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47화 (47/56)

#47

눈을 뜨자 사방이 캄캄했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곧 아침이 올 것임을 알고 마음을 진정하며 주위를 돌아보았습니다. 곧 동이 틀 시간인지 하늘은 서서히 어두운 파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손이 겨우 닿는 저만치에 공주님의 붉은 머리가 보였습니다. 나는 불경스럽게 공주님의 옷 자락을 당겨 흔들며 공주님을 깨웠습니다. 공주님은 눈을 꿈뻑 꿈뻑하며 깨시더니, 곧 또렷해진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며 손가락을 하나 씩 굽혔습니다.

하나, 둘, 셋, 넷...

공주님의 입모양이 작게 움직였습니다. 네, 그런 상황에서도 에드위나 공주님은 무리의 수장답게 모두가 다 왔는가부터 확인하려 숫자를 세셨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다시

하나, 둘, 셋, 넷...

공주님의 손가락이 떨려왔습니다.

열개가 모두 굽혀졌다가 다시 펴지고, 또 굽혀졌다가 다시 펴졌습니다.

아무리 우리 공주님이 만전을 기하는 성격이라 해도, 몇 번이나 반복해 세고 계시는 것이 이상하다 싶었을 쯤입니다.

내 옆에서 불쑥 누군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습니다.

“아…”

혀 짤린 틸버트였습니다. 그가 나를 밀어뜨리다가 말고 우리와 함께 윈저튼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뜨악스럽던 것도 잠시, 나는 그것이 무척 반가웠습니다. 거기 있었다가는 그가 과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안심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님이 자꾸 숫자를 반복해서 세고 계신 거는 틸버트 때문에 헷갈려서 그러신 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어서, 에드위나 공주님께 이 사실을 알려드려야겠다 하고 수풀을 헤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지요.부스럭 거리는 풀 소리에 의식이 들었는지 수그린 채 쓰러져 있던 시녀애 하나가 깨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 애 얼굴을 확인하고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애는 레미였습니다. 네, 공주님 흉내를 내었다며 5년 전 미친 황제의 명 아래 별궁에서 참수되어 죽은 그 레미 말입니다.

으스름한 푸른색이 걷어지고 하늘이 말개져왔습니다. 동쪽에서 비쳐오는 노르스름한 기운이 레미의 말짱한 얼굴에 닿았습니다.

수채화로 그린 듯 흐릿한 인상, 조그마한 이목구비, 그애는 분명 내가 알던 그애가 맞았습니다.

소리 내어 무어라 따질 새도 없이 쿵쾅 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사이에, 쓰러져 있던 자들이 하나 둘 고개를 들었습니다.

2년 전, 작게 난 상처를 치료하지 못해 그만 다리가 썩어 죽었던 시종 딜런이 내 옆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미친 황제의 분노를 사 감옥에 갇혔다 돌아오지 못했던 알비오르도, 궁정에서 일한 게 언제부터인지도 기억이 안나는데 남부 사투리를 고치지 못해 꼭 우리 라이너 황자님처럼 말하던 시종 레니에도, 레미와 함께 참수 당해 죽은 에밀리아도...

이미 죽은 모든 자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별궁 안에서, 원 안에 들어온 것은 틸버트까지 하여 27명이었건만, 숲에 도착한 우리는 다시 마흔 두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제야 나는 손을 벌벌 떨며 반복하여 숫자를 세고 있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숨이 턱턱 막혀와 호흡마저 가빠왔습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정신이 든 것은 틸버트에게 엎혀 레테 수도원 앞에 도착했을 때 쯤이었습니다. 베데르가 맨 발로 달려와 우릴 반겼습니다. 그분의 손에 끌려 간 수도원 앞 예배당에는 매년 같이 필경사들이 직접 만들어 벽을 장식해놓는 윈저튼 력이 붙어있었습니다.

나는 우리가 5년을 거슬러 올라온 것을 알았습니다.

