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저를 납치해 주세요
“사냥 대회의 그 기사님이시군요!”
“하핫, 네. 맞습니다. 기억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기사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차를 나눠 주며 수줍게 웃었다.
가만히 보니 아주 잘생긴 얼굴인데, 이런 사람을 잊고 있었다는 건…… 내가 대공님한테 정신이 홀딱 팔려 있었단 뜻이겠지.
‘7년 전 사냥 대회라…… 벌써 오래전 일이구나.’
당시 14세였던 나는, 귀족 아가씨들이 으레 그러하듯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려고 장식 끈을 만들었더랬다.
내가 장식 끈을 주고 싶었던 사람은 당연히 대공님이었다.
심지어 그때는 막 반했던 상태라 지금보다 훨씬 진심이었다.
대공님과의 ‘진짜’ 연애를 꿈꿨던 과거의 나를 떠올리니 입맛이 쓰다.
‘그 장식 끈은 결국 전해지지 못했지.’
처음 만들어 본 것이라 너무 형편없었다.
그런 못생긴 장식 끈을 감히 대공님께 전해 드릴 수 없어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데, 제게 주시지 않겠냐고 정중히 청해 왔던 사람이 바로 저 금발의 기사였다.
‘그때, 왠지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
내 마음이 버려지지 않았다는, 그런 위안이라 해야 할까?
“저, 아가씨…… 고기가 다 익었는데…….”
“아.”
생각에 잠긴 채라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기사가 민망한 듯 헛기침하며 내게 꼬치를 내밀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양고기인가?’
그 비슷한 냄새가 났다.
위에 뿌린 향신료 때문에 양 특유의 냄새는 많이 죽은 것 같지만.
나는 노릇노릇 구워진 따끈한 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고기의 고소한 맛과 향신료 향기가 입안 가득 스며든다.
‘맛있다!’
난 꼬치 하나를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잘 먹는 내 모습을 다른 네 사람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어 왠지 민망했다.
“아가씨, 구운 채소도 좀 드셔 보세요.”
“여기 감자도 있습니다.”
“닭고기 국물도 끓였는데, 드릴까요?”
“양념을 발라 구운 소고기는 어떠십니까?”
네 사람은 앞 다투어 내게 음식을 권했다.
마치 나를 살찌우는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이……! 나는 주면 주는 대로 입안에 쑤셔 넣는 햄스터가 아니라고!
“헉, 이거 진짜 맛있다.”
“그렇지요? 따뜻한 국물도 좀 드셔요.”
“하, 개운하다…….”
“고기에 양념이 잘 배었지요?”
“네, 너무 맛있어요!”
“감자도 맛있습니다.”
“그러게요! 정말 고소해요!”
……햄스터가 맞는 것 같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먹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일행은 천막을 걷고 짐을 챙겼다. 그리고 마차를 세워 뒀던 곳으로 돌아갔다.
마차는 참담한 모습이었다. 진흙에 파묻혀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모양새라고 해야 할까…….
‘피신을 안 했으면 그대로 마차와 함께 화석이 되었겠다.’
“진흙이 굳기 전에 얼른 바퀴를 빼내야겠습니다.”
“그러지요. 일단 바퀴를 빼내고 위로 올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기사와 마부는 마차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상의하더니, 곧 소매를 걷어붙였다.
“하나, 둘, 셋!”
다행히 마부도 기사도 힘이 장사라 바퀴를 빼내는 것은 문제없었다.
해리스 남작이 두 사람을 거들어 마차를 뒤에서부터 쭉 미니, 굳기 시작한 땅을 딛고 바퀴가 앞으로 쭉 굴러갔다.
일행은 땅이 가장 단단히 굳은 자리에다 마차를 세워 두고, 햇빛에 빗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그러기를 한두 시간쯤 지났을까?
구름이 전부 걷히자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물기가 마르고 길이 단단해졌다.
“그럼 이만 출발할까요? 아가씨들 그리고 남작님, 조심해서 마차에 오르시지요.”
고생한 말들에게 물과 먹이를 주고 나서, 마부가 말했다.
나는 해리스 남작 그리고 엠마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다행히 빗물이 샌 곳은 없어, 마차 안은 비교적 쾌적했다.
얼마 안 있어 “이랴!” 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했다.
“히이잉―” 하고 우는 말들이 왠지 불만에 찬 듯 느껴져서, 어서 숙소를 찾아 말들을 쉬게 해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영지까지는 반나절 정도 남았지만, 인근 여관에서 하룻밤 묵고 가는 편이 좋겠다는 마부의 의견에 다들 동의했다.
어둑어둑한 밤인데다가 날씨가 무척 추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여관은 깨끗하고 좋은 곳이었다.
나는 엠마와 함께 배정 받은 2인실에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잠자리에 누웠다.
피곤했는지 금방 곯아떨어진 후 밤새 푹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몸이 좀 무거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내려가서 식사할까요? 아가씨.”
