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5화 - 대마도로 가는 길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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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는 만족스러웠다.
"어떤가요 장사님?"
"어, 음. 고마워요. 정말 맛...있네요. 하하하"
"크, 크흠. 어린 처자가 요리솜씨가 좋...구려. 끙."
찬모 역할을 하겠다고 따라온 초의의 요리 솜씨가 많이 별로였다는, 아니 평범한 재료라도 그 손에 쥐어주면 괴식으로 변해버린다는 사실을 빼면은.
초희는 남편이 정말 순둥한 사람, 착한 사람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요리 수준이 이런데도 단 한마디의 불만도 없이 금슬도 좋았다면 정말 착한 분이었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자기가 짐이 될까봐 미안해 하는 초희에게, 여인으로서 가장 큰 치욕을 경험해 정상적이 상태가 아닐 그녀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 억지로라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흉내는 낸다만, 주명 일행에게는 참으로 고역이었다.
"これが食べ物のはずがない..(이게 음식일 리 없어..)"
더불어 20명의 왜구 겸 노예 겸 선원들에게도.
먹는 입을 크게 차지해 식량이 빨리 소모되는 게 눈에 보이기에 그냥 관아에 넘기고 올걸 잘못 생각했다는 마음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은 관아에 가서 조선 조정과 엮이고 싶지 않았고 막 부려먹을 수 있는 인력이 필요한 건 사실라 후회막심할 정도까진 아니었다.
중간중간 반항하고픈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지 빨간 물이 드려 하는 왜구들을 응징하며, 주명이 가장 자주 했던 것은 당연히 콘솔을 활용한 경험치 수급과 갬블링이었다.
한번 재미를 봤던 '공짜 경험치 - 갬블링 - 오브젝트 레벨업'을 통한 꼼수를 계속 써먹으려는 속셈에서였다.
하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절대 좋지 않았다. 수십번의 시도 결과 건진 거라곤 텅 비어버린 경험치였을 뿐이었다.
"에라이 썩을. 그 경험치로 레벨업이나 할 걸."
몇일의 시간이 그래도 그냥 허비된 것은 아니었다. 같이 배를 타고 있는 동료들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까.
백발의 노인이 정여수라는, 무려 정여립의 친척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한때 역사학도였던 주명이었기에 기축옥사라는 이벤트를 실제로 겪은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을 보게 된 것 같아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사료로만 접하던 인물과 사건을 이렇게 실제 인물을 통해 대면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 어떤 역사학자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자신은 누리고 있는게 아니던가!
"집안이 역모로 풍비박산이 나고, 무관으로 일하다 낙향했던 나 역시 참수될 뻔 했지. 하지만 서애 대감(유성룡) 덕분에 목숨만은 건져서 군기시의 노비로 일하게 되었다네."
"힘들지 않았다는 것은 솔직히 거짓말이네만, 병장기를 가까히 접하고 직접 만져보고 다룰 수 있었던 건 얼마 남지않은 즐거움이었지."
집안 사람들이 역모로 줄줄히 참수당하는 걸 설명하는 정여수의 얼굴은 큰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군기시 생활을 얘기할 때는 마치 즐거운 일을 회상하는 것 처럼 미소지어 극명한 표정의 대비를 보여주었다.
"난 훌륭한 무관은 아니었네. 그러니 벼슬도 종사관(종6품)밖에 이르지 못했고, 별다른 실적도 내지 못했지."
"하지만, 양반이었다 노비가 되었다며 날 조롱하고 무시하는 장인들 틈바구니에서, 갖은 치욕을 경험하고 군 생활보다도 험하게 부림받으면서도... 제2의 인생을 찾았네."
군인에서 공돌이, 그러니까 기술자로 노년에 전직했다는 말이었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일 터인데, 주명이 느끼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평생 걸어왔던 길과 다른 길을 걷는다는 게 힘들지 않으셨습니까?"
"무기를 만들고, 보수하며 난 이거야 말로 내 천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본래는 반상의 법도가 지엄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의 즐거움마저 인정하지 않았겠지만, 어차피 역적의 집안이 되었는데 사농공상이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말하는 정여수의 표정엔 어떤 후련함마저 옅보였다. 그래서일까. 웬만한 조선인이라면 절대로 살던 곳을 떠나 배를 탄다고 하지 않을 텐데, 그는 노년의 나이임에도 너무나도 대범하게 가지 않았던 길을 가려는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지 않았던 길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았던 값진 경험을 이미 해봤으니까.
