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51화 (51/56)

#51.

생각보다 한량짓에 소질이 있어보이는 코델리아에게.

나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차를 마시고,

자고,

울고,

읽고,

빵을 사고, 다시 차를 마시며 편지를 쓰는 삶이라니.

당신의 오늘에 박수를 보내며, 우리의 첫 편지에서 당신이 내게 쏟아부었던 악담을 기억해내봅니다.

어때요, 매일 놀기만 하는 삶도 꽤 괜찮지요?

우리가 만날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일상을 나눌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열매달 일곱번째 날 저녁.

-언제나 한가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플린과 노엘이 지금 막 옐링의 영지에서 돌아온 참입니다. 노엘과 떨어지기가 아쉬웠던 모양인지 레이디 조세핀 역시 같이 행차하셨지요. 당신이 부탁한 말을 하기에 딱 좋겠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코델리아.

추신2: 리암이랑은요? 연락해보지 않았어요? 혹시 그랑 싸웠나요? 그 작자가 당신 마음이라도 아프게 했다면 말해봐요. 내가 혼내줄까요?

* * *

사랑스러운 아치 앨버트 윌리엄 왕자님.

방금 그 말이 나를 웃게 했어요.

집착의 대가이신 당신과 다르게 나의 리암은 수수께끼 필담 벗인 당신에게 별 다른 질투를 느끼지 않고 있는 듯 하네요.

편지를 쓰느라 바쁘다고 하면 입을 꾹 다문 채, 내가 당신과 보내는 방종한 저녁 시간을 너그러이 봐준답니다.

그럼 레이디 조세핀이 전해줄 편지들을 기다릴게요.

아, 긴 이야기를 들려주어 고맙다는 말도 전해줘요.

8.10. 밤.

-사랑을 담아, 코델리아.

* * *

내 저녁의 주인, 코코께.

방금 레이디 조세핀에게 가서 당신의 요청을 그대로 말씀드린 참입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다행이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온 서신들을 모두 모아두고 계신 모양이에요. 성에 돌아가자마자 바로 찾아 보여줄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그 말을 마치시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덧붙이시지 뭡니까?

“그런데 그걸 보아봤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을텐데요. 차라리 내가 에드위나 공주님께 보낸 편지라면 모를까...”

난 즉시 왜냐고 물었지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조세핀에게 보낸 편지에는 라이너 황자님과의 삶이나, 코델리아 당신을 낳아 기르고 살던 일상의 모든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을게 분명한데 말입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그러니까 에드위나 공주님은 애초에 그렇게 편지를 길게 쓰는 분이 아니세요. 라이너 황자님에게도 ‘감자’, ‘포도’, ‘수건’ 같은 말만 적어 보냈던 분이라니까요.”

전 얼른 되물었지요.

“아니 이야기는 그렇게 잘 지어내셨다면서요. 책도 많이 읽으셨고요. 그렇다면 대단한 문장가였을 것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게... 편지를 쓰는 능력과 글을 쓰는 능력은 또 별개의 문제이니까요. 아치 왕자님,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요. 당신이나 나처럼 열렬히 편지를 쓰는 사람과, 펜을 붙잡는 순간 만사가 귀찮아져, 그냥 달려가서 말해버리는 사람이요.”

“그러니까 에드위나 공주님이 후자셨다고요?”

“어쩌면요. 저에게 보낸 편지는 정말이지 어쩔 수 없어서 쓰신 것일 뿐이에요. 그건 편지라 부르기도 힘들답니다. 뭘 알려달라, 보내라, 같은 말 밖에 없는 걸요.”

“알려달라니요?”

“애가 아픈데 먹을 걸 보내라, 크림 파이 굽는 방법을 알려달라, 틸버트를 협박해서 그림을 그리라고 해라,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서 베데르를 놀래켜라 같은 것들이요...?”

“저런.”

