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49화 (49/56)

#49.

에드위나 공주님이 놓친 투구가 땅바닥에 부딪혀 제법 큰 소리를 내며 굴러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번개가 친들, 천둥 소리가 들린 들, 라이너 황자님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리가 있었겠나요.

몇 번을 반복했을 수많은 1년들, 그 1년들 사이에서 그리움에 그리움을 더하며 그리던 에드위나 공주님의 얼굴이 바로 코 앞에 있는걸요.

“왜…”

우리 공주님 아무 말도 못하시더군요. 라이너 황자님 역시 입을 열어 말을 할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지, 작게 한숨만 냈습니다. 웃으려고 하는지 작게 입가가 일그러졌습니다.

“조세핀, 물, 물을 가지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따뜻한 물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러나 라이너 황자님, 그것 역시 드실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 멍청아, 대체 왜 이런 짓을 해.”

“내가.. 내가, 찾아온다고 했잖니이.”

“미친놈.”

“너의 아서길런이 되어주겠다고 했잖아.”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공주님이 그만, 그만하라고 황자님을 붙잡았습니다.시끄러운 소리 때문인지 보초 서던 병사들이 이쪽으로 걸어오려 했습니다.

“에드위나야, 투구를 주련?”

그 말이 나오고 나서야 에드위나 공주님도, 나도 깨달았습니다. 윈저튼 사람들의 밀밭색 금발과는 전혀 다른 희미한 달빛색을 띈 머리카락, 훌쩍 큰 키, 연푸른색 눈동자.

누가 라이너 황자님을 본다면, 바로 알아차리겠지요. ‘여기 로이틀링엔의 황족이 있다’ 하고 소리라도 지를테지요.

길바닥에 떨어진 투구를 주워 그 아름다운 얼굴에다 다시 씌운 건 공주님이셨습니다.

공주님을 보시고 조금 기력이 들었는지, 라이너 황자님의 입가가 씩, 예쁜 호를 그리며 웃었습니다.

“이 멍청아, 뭐가 좋다고 웃어.”

“에드위나야, 한번만 해보겠다.”

“하긴 뭘 해.”

“기다려보거라.”

그리고 비틀 비틀 거리며 겨우 자세를 고쳐앉은 라이너 황자님이 정말이지, 기사처럼 말했습니다.

“공주님, 나는 기사 아서 길런입니다. 당신이 없는 삶은 내게 의미가 없습니다. 부디 내게 당신의 발 앞에서 100일을 기다릴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아?”

끝이 살짝 늘어지는 것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겠지요. 우리가 낸 소음에 달려온 병사들이며, 궁정 사람들이 삼삼 오오 모여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은 노기 찬 눈을 누그러뜨리더니, 조용히 말했습니다.

“넌 정말 심각하게 미쳤어.그걸 하겠다고 여기에 와?”

“가치 있는 일이었단다. 덕분에 90일이나 네 곁에서 너를 보았지 않니?”

“멍청한 놈 같으니.”

“그래도 생각한 것보다는 말이 살갑구나. 꺼지라고 안해서 다행인가 싶기도 하구우.”

“머저리 같은 놈아. 정말 왜 온거야, 왜, 어떻게.”

“그만 타박하거라, 에드위나야. 이제 그만 날 쓰다듬어주려언?”

그걸 보고 있는데 울컥 눈물이 나더군요. 공주님보다, 울보 황자님보다도 먼저 흑흑 소리를 내며 우는 나를 보고, 라이너 황자님은 퍽도 당황하신 듯 했습니다.

“거봐라, 에드위나야. 쟤가 다 울잖니. 이리와보련, 조세핀아. 얼른 우리를 안아주래두우.”

허, 하고 혀를 차고는 에드위나 공주님이 팔짱을 끼셨습니다. 화가 난 듯이 뒤로 물러났다가 한숨을 푹 쉬다가, 그리고 종래에는 결국 피식 웃고는 이렇게 물으셨지요.

“몸은 좀 괜찮아?”

“눈물이 다 나는 구나. 네가 내 걱정을 다 하고.”

“멀쩡하냐고 묻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아비 죽인 자식은 오래 산다고 하더라.”

“그거 솔깃한 말이네.”

그 말에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작게 웃었습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렸습니다. 다음 날 아를리 궁정은 시끄러워졌지요. 90일을 기다리던 기사와 공주가 얼굴을 맞대고 웃더라고, 그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라도 싹 튼 모양이라면서요.

윈저튼 전역이 시끄러웠습니다. 기사 아서길런과 기네비어 왕비의 전설은 이미 세간에서는 잊힌지 오래였습니다. 그러나, 음유시인들은 옛 노래를 꺼내와 비파를 쳐 가며 흥얼대기 시작했지요. 노래 주인공들의 이름만 조금 바뀌었지만요.

‘기사 아서길런은 북쪽 탑의 공주에게 와서 말했다네.

