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답장을 주세요,왕자님-56화 (56/56)

#56

손목에 달랑거리는 팔찌를 느끼며 코델리아는 눈을 떴다.

분명 왼팔을 붙잡고 생각했다. 아치가 있는, 리암이 있던, 그를 보았던,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그곳으로 가달라고.

그리고 언제나처럼 팔찌는 제대로 된 곳으로 코델리아를 데려가주지 않았다.

사방은 연초록빛으로 가득했고, 햇살은 8월이라 하기엔 너무 온화했다. 그리고, 가렛이 코델리아에게 말했다.

“창고에서 떨어지기라도 했어? 무슨 일이야 대체? 퇴근 후에 저녁 일곱시까지포토벨로로 간다고 했지? 그런 넋이 나간 얼굴로 괜찮겠어? 내가 같이 가줄까?”

코델리아는 급하게 전화기를 열어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6월 5일 수요일. 오후 4시.

그러나 일곱시까지 기다릴 여력은 없었다. 코델리아는 그대로 회사를 뛰쳐나가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여느때처럼 플라타너스의 인사를 받으며 커다란 길가를 지났다. 연초록색 여름 잎사귀가 살랑살랑 코델리아를 맞이해주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이름 모를 나무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났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면 바로 초록색 간판이 보인다.

어떻게 내린지도 모르게 급히 버스에서 내렸다. 달리듯이 걸어 그곳에 도착했다. 무거운 문이 열렸고 딸랑, 하고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정보다 3시간 이르게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암이 서 있었다.

“코델리아 그레이.”

리암, 아니 아치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생글 생글 웃으며 다가왔다.

코델리아는 처음을 회상했다. 바보같아 보일 걸 알면서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잘생긴 얼굴만 바라보던 때를.

이제는 그때와 같지 않았다. 그러나 울컥하는 마음에 입이 떼어지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요정처럼 오묘한 하늘색을 띈 눈동자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처음인듯, 혹은 아주 오랜만인듯한 생경함과 놀라움을 담은 두 눈.

코델리아는 어서 입을 열어 수 많은 미사여구로 자신이 이 하늘색 눈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중에 함께 했던 편지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며, 코델리아는 그저 그를 껴안았다.

“아치 앨버트 윌리엄.”

커다란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주춤, 그의 몸이 어지럼증이라도 타듯이 흔들렸다. 수많은 기억이 한 번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코델리아는 알 수 있었다.

“코델리아, 나의 코코.”

억센 팔이 조심스럽게 코델리아를 안아왔다. 그제야, 모든 것이 평온해졌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잠자코 몇 분을 있었다.

편지를 나누던 동안, 내내 이렇게 안고싶었다는 듯이, 서로를 끌어안는 힘은 약해질 줄을 몰랐다.

히끗히끗한 머리의 노부인이 종을 울리며 들어와, 두 사람을 타박하며 온갖 물건을 쓸어가는 일곱시쯤 까지, 둘은 계속해서 서로의 온기를 느끼고 서 있을 참이었다.

종이에만 담아 전해도 그렇게나 따뜻했던 것을 이제야 손 안에 움켜쥘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렇게 한참의 포옹 후에는 자연스럽게 입맞춤이 이어졌다. 처음인듯 떨리는 입술이 서로를 탐했고, 머뭇 머뭇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인 것 같은 어색한 인사 다음에는 쭈뼛쭈뼛 눈을 마주치다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에 앉아, 서로의 몸을 탐색할 새도 없이 끝없는 수다가 이어졌고, 눈물과 웃음이 그곳에 섞여있었다. 새벽이 다 되었을 때쯤에야 이 열정적인 연인들은 밝아오는 해 속에서도 부끄럼도 모르고 몸을 섞었다. 그리고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에야 코델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굴 몸을 한번 굴린 후 바로 바닥에 다리가 딛어지지 않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코델리아는 지금 누워있는 곳이 자기 침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그제야 웃으며 눈도 뜨기 전에 왼발부터 뻗어 제 옆자리를 더듬어보았다.

하지만 그곳엔 제법 듬직한 몸을 한 황홀한 얼굴의 그녀의 사랑대신에 바스락, 바스락 거리는 종이 두 장이 놓여있었다.

