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리암
거기 있어요?
-열매달의 코델리아, 아니 플로리안 엘핀델.
* * *
코델리아.
네, 전 여기 있지요.
당신이 맡기고 간 서책 보관함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답니다.
당신께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요.
묻지는 않으셨지만 제 안위에 대해 대답해드리자면 당신께 멱살 잡혔던 목은 조금 뻐근하고 잘 돌아가지가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아지고 있습니다. 뭐, 부러지진 않았으니 죽기야 하겠어요?
자, 이제 내가 당신께 물을 차례지요?
코델리아, 아니 플로리안 엘핀델.
건강합니까? 다친 데는 없지요?
나의 세계는 모두 안녕하고요?
-8월에 살고 있는 아치 앨버트, 아니 당신의 리암이.
추신: 오랜 만에 당신 글씨를 보니 반갑군요. 여전히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 * *
리암.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해도 소용은 없겠지만 당신과 단 한번이라도 편지를 주고 받았더라면 난 당신의 진짜 이름이 아치 앨버트 윌리엄이란 걸 단번에 알아냈을 거예요.
그렇게 빈정거리면서도 얄밉지 않은 건 이 세상에 당신 밖에 없을테니까 말이죠.
내가 포토벨로로 찾아가 당신의 사슴처럼 아름다운 모가지를 꺾을 듯 협박한 것은 사과할게요.
그런데 아직도 목이 아프다며 엄살을 떠는 건 좀 너무 하는 일 아닌가요?
벌써 두달도 더 전에 있었던 일인걸요. 그리고 리암, 목은 원래 잘 돌아가지 않아요. 180도 돌아간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죠. 그러니 앓는 소리는 그만하고,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해봐요. 내가 방금 보낸 아치 왕자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당신 (목 말고 다른 모든 부위도 멀쩡히) 살아있는 것 맞지요?
코델리아 플로라 그레이
추신: 쓰다가 알았는데 플로리안, 플로리안, 그래 플로라에서 나온 거였네요. 세상에 딱 내가 지을 법한 이름이었어요.
* * *
코델리아
난 당신이 나보다 바보같이 굴 때가 좋더군요.
그런 때는 흔히 오지는 않으니까요.
물론 난 멀쩡히 살아있습니다. 당신이 내 모가지를 비튼 지는 이제 막 반나절이 지나가고 있고요.
자, 옛일을 기억해봐요, 코델리아.
찰랑거리는 작은 종이 울렸고, 초록색 간판 골동품점의 문을 박차고 당신이 들어왔죠. 서책 보관함을 옆구리에 끼고 씩씩하게 처들어와 당신은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잖아요.
“나를 윈저튼으로 보내줘요. 그럴 수 있죠?”
난 당신을 보자마자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죠.
끼워입은 덩치보다 한참 큰 옷이나, 막 자르고 온 듯한 더벅머리, 그건 내가 공주의 오두막으로 선왕 알프레드를 모시고 갔을 때, 처음 당신을 발견했던 때와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요.
“리암? 지금 그렇게 웃고나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말해봐요. 나를 윈저튼으로 보내줄 수 있죠? 그렇죠?”
“이것부터 묻고요. 코델리아, 그 옷은 대체 어디서 났어요?”
“3층에 사는 레인이 빌려줬어요.”
“왜 빌려입었는데요?”
“줄리엣이 그러는데 윈저튼에 여자 모습으로 가면 위험할 수도 있을 거래요. 그게... 음, 그러니까....... 이상해요?”
그렇게 말하며 당신은 아무렇게나 질끈 묶었던 머리를 다시 풀렀죠. 붉은색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흩어지는 순간, 내 머릿 속에선 오래 전 기억이 재생되었습니다.
레테 수도원 모두가 왁자지껄하게 모여 노엘이 만든 십이야 연극을 보던 날 밤, 에드위나 공주님의 낡은 옷을 걸쳤던 플로리안의 머리가 꼭 그렇게 흩날렸었죠.
7년 전, 윈저튼에서 이곳으로 넘어와 어린 당신과 에드위나 공주님을 만난 후에야 난 꺠달았지요. 난생 처음 아름다움으로 내 눈을 홀린 그 여자가, 내가 여름을 바쳐 사랑하던 여자와 동일 인물이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그러니까 플로리안이 대체 왜 남장을 하고 나타났는지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되게 귀여운 이유였다니, 웃음이 터져버린 것도 당연한 이야기였지요. 당신은 날 이상하게 보았지만, 해묵은 웃음은 그리 쉽게 정돈되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에 당신 표정은 점점 더 험상궂어지더군요. 이내 토라진 표정을 넘어 아주 화가 난 얼굴이 된 당신은 그럼에도 내게는 몹시도 상냥히 대해주었습니다.
