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쉿, 들키면 안 돼
로즈월 후작은 막 해외여행을 다녀온 참이었다.
그래서 제도에 ‘어떤’ 소문이 퍼져 있는지 몰랐다.
눈앞의 귀여운 아가씨가 ‘그’ 대공의 약혼녀라는 사실은, 당연히 듣도 보도 못했다.
“분홍빛이 섞인 금발이 무척 사랑스럽네요, 아가씨.”
“뭐하시는 거예요? 만지지 마세요!”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슬쩍 만져보려 하자, 여자가 그의 손을 매섭게 쳐냈다.
로즈월 후작은 비죽 웃었다.
‘앙칼지긴.’
여자는 더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올랜드 로즈월이 누구던가?
세상에 그가 꼬셔서 넘어오지 않을 여자는 없었다.
그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아주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귀여운 아가씨도 곧 넘어오리라 확신했다.
‘생긴 건 토끼처럼 순진하게 생겨선…… 까칠하게 굴기는.’
올랜드 로즈월이 속으로 음산하게 웃었다.
제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이 여자도 결국 자신에게 함락될 것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을 피하기란 어려울 테니까.
‘크큭…….’
올랜드가 여자를 향해 ‘치명적인 미소1’을 지어 보이며, 막 입을 뗀 순간이었다.
“……?”
갑자기 등 뒤로 엄청난 한기가 느껴졌다.
올랜드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시야가 닿은 그곳엔…….
“그, 글렌 대공……?”
그를 죽일 듯 노려보는, 레녹스 글렌이 서 있었다.
* * *
‘망나니 같은 자식이…… 감히 내 비비안에게 집적거려?’
레녹스는 로즈월 후작을 붙잡아 바닥에 꽂아버리고 싶었다.
감히 비비안을 만지려 한 저 손을 부러뜨리고, 다시는 저 낯짝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코뼈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정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녹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비비안을 힐끗 보았다.
……비비안 앞에서 그런 난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의 충고가 레녹스의 뇌리를 스쳤다.
‘녹스, 너도 이젠 좀 점잖게 대처해야지. 곧 있으면 비비안이랑 결혼도 할 건데, 언제까지 주먹부터 나갈래?’
……그래.
레녹스는 인정했다. 어머니의 말이 옳았다.
그는 비비안과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은데, 화나면 주먹부터 나가는 아빠가 아이의 눈에 어떻게 보이겠는가.
레녹스는 좋은 남편, 나아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비비안을 행복하게 해주려면 반드시 그래야 했다.
‘저 자식을 응징할 방법은…….’
그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 외에도 많이 있지.’
자신은 ‘글렌 대공’이었다. 그 말인즉, 망나니 귀족 하나쯤 응징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는 뜻이었다.
레녹스가 로즈월 후작을 노려보며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마치 맹수와도 같은 위험한 분위기가 그에게서 풍겨 나왔다.
“대, 대공 전하. 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지……?”
레녹스가 앞에 멈춰 서자, 로즈월 후작이 쭈뼛거리며 물었다.
로즈월 후작을 내려다보는 레녹스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세상에는 감히 건드려선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지, 로즈월 후작.”
“예? 어…… 그, 그렇지요, 하하…….”
로즈월 후작은 도대체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은 눈치였다. 레녹스는 입매를 비딱하게 끌어올리곤 말했다.
“로즈월 후작, 방금 네놈이 작업을 걸던 상대가, 바로 내 약혼녀다.”
“……예?!”
그, 그게 무슨……! 로즈월 후작이 입을 달싹거렸다. 레녹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는 버릇을 그 나이 먹고 아직도 못 고쳤나 보군.”
“아, 아니, 그게, 대공 전하―”
로즈월 후작은 레녹스보다 세 살 더 많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지위는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기에, 로즈월 후작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저 여자가 정말 대공의 약혼녀라고?’
올랜드 로즈월은 금발 머리의 여자를 힐끗거렸다. 여자는 어느샌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귀엽긴 한데…… 그렇지만…….’
그는 여자의 외모에 대해 100점 만점에 85점 정도의 평가를 내렸다.
그럭저럭 예쁘장하지만, 사교계의 대단한 미인들에 비하면 그냥저냥이었다.
그런데 저 여자가 정말로 대공의 약혼녀라고……?
‘말도 안 돼…….’
그런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기라도 한 것일까?
갑자기 그의 멱살을 와락 붙잡은 레녹스 글렌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지었다.
“히, 히익.”
“…….”
