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파란 것
내가 따졌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다니요? 우리 내일 결혼하잖아요?”
대공님이 덤덤히 대답했다.
“그렇지.”
“그럼…… 된 거 아닐까요? 제가 어딜 가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사라질 것도 아니고.”
눈치를 보며 말하자니 대공님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조마조마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비비안.”
“헙, 네!”
그가 부르는 목소리에 난 바짝 긴장해 대답했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새 신부를 방에만 가둬 놓고 싶진 않아요.”
“으음.”
“하지만 내가 비비안을 걱정하는 정도가 정상이 아니라서,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
“정말 가둬버릴지도 몰라요.”
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서늘했다.
난 꼴칵 마른침을 삼켰다. 대공님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약속해요. 다신 무리하지 않겠다고.”
“야, 약속할게요!”
“비비안이 뭔가를 보여 주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전에도 말했잖아요. 그저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대공님은 울컥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모습에 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입을 달싹거렸다.
“대공님…….”
“……약속 꼭 지켜요. 알았죠?”
그가 날 빤히 응시하며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이었다. 물론 내 대답은 무조건 ‘알았다’이지만.
“알았어요, 꼭 지킬게요.”
“…….”
대공님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을 100% 신뢰하진 않는 눈치였다. 한, 65% 정도?
‘그래도 50%를 넘은 게 어디야.’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앞으론 절대 사고 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관해서 대공님이 오해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 정정하고자 입을 열었다.
“큼, 대공님. 그런데 제가 정원에 꽃을 피우려고 한 건요, 그…… 대공님께 멋진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예요.”
내 말에 대공님이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결혼 선물이랄까…… 조금 특별한 추억을 남겨 드리고 싶었―”
말을 채 잇지도 못했는데 대공님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멍하니 있었다.
“고마워요.”
대공님이 감정을 꾹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비비안.”
그는 날 더욱 꽉 안으며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난 가만히 눈을 깜박거리다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안았다.
“제 선물이 그렇게나 감동적이에요?”
“응, 감동 받았어요, 무척이나.”
“다행이에요. 대공님 마음에 들어서.”
난 새끼 고양이처럼 대공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몸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겨울 냄새 같기도 하고, 향긋한 허브와 꽃의 향기 같기도 했다.
‘꽃향기…… 아, 그렇지!’
퍼뜩 떠오른 생각에, 대공님의 품에서 버둥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대공님!”
“응?”
“우리, 꽃 보러 가요!”
이왕 피워낸 꽃, 한창 싱그러울 때 보러 가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 볼 수도 있겠지만, 내일은 이른 아침부터 바쁠 테니 시간이 안 날지도 몰랐다. 난 대공님과 단둘이 꽃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밤인데요?”
대공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밤이라서 더 좋은 거예요. 낮과는 다른 운치가 있다고요. 어서 보러 가요, 네?”
그의 팔을 잡고 조르자 대공님이 피식 웃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더니, 그 위에 살짝 키스하곤 속삭였다.
“귀엽긴.”
“갈 거죠?”
“응, 좋아요.”
대공님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난 기뻐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곧바로 나갈 채비를 했다.
* * *
따뜻하게 껴입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무척 추웠다. 나는 달달 떨면서 대공님에게 꼭 달라붙었다.
그런 나를 내려다보면서 대공님이 입을 달싹이다가 물었다.
“비비안, 추우면 그냥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아, 안 돼요. 이왕 준비하고 나온 거 보고 가요! 조금만 걸으면 되는걸…… 5분! 딱 5분만 있다 가요!”
추위를 꾹 참으며 힘주어 말하자니 대공님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팔 하나를 두 손으로 꼭 붙잡고 정원 한가운데로 끌고 갔다.
달빛이 내린 밤의 정원.
잠시 봉오리를 닫은 하얀 꽃들이 지천에 가득했다.
“와…… 너무 예뻐요, 그죠?”
감탄하면서 대공님을 돌아보자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달빛을 받은 푸른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이렇게 추운 날씨에 꽃이 가득 피어난 걸 보니 비현실적인 느낌도 들어요.”
대공님 말대로 마치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난 헤헤 웃으며 대공님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
“내일 밤까지 시들지 않을 거예요. 내일은 우리 결혼식 날이니까……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렇군요.”
대공님이 잠시 쉬었다가 이어 말했다.
“내일이 드디어 우리 결혼식이죠.”
“네, 드디어.”
마음이 벅차올랐다. 내일 드디어 결혼식을 올린다. 정식으로 대공님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4살 때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대공님을 보고 첫눈에 반했던 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공님을 훔쳐보면서 그의 모습을 스케치했던 날들, 남자주인공이 대공님인 소설을 쓰면서 설렜던 날들…….
