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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난 대공님 거, 대공님은 내 거 (27/100)

27화. 난 대공님 거, 대공님은 내 거

‘뭐―’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대공님! 어쩜 이렇게 부끄러운 말을 곧잘 하실까?

못 하시는 게 없다더니, 부끄러운 말도 잘 하시는 모양이었다.

“힉―”

그가 내 입술을 살짝 핥았고, 난 놀라 버둥거렸다.

“대, 대공님.”

“응, 비비안.”

“자꾸 그렇게 맛보듯 핥으실 거예요?!”

“맛있는 걸 어떡해요?”

“악!”

대공님의 망언에 치가 떨린다!

‘대공님이 이렇게나 장난스럽고……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일 줄이야!’

그래도 좋지만!

‘하지만 좋은 건 좋은 거고, 얄미운 건 얄미운 거야.’

난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대뜸 내뱉었다.

“저, 저보다는!”

“?”

“대공님이 더 달거든요!”

“……응?”

대공님이 실소할 듯 입술을 씰룩거렸다.

나는 조금 정신 줄을 놓았다. ……방금 내가 뭐라 한 거지?

‘내 망언에 치가 떨린다…….’

이런 걸 두고 내로남불이라고 하는 건가?

하지만…… 기왕 내로남불한 거, 제대로 해 버리자.

대공님에게 복수(?)도 할 겸!

“……!”

난 대공님의 멱살을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쪽―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세게 입술을 부딪쳤다.

그러나 단순히 입술이 맞닿은 거로는 약한 것 같아서, 좀 더 대범해지기로 했다.

“비…….”

내 이름을 부르려는 대공님의 입술을 핥고, 쿡 깨물어 버렸다.

저, 저도 맛볼 줄 알거든요?

난 눈을 꾹 감고 그의 입안으로 숨결을 불어넣으며 키스하다가, 재빨리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는 제풀에 지쳐 헐떡이며 대공님을 바라보자니…….

그는 전에 없이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비안…….”

‘으아악!’

대공님이 이성이 날아간 듯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눈동자도 맛이 가 있었다!

‘이대론 위험해!’

도망치자!

나는 그가 날 붙잡기 전에 재빨리 등을 돌려 도망쳤다.

그 와중에 삐끗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약혼식에서 뛰다가 넘어질 뻔한 레이디라니, 우습기 짝이 없을 테니까!

‘대부인은 어디 계시지?’

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대부인을 찾았다.

이 자리에서 대공님의 목줄을 당길 수 있는 사람은 대부인이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대부인은 잠시 홀을 빠져나가셨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난 발을 동동 굴렀다.

‘이대로는 대공님한테 붙잡힐 거야……!’

그리고 그다음엔…….

‘으아아∼!’

이렇게 사람이 많은 연회장에서 진한 애정 행각을 선보이는 예비부부라니요!

그거 너무 창피해!

‘이, 일단, 선대공 전하께라도 가보자.’

난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이 내게 인사를 해왔지만, 정신이 없어서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마침내 선대공 전하 앞에 멈춰 서자, 선대공께서 날 돌아보셨다.

“……아가?”

“아버님…….”

난 선대공 전하의 옷자락을 꼭 그러쥐며 울먹거렸다.

그러자 선대공 전하께서 잠시 멈칫하시더니, 왜인지 손으로 입가를 가리시며 고개를 숙이셨다.

“……?”

왜 그러시지?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자니, 선대공 전하께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우리 며느리…… 너무 귀엽지 않습니까?”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선대공 전하의 옆에 서 있던 손님은 벙한 표정을 짓더니, 당혹스러움을 애써 감추는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 예, 무척 귀여운 며느님이십니다. 하하.”

웃음소리에 영혼이 없었다.

그러나 선대공께선 그걸 눈치채시지 못한 듯,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날 바라보셨다.

그가 날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아가, 그런데 왜 그러느냐?”

난 선대공 전하의, 대공님과 빼닮았지만 좀 더 온화해 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대답했다.

“대공님 좀 말려주세요.”

“레녹스가 왜? 아.”

선대공 전하의 시선이 내 등 뒤로 향했다.

난 쭈뼛 등골이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히이익…….’

슬금슬금, 선대공 전하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곤 고개만 빼꼼 내밀어 살펴본 정면엔…… 역시나 대공님이 와 있었다!

“……비비안.”

대공님이 날 부르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그의 눈동자엔 이성이 돌아온 듯 보였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 없었다.

대공님은 날 향해 손짓했다.

“비비안, 이리 와요.”

“시……싫어요.”

“안 괴롭힐게요. 내 곁으로 와요, 어서. 안 그럼 미치겠으니까.”

