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사랑하는 나의 딸 코델리아에게.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지.
미친듯이 긴 편지를 쓸 만큼 할 말이 많은 사람과,
그 시간에 찾아가서 말을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늘 후자였지만, 너희 아빠는 전자였어.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넌 나보단 네 아빠를 훨씬 더 닮았지. 나로선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너희 부녀지만, 그래도 이제와서는 나도 인정할 수 밖에 없겠구나.
세상엔 편지를 써야할 수 밖에 없는 때가 있어. 절대로 달려가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해야하는 순간이지. 그렇게까지 해서 해야하는 말이 대체 뭐인가 하는 생각은 아직도 들어.
너는 커서 대체 뭐가 알고 싶을까.
매번 물어보는 아빠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
내가 너를 두고 왜 가버렸는지 하는 것?
글쎄 그 모든 걸 편지에 담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아. 대신. 네 친구 줄리엣이 기겁하는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같은 이야기로 널 괴롭힐 수는 있겠지.
비가 왔고, 아직 여름이 오지 않은 밖엔 초록이 듬성 듬성 보였어. 라이너가 가져온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나는 물었지.
“우리가 아이를 가져야 할까?”
그는 웃었고, 나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입밖에 꺼내어 말하진 않았단다. 그래서인가봐. 나를 반쯤 닮고, 라이너의 입밖으로 모든 걸 내뱉어내는 성격만 빼닮은 네가 나온 걸 보니 말이야.
몇 번을 생각했어.
만약 다시 시간을 돌린다면 그때로 돌아가겠다고.
만약에 윈저튼으로 가야한다면, 라이너가 기사 아서길런이 되었던 시절로 가야겠다고도 생각했지.
모든 걸 다 똑같이 해야만 다시 널 낳을 수 있을테니, 나는 그저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있을거야.
조세핀이 시키는 대로 밖에 나가서 책을 읽겠지. 그애들의 꿍꿍이를 모르는 채 하면서 기사 아서길런의 옆을 산책할거야. 그걸로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아. 그가 내 옆에 앉아있고, 나는 천천히 산책을 하며 몰래 그를 염탐할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살아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행복할 거야.
하지만 쓸데없는 때만 눈치 빠른 라이너는 곧 물을 거야.
“너 아는구나, 에드위나야.”
내가 말할거야.
“그래, 나는 알아.”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을거야. 그가 나를 안고, 나도 그를 안겠지. 하지만 모든 건 다 똑같이 해야하니까 잠자코 99일을 채울거란다. 그래야 다시 널 만날 수 있을테니 말이야.
매일같이 그 생각을 하면서 웃던 때가 있었단다.
코델리아, 너도 이제 알까. 하루를 덜 살아도 상관없으니, 한번 더 되돌려야겠는 마음을.
어쩌면 난 꽃 같은 네가 영영 그 맘을 모르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만 알 수 있는 감정이니 말이야.
내 손이ㅡ로 그의 눈을 감기우고 내가 직접 그의 무덤을 만들면서는, 정말이지 매일같이 그 생각을 했단다. 언젠가는 코델리아를 다 키워놓고 그때로 돌아갈거야.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안아보면 되는거지, 그리고 그게 내 수명의 전부면 거기서 죽어버리지.
지금쯤 넌, 그럼 난 어떻게 되는거냐며 무책임하다고 화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땐 정말 그렇게 생각했단다. 아니 사실, 그러지 못할 거라면 영원히 팔찌 같은 걸 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는 대신 나는 라이너가 이미 죽었고, 내가 없고, 너 역시도 없는 세상으로 왔단다. 옐링 저책으로 돌아온 내 오래된 벗 조세핀이 있는 곳으로 말이야.
처음에 난 그저 팔찌를 맡길 계획이었어.
언젠가는 아치나 코델리아가 팔찌를 찾으러 올 거라 말해주려 했지.
하지만 그애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날 붙들더구나.
언제나 말없니 내 부탁을 모두 들어주던 애가 처음으로 내게 조건을 걸었지.
“팔찌를 맡기는 대신 하나만, 하나만 해줘, 앤.”
열 여섯살 때 이후로 단 한번도 그렇게 말한 적이 없었던 그애가, 정말 오랜만에 나를 앤이라 부르며 친구 취급을 해주었지. 그리고 이렇게 말했어.
“내 아이를 살려줘. 1년 전, 아니 한 달 전으로만 되돌아가줘.”
그제야 나는 아주 오랜만에 나의 오래된 벗의 친구가 되어 고된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얻었단다.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길 뻔한 일, 그 아이를 겨우 데려와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일, 매일 같이 아이를 빼앗길까 노심초사하며 방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살던 일, 열이 오르는 그 아이를 붙잡고 어쩔 줄을 모르던 일, 그러다 그만 그애가 죽어버린 일까지.