그러다 조금 철이 들었을 때 즈음엔, 나는 대공님과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처지란 걸 자각하고 우울해했었지.
‘그런데 뜻밖에도 대공님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게 벌써 한 달 전쯤이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땐 정말 눈앞이 캄캄했었는데.
‘알고 보니 대공님도 날…… 좋아하고 있었고…….’
가만 생각해 보니 마치 한 편의 로맨스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고생 많았어요, 비비안.”
대공님이 내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담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별로 고생이랄 것까진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토끼도 됐었으면서.”
“…….”
확실히 그 일은 좀 충격적이었지. 토끼라고 놀림 받다가 진짜로 토끼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
‘그러고 보니 아스모드 엘피디온은 우리 결혼식에 못 오는구나.’
뭐, 안 오는 편이 좋지만.
그 사람이 근신 중이 아니었더라면 당연히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했을 것이다. 어쨌든 황족이니까.
‘내일 그 얼굴을 안 봐도 된다니 속이 시원하다.’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켰다. 공기 중에 은은한 꽃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꽃잎을 실어 날랐다. 밝고 둥근 달이 뜬 밤하늘에 하얀 꽃잎이 아름답게 흩날렸다.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대공님을 돌아보았다.
“앞으론 좋은 일만 가득할 거예요.”
좀 이상한 꿈을 꾸긴 했지만, 그건 정말로 개꿈이겠지. 왜냐하면 대공님이 아스모드 엘피디온을 좋아하게 될 리 절대 없으니까.
“그러니 지금까지의 고생이 어떻든, 저는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기대돼요.”
대공님의 손을 가만히 잡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달빛에 녹아 들어갈 듯한 미소였다.
‘하여튼 엄청 잘생겼어.’
미의 신도 대공님을 보면 울고 갈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음을 흘렸다. 까치발을 들어 대공님의 품에 안기자 그가 따뜻하게 마주 안아 주었다.
이토록 내일이 기대되는 밤은 처음이었다.
* * *
해가 지평선 너머에서 빼꼼 고개를 들이밀기 무섭게, 엠마와 시녀들이 나를 깨우러 들어왔다.
“아가씨! 어서 일어나셔야 해요! 시간이 없어요!”
“우……으…… 엠마, 나 10분만 더…….”
“안 돼요!”
평소 늦은 아침까지 자다가 꼭두새벽에 일어나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난 연신 하품을 하며 시녀들에게 몸을 내맡겼다.
그렇게 몸을 씻고, 마사지를 받고, 피부에 향유를 바른 뒤 향수도 뿌렸다.
온몸에서 향기가 폴폴 나서 마치 인간 방향제가 된 것 같았다.
그 얘기를 엠마에게 했더니,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보통은 꽃이 된 것 같다고 하지 않나요?”
라고 되물었다.
여하튼 난 머리를 빗고 촘촘히 땋아 틀어 올린 뒤, 고대하던 웨딩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웨딩드레스는 꽃잎이 여러 개 겹친 듯한 디자인이었는데, 너무 과하지 않은 화려함에 우아함이 돋보였다.
이런 옷을 입게 되다니 마치 꿈만 같아서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그렇게 좋으세요?”
옆에서 엠마가 물어왔다. 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저도 오늘이 오기를 고대했어요. 아가씨가 결혼한다니 시원섭섭하지만…… 오늘부로 명실상부한 대공비 전하가 되시는 거죠. 정말 잘됐어요, 아가씨.”
엠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녀가 울려고 하니까 어쩐지 나도 가슴이 찡해져서 울먹거렸다.
그러자 시녀들이 “안 돼요! 화장 지워져요!” 하고 소리쳤다.
“엠마…… 정말 고마워. 그동안 내 뒤치다꺼리하느라고 많이 힘들었지? 엠마가 없었으면 나도 외롭고 쓸쓸했을 거야. 같이 대공님 얘기할 사람도 없었을 거고.”
“아니에요, 아가씨. 저야말로 아가씨가 있어서 그동안…….”
내 말에 대꾸하려던 엠마가 기어코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따라 눈물이 나려 하자, 시녀들이 재빨리 내 눈 아래 손수건을 가져다 댔다. 힘들게 해 놓은 화장을 지키겠다는 집념이 엿보였다.
시녀 하나가 황당해하며 말했다.
“아직 식을 올리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울면 어떡해요! 엠마 양도, 아가씨도!”
“그러게…….”
나는 웅얼거리며 애써 눈물을 참았다.
다른 시녀가 대공님 화집을 가져다줬고, 그걸 보기 시작하자 감쪽같이 눈물이 멎었다. 나는 곧 화집에 정신이 팔렸다.