괴롭히지 않겠다는 대공님의 말이 과연 사실일까?

못내 의심스러워하며 그를 힐끗거리고 있으려니, 선대공 전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 둘, 벌써부터 부부싸움이냐?”

“아닙니다. 그냥 비비안이 도망친 것뿐이죠.”

“왜 도망쳤는데?”

“그건…….”

대공님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거침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제가 괴롭혀서요.”

‘대공님, 너무 당당하신데요.’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비비안을 너무 괴롭히지 말 거라, 녹스. 그러다 정말로 훌쩍 도망쳐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

선대공 전하의 말씀이 폭탄이라도 되었는지, 대공님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럴 일은…….”

대공님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날 뚫어지라 응시했다.

내가 대공님을 두고 도망칠 일은 추호도 없다는 대답을 원하시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게 맞긴 하다.

하지만…….

난 툭하면 나를 놀리는 대공님에게 심술을 부릴지, 아니면 솔직해질지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날 바라보는 대공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치 주인이 쓰다듬어 주길 바라는 강아지처럼 간절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대공님이 정말로 날 좋아한다는 게 실감이 났다.

‘대공님…….’

왠지 마음이 찡해져 오며, 맺혀 있던 심술이 사르르 풀렸다.

원래 사랑싸움은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하던가?

‘그래, 내가 져야지 뭐!’

이미 대공님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걸, 별수 있나!

나는 푹 한숨을 내쉬고 앞으로 나섰다.

대공님을 향해 한 발 내딛자니, 그가 어깨를 움찔하며 주먹을 꽉 쥐는 것이 보였다.

요즘 들어 든 생각인데, 내가 무언갈 할 때면 대공님이 내비치는 반응이 참 섬세했다.

난 그의 앞으로 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대공님.”

“……응, 비비안.”

“안 도망칠게요.”

“…….”

“앞으로 언제까지고 대공님 곁에 있을 테니까요.”

대공님의 손을 꼭 붙잡고 나는 방긋 웃었다.

대공님은 날 지긋이 바라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이윽고 닿아온 그의 시선이 어쩐지 복잡해 보였다.

그가 나를 좀 더 곁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절대…….”

“…….”

“안 놓아줄 거예요, 비비안.”

그렇게 말하는 대공님의 눈동자에 불꽃이 깃든 것만 같았다.

이런 걸, 집착…… 이라고 하던가?

‘조금 무서운걸.’

난 팔뚝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서운데 좋다니, 나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 * *

드디어, 반지 교환식이 진행되었다.

절차는 간단했다. 대공님과 내가 오늘부터 약혼 관계임을 발표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주면 된다.

‘와아, 예쁘다.’

난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은빛 반지를 보며 감탄했다.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오색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어찌나 영롱한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그럼…….”

대공님이 싱긋 웃으며 내 손에 반지를 끼워주었고, 은빛 링이 약지에 파고드는 것을 난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침내 반지가 내 손가락에 안착했다. 반지는 놀랄 정도로 딱 맞았다. 이거, 대공님이 여섯 달 전부터 준비했던 거라고 했던가?

‘대공님의 놀라운 준비성에 감탄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준비해왔다는 사실에 경악해야 할지…….’

대공님이 무려 5년 동안이나 날 좋아하셨다는 게, 아직까지도 안 믿긴단 말이지.

‘대공님과 내가 서로 짝사랑하고 있었다니.’

물론, 먼저 좋아한 쪽은 나고, 더 좋아하는 쪽도 나인 것 같지만!

“비비안? 이제 비비안 차례예요.”

대공님이 부르는 목소리에 난 서둘러 생각에서 벗어났다.

나는 대공님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인 후, 그의 손에 약혼반지를 끼워주었다.

‘와, 딱 맞는다.’

대공님의 반지 역시 그의 손에 빈틈없이 잘 맞았다.

“그럼, 두 사람의 약혼이 무사히 성사되었음을…….”

약혼식 주례를 선 사제가 모두에게 공고했고, 그렇게 대공님과 난 약혼 관계가 되었다.

‘꿈만 같아.’

발그레한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으려니, 대공님이 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가 내 손등 위에 천천히 입술을 내려 앉혔다.

그 순간, 사방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그중엔 내 또래 영애들의 깊은 탄식도 섞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미처 생각 못 했는데…….’

대공님과 약혼했으니,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게 되겠구나.

‘그중엔 날 질투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으음, 어쩐지 불안한걸…….

특히…… 누구였더라. 아, 그래. 모리아스 후작 영애가 가장 불안하다.

나는 맨드라미 꽃잎처럼 짙은 자줏빛 머리카락을 지닌, 보라색 눈동자의 아름다운 숙녀를 떠올렸다.