"진짜 힘들었던 건 자식이, 며늘아기가 그 참혹한 꼴로 죽어가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
"천우신조로 서애 대감의 도움을 받아 면천은 되었지만, 그덕에 이 동래로 온 것이 외려 왜구를 만난 불행의 원인이 될 줄이야."
"내가 만든 무구도, 무관으로서의 경험도 우리 일가를 지켜줄 수 없었네.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
정여수의 몸에 온갖 상처가 가득하고, 다리를 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저 말을 들으니 왜인지 알 것 같아 주명은 목이 메어왔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격렬히 왜구에게 저항했던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백발 노인의 눈에서는 짙은 회한과 비탄이 느껴졌고, 평소 표현을 잘 하지 않아 굳세고 강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는데 가족 얘기가 나오니 그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 내려왔다.
"이제 내게 남은 건 손자 녀석밖에 없네."
"내가 할 수 있는건 쓸모없는 이 육신으로 무구를 손보는 것밖에 없지."
"이 쓸모없는 나지만, 손자녀석에게 제 어미조차 지켜주지도 못한 못난 할애비지만,
네같은 장사를 도와줄 수 있다면 나름 이 목숨에도 가치가 생기겠지."
"그때, 자네가 왜구를 해치우고 갑옷을 어찌 입어야 하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때, 그 대단한 용력을 지닌 자네같은 장사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난 내가 해야할 일이 조금 보이는 것 같았지."
내 손을 꼭 잡으며 정여수는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의 무구를 책임지겠네! 난, 난 할수있네!"
눈물이 흐르고 있는 전직 무관의 눈에는 저 멀리서 초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귀여운 손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말없이 계속해서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서 주명은 마치 노인이 소년을 부탁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목숨을 구해준 주명에게 뭔가를 부탁하는 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직접 말을 꺼내지는 못했으리라.
정여수에게 들으니 손자인 정옥현이 왜어를 잘 아는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이자 정여수의 며느리는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이었다. 아마 어머니로부터 일본어를 배웠을 거였다.
동래(부산)에 설치된 왜관에서 정여수의 아들과 일본인 여인이 눈이 맞았고, 풍비박산난 집안의 명망에 얽매이지 않았던 정여수가 그 결혼을 허락했다. 덕분에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왜어(일본어)와 조선어에 둘 다 능통한 정옥현이란 소년.
시스템의 보정 덕분에 언어의 장벽이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주명에게 통역이 되는 정씨 소년의 존재가 엄청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쓸모를 바라고 소년을 배에 태운 것은 아니었다.
정여수도, 초희도 그 점에선 마찬가지.
아무리 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여리고 물렁한 정신을 지닌 현대인 김주명의 멘탈이 깨지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같은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동포의 존재가 필요했으니까.
아무리 상태창이, 콘솔 명령어가 함께한다지만 낯선 세상에 떨어졌다는 게, 사람을 죽여 봤다는 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불안정한 정신상태를 지닌 주명에게는 그들과 같은 대화상대가 필요했다.
특히 대화상대란 점에서는 정옥현의 존재가 가장 빛났다.
얼굴도 귀염상에, 활달하고 친근한 성격을 지녔고, 말재주도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좋았던 덕분에 녀석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주명의 불안감이 많이 완화되었으니까.
굳이 따로 주명이 시간을 내서 찾아가지 않아도 어미새를 따르는 새끼새처럼 항상 주명을 졸졸 따라와 말을 거는 바람에, 마치 전담 정신과 치료를 상시 받는것처럼 주명의 멘탈케어란 측면에서는 매우 바람직한 상황이었다. 본인은 조금 귀찮아 하는 것 같았지만.
지금도 주명의 옆에서 재잘대는 이는 옥현이었다.
"형, 대마도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나도 가보지는 않았지만 살기 좋은 곳은 아닐 것 같다. 살기 좋았으면 그렇게 왜구의 본거지가 될 리는 없었겠지."
"그럼 그 무서운 왜구들이 엄청 많지 않을까요?"