라이너 황자님이 주신 팔찌는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까지 거슬러 우리를 옮겨 온 것입니다.

라이너 황자님이 그것을 예상했을까요?

우리가 5년이나 되돌아갈 것임을,

수많은 사람들이 산채로 윈저튼에 도착할 것임을,

우릴 보낸 후 5년을 거슬러 올라가 혼자서 모든 것을 다시 견뎌야 함을,

라이너 황자님은 모두 알았을까요?

네, 분명 그랬겠지요.

알고도 벌이신 일일 겁니다.

그렇다면, 지난 5년간의 기억은 라이너 황자님의 기억에도 남아있을까요?

우리와 함께 한 고난의 세월, 마지막 눈물의 인사들까지, 모두요?

아마 그렇겠지요. 돌리신 분이 황자님이시니, 그 기억이 황자님께 또렷이 남아있음은 당연한 일일겝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우리를 본, 라이너 황자님이 무슨 일을 벌이는 지를 똑똑히 지켜보았던 미친 황제의 머릿 속에도 남아있을 것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그 모든 기억을 끌어안고, 무슨 일을 저지를까요?

시간을 돌리고 공간을 옮겨놓은 제 둘째 아들의 솜씨에 감탄할 까요?

혹시 망한 전쟁을 다시 하려 들지는 않을까요?

그 생각을 하자 갑자기 몸이 덜덜 떨렸습니다. 내가 그렇게 무서움에 어쩔 줄 몰라하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에드위나 공주님은 신속히 라이너 황자님이 시킨대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종이를 가져와, 짧은 서신을 썼습니다.

“나를 이리도 빨리 보내주어 고맙다.”

종이를 쓰는 에드위나 공주님의 손 역시 부들 부들 떨렸으나,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분노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평소보다 훨씬 일그러진 글씨체를 보며, ‘빌어먹을, 빌어먹을 라이너’ 라고 중얼거리는 공주님의 입술을 보며 나는 알았지요. 이것은 라이너 황자님이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 공주님께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일 거라고요.

며칠 후, 서신이 로이틀링엔에 도착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누가 받았느냐?”

“로이틀링엔의 사자가 받았습니다.”

“황제를 보았느냐?”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제 2황자의 소식을 들었느냐?”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로이틀링엔에 전갈을 보내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되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더 묻지 않으셨습니다. 베데르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습니다. 여기로 보낸 이가 혹시 너희를 도왔다는 그 황자님이냐고요.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더 말했다가는 혹시라도 누가 될 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한번, 두번, 세번, 네 번 끄덕이는 동안에 눈물이 났습니다.

고마워서, 미안해서, 걱정되어서, 그럼에도 이렇게 모두가 살아난 것이 기뻐서, 이것에 기뻐한다는 것이 다시 미안해서... ...

그 눈물은 레미가 죽었을 때와 같이 많은 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후의 삶은 정신 없이 흘러갔습니다.

전의 삶과 이번의 삶이 뒤엉켜 내 머릿 속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나는 많이도 헛소리를 내뱉곤 했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야 말로 제일 복잡한 삶을 살고 있을 터인데, 공주님은 침착하게 나와, 몇몇 이동한 자들의 입단속을 시켰습니다. 신기하게도 죽었다 다시 살아난 자들의 기억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듯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나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왕궁으로 불러왔습니다. 내 오랜 벗 앤 에드위나가 그리워 그런 것도 있었지만, 집에 있을 때면 오라비와 어머니, 아버지가 나이 깨나 먹은 데다 볼모까지 살다온 나를 어떻게든 좋은 곳에 결혼시키려 혈안이었기에 그 속에 있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쯤 몸이 많이도 약해져있던 저는 공주님의 수발을 드는 시녀 노릇을 하기엔 나이도 너무 많았고, 체력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다정한 벗은 이 쓸모없어진 몸을 받아주었습니다.

목숨의 위협이 사라졌건만, 그럼에도 매일의 일상이 나를 더 옥죄어 오던 때였습니다.

