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2화 - 각성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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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콘솔이란 엄청난 기능을 현실에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갑자기 과거로 끌려왔다는 황당한 상황따위는 이제 기쁘게 감내할 수 있겠다는, 앞으로 꽃길만 걸을 거라는 장밋빛 착각마저 가질 정도로.
"있으면 뭐해? 쓰지를 못하는데!"
하지만 애초에 콘솔 기능이 활성화 되었다고 해서 이제 모든 게 술술 풀릴 것이라 믿고 기뻐한 것은 그저 김칫국 마시기에 불과했다는 게 금방 드러났다.
활성화 시키는 건 알았지만, 정작 중요한 구체적인 명령어를 실제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이니까.
콘솔이란 개념 자체는 서양 게임에서는 보편적인 기능이다. 허나 김주명이란 사람이 알고 있는 콘솔 명령어는 오로지 스*이림의 그것 뿐이었다.
만약 활성화된 콘솔 기능이 스*이림에 기반한 거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잘못된 명령어입니다.]
...만, 그렇지 않다면 명령어를 모르니 콘솔은 지금으로선 있으나마나한 기능이었다. 주명의 눈앞에서 반투명한 창에 떠오른 잘못된 명령이라는 글귀는 그걸 적나라하게 팩폭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 발동하는 건 스*이림과 같으면서 명령어는 왜 또 다르냐고!"
콘솔 명령어는 기본적으로 무슨 프로그램 명령어처럼 꽤나 복잡했다. 프로그래머라 할 수 있는 게임 개발자의 보조 도구로서 개발된 거라 정확한 명령어를 모르면 무용지물.
콘솔만 제대로 쓸 수 있다면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 소년을 구해주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아까 그가 발동하려 했던 명령어만 제대로 발동했다면 알아서 회복될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알던 명령어가 먹히지 않는 상황이라 그저 어린 생명의 죽음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에 주명은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 했지만 죽음을 고작 몇발짝만 남겨둔 삶의 경로를 평범한 일반인이었던 주명이 돌릴 수 있을리가.
이렇게 무력할 거라면 왜 자신은 이 시대에 왔는가. 그냥 자신을 다시 현대로 돌려보내 준다면, 일상으로 되돌려 준다면 좋을텐데.
"근데 그 빌어먹을 인형은 또 어디갔냐?"
자신을 과거에 떨어지게 만든 원인이자 시발점이 바로 그 이상한 인형이었다.
분명 현실에서 콘솔이 된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가능하게 만든 것도 확실한 물증은 없으나 분명 그 인형이 관련되어 있을 것 같았다.
뭔가 문제해결의 단서라도 찾아볼 요량으로 그 인형을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마치 애초에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는 듯 품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분명 나무로 된 인형의 딱딱한 감촉을 품속에서 방금 전까지도 느꼈던 주명으로서는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에라이 썅. 차원이동이고 콘솔이고 애초에 말도 안되는 일인데 뭐. 고작 있었다 사라지는 빌어먹을 일 정도는 왜 불가능하겠어."
어차피 과거 시대의 해적선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극도로 비현실적인 마당이 이제와서 사건을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포기했다.
주명은 인형이 어디 갔는지 찾는 것은 때려치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해야 했다.
"..."
소년은 시시각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전에는 생명이 꺼져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 이제는 생명이 곧 꺼지기 직전의 마지막 꿈틀거림인 것만 같아 더욱 불안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콘솔 명령어가 맞지 않아서 문제라면, 어떤 명령어든지 기본적으로 들어가 있는 보편적인 문구를 쓰게 된다면 어떨까.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주명의 생각의 속도는 더 빨라졌다.
스*이림이 아닌 다른 게임에서도 보편적으로 쓸 법한 콘솔 명령어 중 지금 소년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명령어 입력 대기중]
일단 콘솔이 실존하다는 건 눈앞에서 깜빡거리는 입력창을 보면 알수 있었다. 실존하는게 맞다면 그 압도적인 기능 또한 존재할 것이다. 제대로된 명령어만 입력할 수 있다면.
콘솔이라는 건 보통 서구권 게임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러니 게임 용어나 게임 명령어라는 측면에서 생각을 해 보면 뭔가 먹힐 만한 명령어를 기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뭔가 도움이 될 만한게 없나?'
보편성이라는 키워드로 머리를 맹렬히 회전한 결과 주명의 머리속을 한가지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치고 지나갔다.
'잠깐! 도움?!'
모든 게임의 콘솔이 그렇지는 않지만 대다수의 콘솔 명령어 체계에서 기본을 이루는 그 명령어.
콘솔이란 게 복잡하기 때문에 유저들에게 어떤 명령어가 있는지 알려주고 사용법을 숙지시키려면 기존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
'help'
[도움말 기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Debug mode의 사용법에 대한 정보가 사용자에게 '입력'됩니다.]