“응.”
나는 꼼꼼히 세수한 뒤 은색 빗으로 머리를 빗어 초록색 리본으로 묶었다.
그리고 1층으로 내려가 보니, 일행이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엠마와 함께 그쪽으로 걸어가던 나는, 원래 일행인 세 사람 외에 다른 두 사람이 더 있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어라……?’
그중 한 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왜 여기에 있지?
“숙부님?”
“오! 왔구나! 비비안!”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벤자민 숙부님이었다. 우리 아버지의 동생.
“이런 데서 다 뵙네요. 숙부님도 여행 중이신가요?”
나는 숙부님 옆에 앉은 사람을 흘끗 보았다. 2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날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으엑. 뭐야.’
난 인상을 찌푸릴 뻔했다가, 가까스로 얼굴 근육을 붙잡았다.
“비비안, 잠깐 기다려라!”
자리에 앉으려는데, 숙부님이 갑자기 내 어깨를 붙잡곤 다른 자리로 이끌었다.
“자, 여기 앉으렴.”
“숙부님?”
왜 이러시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예의 남자가 이쪽으로 느긋하게 다가오더니 내 맞은편에 앉았다.
‘……?’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비비안, 여기 이 청년은 앨빈 자작이란다. 인사하렴.”
마치 선 자리를 주선하듯, 숙부님이 싱글싱글 웃으며 내게 인사할 것을 종용했다.
‘뭐야, 이게…… 맞선?’
너무 어이없는 일이라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요양차 영지로 내려가는 귀족 영애를, 갑자기 맞선 자리에 앉히다니?
아버지가 이런 황당한 맞선을 허락했을 리 만무하니, 숙부님이 마음대로 벌인 일이 틀림없었다.
‘설마, 대공님하고 내 사이의 일을 그새 어디서 주워들은 건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내가 영지에 내려간다는 소식만 들었을 수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불쾌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한 여행길에 격식도 없이 맞선을 보게 하다니?
‘숙부님, 진짜…… 답이 없으시네.’
숙부님이 막장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말로 가관이었다.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일러바쳐야지.
“처음 뵙겠습니다, 루이스 백작 영애. 저는 스콧 앨빈이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앨빈 자작이 먼저 나서서 인사해왔다.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살펴봤다.
살짝 곱슬기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에 회색 눈,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인데 왠지 모르게 야비한 인상.
내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이런 여관에서 맞선을 보려는 이 남자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아…….’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비비안 루이스예요.”
“하하,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긴장한 거 아닌데. 그냥 싫은 건데.
“듣던 대로 미인이시네요. 비비안이라고 불러도 괜찮죠? 아니면 애칭으로 부를까요? 비비? 비브? 안나? 어느 쪽인가요?”
“네?”
뭐야, 미친 거 아니야?
“저기, 초면에 이름이나 애칭은 좀―.”
“비비안도 편하게 스콧이라고 불러요.”
남자가 눈을 찡긋했다. 난 너무 황당해서 입을 딱 벌린 채 굳어 버렸다.
‘애칭으로 안 부른 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하나?’
애칭으로 불렸으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앨빈 자작은 다리를 꼬며 뻐기듯 말했다.
“사실 제 영지에서 얼마 전 금광이 발견되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좀 부유합니다.”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돈 자랑 하는 사람은 질색이었다.
‘아무리 우리 가문이 세가 죽었다지만…… 이건 너무하는 거 아니야? 숙부님?’
숙부님을 흘겨보자, 그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와, 저 인간 진짜……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을 때부터 알아봤어. 답이 없어, 정말.
“저와 결혼하면 분명 이득일 겁니다. 비비안도 그런 낡은 드레스가 아니라 화려하고 세련된 옷을 걸치고 싶죠? 가난한 집에서 잘 못 꾸미는 티가 나네요. 하지만 저랑 결혼하면―.”
“그만! 더는 못 들어 주겠네요!”
나는 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침 테이블 위 놓인 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난 그것을 집어 들어, 앨빈 자작의 얼굴에 물을 확 끼얹었다.
촤악!
뚝, 뚝…….
딱딱하게 굳어 버린 앨빈 자작의 얼굴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짐짓 화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루이스 백작가가 가난해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 구걸해야 할 정도는 아니에요.”
부산스럽던 여관 홀에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난 이 장소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내게 쏠렸음을 느낄 수 있었다.
‘으…… 사람들 앞에서 이게 무슨 망신이야!’
당장이라도 2층으로 달려가 방에 숨고 싶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우리 집을, 내 가족들을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이런 여관에서 나랑 선을 볼 생각을 하고, 마구 무례하게 굴고, 가난하다며 대놓고 흉을 볼까!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나왔다.
“당신한테 구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우리 숙부님이겠죠! 또 어디 도박장에 가서 탕진하고 오신 건가요? 숙부님!”
“뭐, 뭐, 뭐라고? 비비안, 너―.”