공주님의 처지는 나보다 나쁘면 나빴지 더 좋지는 않았습니다. 알프레드 선왕 폐하께서는 불안정해진 왕위를 지키려 찰스 웰즐리와 공주님의 혼인을 서두르려 했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찰스 웰즐리와 결혼할 일은 없을 거라고 선언하며 레테 수도원으로 도망을 치셨지요.

엉성해진 정신 상태로 우리 공주님이 왜 그러시지, 하고 생각하다 말고 나는 퍼뜩 깨달았습니다.

그래, 아델이 찰스와 결혼했었지.

그리고 세실리아가 태어났지.

이제 슬슬 세실이 잉태되어야 할 때가 오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에드위나 공주님이 가출까지 감행하시며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 이유를 꺠달았습니다.

우린 모두 보았는걸요. 아델과 찰스가 사랑으로 가꾼 가정을, 그 사이에 낳은 그 귀여운 세실리아 공주님을 말입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이 모든 일은 없던 일로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천형일 지도 몰랐습니다.

레테 수도원으로 도망가 있는 사이 전쟁이 완전히 종식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라이너 황자의 형이었던 제 1황자 알브레히트가 제 아버지를 죽이고 함께 죽었다는 소식, 2황자 대신, 막내인 황녀가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들이 빠르게 수도원 소식통에 꽂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날, 내가 이렇게 물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라이너 황자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에드위나 공주님은 피식 웃고 대답했습니다.

“조세핀, 너는 느껴지지 않니?”

그 말을 듣고, 곱씹고, 다시 또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알았지요. 황제가 죽고, 제 1황자가 죽고, 전쟁이 종식되기 까지, 라이너 황자님은 또 몇 번이나 거슬러 올라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바꿨을 것임을요.

며칠 후, 알프레드 선왕 폐하가 수도원에 공주님을 다시 모셔갈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몇 주 간의 조용한 반항을 끝내고 돌아가며 나는 공주님께 물었지요.

“라이너 황자님이 또 시간을 돌리신 거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했습니다.

“이 모든 시간을... 그러니까 우리가 윈저튼에 돌아온 후 이 1년을, 황자님은 몇 번이나 반복하셨나요? 공주님은 그걸 모두 느끼셨나요?”

“모르겠어. 조세핀. 나도 정말 모르겠어. 어쩌면 그애가 바꾸고 있는 그곳과 너무 멀리 떨어져서인지, 나는 무엇이 반복되었는지, 정말로 시간을 돌리기는 했는지도 잘 느껴지지 않아. 다만, 살다가 문득 생각할 뿐이야. 이런 적이 한 번, 두 번,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있었는데 하고.”

“그분이 그립지는 않으세요?”

“난 그냥 걔가 이 짓거리를 그만했으면 좋겠어. 황궁을 떠나 어디 먼 곳에서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어.”

“궁을 떠나서요?”

“그래, 난 알지. 걔는 그래야 살 수 있는 애야. 나도 그래야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말하기가 무섭게 공주님이 탄 마차가 아를리 궁에 닿았습니다. 그 무렵, 감옥처럼 우리 공주님을 옥죄던 그곳의 문이 열렸지요.

그리고 선왕 폐하가 친히 나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찰스 웰즐리에게 왕위를 승계할 거란다.”

“무슨 마음의 변화셔요?”

“웰즐리가 말했지. 폐위하지 않고 승계하는 대신, 아델을 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이야기가 되었습니까?”

“아델을 내 양딸로 들일 참이다. 에드위나, 그러니까 이건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네가 내 자식이고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없는 이야기란다. 우리가 함께 행복하려면 이 수 밖에 없단다.”

알프레드 선왕 폐하께서는 축 쳐진 어깨로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차라리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에드위나 공주님을 몰아세웠더라면, 미안해하는 표정이라도 짓지 않았더라면 우리 공주님, 마음 편히 아버지를 미워할 수 있었겠지요.