“대공님 아홉 살 때…… 진짜 귀엽지 않아?”
내 중얼거림에 나이 많은 시녀가 살짝 코웃음 쳤다.
“미운 아홉 살이셨죠.”
“그랬어?”
“네, 선대공 부부께서 아주 골치 썩으셨다니까요.”
‘흐음, 그랬구나.’
대공님 말로는 자기는 어려서부터 뭐든 잘하고 완벽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땠는지 궁금했다.
“보석은 대부인께 받은 걸 착용하실 거죠?”
“응, 물론이지.”
“그럼 보석은 오래된 것, 드레스와 티아라는 새것이네요. 파란 것과 빌린 것이 없는데…….”
“아, 그건…….”
막 대답하려는 차,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날 보며 장난스럽고 친근하게 씩 웃는 얼굴. 마리나였다.
“마리나! 어서 와! 마침 잘 왔네!”
“이야, 비비안. 너 오늘 진짜 예쁘다. 다른 사람 같아.”
“헤헤, 그래?”
마리나의 칭찬에 헤벌쭉 미소가 지어졌다.
마리나는 내 기분을 띄워주려 작정했는지, 평소 안 쓰던 미사여구를 전부 동원해가며 계속해서 칭찬을 남발했다.
“장담하는데 오늘 네가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사람일 거야. 네가 입은 웨딩드레스는 곧 유행이 될걸? 너도나도 비슷한 디자인을 맞추려고 난리가 날 거야.”
“그 정도야?”
“그럼, 내가 언제 빈말하는 거 봤어?”
‘흠.’
마리나는 언제나 한결같이 진실 폭력을 가하곤 하는 친구였으므로 신빙성이 있었다.
‘별로였으면 진짜로 별로라고 했겠지…….’
상대가 막 결혼을 앞둔 새신부라도 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 맞다. 나 이거 가져왔어.”
마리나가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그 안에는 파란 보석이 박힌 백금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내 데뷔탕트 때 우리 할머니가 선물로 사주셨던 거야. 주문 제작한 거라 세상에 하나뿐인 거고. 거기 박힌 보석은 사파이어야. 블루 다이아몬드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름 최상급이니까 네 결혼식에도 어울릴 거야.”
마리나가 빙긋 웃었다.
“이걸로 빌린 것, 파란 것까지 다 채워진 셈이지?”
나는 무척이나 감동 받아서 말문이 막힌 채 있다가 울먹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시녀들이 또다시 호들갑 떨며 “울면 안 돼요!” 하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울음을 꾹 참고서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마리나. 진짜 고마워.”
“내 친구의 한 번뿐인 결혼식인데, 뭐 이런 걸 가지고.”
결혼식 날 신부는 오래된 것, 새로운 것, 빌린 것, 파란 것을 지니면 행복해진다고 한다.
보석 세트는 대부인께 받은 오래된 것.
드레스는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새로운 것.
티아라는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으로 역시 새것이었다.
그리고 이 머리핀은 마리나에게 빌린 것이자, 파란 것…….
‘이거, 소중한 머리핀일 텐데…….’
마리나의 할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생전에 마리나를 무척이나 예뻐하셨다.
이 머리핀도 아끼는 손녀의 데뷔탕트 무도회를 위해 몇 개월 전부터 맞춤 주문한 아주 특별한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나에게 빌려준다는 건, 마리나가 진심으로 나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의미였다.
난 너무 감동해서 뭐라 표현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꼭 행복하게 살아야 해, 비비안. 너를 두고 뭐라 하던 사람들 보란 듯이 말이야. 알겠어?”
“흑, 당연, 하지!”
“내가 꼭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돼서 널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게. 내 친구를 괴롭히는 놈들은 다 부숴버릴 거야.”
‘부숴버릴 거야.’를 발음하는 마리나의 목소리가 엄청 살벌했다. 역시 마리나는 비범하다.
“그럼 준비는 슬슬 다 끝나가는 건가?”
“으, 으응. 이제 네가 준 머리핀만 꼽고, 전체적으로 점검하면…….”
마리나의 머리핀을 조심스럽게 받아 간 엠마가 땋아 올린 머리의 가장자리에 머리핀을 보기 좋게 꽂았다.
그러고는 시녀들과 함께 감탄하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무척 고급스럽고요.”
“맞아요, 다른 머리 장식하고도, 티아라하고도 잘 어울려요.”
“드레스에도 파란색으로 포인트를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이런 건 어때요?”
“오, 괜찮은데?”
시녀들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마저 꾸며주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서, 나는 마리나의 손을 잡고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결혼식까지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