“숙부님,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돈이 없다고 조카를 팔아요?”
“아니, 이 계집애가!”
얼굴이 새빨개진 숙부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려는데.
쾅!
내 맞은편의 앨빈 자작이 갑자기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몸을 일으켰다.
나는 깜짝 놀라 움찔했다. 그다음 벌어진 모든 일은 아주 느리게 재생되는 것처럼 보였다.
날 향해 팔을 들어 올리는 앨빈 자작의 등 너머로 호위 기사가 달려왔고, 그가 미처 붙잡지 못한 자작의 손이 날 내리치려는 순간―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
타격감과 함께 고통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고 웅크려 있는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나는 살그머니 실눈을 떴다. 앨빈 자작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멀거니 눈만 깜박거리던 나는, 문득 들려온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난 대경실색했다.
웬 키 큰 사람이 자작을 벽에 처박고서 그의 목을 조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
어딘가 익숙한 사람의 뒷모습.
‘설마?’
나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나 혹시 죽었나?’
아니면 꿈? 뺨을 찰싹 때려 보는데, 앨빈 자작의 괴로운 신음이 들려왔다.
“커억, 컥, 크윽……!”
뒤이어,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온 기사 두 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악! 미친! 레녹스 전하!”
“전하! 그거 그러다 죽습니다!”
‘전하’라는, 이런 여관에서 울려 퍼지기에는 너무도 묵직한 칭호에 사위가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크흑, 커허헉…….”
“전하! 죽는다고요!”
“아오, 요새 잠잠하시더니 왜 또 이러셔!”
기사들은 낑낑거리며 ‘그’의 팔을 자작에게서 떼어 놓으려 애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쪽으로 다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 사람’을 불렀다.
온 대륙에서, 이 세상에서, 그 칭호가 허락된 유일한 사람.
“대공님……?”
움찔, 내 목소리에 반응한 대공님이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정말로, 내게 잘 웃어 주었던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르륵―.
힘이 빠진 대공님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자작이 미끄러져 내렸다.
의식을 잃은 듯 보였지만 다행히 죽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다시 대공님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입술만 달싹거릴 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대공님의 서늘한 푸른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으스스 한기가 들었다.
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대공님이 나를 덥석 붙잡았다.
“흣―.”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키며 어깨를 움츠리자, 날 붙잡았던 대공님의 손에서 힘이 살짝 풀렸다.
나는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들었다.
대공님이 가까이에서 날 내려다보고 계셨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내가 이곳에 있음을 확인하듯이.
“대공, 님…….”
내가 힘겹게 불렀다. 대공님이 계속 말없이 나를 살펴보기만 해서 당혹스러웠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고민하는데, 대공님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비비안, 지금부터 당신을 납치할 겁니다.”
“……네?”
방금 뭐라고…….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날 보며, 대공님이 삐딱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푸른 눈이 일변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퍼뜩 기시감을 느꼈다.
‘……맛이 간 눈!’
대공님이 제정신 아닐 때의 눈빛이었다!
“대― 꺄악!”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대공님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난 그의 품에 갇힌 채 발만 동동 굴렸다.
내 호위 기사가 “아가씨!”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이게 대체 뭔―!”
“와, 대박. 완전 일 났네.”
대공가의 두 기사가 뒤따라왔다. 대공님은 그들을 유령 취급하며 오직 내게만 질문했다.
“비비안, 내가 당신을 납치하길 원합니까?”
“네? 자, 잠시만요, 저 너무 당황스러워서―.”
“싫어요, 좋아요, 두 가지로만 대답해요.”
대공님이 나를 땅에 내려놓고선 두 팔로 빈틈없이 내 몸을 끌어안았다.
그 탓에 난 고개를 훅 꺾어 그를 올려다봐야 했다.
내 두 손은 대공님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고, 하늘빛 눈동자가 대답을 종용하듯 날 옭아매고 있었다.
“저는…….”
엠마와 호위 기사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나는 그들이 내게 뭐라 외치는 소리를 흘려들으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다가―.
“좋아요…….”
―라고 대답해 버리고야 말았다.
대공님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려 웃었다. 두 눈은 초승달처럼 휘어지고, 얼굴에서 환하게 빛이 났다.
그가 나를 꼭 껴안았다. 원하는 답을 듣게 되어 기쁜 듯이.
대공님은 날 끌어안은 채, 기사 둘을 돌아보며 명령했다.
“그 새끼는 너희가 알아서 족쳐 놔라.”
“…….”
“그 새끼 가문도 족칠 거니까, 신상 정보도 입수해 놓고.”
냉기가 폴폴 느껴지는 싸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를 돌아보는 얼굴은 마냥 다정하기만 했다.
“폭군이 따로 없으시네, 진짜…….”
대공가의 기사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님은 날 향해 산뜻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럼 갈까? 비비안?”
“네…….”
소심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끄덕이니, 대공님이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곧이어 불가사의한 흔들림과 함께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였고,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