네, 그렇게 우리의 슬픈 대화는 끝났습니다. 나는 거기서 우리의 옛 편지들을 상기했지요. 코델리아, 당신이 기숙학교 시절 받았던 편지에도 잔소리만 잔뜩 써있었다면서요. 아마 당신 어머니의 편지쓰기 기술은 언제나 그런식이었나봅니다.

레이디 조세핀은 옐링 성에 돌아가면 사람을 시켜 에드위나 공주님의 편지를 모조리다 보내주겠다고 말했지만, 그걸로 우리의 궁금증을 풀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실망하기는 일러요, 코델리아.

당신이 정말 좋아할 이야기가 하나 남았으니까요.

내가 이 모든 이야기를 고하기 위해 필경소에 들어와있는데, 레이디 조세핀이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더니 에드위나 공주님의 오두막에 가보지 그러냐고 말씀하시더군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당신의 세계로 넘어간 것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한 때나마 그곳에서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뒷뜰 한편에 기사 아서길런과 에드위나 공주님의 묘비가 세워져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그 집 안에 에드위나 공주님의 물건이 남아있을 거라는 레이디 조세핀의 추측도 정당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지요. 세심한 우리 어머니와, 선왕 알프레드 폐하께서 그 집에 있는 모든 것을 정리하여 아를리로 가져가라 명했다는 것이예요. 제가 여기까지 말하자 레이디 조세핀은 웃더군요.

“에드위나 공주님이 그걸 생각하지 못했겠어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아는 앤 에드위나는 그걸 그냥 두었을 사람이 아니에요. 천덕꾸러기처럼 지내던 어린 시절에도, 로이틀링엔에서 살았던 때도 물건 숨기기에는 대가였지요. 어서 가서 찾아봐요, 아치 왕자님. 분명 그곳에 서신뭉치가 남아있을 거예요. 딸에게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곳에 있는게 틀림없어요.”

레이디 조세핀은 거의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드위나 공주님의 오두막에 가면 조세핀이 보내주었던 틸버트의 삽화며, 아픈 어린애에게 끓여 줄 치킨 수프의 레시피며, 베데르에게 장난 친 결과를 보고하는 편지들이 모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걸요.

그리고 물론 그곳엔 라이너 황자가 에드위나 공주님에게 쓴 편지들도 있겠지요. 서책보관함을 터질 듯이 꽉 채웠던 수많은 편지들 말입니다.

어쩌면 그곳엔 에드위나 공주님이 두고간 세줄 팔찌도 있을 수 있겠지요.

운이 좋다면, 난 그걸 가지고 당신을 만나러 갈 수도 있겠고요.

어때요, 코델리아.

이쯤하면 나를 칭찬해줄겁니까?

-조금 우쭐한 당신의 벗, 아치 앨버트.

추신: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요? 질투 없는 사랑이라는게 세상에 있답니까? 리암, 그 친구 다시 한번 생각해봐요. 코코.

* * *

아무래도 질투의 대가 같으신 아치 왕자님께.

네, 아낌없이 칭찬해드릴게요.

다만, 하나만 묻고나서요.

공주의 오두막, 서쪽 숲안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난 달에 바로, 당신은 그 서쪽 숲에서 나온 마물 때문에 죽을 뻔했고요.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팔찌는 그 마물들이 모두 사라진 다음으로 하면 안되나요?

아빠와 엄마의 편지를 보고 싶은 마음은 절실하지만, 그러다 당신이 죽으면 전 정말 많이 후회할 것 같아요.

아치 앨버트,

당신 오늘따라 나보다 더 급해보이는걸요.

서쪽 숲엔 가지말아요. 알았죠?

8.10. 밤.

-당신의 걱정많은 벗, 코델리아.

추신: 진짜예요. 내 허락도 받지 않고 편지 한 장 남기고 떠나면 절대로 절대로 안돼요!

* * *

수많은 불안을 떠안고 사는 나의 코코께.

당신에게 바칠 보석과 편지더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제법 낭만적인 일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그런 일에 하나 뿐인 모가지를 걸었다간, 다시는 당신을 볼 수 없을테죠.

