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침 햇살과 함께 찾아온
내 연주가 이 자리에 있는 음악가들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그래도 듣기에 꽤 좋은 편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이 곡은 달빛을 표현한 서정적인 피아노곡이었다. 그리고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곡이기도 했다.
‘첫 번째로 좋아하는 곡은…….’
대공님에게만 들려줄 생각이었다.
단둘이 있게 되면.
건반을 부드럽게 꾹 누르며 연주를 마쳤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니, 여기저기서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모리아스 후작 부인 쪽을 흘끗 살피자, 얼떨떨한 얼굴로 오도카니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후후.’
난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대공님의 손을 잡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내 어깨를 잡고 바짝 끌어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멋지네요. 다음엔 내 연주를 들려줄게요. 단둘이 있게 되면.”
“……!”
“오직 비비안을 위해서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리 내어 웃었다.
대공님도 나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천생연분인가 봐.’
난 대공님에게 꼬옥 팔짱을 끼며 헤헤 웃다가, 마침 앞에 서 있던 황태자와 눈이 마주쳤다.
‘윽.’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니, 황태자가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 양, 내가 그렇게나 싫은 거야?”
‘아니, 이 양반이 진짜…….’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 그런 걸 물어보면 내 처지가 곤란해지잖아!
‘요망한 사람 같으니.’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어봤자 소용없거든요?
‘대공님이라면 모를까…….’
여하튼, 대충 대답해야겠다. ‘조금 부담스럽네요.’ 정도로.
내가 막 입을 열려는데, 대공님이 먼저 나섰다.
“남의 약혼녀에게 집적거리는 건 집어치워, 아스모드.”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황태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받아쳤다.
“그래, 약혼녀. 아직 결혼한 사이는 아니잖아?”
우와.
나는 감탄했다.
사람이 이렇게 뻔뻔할 수도 있구나!
‘어떤 의미에선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단호하게 말해두지 않으면 안 되겠어.
‘내 팜므 파탈 이미지를 쇄신하는 건 이미 망했고…….’
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날 보는 눈들이 새삼 달라져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자리라서 다행인지도 몰라.’
여기서 내 의견을 확실히 내비쳐놓으면, 뒷말이 나올 일도 없겠지.
나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
“응? 루이스 양, 나한테 뭐 할 말이라도 있어?”
내가 돌연 황태자를 부르자 대공님은 당황한 눈치였고, 황태자는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야.’
난 그를 똑바로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씀을 드렸던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이번에 다시 한번 더 분명히 말씀드릴게요.”
“흠……?”
“저는 대공님뿐이에요. 그리고 이 마음이 변할 일은, 죽어도 없어요.”
황태자의 금빛 눈이 크게 뜨였다.
“부디 알고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난 그에게 꾸벅 묵례한 후, 대공님의 손을 잡아당겼다.
대공님은 어쩐지 멍한 표정으로 내 손에 힘없이 끌려왔다.
파티 참석은 이쯤 하면 되었지 싶어서 난 대공님을 데리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
등 뒤가 소란스러웠지만, 일단은 신경 끄기로 했다.
* * *
“대공님…….”
모리아스 저택의 복도에서 대공님을 돌아보려던 나는, 익숙한 인영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유니스 공주……!’
그녀는 웬 갈색 머리의 여자에게 꾸중을 듣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굉장히 막역한 사이처럼 보였다.
‘누굴까?’
나는 조금 궁금했으나 그 장소를 모른 척 지나치려 했다.
유니스 공주가 나에게 호감이 있다느니 한 것 때문에 다소 부담스럽기도 하고.
‘황태자처럼 내가 싫어하는 타입의 사람은 아니지만…….’
대공님을 데리고 살금살금, 빠르게 지나쳐 가려 했는데―
“어? 비비안!”
금방 들켜 버렸다.
그 순간, 대공님이 돌연 내 어깨를 감싸더니 확 끌어당겼다.
덕분에 난 대공님께 반쯤 안긴 자세가 되어버렸고 말이다.
난 조금 민망해하면서 유니스 공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하하…….”
“이제 가려는 거예요?”
“아, 네에…….”
대답하면서 나는 유니스 공주 옆에 서 있는 여자를 힐끗 살폈다.
여자는 어쩐지 탐탁지 않아 하는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비비안이 왜 당신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유니스 에브론.”