공주여, 나와 결혼해주오. 당신이 없는 삶은 아무 의미 없으니.

뱀같은 아델, 무시무시한 꾀를 내었지.

100일을 공주의 앞에서 기다려봐, 그리하면 공주는 너의 것이 되리니...’

랜슬롯 왕 대신 애꿎은 아델이 들어간 그 노래는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윈저튼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모두가 기사 아서길런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이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로 끝나길 기대하고 있었지요.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대로 꿈 같은 열흘을 보냈습니다. 아침이 오면, 기사 아서길런...아니, 라이너 황자님이 에드위나 공주님을 부르십니다.

“에드위나야, 날이 맑구나.”

“맑긴 뭐가 맑아.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눈까지 맛이 갔어?”

“그 입담은 여전하구나. 그래, 맛이 가기 직전이니 이리 와 이마라도 짚어주련?”

그러면 한숨을 푹 쉬면서도 에드위나 공주님은 라이너 황자님께 가십니다.

보는 눈이 많은 한낮이면 공주님은 발코니에 매달려 황자님을 내려다보십니다. 두 분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서도 잘도 티격태격하지요. 94일이 되는 날에는 비가 한 방울씩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공주님은 황자님에게 속삭임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야, 야. 이리로 들어와.”

“안 들어가련다.”

“왜.

“왕비를 얻으려면 여기서 꼼짝않고 100일을 기다려야하니 말이오.”

“그 멍청한 기사 흉내좀 그만 낼 수 없어?”

“에드위나야.”

“왜.”

“너 내 잘난 얼굴이 보구싶어서 그러는구나아? 그럼 이리 내려오련?”

으이구, 하고 한숨을 쉬시면서도 에드위나 공주님은 비를 가릴 천을 들고 가십니다. 시종들을 불러 기사 아서길런의 주변에 비를 가릴 막을 치라 말씀하시고 그리고 감기라도 걸릴 새라 얼른 라이너 황자님의 얼굴이며, 손, 갑옷 사이 사이를 닦아주시지요.

“열흘도 안남아서 내쫒지않고 그냥 두는거야. 이 바보야. 대체 왜 이런 고생을 하면서 나까지 고생시켜.”

“그러게다. 네가 나 덕에 고생하는데, 나는 그 마저 좋구나.”

“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라이너?”

“글쎄, 100일을 기다려 랜슬롯 왕에게 너를 받을까?”

“잘도 그러겠다. 지금도 투구만 벗으면 바로 사람들이 널 잡아 어떻게 삶아 먹을까 궁리할텐데. 정말 어쩌려 그래. 또 시간이라도 되돌릴 참이야.”

“글쎄. 그건 며칠 있다가 생각하자꾸나.”

속 없이 웃는 라이너 황자님의 얼굴을 보고는 에드위나 공주님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십니다. 나 역시 둘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비죽 새어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지요.

네, 그 시간들은 우리에게 또 다른 호 시절이었습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아픈 기억이 모조리 비에 씻기는 듯 했습니다.

우리에게 늘 즐거운 날만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음유시인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기사 아서 길런과 에드위나 공주의 노래를 불러재꼈습니다. 그리고, 마치 그 노래의 마지막 부분처럼 99일째가 되었을 때 기사 아서길런이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터벅 터벅 긴 다리를 옮겨, 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무리 들어오라 해도 한 걸음도 가까이 않던 그 곳으로 와, 난생 처음 자신이 먼저 긴팔을 뻗어 우리 공주님을 잡고는, 작은 공주님의 몸을 감싸 끌어안았습니다.

“에드위나야, 한 번 안아보자.”

그대로 엉겁결에 안긴 공주님이 아무 말도 못하고 놀라 있는데, 황자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에드위나야, 나는 기사 아서길런처럼 떠나겠다. 내가 주었던 팔찌는 어디 있니?”

“떠나? 그걸로 또 시간이라도 돌리게?”

“설마. 네가 절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니?”

“넌 죽어라 말을 안 들었지.”

황자님이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셨습니다.

“맞다. 그랬지. 그래도 이제 들으련다. 팔찌는 나도 내 것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네 것은 네가 쓰거라. 기네비어 왕비처럼 떠나려거든, 그때 주었던 그 팔찌를 꺼내렴. 팔찌를 붙잡고 어디든 네가 살고 싶은 곳을 생각해보렴.”

“책이 많은 곳, 빵도 엄청 많은 곳, 비가 자주 와서 모든 것이 쉽게 씻겨 내려가는 곳, 정원이 아름다운 곳, 장미꽃이 크게 피는 곳, 우리 아버지가 없는 곳, 여자가 팔려가듯 결혼하지 않아도 되는 곳, 내가 공주가 아닌 곳...”

우리 공주님이 천천히 소원이라도 빌 듯 그렇게 말씀하시니 황자님, 제법 멋진 얼굴로 미소를 지으십니다.