“제발 리암, 난 가끔 당신이 날보며 이유없이 터뜨리는 웃음을 사랑해요. 하지만 오늘은 내 옷차림 같은 걸 비웃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요. 난 아치를 만나야해요. 빨리 날 그곳으로 보내줘요.”
당신 생각보다 훨씬 사악한 나는, 내 이름을 부르며 절박해하고 초조해하는 당신을 조금만 더 감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내게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죠. 어디서 그런 것이 낫는지, 영 이상하게 생긴 벨트에다가 차놓은 가짜 칼을 뽑더니 내게 휘두르더군요.
“안 보내주면 찌를 거예요.”
“...그 칼로요?”
“조금은.. 아플 걸요?”
“그걸 가져가서 아치 왕자님을 구하기라도 하려고요?”
“어쩌면요. 빈손 보다는 낫죠.”
그런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결국 난 저열하게도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습니다.
“아치가... 그 아치 앨버트 윌리엄이라는 작자가 그렇게나 좋아요?”
그때 당신이 지은 표정은 내 마음을 마구 어그러뜨리더군요. 망설이는 것처럼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굳게 다물었다가 아래를 보다가 다시 나를 보다가, 곧 이어 그 커다란 눈동자 가득, 눈물이 핑 돌았죠. 건드리면 바로 눈물이 뚝 떨어질 것 같은 표정이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어요.
“좋아해요. 무척이나요.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쩌면요.”
아, 그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다시 한번 지고, 또 다시 이긴 것 같은 내 마음을 코델리아, 당신이 알까요?
“그런데 당신도 좋아해요. 리암, 당신은 너무 잘생겼으니까요.”
이런 사특한 말로 결국 내 웃음을 자아낸 것을 잊었다고 말씀하진 않으시겠죠?
설마요. 난 이 말을 그대로 커다란 종이에 써서 우리집 대문에 붙여놓고 싶은 심정인걸요.
네, 그렇게 마지막까지 당신은 날 웃겼어요.
그리고 난 웃음 속에서 당신을 보낼 준비를 해야 했죠.
내가 가지고 있던 팔찌를 가지고오자, 당신 눈이 휘둥그레 지더군요. 당연히 에드위나 공주님의 팔찌라고 생각했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내게 질문 세례를 쏟아붓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어요.
난 당신 왼쪽 팔에 팔찌를 걸어주었고, 오른 손으로 왼쪽 손목의 팔찌를 잡고 당신이 도착하고 싶은 곳을 그려보라고 했어요.
돌아올 때도 팔찌를 붙잡고 똑같이 하라고, 이 세상을, 당신이 이토록 사랑하고 익숙해진 세상을,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을, 당신이 원하는 딱 그 순간을, 잊지말라고 나는 몇 번이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이미 레이디 조세핀의 편지를 모두 읽었을 당신은 일이 어떻게 이뤄지는 것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질문 하나 하지 않고 초롱초롱 눈만 빛내고 있었지요.
“코델리아, 잘 들어요. 쓸데 없는 생각은 단 1초도 하지마요.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해요. 당신은 윈저튼으로 갈거예요. 공주의 오두막이 있는 엘핀델 숲으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예요.이곳만 생각해요. 그래야 돌아올 수 있어요.”
“알겠어요.”
“그리고 그곳에 가면 아무것도 바꾸지 마요. 아무것도 바꾸지 말고, 원래대로 해요. 알았어요?”
“아뇨,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기억해요. 팔찌를 잡고 당신이 가기를 원하는 그 시간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것.”
“리암, 제가 똑똑한 것 치고는 기억력이 좀 없는데, 그래도 뭐 그 두 개쯤은 외워볼게요.”
당신은 미적지근하게 대답했지요. 나는 또 당신을 붙들고 했던 말을 반복했고요. 팔찌를 붙잡고는 절대 다른 생각하지 말라는 내 말에 당신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마 그때부터 당신은 다른 생각들을 하고 있었겠지요. 들뜬 당신 표정을 보고 난 그걸 알았고, 내가 그걸 멈출 힘이 없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저 마지막으로 이렇게만 물었지요.
“코델리아, 행복해요?”
“네? 리암, 그럴리가 있겠어요. 나는 방금 전에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당신에게 상처를 줬고 또, 그 남자는 지금-“
속사포처럼 내뱉는 당신의 말을 막고 내가 물었죠.
“아뇨, 그런 것 생각하지 말고요. 이 일만 해결된다면요. 모두가 살아남아있는다면, 그럼 당신은 지금 행복해요?”
“왜 그걸 물어요? 행복하다고 하면 나를 보내주지 않으려고요? 여기서 그냥 살라고 하려고요?”
“아뇨, 어쩌면 그 반대죠.”
“또 수수께끼 같은 말들만 하네요, 리암.”