다소 까칠해 보이는 인상이긴 하지만, 모리아스 후작 영애는…….

‘……나보다 예뻐!’

으음.

딱히 위기감을 느낀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런 게 아니고, 모리아스 후작 영애가…… 대공님과 결혼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했다는 것이었다.

‘모리아스 후작 부인도 딸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굉장히 적극적이었고…….’

그들이 대공님과 나의 약혼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오늘 이 자리에 왔을까?

난 좌중을 슥 둘러보았다. 하지만 모리아스 후작 일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안 왔구나.’

하지만, 지금쯤 제도에는 소문이 쫙 퍼졌을 터.

‘모리아스 후작 영애…….’

괘, 괜찮겠지?

난 불안하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려 애쓰며, 박수를 보내오는 사람들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뭐랄까, 다정한 느낌의 미소는 아니었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날 바라보는 그의 금빛 눈동자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 * *

이브닝 파티가 시작되기 전.

난 대부인과 함께 호숫가로 왔다.

대공님과 선대공 전하, 우리 가족들, 그리고 마리나도 함께였다.

그에 더해, 오늘 객으로 참석한 모든 사람이 와글와글 쫓아왔고 말이다.

내가 정말로 정령의 선택을 받았는지, 다들 무척이나 궁금한 모양이었다.

‘만일…… 선택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흠.

하지만 이미 약혼했잖아?

사제가 주례를 서고, 신 앞에 맹세했는데요?

‘그리고 대공님이 날 절대로 안 놓아줄 거랬으니까.’

난 대공님 거, 대공님은 내 거.

대공님만 안 놓아주실 것 같나요? 저도 안 놓아드릴 건데요.

나는 내 옆에 선 대공님의 허리를 꼬옥 끌어안았다.

“?”

대공님은 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의아해하면서도 미소를 지어주었다. 더해서, 조금 기뻐 보이는 것도 같았다.

“기뻐요, 비비안. 요즘 부쩍 먼저 다가와 줘서.”

난 에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가요? 앞으로 열심히 먼저 다가갈게요.”

“그거 고맙군요…… 좀 더 대범해져도 좋아요. 예를 들면, 아까 발코니에서 키스했던 것처럼…….”

대공님이 내게 바짝 고개를 기울이고 속삭인 말에, 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입술이 아니라 다른 곳에 키스해 줘도 괜찮고요.”

“……?!”

다, 다른 곳? 어디?

당황하며 눈을 깜박이자니, 대공님이 자신의 몸을 쓱 훑어보았다.

“비비안이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

“이를테면, 비비안이 가장 좋아하는 내―”

“으아악! 그, 그만! 거기까지!”

발언 수위가 더 높아지기 전에, 난 대공님의 양쪽 뺨을 두 손으로 콱 꼬집었다.

대공님, 자제 좀 하세요! 사람들이 보고 있다고요!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자니, 대공님이 피식 웃었다.

“비비안, 그거 알아요?”

“?”

“비비안의 이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내가 장난치는 거라는걸.”

“…….”

난 대공님의 뺨을 꼬집은 손에 꽈아악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아픈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싱글벙글 웃는 게 아닌가.

……

부들부들…….

대공님의 뺨을 꼬집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대공님, 피부가 말랑말랑하고 매끈하고 좋으면 다예요? 다냐고요!

“이 녀석들아, 알콩달콩은 잠시 접어두고 어서 이리로 와!”

그때, 대부인께서 우리를 소리쳐 부르셨다.

난 하는 수 없이 대공님의 뺨을 놓아주었다.

그의 뽀얀 얼굴에 살짝 붉은 자국이 생겼는데, 그게 웃겨서 나는 연신 실실거렸다.

‘볼터치 한 것 같아.’

“자, 비비안, 여기 서 보렴.”

대부인께서 날 그녀의 옆에 서게 하셨다.

나는 뭘 어떻게 하면 되는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이윽고 대부인께서 눈을 감고 허공에 무슨 말인가 속삭이셨고, 잠시 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더니 물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마치 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두 손을 꼭 맞잡고 가만히 기다리려니,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온 물결에서 퐁퐁 방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은 이내 동그란 구슬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내가 그것과 시선을 마주치며 눈을 깜박이자, 물방울 위로 토끼 귀가 쫑긋 솟아났다.

“?”

아니, 잠깐.

난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건…… 아무리 봐도 토끼 귀였다.

물론 진짜 토끼 귀는 아니고, 정령이 토끼 귀 모양을 흉내 낸 것이었다.

“…….”

난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글렌 가문의 정령…….

너 이 자식…… 왜 하필 토끼 귀야?

‘지금 날 놀리는 거냐.’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정령이 허공에서 폴짝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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