유니스 공주가 아쉬운 기색으로 말하자니, 대공님이 불쑥 끼어들었다.
유니스 공주를 노려보는 대공님은 심히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니스 공주는 반짝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비안에게 호감이 있거든.”
“아니, 그러니까 왜.”
대공님이 기가 막힌다는 듯 크게 한숨을 뱉었다.
“나와의 혼담을 재차 꺼내러 온 게 아니었나? 물론 내 대답은 ‘거절’이다.”
대공님의 싸늘한 말에, 유니스 공주가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혼담은…… 이제 됐어.”
“뭐?”
“당신과 혼인하는 편이 고국을 위해 좋은 선택이긴 하지만, 좀 힘들더라도 다른 길이 있으니까.”
“언제는 남부의 에스테야를 그렇게나 탐내 하더니?”
“그곳에서만 나는 특수한 철광석이 있잖아. 에브론 왕국엔 그게 필요하거든. 우리 영토에 있는 광산은 메마르기 시작했고…….”
“…….”
“하지만 그 철광석이 꼭 에스테야에서만 채굴되는 것은 아니지. 다른 지역도 이미 알아놨으니, 황제 폐하께 교섭을 시도할 생각이야.”
에스테야라면, 글렌 대공령의 일부로 에브론 왕국과 맞닿은 지역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특수한 철광석이 바다에 서식하는 마수를 무찌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던가?’
마수란 마나에 의해 변이된 변종생물.
바다는 깊고 광활한 만큼 위험한 마수가 득실거렸다.
그리고 그런 바다와 인접해 있는 에브론 왕국은 늘 골치를 앓는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그 철광석이 필요해서…….’
유니스 공주가 어째서 대공님과 혼인하려 했나 싶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뭐랄까…….’
사적인 이유…… 는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느낌이…….
‘……헛.’
순간, 난 나의 욕심을 깨닫고 놀랐다.
‘그랬구나.’
난 생각보다 대공님을 욕심내고 있었구나.
대공님에게 특별한 사람은…… 오직 나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그런 마음이 내게 있었던 거였어.
‘왠지 좀 낯설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내 안에서 낯선 자신을 계속 발견하는 일이기도 한 걸까?
“황제 폐하는 까다로운 분이다. 당신이 그분을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지?”
대공님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유니스 공주는 대공님의 까칠한 태도에도 동요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특유의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사람이다.
“내가 황제 폐하를 어떻게 설득할지는 당신이 신경 쓸 일이 아닐 텐데?”
“…….”
“그보단, 다른 의미로 날 경계하는 편이 좋을걸?”
“……무슨 소리지?”
유니스 공주는 왜인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푸른색이 이토록 화려해 보일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생각해보도록 해. 그럼 이만.”
“하?”
“또 봐요, 비비안.”
여유로운 태도로 인사한 유니스 공주가 등을 돌렸다.
그녀와 긴밀한 사이로 보이는 갈색 머리 여자가 유니스 공주의 뒤를 따르기 전, 날 힐끗 보았다.
“?”
아니, 정정. 째려보았다.
‘뭐, 뭐지.’
이내 홱 몸을 틀더니 성큼성큼 떠나버리는 갈색 머리 여자의 뒷모습.
난 영문 몰라 하며 눈만 깜박거렸다.
도대체 왜 날 째려본 거지?
“비비안?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별일 없었던 것처럼 웃으며 대공님에게 팔짱을 꼈다.
“우리도 얼른 돌아가요. 내일은 저도 바쁘거든요. 대공저로 짐을 옮겨야 해서!”
“아, 그랬죠.”
대공님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깜박였다.
그런데…… 왜일까?
그의 얼굴에 불현듯 그늘이 지는 듯하더니, 대공님이 저조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럼 어서 가죠.”
“아…… 네에.”
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겼다.
* * *
후작저를 나와 마차 앞에 도착하니, 엠마와 로이드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앗, 아가씨!”
“주군!”
어째선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은 황급히 다가와 대공님과 나의 안색을 살폈다.
“벼, 별일 없으셨습니까?”
“없었다.”
로이드 경의 물음에 대공님이 짤막하게 대꾸하자, 엠마가 나에게 재차 물어왔다.
“정말 별일 없으셨어요?”