그제야 깜짝 놀라 코델리아는 눈을 뜨고 제 손에 집힌 편지를 펼쳤다.

[코델리아, 살아있어요?]

당황스러웠다.

세상에, 이제와서 다시 또 편지라니.

코델리아는 황급히 다음 장을 넘겼다.

[꼭 죽은 것 처럼 자네.

이건 또 처음 알게 된 사실이군요. 어쨌든 내가 당신을 그렇게 푹 잠에 빠뜨렸던 것은 자랑할 법한 일입니다. 잠에서 꺠어나 눈을 뜨고 이 편지를 읽을 만큼 정신이 멀쩡해졌다면 문을 열고 어서 나와요. 팬 케이크라도 구워둘 테니.

추신: 7년 동안 내가 또 어떤 요리들을 배웠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언제나처럼 사랑을 담아, 당신의 아치 앨버트 윌리엄.

추신: 내가 아까 당신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

편지를 한손으로 붙든 채, 코델리아는 문을 열었다.

거기엔 서책보관함 대신, 아치 앨버트 윌리엄이 서있었다.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열심히 팬케이크를 뒤집다 말고 그가 돌아본다.

그리고 웃는다. 아름다운 입술이 열린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코코, 일어났어요?”

“대체 저 편지는 뭐예요?”

“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당신에게 내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만...”

“그러게요. 그건 의무라고요.”

“놀랍게도 당신은 내 얼굴이 아니라 편지에 반했으니까 말이죠, 내 사랑.

두 사람은 다시 얼굴을 맞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

번개라도 맞는 것처럼 첫 눈에 반해버리는 사랑.

지나가는 비인줄 알고 그냥 걸어가려다 나도 모르는 새에 흠뻑 젖어버리는 사랑.

어쩌면 두 사람의 경우에는 둘 모두인지도 몰랐다.

-끝-

========== 작품 후기 ==========

지금까지 읽씹왕자... 아니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말 정말로요.

<-- 작품 후기 혹은 마지막 편지 -->

사랑하는 독자님들께.

후기를 쓸 때는 늘 후련했습니다.

거의 뭐 후기를 쓰기 위해 완결을 짓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게 독자님들께 드리는 마지막 편지라 생각하니 오늘은 괜히 서글퍼지네요.

베데르와 조세핀의 가호를 온몸에 받은 제가 얼마나 말많은 사람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후기에는 이 소설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모든 티엠아이를 쏟아내고자 했건만, 정작 완결을 짓고 나니 아무 말도 보태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내일이면 후회하면서 말을 길게 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었다고 땅을 치며 베데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겠으나, 소설은 이미 끝났으니 거기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거니 하는 생각도 합니다.

다만 후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소설을 쓰는 연초록달, 초열달, 열매달, 그리고 포도달 내내 제가 얼마나 행복했나에 관해서입니다.

몇몇 장면은 집에서 고양이들과 함께, 어떤 장면은 제가 등장인물을 죽일때마다 가는 집앞 할리스에서, 또 아주 피곤한 때에는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바빠서 정신이 없을 때에는 일터, 혹은 부엌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서, 어떤 때에는 밤을 새운 아침에 소파에 앉아서 더듬더듬 글을 썼습니다.

이건 제 사정이며, 안한다고 해놓고 하는 티엠아이고, 독자님들께는 또 독자님들만의 독서환경이 있었겠지요.

버스 안에서, 잠 드려고 누우신 침대에서, 학교 가는 길, 회사에서 몰래,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그 어떤 때라도 제 글을 읽으며 아주 잠깐의 웃음을 터뜨리셨다면 그게 비웃음이었더라고 해도 정말 행복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저든,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이든, 언젠가 이 글을 다시 꺼내보시면 그때의 열악했던, 혹은 즐거웠던 시간들이 다시 흘러나왔으면 하고 바라봅니다. 반대로 어느 곳에 있는지를 잊고 아치와 코코만 상상하시며 즐거우셨다면 그건 그거대로 몹시 기쁜 일이고요.

서간체 소설에 마이너한 글이라 생각했기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봐주실 줄은 미처 몰랐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봐주신 것은 ‘편지’ 라는 것의 특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소설을 준비하면서 읽은 편지에 관한 어느 책의 서문엔 이렇게 적혀있더군요.

