주님이 그것을 묻기도 전에 그 어린 공주님께서는 당당하게 손가락 네 개를 펼치고 계셨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피식 웃었습니다.
“이렇게 귀여운 것을 낳았으니, 널 욕하지도 못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방긋 웃는 우리 공주님 앞에 아델라이드가 주저앉았습니다.
“미안해, 미안해, 나는...”
“이러지마, 아델.”
그때였습니다. 세실리아 공주님이 다시 에드위나 공주님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지요.
“나는 귀엽지 않다. 말을 번복하여라. 나는 네 살이다.”
두 친구의 감동적인 재회에 저마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건만, 저는 그만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세실리아 공주님의 귀여운 볼때기를 꼬집었지요.
“요 꼬마 아가씨야, 네가 아무리 근엄한 표정을 지어봤자 지금은 귀엽기만 한 나이야.”
“무엄하구나.”
세실이 그렇게 말하자 에드위나 공주님이 아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작게 속삭였습니다.
“있잖아, 아델. 이상해. 얘 너 말고 나를 닮았어.”
“음.. 어, 일이 그렇게 될 수는 없지, 앤... 찰스와 네가 약혼하긴 했지만, 음...어, 일단 내가 배 아파서 낳았으니까…?”
“뭘 그렇게 놀래, 바보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당황한 아델의 더듬거림에 에드위나 공주님이 활짝 지은 웃음으로 답했습니다. 우리 셋은 다 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오랜 친구를 만나는 자리는 그렇게 쉽게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아델은 찰스 웰즐리가 발레아, 알다르와 함께 황제의 광기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조금만 참으라 했고, 전쟁이 끝나기 전에 먼저, 에드위나 공주를 빼내어 올 방책을 구해보겠다 약조했습니다.
순한 성정 탓에 아델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전부터 많았지만, 아델이야말로 왕위에 참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지요.
늘 사람들을 배려했고, 남에게 상처 주는 것을 두려워했고, 어떤 일에든 마음을 다했으니까요. 그런 아델의 말이니 우리는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작은 희망의 불씨를 활활 타 올라 하늘까지 닿을 커다란 불로 만들고는 아델이 마지막 인사를 할 때쯤이었습니다.
시녀들에게 로이틀링엔에서의 삶을 묻느라 정신이 없는 오만방자한 표정의 세실리아 공주님이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나와 같은 공주라는 이야기를 들었노라. 오늘은 반가웠다.”
어디서 그런 말투를 익힌 것인지 벌써부터 의젓한 자세로 어설픈 궁중예법을 구사하는 세실의 모습에 우리 모두 부들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습니다. 우리와 달리 에드위나 공주님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세실의 인사를 맞받아쳤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지요.
“세실리아 공주님, 그냥 우리 친구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그대가 퍽 마음에 들거든요.”
세실리아 공주님은 커다란 눈을 한번 굴리더니, 에드위나 공주님을 한참 노려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세로는 우리 공주님도 누구에게 질 분이 아니었지요. 한참 눈싸움을 하다가 세실리아 공주님이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만 들어다오.”
“벌써부터 조건을 내걸다니, 얘 정말 왕의 재목이네. 그래, 뭘 들어줄까?”
“잠시 놀아다오.”
그 얼굴이 어찌나 귀엽던지, 이번엔 에드위나 공주님 역시 웃음을 열심히 참고 있는 눈치셨습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웃음을 참던 공주님은 입을 열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세실리아. 잠깐 놀아줄게. 이리 와봐.”
에드위나 공주님이 그렇게 아이를 잘 다루시는 줄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조그만 몸집으로 네 살인데도 훌쩍 큰 세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저 쪽으로 가서는 국정이라도 의논할 듯 근엄한 얼굴로 열심히 소곤 소곤 비밀 이야기를 나눕니다.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니 쓸데 없이 잔정이 많은 우리 공주님, 아무래도 세실 공주님에게 패물 하나 정도는 빼앗기신 것 같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진짜 동갑내기 친구라도 된 듯 놀다 지쳐버린 것은, 당연히 우리 에드위나 공주님이셨습니다. 그맘때쯤, 하루에 한 끼니를 먹으면 다행인때였으니 말이에요. 기진맥진한 우리 공주님은, 세실리아 공주님을 보시고 졌다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세실, 너 말야. 왕이 되어야겠어.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네 아버지가 죽으면 네가 왕이 되렴. 밑으로 아들을 더 낳아도, 공주가 또 생겨도 네가 왕이 되겠다고 해. 넌 딱 왕이 될 눈을 하고 있어.”
“알았다. 내 네 말대로 하겠다.”
어린 세실리아 공주님께서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지요.
아델은 가기 직전에 다시 한번 에드위나 공주님을, 그리고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십 대 시절을 함께 했던 우리가 이렇게 서로 다른 운명에 처한 채 이십 대를 맞이하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요. 그제야 내 눈에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언제나처럼 물기 하나 없이 메마른 눈으로 말했습니다.
“또 울면 나 정말 너네랑 친구 안한다?”
그렇게 웃으며 우리의 만남은 끝났습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들어 알았던 우리들은 그때부터는 그저 아델라이드와 찰스 웰즐리가 우리를 빼내어줄 날만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별궁엔 전보다 웃음이 많아졌고 앓는 소리가 작아졌지요.
전쟁이 정말 끝날 모양인지, 황궁에서는 언젠가부터 더는 무도회 따위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황궁엔 전에 없이 음산하고 불안한 기운이 가득했고, 라이너 황자님 역시 두어 달이 넘게 두문불출했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는 연기를 마시다 말고 깼습니다. 일찍 일어난 시종이 지붕위로 올라가자, 저 멀리, 황궁의 서쪽이 불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별궁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고 비척비척, 비뚠 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 라이너 황자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빵도, 고기도, 감자 알이 든 보따리도, 들고 있지 않은 채, 휘청이고 있는 라이너 황자님의 손목엔 세 줄이 엉켜서 하나가 된 묘한 모양의 팔찌가 두 개 걸려 있었습니다.
“에드위나야. 내일이다. 내일 다시 해보자꾸나.”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여기까지 읽었는데 재미없었다 하면 다음 편 부터 재밌어집니다(!!)
쉬는 동안 좀 약장사 스타일이 되었네요.
...원래부터 그랬던 것 같고요....
약 판 김에 추천 구걸도 하고 다음 편 예고도 해보겠습니다.
내일 뭘 하자는 것인지가 궁금하시다면 추천과 다음편을 눌러주세요!
추신: 연참을 따라와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사랑합니다...
<-- -->
(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