대공 전하의 얼굴이…… 심상치 않은데요. 엠마가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으음…….’
역시, 남들이 보기에도 그런 모양이다.
‘대공님…….’
복도에서 유니스 공주를 만나고서부터 어딘지 좀 이상한데…….
계속 신경이 쓰여서 난 대공님을 힐끗거렸다.
“비비안, 잡아줄게요.”
“앗, 감사해요.”
마차에 오르는 날 도와주는 대공님의 태도는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역시, 어딘지 좀 이상하셔.’
난 옆자리에 앉은 대공님을 연신 힐끔거렸다.
그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대공님이 창가에서 시선을 떼며 날 바라보고는 말했다.
“왜 훔쳐봐요?”
“……!”
대공님이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비비안 거니까, 마음껏 봐도 되는데.”
순식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어쩜 아무렇지도 않게 하실까!
난 코앞에 있는 대공님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
두 손으로 그의 양 뺨을 감싸고 입술에 키스해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굳어 있는 대공님을 향해, 난 어버버 말했다.
“앞으로…… 저를 놀리시면, 저도 똑같이 할 거예요.”
대공님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자주 놀려야겠네요.”
“뭐라구요?”
어이없어 반문하는 날 대공님이 느닷없이 꽉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서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이건…… 향수인가?’
청량한 느낌이 들면서도, 꼭 차가운 겨울의 향기 같았다.
대공님과 잘 어울리는 향.
“……비비안, 당신을 어떡하면 좋지.”
“……?”
대공님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대로 가둬두고 나만 보고 싶은데, 진짜로 그럴 수도 없고…….”
“대공님……?”
“비비안이 얼마나 귀여운 사람인지는, 나만 알았으면 했는데.”
날 끌어안은 대공님의 팔에 꽉, 힘이 들어갔다.
조금 숨이 막힐 정도로 옥죄는 느낌.
“내 눈에 보석은 남의 눈에도 그렇다더니…… 설마 그 둘이 달려들 줄은.”
대공님이 크게 한숨을 뱉자, 그의 따뜻한 숨결이 어깨 위 살결을 간질였다.
나는 조금 몸을 떨었다.
“하지만 비비안이 아스모드에게 그렇게 말해준 건 통쾌했어요.”
“…….”
“물론 나는 완전히 안심할 수 없지만.”
아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안심하시려나?
‘어쩔 수 없는 건가.’
……사실 생각해보면, 나도 다른 사람이 대공님에게 다가가는 걸 보면 질투가 날 테니까.
‘불안할 테고.’
그렇구나, 이건, 이런 마음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하지만 대공님을 조금이나마 안심시켜 드리기 위해서…….’
앞으로 더욱 철저하게 철벽을 쳐야겠군.
음, 그래, 좋아. 황태자가 여러모로 성가시긴 하지만 힘내자.
‘그런데 유니스 공주는 정말 무슨 생각인 걸까…….’
고작 두 번 만난 사람이 나에게 호감이 생겼다니 이해할 수 없었다.
음, 대공님한테 첫눈에 반한 내가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지만.
‘다른 목적이 있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아스모드 황태자도…….
‘……황태자와 대공님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나중에 은근슬쩍 대공님께 물어보고,
안 알려주면, 대부인께 물어봐야지.
대공님의 흑역사일지도 모르겠지만…… 흑역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공님.
‘흑역사, 하니 비비토끼가 생각난다…….’
신간을 안 낸 지 좀 되었지.
‘그러고 보니 모리아스 양은 모르겠구나. 내가 비비토끼라는 거.’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그렇지 않아도 나에게 모종의 환상을 품고 있는 듯한데, 내가 비비토끼라는 사실을 들켰다간 불난 데 기름 붓는 격이다.
‘모리아스 양에겐 미안하지만, 좀 부담스러워…….’
그래도, 그녀와 친해진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헤헤.
“……내일이면 비비안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살게 되겠네요.”
어느새 날 느슨히 풀어준 대공님이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이야기했다.
“정말 기대가 돼요.”
난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도요.”
그리고 덧붙였다.
“대공님의 피아노 연주, 꼭 들려주셔야 해요?”
“물론이죠, 내 약혼녀님.”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대공님은, 아까보다 훨씬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분이 좀 풀리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제가 나중에 상 드릴게요.”