마물에 할퀴어 죽임이라도 당할라치면, 제일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찍어대는 커다란 느낌표가 동동 떠올라,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할 거예요.

그렇게 내가 사라진다면 당신은 또 눈물에 젖어 엉망진창이 된 편지들을 보내가며 서책보관함을 괴롭힐테고, 가뜩이나 나이가 들어 눈이 좋지 않은 베데르는 당신 글씨들을 해석하다가 앓아 누울 겁니다. 베데르가 사라진 레테 수도원에 흐르는 적막을 생각하니 숨이 막혀옵니다. 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정말이지 안될 일이죠.

그러니 안심하세요, 코델리아.

당신의 질투많은 필담 벗은 아무 생각없이 마물이 득실거리는 서쪽 숲으로 출발할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못된답니다.

당신께 편지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나는 바로 세실리아를 불러 서쪽 숲의 마물 처리 문제는 잘 해결되었냐 물었지요. 세실은 언제나 그렇듯 눈살을 찌뿌리며 내게 묻더군요.

“그게 왜 궁금한데?”

“글쎄, 산책이나 할까 하고?”

“드디어 죽으려 작정한 거라면 네 선택, 지지해주마.”

...네, 뭐 이런 남매다운 대화를 나눈 후 나는 열심히 세실을 설득해서(그렇니까 세실의 앞에 무릎꿇고 빌어) 결계를 세워 줄 이를 부를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내일 바로 마탑에서 사람이 올테고, 수도원에서 공주님의 오두막에 이르는 길까지 결계를 세우는 작업은 2-3시간이면 끝날 거랍니다.

그럼 난 바로 당신 어머니 아버지의 비밀을 풀기 위해 떠날 수 있겠지요.

몹시도 안전한 길을 따라서 말입니다.

자, 이제 내가 떠나는 것을 허락해주실겁니까? 나의 코델리아 아가씨.

열매달의 일곱번째날 밤.

-사랑과 애원, 약간의 비굴함을 담아, 당신의 아치 앨버트.

* * *

아치 앨버트 윌리엄 어쩌구 왕자님.

당신의 긴 이름을 외우지 못한 것은 아니고요.

마음이 혼란스러워 기억력이 좀 쇠퇴된 듯 하네요.

며칠 동안 너무 많은 정보를 들어서인지, 머릿 속이 복잡해진 여름밤입니다.

제일 더운 떄가 지나고 나니, 이곳의 밤은 이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고요.

여름이 끝나면 우리의 편지도 끝날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을 제 가슴 속에서 지울 길이 없네요.

아치 앨버트, 정말로 안전한 것 맞아요?

결계를 치면 마물이 그걸 뚫고 나올 일은 없는거죠?

혹시나 그럴 일을 대비하여 치유술사를 데려갈 생각은 없어요?

세실리아, 그래 세실리아도 데려가면 좋겠네요. 세실리아가 같이 간다면 조금은 안심이 될 것 같아요.

* * *

사랑스러운 나의 코델리아.

마물이 결계를 뚫고 나올 것을 걱정할 정도라니, 당신은 로이틀링엔의 마탑에 들어가셔야 겠습니다. 거기선 당신같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인재들을 환영하니 말이에요.

다행히도, 세실이 데려온 자 역시 당신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입니다. 세 시간이면 끝날 작업을 반나절을 걸려서 하고 있으니까요.

그 자의 미칠듯한 꼼꼼함도 당신을 안심시키지 못한다면, 네, 당신을 위해 나의 누이도 데려가지요. 세실이 내 옆에 없어 마물에게 죽는 것과, 세실이 나와 함께 동행하다 나를 떄려죽이는 것, 무엇이 더 참혹한 죽음일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할테지만요.

코델리아,

지금쯤 좀 웃고 있는거죠?

그렇다고 말해요, 제발.

당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약간의 유머와 다정함이 없이는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잖아요.