로즈월 후작은 체면도 잊고 벌벌 떨었다.
눈앞에 사람이 아니라 웬 마수가 있었다.
“그 머리를 날려버려야 무례한 생각을 관두려나?”
“예, 예?”
“로즈월 후작…… 지금 네놈을 반죽음 만들어놓고 싶은 걸 그녀의 앞이라 참는 줄 알아라.”
레녹스 글렌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빛났다. 시선에 날이 있다면 베일 듯, 아니, 그대로 목이 날아갈 듯한 눈빛이었다.
로즈월 후작은 꼴칵 침을 삼켰다. 왜 사람들이 입을 모아 레녹스 글렌은 위험하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해야 할 행동을 재빨리 자각했다.
“대, 대공 전하!”
그는 그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려 빌었다.
“감히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용서……?”
‘용서’란 말을 느릿느릿 읊조리는 레녹스의 목소리에 한기가 돌았다.
로즈월 후작은 바닥에 엎드린 채 벌벌 떨었다.
“감히 천박하게.”
“…….”
“내 약혼녀에게 수작질한 것을.”
“…….”
“그리고 네놈 머릿속의 더러운 생각을.”
“…….”
“쉽게 용서할 수는 없지.”
“……저, 전하!”
로즈월 후작은 이제 거의 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레녹스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생각이었다.
‘로즈월 후작가에 빚이 있다고 했던가.’
지나친 사치로 올랜드 로즈월은 여기저기 빚을 졌는데, 그 돈을 메꾸려 친척들에게 손을 빌리고 있다 들었다.
‘거의 파산 직전인 재정 상태를 그나마 받쳐주고 있는 게…… 로즈월 후작가의 향수 사업이었지.’
“…….”
레녹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어떻게 응징할지, 방법은 정해졌다.
‘거지꼴이 되면 다시는 설치지 못하겠지.’
올랜드 로즈월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했다.
연인이나 약혼녀가 있는 여자를 건드리는 건 기본이고, 심지어 유부녀와도 바람이 나곤 했다.
부부가 맞바람을 피우는 일이란 귀족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긴 했지만, 로즈월 후작의 경우엔 질이 나빴다.
그는 이 귀부인, 저 귀부인…… 양다리로도 모자라 다섯 다리는 걸친 전적이 있었다.
‘미친놈이지.’
레녹스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로즈월 후작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버러지는 비비안의 눈앞에 다신 나타날 수 없게 만들어줘야 한다.
레녹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올랜드 로즈월 후작.”
“허, 허억, 네, 전하!”
“두 번 다시…….”
“…….”
“그 얼굴을 내 약혼녀 앞에 비칠 수 없게 해주지.”
“……예?”
“생각이 있으면 지금 당장 네놈의 친척들에게 달려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 그게 무슨…….”
“앞으로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말이야.”
로즈월 후작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무어라 중얼거리곤 그 자리에서 줄행랑을 쳐 버렸다.
레녹스는 실소를 뱉으며 그 뒤꽁무니를 노려보다가, 비비안에게로 몸을 틀었다.
“…….”
눈을 동그랗게 뜬 비비안이 그의 얼굴을 보곤 흠칫하자, 레녹스는 자신이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는 걸 깨달았다.
‘젠장.’
비비안을 돌아보기 전에 표정을 바꿨어야 했는데.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했다.
몇 번 그러고서, 다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레녹스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로즈월 후작가를 족쳐버리고 싶은 분노가 그의 안에서 넘실거렸으나, 지금은 비비안만을 생각해야 할 때였다.
레녹스는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봐, 비비안.
레녹스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비비안은 그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투명한 보석처럼 맑은 연녹색 눈동자에 무슨 생각이 담겨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무섭게 했나?’
레녹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무섭게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자제했는데…….’
비비안 앞에서는 되도록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물론 그게 매우 어렵다는 건 안다. 자신은 비비안이 생각하는 것처럼 상냥하고 어른스럽지 않으니까.
그래도 노력하려 했다. 비비안을 무섭게 해 그녀가 도망치는 일은…… 절대 생기지 않도록.
‘넌 내가 어떤 사람이든 좋다고 했지만…….’
정말로 그럴까?
너는 내 속이 얼마나 새까만지, 널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물론 그걸 알게 된다고 해도…….’
그리고 네가 내게서 도망치고 싶어진다고 해도.
‘나는 절대 놓아줄 생각이 없지만.’
레녹스의 눈동자에 슬며시 집념이 서렸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비비안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부러질 듯 가냘픈 어깨였다.