“……상이요?”
“네, 뭐로 받을지 생각해두세요.”
“흐음…….”
……날 물끄러미 바라보는 대공님의 눈빛이 어딘지 야릇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설마 이상한 걸 바라시진 않겠지.
난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사다난했던 토요일 저녁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사다난한 것은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하루라도 좀 평온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러다 초대장에 파묻히겠어.’
대공저로 향할 준비를 하느라 가뜩이나 바쁜데, 엄청난 개수의 초대장이 내 앞으로 날아드는 바람에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제 모리아스 양의 살롱 파티에 모습을 드러낸 일로 물꼬가 튼 거구나.’
다들 날 초대할까, 말까, 눈치를 보던 중에 어제 일이 계기가 된 것이리라.
‘그런데 이건 뭐지?’
산더미 같은 초대장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어 살펴보니…….
‘황립 아카데미 정령술 학회?’
오오……?
운디네의 후광(?)으로 이런 데서도 초대장을 다 받아보는구나!
‘참,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마법이나 정령술 같은 건 나랑 인연이 없는 줄 알았는데.’
정령술 학회의 초대장을 신기해하면서 살펴보다가, 그것만 따로 옆으로 빼두었다.
솔직히 지금 가고 싶은 마음이 내키는 건 정령술 학회뿐이었다.
‘다른 곳은 여러모로 하이에나 소굴일 테니 말이지…….’
모리아스 후작 부인의 음모(?)는 무사히 튕겨냈다만, 다음은 어떨지.
‘아무튼, 이제 슬슬 나갈 채비 해야겠다.’
난 하인에게 초대장을 정리해 대공저로 보내달라고 부탁한 뒤, 밖으로 나와 마차에 올랐다.
당연하게도 엠마와 로이드 경이 함께였다.
가족들과 미리 인사는 했고.
미리 인사했으니 마중 안 나올 거라더니 진짜로 안 나올 줄이야.
‘은근히 칼 같은 데가 있어, 우리 가족들.’
곧 마차가 출발했다. 난 루이스 백작저를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영영 떠날 것도 아닌데, 제도에 있는 한 자주 놀러 올 수 있을 텐데,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집이라 그런 거겠지…….’
창밖으로 루이스 백작저의 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난 아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서 얼마 후, 마차가 글렌 대공저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대부인께서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해주셨다.
“비비안! 어서 오렴!”
난 대부인의 품으로 뛰어들어가 쏙 안겼다.
대부인께서는 제국 여성의 평균 신장보다 훨씬 키가 크셔서 부러웠다.
‘나도 키가 컸으면 좋았을 텐데.’
뭐가 문제였을까. 어렸을 때 우유 잘 마셨는데.
“드디어 함께 지내게 되었구나. 난 정말로 기쁘단다.”
“네, 저도요.”
수줍게 웃으며 답하려니, 대부인께서 내 머리를 쓰다듬으시곤 손을 잡아 오셨다.
“나랑 루카스가 우리 비비안을 위해 깜짝 선물을 준비했단다. 어서 보러 가지 않으련?”
“서, 선물이요?”
선물이라니 조금 두려워졌다. 이 집안의 선물 스케일은 상상을 초월해서.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대부인께서 어깨를 도닥이며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말렴, 아주 소소한 선물이니까.”
으음.
‘소소한’의 기준도 보통 사람과는 조금 다르다는 점이 함정이다.
어찌 되었든 날 위해 무언가 준비해주셨다니 기뻤다.
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 어머님.”
“어머, 귀여워라…….”
대부인께서는 내가 부끄러워하며 ‘어머님’ 하고 부른 것이 마음에 드셨는지, 더 불러 보라며 재촉하셨다.
난 못내 당혹스러워하면서 대공저의 본관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2층의 창가에 서 있는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대공님.
‘업무 중이시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순간 봄바람이 불어온 듯한, 그런 미소였다.
‘……마침내.’
좀 더 가까워질 기회를 얻었는지도.
‘당신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싶어요.’
나에게 숨기고픈 모습이 많다는 거, 아니까.
‘그렇지만 어떤 모습이든.’
나는 당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아침 햇살이 유리창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슬그머니 등을 돌린 대공님이 창가에서 멀어져갔다.
난 그가 내게로 오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