아름다운 사람은 일찍 죽는다는 풍문때문에 당신이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은 이해하는데, 나는 정말이지 무척이나 안전한 환경 속에서 모험을 떠날 참이랍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세상의 가짓수를 천천히 없애가며, 가장 나은 세상을 선택하고자 했던 당신 아버지의 사랑만큼 대단한 낭만을 담고 있지 않지만, 이 한량은 내 식대로의 절박함을 가지고 있답니다.

코코, 팔찌를 찾으면 당신을 만나러 갈 수 있어요.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손톱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마물에게 팔 한짝 정도는 잃어도 상관없습니다.

추신: 차는 당신이 따라줘야 할거예요.

열매달의 낮게 뜬 저녁달을 보며,

-당신의 아치 앨버트.

* * *

나의 왕자님,

왼쪽 어깨는 특히 더 조심하세요.

오른쪽 어깨도, 그리고 몸의 다른 부분도요.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되어요?

서책보관함도 꼭 들고가세요.

여정이 길어지면, 당신이 걱정되어 미칠 것 같아질 나를 알지요?

-사랑을 담아, 당신의 코코.

추신: 정확히 몇 명이 가는거예요?

* * *

여전히 걱정이 많은 나의 아가씨.

세실리아와 나, 그리고 플로리안이 함께 갑니다.

플로리안 그 애, 꼭 당신처럼 벌벌 떨며 걱정하더군요.

안가면 안되냐고 몇 번이나 묻고 한숨을 푹 쉬면서 전전긍긍하더니 자기도 따라나서겠다고, 자신이 살던 집 아니냐고 말하지 뭡니까?

코델리아, 당신은 미리 생각해두신 게 있겠지요?

하지만 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플린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상기했습니다.

당신이 에드위나 공주님의 딸이란 것이 밝혀진 이상, 플린 그 녀석은 가짜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나의 영민한 벗, 당신께서 이것을 모를리가 없을 진대, 왜 아직 내게 묻지 않으셨나는 모르겠습니다. 레이디 조세핀 역시 잠자코 플린을 플로리안 공작이라 불러주며 에드위나 공주님의 딸 취급해주시는 연유도 알 길이 없고요.

다시 이 필경소에 틀어박혀, 당신과 함께 서책보관함 앞에 머리를 맞대고 앉아 모든 일을 낱낱이 캐내고 싶지만, 이제 결계가 완성되었으니 슬슬 출발할 때가 되었습니다. 플린 이 녀석, 거짓말쟁이긴 해도 당신처럼 영민한 구석이 있으니 길동무로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제 제법 튼튼해진 어깨에 단단히 잠궈놓은 서책보관함을 메고, 오른쪽 주머니에는 열쇠를 집어넣었습니다. 돌아올 땐, 더 많은 짐을 실고 있겠지요.

그러니 부디, 걱정말아요. 내일 쯤 다시 연락드리죠.

열매달의 여덟번 째 새벽에,

-당신의 아치 앨버트.

* * *

아치 앨버트,

잘 도착했어요?

열매달의 여덟번째 날 밤.

코델리아가.

* * *

아치?

괜찮아요? 하루면 도착하는 것 아니었어요?

열매달 아홉번째 날 아침.

-당신의 코코.

* * *

빌어먹을 아치 앨버트 윌리엄.

당장 답해요.

지금 날 놀리려고 장난치는 거면 정말 불같이 화낼 거예요.

당신, 이런 장난 치는 사람 아니잖아요. 네?

열매달의 아홉번째 날 밤.

-코델리아가.

* * *

아치 왕자님.

답장을 주세요.

제발요.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길게 써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팔이 하나 나가떨어졌다고 말씀하셔도 울지 않을게요.

그냥, 무사하다고만 말해주세요.

열매달의 열번째 날 밤.

-코델리아 그레이.

* * *

아치,

나를 잊었어요?

크게 아프기라도 해요.

살아있는거죠?

어서 답장을 주세요.