“코델리아, 당신 인생이요. 당신이 편지를 나누고, 날 만나고, 그리고 이곳에 오기까지의 모든 순간들은, 이 여름은 당신에게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이 인생이, 당신에겐 두 번 반복해도 좋을 만큼 멋진 인생이었나요?”
당신은 그 와중에도 너무 아름다운 미소를 짓죠. 난 알아요. 설탕을 들이 쏟아부은 빵을 먹을 때처럼 아주 행복한 때에만 당신이 짓는 표정이라는 것을. 그렇게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기어코 이렇게 말해요.
“네, 행복했어요. 단 1분도 놓고 싶지 않던 시간들이었어요.”
묻지도 않은 부분까지 이야기해주는 그 대답에,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붙잡고 있을 도리가 없죠.
당신에게 1분도 놓고 싶지 않았던 그 시간들을, 모조리다 다시 돌려주는 수밖에.
난 당신에게 서책보관함을 내려놓고, 팔찌를 팔에 걸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팔찌를 내게 건네 받은 후, 마지막 자비라도 베풀 듯이 내 목에 양팔을 걸고 나를 꼭 안아주었고요. 그리곤 끝인사를 건네더군요.
“리암, 나는 무척이나 행복해요. 당신을 만나서 서책보관함을 받고, 편지를 주고 받게 되고, 당신과 홀본의 거리를 걷고, 밤마다 편지에 설레던 여름. 당신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내 생애 최고로 행복한 시간들이었어요. “
끝까지 나를 웃을 수도 울 수도 없게 만든 고약한 코델리아, 당신은 그렇게 나를 버리고 나를 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벌써 몇 시간 째, 나는 고민 중이지요. 어째서 편지로는 사로잡을 수 있었던 당신 마음을 이 아름다운 얼굴로는 그러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요.
자, 코델리아 그레이
아니 플로리안 엘핀델.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예요.
잘 도착했어요?
내가 알던 대로 공주의 오두막에 떨어졌나요?
당신을 처음 발견한 것은 나와 선왕 알프레드 폐하였고요?
내 말을 듣지 않고 오로지 그 순간에 집중하지 않은 죄로, 두달 이른 곳에 불시착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라도 하셨습니까?
아, 리암 말을 조금 귀담아 들었어야 하는데 하고 반성이라도 하셨을까요?
그 반성이 깊으셨다면 그 다음은 내가 말한 대로 모두 했나요?
모든 것을 바꾸지 않고 당신이 아는 대로 두라는 내 말을 들어주셨습니까?
한심하게도, 당신을 알아보지도 못한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행복했습니까?
모든 것이 내가 아는 대로 되었더라면 지금쯤 당신은 세실과 함께 공주의 오두막 앞에 남아있겠지요.
당신을 구하겠다며 되도 않는 멍청한 짓을 하다 내가 흘린 피를 모두 뒤집어 쓴 채, 핏빛 차림이 되어 울먹이고 있나요?
울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었어요.
저리 가 있으라고, 피가 묻는다고 밀어내려했는데 팔이 말을 듣지 않았지요.
내 말도 듣지 않고 당신은 그러게 오지 말자고 하지 않았냐고 펑펑 울며 팔찌를 풀러 내게 채워주었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기엔 난 너무 정신이 없었습니다. 당신이 팔꿈치까지 올려 숨겨놓을 만큼 커다랐던 그 팔찌는 내 손목 근처에서 적당하게 겉돌고 있었지요.
그 차가운 감촉에 생경해하고 있을 때, 당신이 피범벅이 된 나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아치 왕자님, 하루만, 하루만 전으로 돌아가요. 이렇게 되기 전으로 돌아가요. 제발요. 내가 여기 오지 말자고 했잖아요. 제발, 제발, 코델리아를 생각하세요. 코델리아랑 편지를 나누던 어제를 생각해요. 제발요, 제발, 제발...”
내겐 당신이 중얼거리던 그 말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귓가가 멍해지고, 주변이 적막해졌습니다. 결계가 무너진 숲안, 빽빽히 난 나무들 사이로 한줌 햇살이 쏟아지더군요.
그 볕을 맞으며 나는 생각했습니다.
코델리아를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나는 당신을 그렸지요.
내가 답장을 주지 않는다면 서책 보관함 안으로 몇 장의 편지를 내며 화를 낼 당신을 생각하고,
그러다 당신이 흘릴 눈물들을 걱정하고,
초록색 간판이 달린 가게 앞에서 당신을 위로할 리암을, 그것이 나 자신인줄도 모르고 열렬히 질투하고, 나 없는 밤, 당신이 읽어댈 책들을 헤아려보고
더 어린 시절, 엄마 없이 기숙학교에서 살며 그 책들에 위안을 받았을 당신을 상상하고,
그보다 더 전에, 당신이 에드위나 공주님과 함께 하던 시간들을 그렸지요.