"좋았... 끄아아악!"
생각했던 대로 도움말 기능이 있다는 것에 기뻐하던 찰나.
도움말이라는 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져 당혹스럽고, 그 다른 방식이 매우 극심한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 때문에 주명은 입밖으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도저히 버티거나 막을 수 없었다.
주르륵
다행히 고통의 순간은 매우 짧았으나 그 강도만큼은 심각했다. 주명의 눈가와 코, 입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명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이거 끝내주는걸?"
도움말이 자신의 머릿속에 정보를 강제로 때려박아 준 덕분에 이제 자신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으니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지 알게되자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알았다.
주명은 죽어가는 소년을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으며, 해적새끼들이 있을 배 윗편을 분노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개같은 해적 새끼들. 니들은 좆됐어."
콘솔의 권능을 가진 그에게서는 얼마 전 해적들에게 구타당하며 살려달라 구슬피 울부짖던 약한 모습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
다나카는 쓰시마 섬의 수많은 낭인 중 하나였었다. 굳이 과거형을 쓴 이유는 이제는 그저 먹고 살기 위해 바다에서 칼을 휘두르는 무뢰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모시는 주군을 위해 충성하겠다는 무사의 낭만을 가슴에 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을 휩쓸고 있는 전국시대의 광기는 그런 낭만만 가지고 살아남기엔 너무도 가혹했다.
굶주림에 처자식을 잃고, 전쟁에 몇 없는 지인마저 모두 잃고 나서야 그는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남은 선택지가 왜구가 되어 칼밥을 먹고 사는 인생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란 속에서 떠밀리고 내쳐진 대마도(쓰시마 섬)의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것 해적질밖에 없었으니.
왜구로서 활동한지도 10년, 온갖 험악하고 더러운 일을 겪고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덕분에 지금은 해적단의 두목까지 오를 수 있었다. 비록 총원이 30명도 안 되는 작디작은 해적단이고, 배라고는 곧 폐기처분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노후한 배 1척에 불과했지만.
"조선놈들이 그래도 술은 잘 만든단 말야. 약골들이라서 그런가 손재주는 좋으니."
해적단의 대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실에서 여유롭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경상도의 어느 이름모를 마을에서 노략질한 청주의 풍미는 정말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지금 마시는 청주는 손재주 좋은 외거노비가 그 지역 지주이자 주인댁이기도 한 최진사댁의 제사 때 쓸 술이라 정성들여 만들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저 울부짓는 조선 백성 중 한명이 걸리적거리길래 칼로 베고, 그자의 집안에 있던 비싸보이는 자기(청주가 담겨 있던)를 빼앗와 왔을 뿐인 다나카에겐 그런 사정따윈 알 리가 없었다.
"술맛 좋군."
달고 향기로운 술맛 만큼이나 이번 해적질은 너무도 결과가 훌륭했다.
운 좋게도 노획할 수 있었던 값비싼 도자기는 일본에 내다 팔면 엄청난 부를 그에게 가져다 줄 터였다. 한창 다도가 유행하고 있는 본토에서는 조선산 자기를 명나라 것 만큼은 아니더라도 최상품으로 치고 비싼 값으로 쳐줄 것이다.
또한 이번에 잡은 싱싱한 노예들, 그리고 배 밑편을 가득 채우고 있는 조선의 쌀가마니들 역시 큰 돈을 만져보게 해줄 거라 확신했다.
이번 해적질은 조선의 병사들과 단 한번도 마주치지 않고 그저 몇번의 약탈만으로 얻어낸 성과였으니 들인 노력에 비해 너무 훌륭한 성과였다.
지난 을묘년의 일로 조선군이 허수아비라는 것은 선배 왜구들로부터 들었다만, 그래도 정규군과는 마주치지 않는게 훨씬 이득이었다.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나 피해는 적을 수록 좋고, 결정적으로 주업인 약탈을 하는 데 걸리적거리니까.
명종 때 이미 박살나 버린 조선의 군사력은 일개 해적인 다나카가 느끼기에도 그정도의 위협밖에 되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사건이 1555년 을묘년에 일어난 을묘왜변이었고.
엄청난 성과를 거둔 덕분에 부하들에게 수고비를 쥐어 주고도 다나카의 앞으로 엄청난 재물이 굴러들어올 것이라 생각하니 다나카는 너무도 기분이 좋았다.
이정도라면 배를 한척 더 구매할 수 있을 것 같다다는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인생이 딱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구나.“
정말 오늘처럼만 일이 수월하게 계속 풀려준다면 신사부로(信三甫羅)나 긴지로(緊要時羅)처럼 수십척의 배를 거느린 쟁쟁한 대해적이 되는 일도 꿈이 아니었다.