내가 플로리안을 누구라 생각하는지 알려드릴게요.

늘 그걸 궁금해하셨잖아요.

내가 숨기고 있는게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묻지 않으셨잖아요.

그런데 답도 안해드렸어요.

그 쪽지가 뭐라고, 그 따위 약속이 뭐라고.

아치 앨버트, 빨리 나타나요. 네?

열매달의 열한 번째 날 새벽 한 시.

-잠못 드는 코델리아.

* * *

아치 왕자님.

살아있어요?

전 살아있지만 잠을 못 잔지 너무 오래된 것 같네요.

당신이 무척 보고싶어요.

열매달의 열두 번째 날 밤.

-당신만의 코코.

추신: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 제발요.

* * *

아치 왕자님께.

플로리안이 내게 편지를 보냈어요.

당신이 사라지면 리암을 찾으러 가라고 했죠.

그 말이 무엇인지, 그애가 누구인지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내게 주어진 단서는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데, 난 도저히 그 사실이 믿을 수 없었지요.

머릿 속이 너무 복잡해져서 당신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난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여기 앉아있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요, 아치.

당신과 편지를 나누지 못한다면,

당신의 생사도 알 수 없는 상태로 삶을 이어나가야한다면,

내 남은 생은 내내 비참할 거예요.

그러니 지금 당장 리암에게 가겠어요. 플로리안이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아름다운 모가지라도 거머쥐고, 당신 세상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를 참이에요. 아치 앨버트, 당신의 허락같은 건 구하지도 않겠어요. 그러니까 죽지말고 기다려요. 내가 당신을 만나러 갈테니.

열매달 열 세번째 날 아침.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 작품 후기 ==========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네, 결국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뵐 날이 얼마 안 남았네요.

느껴지시죠...?

아까운 마음에 한 편만 들고오려다, 그래도 이어 보시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여기서 자릅니다.

아치가.... 오래.... 연락이 없는 것을 조금 더 실감나게;;;; 느끼실 수 있게, 저도 며칠 있다가 완결편을 들고 올게요.

추신: 후원쿠폰 주신 애고보님, 온별누리님, Sen98님, 김치치님, 휴즈라님 감사합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도 모두 감사합니다!

+++ 덧) 소장본 수요조사에 대한 문의가 많아, 여기에 덧붙입니다. 완결 후 다시 공지해드릴게요. 걱정마세요!

<-- 줄리엣이 먼저 알았다 -->

연참1.

51.줄리엣이 먼저 알았다.

08-15-THU-9:02.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정말 리암한테 찾아갈거야? 지금 당장?

그래서 오늘은 무단 결근을 하시겠다고?

-

08-15-THU-9:1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내가 모두 설명했잖아, 줄리엣.

금으로 만든 그 책도, 언제부터 말렸는지도 모르겠는 그 낡은 꽃도, 값비싼 책갈피도, 내 이름이 들어간 그림도, 그 수많은 편지들도 모두 아치 앨버트 윌리엄이 준 거라고.

너도 직접 보지 않았니? 서책보관함을 열었을떄, 스르르 편지가 오는 걸.

그 사람은 그냥 소설 속 왕자님이 아니야.

나의 아치 앨버트 윌리엄이지.

그리고 네가 너에게 그 쪽지도 보여줬잖아.

그 ‘너 정말 말을 안듣는구나, 코델리아’ 라고 시작한 이상한 쪽지 말이야.

그 사람, 분명히 그랬다고.

편지가 끊기면 리암을 찾아가라고.

그리고 편지가 끊긴지 벌써 6일째야.

더 기다릴 수는 없어.

-

08-15-THU-9:2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그래. 너희 집에 갔던 그날 서책보관함을 열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편지에 놀라지만 않았더라도 지금쯤 넌 내 손에 이끌려 신경정신과 의사 앞에 앉아있을거야, 코델리아 그레이.