“바보, 지금 말고 팔찌를 붙잡고 하란 말이다.”

“그거.. 버렸는데?”

“…어디에다?”

“…수도원에..?”

“서책보관함도 거기 버려두었느냐?”

“뭐, 그렇지.”

라이너 황자님은 이제 박장대소를 하십니다.

“뭐가 그리 웃겨?”

“너는 정말 나를 하나도 사랑하지 않았구나 싶어서 그런다.”

“그게… 웃겨?”

“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니?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고작 1년 전의 그때, 마지막이라며 그렇게 울었던 소년은, 그 사이 성큼 자라, 깊어진 눈동자로 그렇게 말합니다.

“에드위나야. 길을 떠나다 힘들면, 다시 수도원에 가련. 그리고 서책보관함을 보려무나. 거기에 내가 편지도 써놓구우 그럴게.”

“넌 편지 못 쓰잖아.”

“그러게다. 큰일이지?”

그 말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라이너 황자님은 투구를 벗어 내게 안기곤 그대로 성큼 성큼 걸어 성을 나가셨지요. 북쪽 탑 뒤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시는 그분 모습을 보고도 우리는 설마 저렇게 가려나, 다시 오겠지 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뒷모습이 내 손바닥만큼 작아지더니, 점만큼 작아지다가, 무성한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어느덧 보이지 않더군요.

그렇게 황자님은 숲으로 떠나셨습니다.

마치 기사 아서길런처럼, 단 하룻밤을 남겨 놓은 99일 째 날에 말입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이 기사 아서길런을 찾겠다고 떠난 것은 그러고나서 일주일 뒤였습니다.

그때쯤, 이미 공주와 기사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가 윈저튼 전역에 퍼졌으니, 공주님이 기사 아서길런을 찾으러 갔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잔뜩 들떴습니다.

찾아오기만 한다면, 그것 참 낭만적인 연애담 아니냐며, 모두들 멋 모르고 좋아했지요.

알프레드 선왕 폐하 역시 크게 낙담하진 않았습니다. 그간 몇 번의 가출을 감행했던 공주님이었으니, 그래봤자 멀리는 못갔겠지, 조금 내버려두었다가 수도원에 가 찾아오면 될 일이지 하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공주님이 나타나지 않자, 그제야 수색대가 조직되었습니다. 그러나 야단법석을 떨어봤자 뒤늦은 일이었으며, 사실 공주님이 사라진다 한들,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윈저튼의 후계는 이미 에드위나 공주님의 것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오히려 일은 더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 자식 잃은 슬픔을 핑계로 선왕 폐하께서는 존엄을 지키며 무사히 왕좌에서 내려오셨고, 찰스 웰즐리와 아델이 빈 자리에 우뚝 섰지요.

공주님이 사라진 아를리에서는 저 역시 남은 할 일이 없었기에, 나는 내 친구 아델이 왕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옐링의 영지로 돌아가 내 아버지가 준비해 둔 뒤늦은 신부수업을 들었습니다.

베데르의 서신을 받고, 레테 수도원에 달려가 서책보관함에서 나온 에드위나 공주님의 편지를 읽게 된 것은 그로부터도 한참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당신네들이 그토록 알고 싶어했던 기사 아서길런과 에드위나 공주님의 이야기는 이렇게 돌고 돌아 긴 이야기의 끝을 맺습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하나 뿐이지요.

기사 아서 길런은 약속대로 공주님을 찾아왔으며,

에드위나 공주님은 그를 좇아 전설처럼 숲으로 사라졌고,

그들은 기어코 다시 만나, 사랑에 빠졌다는 것 말입니다.

아치 앨버트 윌리엄, 내 가장 오래된 벗 아델의 아드님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내 가장 친한 친구 앤 에드위나의 따님,

이제 모든 것을 알아 만족하십니까?

열매달의 손목이 아픈 밤,

-당신네들의 부모를 사랑했던 만큼, 당신들에게도 사랑을 담아. 조세핀 옐링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이렇게 레이디 조세핀의 기나긴 편지는 끝을 맺습니다.

추석 즐겁게 보내셨나요?

19년 만에 가장 낮게 뜬 노란 달은 보셨어요?

못 오고 있는 동안 저는 기사 아서길런과 에드위나 공주와 포도달을 넘어 하늘달, 서릿달, 매듭달을 먼저 나고 있었답니다. 그러니 늦게 온 것은 7연참을 보시며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이제 드디어 아치와 코코가 마지막 걸음을 걸으러 달려옵니다.

이번주에 완결을 내는 것이 저의 새 목표이니,

이번엔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는 하지 않을게요.

추신: 선작과 추천, 코멘트, 후쿠, 보내주시는 모든 관심 사랑합니다.

포도달의 달빛 아래

-이 바닥 최고의 관종 올림.

<-- 아치와 코코 -->

연참

(1/2)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