그때였을 겁니다.
당신이 내 손을 잡았어요.
힘 풀린 오른 손을 잡아, 나의 왼쪽 팔에 걸린 팔찌를 잡게 했죠.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졌지요.
퍼뜩 정신이 깨었을 땐, 누군가 나를 돌보고 있었습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주변이 시끄러웠죠. 온 몸이 아팠고, 난생 처음 본 공간 속에 내가 놓여있었습니다. 그곳이 어딘줄 알기도 전에 다시 눈이 감기웠고, 다시 눈을 떴을 땐 머리에 차가운 물수건이 올려져 있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정신없이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윽고 멀쩡해진 정신으로 눈을 떴을 땐 붉은 머리 여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더군요.
어딘가 플로리안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애의 적갈색 머리카락과는 달리 그 여인의 머리는 타는 듯이 붉었고, 그래서인지 얼굴도 훨씬 창백해보였지요. 창백하고 말랐다 한들, 어딘지 생기있어보였던 건 매서운 눈초리 때문이었습니다.
그 눈이 또렷이 나를 바라보고 물었죠.
“너,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찰스 웰즐리를 빼닮았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그 여인은 얼른 다 식은 내 머리 위의 물수건을 갈아주었지요.
그 상냥한 태도, 살벌한 눈초리에도 나는 아직도 정신이 덜 돌아온 사람처럼 알아채질 못하고 있었지요. 그때였습니다. 무거운 문이 힘겹게 움직이며, 소녀애 하나가 빼곰히 고개를 들이밀었어요.
엄마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당밀빛을 한 머리카락, 똑같이 초록색으로 빛나는 장난끼 어린 눈, 동그란 얼굴, 앳된 뺨.
조금 더 어린 모습이긴 하지만 나는 바로 알아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애는 플로리안이 분명했지요.
꿈속에라도 들어와있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엄습하는 통증이 이것이 현실이라고 말해주었지요. 어깨를 부여잡고 밭은 숨을 내뱉는 나를 눕히며 붉은 머리의 여인이 제 딸에게 손사레를 쳤지요.
“저리 나가 있어, 코델리아.”
그제야 나는 알았어요.
모든 것이 당신이었다는 것을.
하늘에서 방금 막 떨어진 것 같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온 것도,
남장을 한 채, 비오는 날 내게 안겨 춤을 추던 것도,
연극을 하다 말고 불쌍한 눈동자를 하고 나를 바라보던 것도,
모든 것이 당신이었지요.
그 후로 한참 나는 당신을 곱씹었습니다.
제발, 제발, 제발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웅얼거리던 당신.
그런 당신이 내게 채워준 차가운 감촉의 팔찌.
어린 당신을 보고나서 놀란 나를 알아차리고는 바로 나를 추궁하기 시작하던 당신의 어머니,
모든 걸 털어놓을 새도 없이 까무룩 다시 기절한 새에 꾸었던 당신이 실컷도 나오던 꿈들.
그리하여 7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날의 기억은 내 머릿 속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마치 반나절 전, 내 멱살을 쥐고 가짜 칼을 등에 꽂으려 하던 당신과의 대화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코델리아, 부디 당신도 기억해보세요.
내가 채워준 팔찌를 붙잡고 무사히 공주님의 오두막 앞에 떨어졌겠지요.
나를 보자마자 기절했을테고, 일어나서도 나를 속이느라 여간 애를 먹은 것이 아닐겝니다.
그리고 긴 여름은 감쪽같이 지나갔겠지요.
두달을 거슬러 당신이 그곳에서 여름을 모두 지낸 후 내게 다시 팔찌를 끼워주어봤자,
이곳에서는 단 하루도 흐르지 않은 셈이지요.
자, 이제 아시겠나요. 나의 사랑스러운 바보 아가씨.
어서 대답해주세요.
내가 말한 것을 기억하기는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바꾸지 말라는 말을 그대로 행하셨나요?
그리하여 내가 보낸 당신이 다시 나를 보내었으니, 지금 나는 서책보관함 앞에서 목을 어루만지며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서 답장을 주세요, 나의 코코, 나의 플린.
방금 전에 당신을 떠나보냈을 뿐이지만, 나는 벌써 당신이 그립답니다.
-당신의 영원한 벗, 아치 앨버트 윌리엄.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마음이 급해 후기는 한꺼번에 나중에 올리려 했는데요.
이것이 작품 후기를 쓸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니 그렇게는 안되네요....
방금 전에 완결을 냈을 뿐이지만 저는 벌써 독자님들이 그립답니다.
그러니 조금 재미없어도 의리로 마지막까지 봐주세요.
아, 동정도 환영합니다.
사랑합니다.
추신: 선추코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편을 눌러주세요.
<-- -->
연참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