선왕 폐하는 그렇게 애매하게 악하고 나약한 분이셨습니다.

“아델이, 아델이.. 그러겠다고 하더나요?”

“그래, 에드위나. 넌 그 애를 용서해야한다. 네가 제국에 있는 동안 귀족회가 나를 내치려고 얼마나 수를 썼는지 모른다. 그런 나를 지지해준 것은 찰스와 아델 뿐이었다. 그 둘 사이에 사랑이 싹 튼 것도 당연한 일이었단다. 그러니까 너는, 너는 모른다. 너는 여기 없었잖니.”

그 말을 듣다보니 당사자도 아닌 내가 울컥 화가 치밀더군요.

“폐하께서도…”

“조세핀..?”

“폐하께서도, 제국에 없으셨잖아요. 폐하께서도 공주님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무것도 모르시잖아요.”

이빨 빠진 호랑이라 해도 왕은 왕이었습니다. 내가 옐링 가의 작은 딸이라곤 해도 일개 시녀가 왕에게 대들다니, 지금 당장 목이 잘려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폐하가 바로 내 얼굴을 후려치려 손을 드셨습니다.

그러나, 다 늙은 아비보다는 젊은 딸의 몸짓이 더 날랜 것은 당연했지요. 알프레드 선왕 폐하의 따귀를 얻어맞은 것은 에드위나 공주님이었습니다.

알프레드 폐하께서는 감히 자기가 든 손을 공주님이 몸으로 막았다는 것에 노하셔서 어쩔 줄을 몰라하셨지요.

“매번 자식을 팔아 안위를 지키시니 좋으십니까?”

“에드위나, 나는.”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아시나봅니다. 시녀 애가 하는 소리 하나에 그렇게 발끈 하시는 걸 보면요.”

“너는.. 너는 정말이지 끝까지 애비 마음을 모르는구나.”

“그래, 애비 마음은 모르는 자식은 이제 놔주시렵니까?”

“수도원 안에 틀어박혀 숨어 있는 너에겐 왕명도 가닿지 않았나 보구나.”

“왕명이라니요?”

“설마. 모자란 자식이라고 그냥 두면 그것이 부모겠느냐? 너도 아델처럼 괜찮은 영주를 잡아 혼인해야지. 결혼하여 어디로 간들 너는 윈저튼의 공주이며, 공주로 남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내일 있을 마상시합에서 내 부마가 결정될 것이다. 네가 레테 수도원에 틀어박혀 있는 한달 내내, 윈저튼이 그 일로 떠들썩 했지. 누구든지 네 성 앞에서 100일을 기다리는 자에게 널 줄 참이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더는 대꾸할 의욕도 잃으신 듯 가만히 제 아버지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소중하다는 자식의 표정도 살필 줄 모르던 선왕 폐하께서는 그것이 참말로 좋은 생각이라도 하다는 듯 순수한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말을 이으셨지요.

“아, 참. 우리 공주의 성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은 10만크론으로 할 생각이다. 아름다운 우리 딸, 앤 에드위나를 위해 온 왕국의 기사가 모두 달려와 돈을 들이밀 테지. 가장 부유하고 끈기있는 자가 널 가지게 될 게다. 어떠냐. 아주 멋진 방법 아니냐?”

========== 작품 후기 ==========

하나, 둘, 셋, 넷...

저도 여기까지 보고 계실 독자님들의 숫자를... 반복해서 세며,

알프레드 선왕 폐하의 가증스러움에 지치지 마시고, 다음편을 눌러주시길 청합니다.

우리 모두 알잖아요. 다음 편에 누가 나올지를요.

추신: 새로운 표지를 설명하는 것을 잊었네요. 트위터로 흔동백님께서 보내주신 라이너 황자님 그림입니다. 달빛 머리를 한 청년이 긴 머리를 하고 있다고(생각은 했지만) 말한 적은 없었는데, 어쩜 이리 라이너를 라이너답게 그려주셨는지!

<-- -->

(6/7)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