그 모든 걸 소설 속 왕자님이 너한테 주었다는 것보다는 네가 금을 두드려 책도 만들고 꽃도 손수 말리고, 그림도 마음대로 그려놓고 그 모든게 너에게 온 선물이라고 가장하는 머리가 좀 돌아버린 여자라는게 훨씬 덜 의심스러운 가정이란 건 너도 알지? 네가 원래 살짝 돌기도 했고 말이지.

어쨌든 지금은 너랑 같이 나도 돌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알았어. 오늘 결근은 내가 대신 설명해줄게.

눈물을 뚝뚝 흘리며 네가 너무 아파서 응급실에 가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다고 말해주마. 그러니까 회사 걱정은 하지 말고 다녀와.

하루 쯤이야, 괜찮을테니까.

근데 너 어떻게 할 건데?

리암을 찾아가서 뭘 어떻게 해보려고 그래?

-

08-15-THU-9:58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줄리엣,

난 더 이상 서책 보관함 앞에 앉아 이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언젠가 올 지 안 올지도 모르는 편지를 기다리며 울고 있진 않을 거야.

내가 그간 줄곧 생각해오던 것이 뭔지 알아?

리암에게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는 거야. 그는 분명 그곳에서 온 사람이야.

그러니 〈공주와 기사〉를 소설로 썼고, 서책보관함을 나에게 주었고 이 모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질 알고 있겠지. 리암이 그곳에서 온 사람이란 건, 그곳으로 돌아갈 방법도 알고 있다는 거야.

난 그를 만나서 말할거야. 나를 그 안으로 보내달라고.

-

08-15-THU-10:0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미쳤네.

그래서 그 동화 속안으로 정말 들어가시겠다고?

코델리아, 그냥 그 편지 다 템즈강에 찢어버리고 살던 대로 살 생각은 없어?

그 세계가 그렇게 좋으면 리암이나 붙잡아.

너 리암도 사랑한다며. 첫 눈에 반했다면서.

-템즈강에 갈 거면 같이 가 줄 용의 있는 줄리엣

-

08-15-THU-10:1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코델리아, 답장 좀?

-

08-15-THU-10:27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메일도 안 읽고 가버렸네.

정말 말은 죽어라 안 듣는 애라니까.

네가 보여준 그 쪽지를 쓴 사람이 너희 엄마인지 네 글씨를 엄청 잘 따라하는 다른 누구인지 모를 노릇이지만, 아무튼 그 사람,

너를 엄청나게 잘 아는 사람인가보다.

-

08-15-THU-10:30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야,

나 아직 여기 있거든?

추신: 그 쪽지 쓴 사람, 우리 엄마같다니까? 너는 미친 소리라고 들을 지 모르겠지만

-

08-15-THU-10:33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잘했어.

정말 가려면 준비라도 하고 가.

추신: 그건 말도 안된다고. 너희 엄마는 내 어렸을 때 우상이야. 그런 분이 네 글씨체나 흉내내면서 그런 장난을 칠리가 없다니까.

-

08-15-THU-10:41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그래 우리 엄마에 대한 얘기는 뒤로 하고,

무슨 준비? 너 설마 첫인상이 어쩌고 하면서 내게 예쁜 옷이라도 입히려고 달려오고 있는 건 아니지?

지금 내게 중요한 건 아치 앨버트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하는 거야, 줄리엣.

준비는 필요없어.

그동안 많이 생각했는걸.

-

08-15-THU-10:45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예쁜 옷은 무슨.

마녀로 몰려서 화형당하지 않게 멀쩡한 옷이나 준비해둬.

너희 윗집에 사는 그 히피 아가씨에게 빌리면 되겠다.

중세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입고 다니니 말이야.

네 왕자님이 거기 화장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주던?

샤워시설은 있대? 너 정말 하루도 안 씻고는 못배기는 애잖아.

코델리아, 너 어렸을 때 예방접종은 제대로 했어?

약국에 들러서 항생제나 소염제라도 사가지고 가.