사실 그녀의 모든 부분이 다 그랬다. 목은 한 손에 다 잡힐 정도로 가느다랗고, 팔다리도 툭 부러질 듯 연약해 보였다.
그가 작정하고 옭아매면 그녀는 분명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싶은 진득한 욕망이 내부에서 날뛰는 것을, 레녹스는 매 순간 억눌러야 했다.
‘마음 같아선…….’
아까 같은 일이 절대 생기지 않도록, 그녀를 가둬 놓고 자신만 보고 싶었다.
여름 나무의 잎사귀 같은 저 눈동자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만을 담았으면 좋겠다.
입술로는 자신의 이름만을 부르고, 원하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
레녹스가 슬그머니 손을 올려 비비안의 입술을 엄지 끝으로 어루만졌다.
분홍색 입술에 피가 몰려 살짝 붉어진다. 레녹스는 그녀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여기가 백화점만 아니었으면…….
‘……진정하자.’
그가 손을 떼어내며 한숨을 쉰 순간이었다.
덥석!
“……!”
느닷없이 그의 손을 붙잡은 비비안이 “아.” 하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녀가 민망한 듯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저도 모르게…… 음, 대공님의 손길이 기분 좋아서…….”
“…….”
그 순간 레녹스의 인내심이 한계를 뚫을 뻔했다가 겨우 진정되었다.
이 아가씨는 왜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가?
자신을 자극하는 게 주특기인가?
‘정말…… 최대한 빨리 잡아먹어 버려야지.’
계속 굶주려서 미칠 것 같았다.
“아까 그 사람, 로즈월 후작이죠?”
“……알고 있었어요?”
“유명하잖아요.”
비비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녀는 불쾌한 일을 겪었음에도 그다지 타격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레녹스는 비비안의 안색을 유심히 살폈다.
어디에도, 그를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
그는 조금 안도했다.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는 불안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그런데요, 대공님.”
“네, 비비안.”
“손안에 그…… 선물 상자요, 구겨졌어요.”
“…….”
결국, 레녹스는 선물을 다시 포장하러 갔다 와야 했다.
* * *
선물을 다시 포장하는 김에, 레녹스는 진열대의 모든 장신구를 쓸어버리려다 비비안에게 혼이 났다.
“우리 어머니는 과한 선물은 오히려 싫어하신다구요!”
그의 등짝을 팍 후려치는 손길이 제법 매서웠다. 비비안에게 막 대해지는 느낌이 레녹스는 어쩐지 기분 좋았다.
자신이 정말로 미쳐가나 싶었지만, 그래, 상대가 비비안이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겼다.
“어머니 취향의 선물을 꾸준히 조금씩 선물하는 편이 훨씬 효과가 좋아요.”
“그런가요?”
“네, 어머니가 화났을 때 아버지가 그런 방법으로 어머니 기분을 풀어드리곤 했거든요.”
“흐음…… 알았어요, 참고하도록 하지요.”
레녹스가 비비안을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백화점에 들른 후, 조금 이르지만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온 참이었다.
비비안이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인지 전부 꿰고 있는 레녹스는 모든 걸 완벽하게 준비했다.
셰프에게 미리 연락해 필요한 식자재를 모두 최고급으로 미리 준비하게 했고, 조명, 장식, 테이블에 놓일 꽃 등, 뭐 하나 빠짐없이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했다.
비비안은 모르겠지만.
테이블에 놓인 꽃이 마음에 드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녀를 보며, 레녹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레스토랑에 사람이 하나도 없네요?”
비비안이 넓은 홀 내를 두리번거리며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 모습에 레녹스는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야 없는 게 당연하지.’
이 레스토랑을 통째로 다 샀으니까.
비비안이 들으면 기겁할 테지만, 레스토랑 한두 개쯤 사는 것이야 레녹스에겐 그다지 큰 지출이 아니었다.
비비안을 위해서라면 레녹스는 왕국이라도 사줄 수 있었다.
그는 짐짓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러게요, 오늘따라 사람이 없군요. 어딘가 새 레스토랑이라도 오픈했나 보죠.”
“흐음…… 그사이 제도의 유행이 바뀌었나 봐요! 익숙한 걸 버리고, 새로운 시도를 즐기는 쪽으로 말이지요?”
이번엔 레녹스도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참 순진하기도 하지.
‘귀여워.’
그가 먹고 싶은 것은 테이블 위의 음식이 아니라 눈앞의 귀여운 약혼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