'삼대천왕이라 불리는 거물 삼인방처럼되는 거다! 나까지 포함되면 곧 사대천왕이 되겠군!'
맹렬히 행복회로를 굴리는 채로 청주를 입 안에 털어 넣으며 다나카는 간단하게 차려진 술상에 놓여있는 떡으로 손을 가져가려 했다.
저 떡처럼 대해적의 꿈도 곧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얼큰한 취기를 달아나게 할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컥“
누군가 자신의 뺨따귀를 가격했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이빨 두어개가 허공에 튀었지만, 남자로서 싸대기를 쳐맞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개새끼야!"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해야 했다. 수십년 칼밥을 먹은 경험이 그렇게 해야 한다 경고하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은 와중에도 다년간 단련된 전투감각 덕분에 최소한의 행동을 할 여력만큼은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이 고통의 원흉이 누구인이 파악하려 눈을 굴렸고, 그 결과 확인한 것은 자신을 친 원흉이 바로 오늘 본보기로 흠씬 두들겨 패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조센징?"
그 조선인은 다나카가 기억하기로는 분명 별볼일 없는 흔한 조선인이었다.
그가 어린 소년을 죽일 듯이 팬 행동에 대해 감히 주제도 모르고 분노했다가도, 잠깐 맛보게 해준 폭력에도 목숨을 구걸하는 겁쟁이.
그런데,
"인생이 딱 오늘같으면 좋겠다고?"
"그딴 개소리를 짖어대지 못하도록, 오늘이 최고로 좆같은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해줄게 이 씨발 해적노무 개새끼야!"
어째서 이리도 겁없이 자신을 욕하고 때리기까지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그세 달라지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보다도 대체 왜 저놈이 이 자리까지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며, 방 안에 들어올 동안 자신은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전장에서 단련된 자신의 감각은 아무리 그가 지금 술에 취해 있다고 하더라도 무방비로 습격을 허용할 수준이 아니었다.
또 자신의 개인실이자 선장실이기도 한 이 방은 부하 여럿이서 겹겹히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대체 어째서.
하지만 일신의 고통이나 의문스러운 침입이 문제가 아니었다.
"와아아아!!"
"왜놈들을 몰아내자!"
노예로 팔기 위해 묶어 놓았던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제때 진압하지 못하면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배를 일어버리고 다시 밑바닥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 생각하니 아찔했다.
일단 눈앞의 조선인을 치우고 나서 생각을,
찰싹
"크어억!"
겁쟁이였던 조선인의 제2격,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귀싸대기가 자신에게 작렬하자 이번엔 강냉이가 털리는 것을 넘어 몸 자체가 붕 뜨며 반대 구석으로 쳐박혀 버렸다.
고작 싸대기 한방이었을 뿐인데 어찌나 강력하던지 다나카는 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극심한 부상을 입었다.
그가 날아가 부딪친 선실은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으니 조선인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살려달라 질질 짜던 모습을 기억하며 내심 눈앞의 조선인을 우습게 보고 있었던, '네놈이 몰래 이 방에 어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을 경험하게 해 주겠다'며 벼르고 있던 다나카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맙소사!'
아니 어찌 사람의 힘이 이리도 세단 말인가. 이게 정녕 사람새끼의 힘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찢어죽일듯 노려보는 저 무서운 조선인을 보니 이젠 다리가 떨려왔다.
하류인생을 전전한 그는 딱 두 방을 맞아본 것 만으로도 견적이 나왔다. 이건 비벼볼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배을 잃고 밑바닥 인생으로 굴러 떨어지고 자시고 이젠 그것조차 글러먹었는지도 몰랐다. 애초에 다시 내일의 해를 볼 수 있을까.
괜시리 아까 손에 집으려 했던 떡에 눈길이 갔다.
손쉽게 손에 잡힐 것 같아 보였던 떡은 저 멀리,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조선인의 뒷편으로 굴러가 있었다.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그리고 조선인의 제3격이 다시 그의 얼굴에 작렬하는 순간, 목이 꺾이며 다나카의 의식은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마지막 순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더이상 볼 수 없고 죄업에 물든 몸이라 자격도 없다고 여겼던 그날의 광경이었다.
굶주림에 죽어버린 딸아이가 정말 환하게 꺄르르 웃음지었던 그 순간, 그러니까 영주의 생일날 운 좋게 얻은 떡을 그 조그만 손에 쥐어줬던 그 순간이었다.
'그래, 그 떡만이 진정으로...'
의미있었지.
계속 그 떡을 쥐어줄 수 있었다면 자신의 삶도 달라질 수 있었까.
누구에게도 답을 듣지 못할 의문을 끝으로 더이상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