세상에 너 여자에게 중세 시대가 얼마나 위험한 곳일 줄은 알기나 해?

사람들은 디즈니 영화만 보고 모든게 동화 속 세상처럼 낭만적일 줄만 알지.

아, 너희 엄마는 너처럼 대책없이 밝기만 한 애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다니.

이 언니가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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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THU-10:57

보내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받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1절만 해, 줄리엣.

한 번만 더 걱정했다가는 아주 날 따라오려 들겠다.

어쨌든 충고는 고마워. 약국에 들러서 항생제랑 소염제를 있는대로 다 달라고 해야겠다.

옷 차림에 대한 조언도 아주 도움이 되었어.

지금 막 3층에 사는 레인에게(그래, 히피여자라고 부르는 것 그만둬. 이분에게도 이름이 있단다.) 흰 셔츠와 중세풍 벨트를 빌려온 참이야. 바지까지 빌리려했는데 허리가 좀 크더라. 내가 가진 것 중에 그럴듯한 걸 하나 고르느라 애먹었어.

레인은 이렇게 입고 머리를 기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며 그 자리에서 바로 4년을 길러온 내 머리를 싹둑 자르려고 하더라. 나는 기겁하고 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었지. 레인이 말하길, 뭐 그 정도만 해도 괜찮은 건 같대.

그래, 이제 난 소년애처럼 보여. 이 정도면 중세시대에 뚝 떨어진 여자애에 대한 네 걱정도 좀 잠재울 수 있겠지?

가슴을 가리려고 붕대를 감고 나니 꼭 십이야 속 주인공이라도 된 느낌이다.

어쨌든 줄리엣, 충고들과 응급실 변명까지 모두 고마워.

곧 돌아올게.

-코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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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THU-11: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맙소사, 코델리아.

머리를 잘랐다고?

남장을 하고?

십이야의 바이올라처럼?

〈공주와 기사〉 이야기의 플로리안처럼?

이 바보를 어쩌면 좋아.

코델리아, 그 쪽지를 보냈다는 플로리안, 너희 엄마가 아니라 너였던 거야.

네가 남장을 하고 거기로 가서 플로리안이 된 거잖아.

이 멍청아, 넌 꼭 혼자 똑똑한 척 다 하다가 제일 중요한 데서 헛다리를 짚더라.

내가 입사 초기에 가렛이랑 어울리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사람이 보내는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다는 둥 하다가 결국 그렇게 되더니.

아, 정말이지 너희 엄마는 어떻게 널 두고 눈을 감으신거라니.

코델리아, 남장이고 뭐고 그만두고, 리암에게 가지마.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어 거기 갇히는 건 그만두라고.

빨리 대답해봐. 이제 다 알았으니 가지 않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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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THU-11:14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또 무슨 준비를 하고 있길래 메일을 안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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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THU-9: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코델리아, 이번엔 진짜 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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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5-THU-9:00.

보내는 이: 줄리엣〈[email protected]〉

받는 이: 코델리아〈[email protected]〉

갔군.

최소한 마지막 내 메일이라도 읽어보고 갔기를 기원한다.

사람들은 네가 똘똘해서 방탕한 줄리엣 캐퓰런의 뒤치닥거리를 하느라 고생하고 사는 줄로만 알지.

내가 지금 너 대신 장기 휴가 사유 만드느라 머리에 쥐가 나는 줄은 꿈에도 모를거다. 이 고집세고 말 안듣는 친구야, 어떻게든 둘러될테니 돌아와, 돌아오는 즉시 연락해. 알았지?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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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께.

하루 늦었네요.

지난주에 완결내겠다고 해놓고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완결까지 가져왔어요.

다음편을 다섯번쯤...? 눌러주세요!

추신: 후원쿠폰 주신 알입니다님, 여우그늘님, 애고보님, 온별누리님, Sen98님, 김치치님, 휴즈라님 감사합니다.

선작과 추천, 코멘트 주신 모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 아치 앨버트 윌리엄과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

연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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