그 이야기를 들은 후에는 듣기 전과 같을 수 없었지.
그 일을 겪은 내 친구과 그 전과 같을 수 없는 것처럼.
조세핀이 내게 부탁했지.
“일년 전으로 돌아가. 그리고 아이를 내게서 빼앗아 가. 그리고 더 먼 미래로 가. 조금만 더 아이가 살 수 있게.”
처음엔 난 고개를 저었지.
“그렇게 해본 적은 없어.
“하지만 할 수 있잖아, 에드위나.”
내가 걱정하는 건 이름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라 조세핀이었지. 1년 전으로 돌아가 아이를 데리고, 다시 먼 미래로 데려놓고 온다면, 그럼 조세핀은 대체 무얼 기억할까? 이미 죽은 아이를? 오늘 나와 나눈 대화를? 내가 아이를 데려갔다는 사실을?
나는 물었지.
“네 기억이 엉망이 되면 어떡해?”
“상관없어.”
조세핀은 단호했단다.
“아이를 살려줘.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곳으로 데려가줘. 네 딸처럼 말이 아주 많은 애로 키워줘. 아니야. 무엇이 되었든 상관없어. 그애가 그냥 살아있게만 해줘.”
그래서 나는 조세핀을 떠났지. 그리고 조금 더 전의 옐링저택으로 갔어.
아이를 붙들고 방에 골몰해 있는 그애를 설득했고, 말이 많은 아이로 키워주겠다며 빼앗다 시피 해서 아이를 가져갔지.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곳 따위 고를 겨를이 없었어. 내게 남은 시간은 뻔했고, 나는 마음이 아주 급했으니까. 나는 그대로 그 갓난애를 데리고 레테 수도원으로 갔지.
그곳은 언제나처럼 조용했어. 그리고 문 앞에 그애를 내려놓으려는데 아치와 눈이 마주쳤단다.
그애는 급하게 아이를 두고 가는 날 잡지 않더구나.
나를 부르는 대신 그저 아이를 안아들었지.
그리고 크게 소리쳐서 수도사들을 불러모았어. 그 소리에 놀란 아이가 깨는 걸 보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단다.
그러면서도 생각했어.
그애는 행복하게 자랄거라고.
그러면 내 오랜 벗 역시 행복해질테고, 언젠가는 그애가 너에게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겠지. 네 아빠가 얼마나 무모한 사람이었는지, 그 사랑을 내가 얼마나 늦게 깨달았는지,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이 너를 사랑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야.
수다를 들어줄 사람만 있으면 언제나 실컷 떠들 줄 아는 그애는, 그때쯤엔 제 아이를 찾아안고는 웃으며 네게 팔찌를 줄거야.
코델리아, 그럼 이제 네가 할 것은 정해져있단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팔찌를 왼 팔에 차렴.
그리고 오른손으로 네 왼 팔을 잡아.
그것을 잡고 내가 널 위해 꾸려놓았던 그 세상으로 다시 가.
우리가 행복하게 살았던 그곳으로 말야.
아니, 이곳이 마음에 든다면 남아도 좋겠지.
네가 사랑하는 사람의 세상에서 너 역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어찌되었든 선택은 네 몫이란다.
무엇을 선택하든 사람을 만나면 항상 웃으렴.
물건을 건네받을 땐 고맙다고 말하고,
호의를 거절할 땐 미안하다고 해.
웃지 못하게 힘들 땐 울어도 좋지만,
그럴 여력이 있으면 남을 웃기는 데 힘을 써도 좋겠지.
쓸데 없이 무례한 사람들에게 까지 친절할 필요는 없어.
그래도 짜증은 그만 부리고, 신호를 건널 땐 늘 좌우를 살피거라.
그래, 내가 너에게 할 말은 이게 전부야.
길다고 투덜거릴 지도 모르겠지만 너희 아빠라면 이백장은 더 썼을 거란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이라고 하면서 다시 서너장을 할애하겠지.
하지만 엄마는 너희 부녀와는 조금 다른 사람이니, 그냥 이렇게 편지를 끝내마.
코델리아, 기억하렴.
네가 어디에 있든 엄마는 영원히 널 사랑할거야.
-앤 에드위나 셀리네 그레이.
추신: 너희 아빠나 너 같은 사람들은 추신이 없으면 정이 없다고 사람을 헐뜯지. 너도 그런 사람이 될거니?
========== 작품 후기 ==========
독자님들께.
저는 작품 후기가 없어도 독자님들이 정이 없다고 헐뜯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냥 쓰고 싶어서 쓴답니다. 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추신: 추천을 구걸하는 마음이 정말 아니에요.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 마지막 한편이 남았습니다.
<-- 어쩌면 두 사람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