“편지는 우리에게 좀 더 폭넓은 삶을 허락하는 힘이 있다. 동기를 드러내어 이해가 깊어지게 한다. 증거가 된다.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꿔놓는다. 일찍이 사람들은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에 사로잡혔다. 편지는 인간 소통의 윤활유이자 생각의 자유낙하이며, 중요한 것과 부수적인 것, 우리의 멋진 날에 관한 이야기, 가장 묵직한 사랑의 기쁨과 슬픔을 조용히 전하는 전달자였다. 편지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편지 없는 세상은 분명 산소 없는 세상일테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다가 뭐 또 이렇게까지 거창할 일인가 싶다가, 괜히 감격스러워지기도 하는 멋진 문장이지요?

사람들이 편지를 주고 받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문자로 소통하는 많은 장치가 있다는 걸 압니다. 아치와 코코가 짧게 던지는 말처럼 문자로, 카톡으로, 메일로, 트위터로, 여러가지 장치로 상대의 말이 내 말에게 와닿을 때, 다시 받아치는 말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을 보낼지를 생각할 때, 그런 때의 설레임이 사랑으로 변하는 순간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순간을 그리려 글을 쓰면서 독자님들께 그런 설렘을 많이도 받은 것 같습니다.

저만 재밌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밤을 지새울때마다 재밌다고 해주시던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합니다. 댓글로, 쪽지로, 메일로, 정성어린 감상을 보내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리고요. 글의 작은 장치 하나하나를 알아주시고, 감탄해주셨던 분들에게도 영혼의 교감이라도 한 듯 혼자 내적 친분을 느꼈습니다. 댓글에 추천해주시는 모든 노래, 작품들을 같이 향유하며 여름을 보냈고요. 혹시나 못 알아채면 어쩌지 하는 조바심을 단번에 날려주는 셜록독자님들의 댓글에는 감탄을 마지 않았고, 어떤 댓글은 제가 생각한 줄거리보다 훨씬 더 좋은 것 같아 판을 깔고 대화를 해보고 싶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와 함께 댓글에 편지를 써주시던 모든 독자님들도, 이 글을 읽고 책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고 말씀하신 독자님들(재미없어도 저를 욕하진 마세요..), 이 글을 읽고 옛 편지를 들춰보았다는 독자님들,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는 독자님들. 아치와 코코, 세실, 라이너를 그려주신 독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모든 분들 덕분에 정말 꿈같은 여름이었답니다.

완결에 맞추어 거짓말처럼 여름이 뚝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치와 코코는 아마, 런던 어딘가에서 책을 읽고 편지를 주고 받으며 살고 있겠지요.

적어도 제 안에서는 그렇습니다.

독자님들 안에서도, 두 사람이 영국의 수많은 공원 어딘가에서, 에드위나 공주와 라이너 황자처럼 한 사람을 무릎을 베고 눕고, 다른 한 사람을 책을 읽어주며, 오래토록 행복하게 살아있기를 바랍니다.

-가을 한 복판에서, 유폴히 올림.

추신1. 답장을 주세요 왕자님은 11월쯤 전자책이 출간될 예정입니다. 하여, 글은 빠른 시일내에 내리겠습니다. 출시 될 이북에서는 빵빵한 외전을 준비...중이니, 본편이 실망스럽다 하신 분들께서는... 외전에서 그 실망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네.. 사랑합니다..

추신2. 소장본 폼이 열렸습니다. 수요조사 해주신 분들은 로긴 하시면 알림을 받으실 수 있고요. 하지 않으신 분들은 트위터 @exlibrispaul 와 작품 공지사항에 주소 올려두도록 하겠습니다. 욕심을 내서 하드커버 양장 실제본을 계획했기에 가격이 아주 싸지만은 않네요. 전자책을...많이 사랑해주세요..ㅠㅠ

추신3: 후기에 별 말 안 쓸 거 처럼 해놓고 결국 길게 쓰긴 했네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원래 쓰려고 했던 건 얼마나 길었겠어요....?

========== 작품 후기 ==========

읽어주시고, 선작, 추천, 댓글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독자님들은 제게 조세핀의 시나몬롤이며, 노엘의 레이어케이크, 에드위나와 라이너의 포도같은 존재들이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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