왜구들이 모여있다는 말에 옥현은 울상을 지으며 두려워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린 나이에 그런 일들을 당했으니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괜시리 화가 치밀은 주명의 눈에 빨갱이로 변한 노예(왜구) 한놈이 들어왔다.
201레벨에 달하는 피아식별 스킬의 도움으로 살의나 적의를 주명에게 품거나 품을 예정(24시간 내)인 놈은 저렇게 빨간 색으로 표시가 되었다.
더군다나 스킬레벨이 올라가니 구체적으로 살인 행동을 할 신체부위가 있다면 표시해 주었는데, 지금 저 왜구의 몸은 균일하게 빨간 것이 지금 당장은 그렇지 않더라도 하루 내에 분명 살의나 적의를 품을 예정이란 것을 의미했다.
안 그래도 어린 소년을 무참히 구타했던 왜구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던 주명은, 옥현이 그때의 일로 겁에 질려 하는 것을 보고는 내달리듯이 그 왜구의 앞으로 뛰어갔다.
"야, 너!"
"하, 하이.. 쿠엑!"
"너랑 인사할 기분 아니다 이 왜구 새끼야!"
힘 조절을 해가며, 그렇지만 최대한 고통스러울 방법으로 왜구를 주물러준 주명의 폭행은 놈의 몸에서 빨간 색이 사라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았다.
"옥현. 어린 너에게 폭력의 현장을 보여주는 건 좋지는 않다는 걸 안다."
"..."
"하지만 배를 타기로 했으면 말야, 일단 남자가 되어야해!"
굳이 왜놈을 팬 이유는 불순분자를 폭력으로 교화한다는 것도 있었지만 왜인들에게 겁에 질려 있는 옥현을 일깨우기 위한 것도 있었다.
봐라, 저렇게 개패듯 쳐맞는 하찮은 것들이다. 무서워 하지 말아라. 너랑 같은 말을 쓰고 너랑 형 동생을 하는 네가 저것들을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뜻을 전하고 싶었던 거다.
"진짜 사나이는 바다 사나이라는 말이 있어."
물론 그 말이란 건 해군을 만기전역했기에 해군 뽕을 잔뜩 들이킨 주명과 일부 해군 장병만 알고있는 말이었지만, 어쨌든 바다 사나이는 역사적으로 상남자로 여겨지곤 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최대한 근엄한 표정을 지은 주명은 옥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건넸다.
"넌 바다 사나이 맞아. 왜냐고? 저 칼든 흉악한 왜놈들이 무서워 아무도 놈들에게 한마디도 말조차 하지 못했는데, 오직 너만이 말이라도 걸었잖아?"
"그러니까 넌 나보다 낫다고."
"...!"
저 흉악한 왜구들을 복날 개패듯 손쉽게 패버릴 수 있는 하늘이 내린 장사인 주명 형이, 본인보다 자신이 낫다고 치켜세워 주자 옥현은 마음 속에서 뜨거운 뭔가가 끓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용기. 저 왜구들이 무섭지 않다는, 자신도 충분히 대단하는 그 용기.
아직 어린 옥현이기에 이 어거지로 말을 지어낸 단순한 격려가 진짜 먹혔던 거지만, 뜻했던 대로 일이 흘러가자 주명은 흡족했다.
"잉? 저것들이 덜 쳐맞았나?! 또 빨갱이 새끼가 보이네."
뱃머리쪽에 또다시 붉은 색으로 칠해진 무언가가 보이자 주명은 성큼 그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씨발..."
하지만 불행히도 주명이 확인한 것은, 그 붉은 색의 정체는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무수한 붉은 점들이 해안가에 늘어서 마치 붉은 띠를 만들었던 것이라는 것.
그 해안가에는 엄청난 수효의 선박들이 정박된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사실, 또한 지금쯤은 대마도에 도착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건,
"존나 많네."
이곳이 왜구의 본거지 쓰시마 섬(대마도)라는 사실과, 수천 이상의 왜인들이 자신에게 살의 혹은 적의를 가질 게 분명하다는 거였다.
아무리 늦어도 하루 안에.
"아, 레벨업 마렵네. 썩을."
***
쓰시마섬은 왜구의 본거지였다. 이키 섬이나 마츠우라 섬도 있기는 하지만 주된 본거지는 단연 쓰시마 섬이었다.
사업장(약탈지)인 명과 조선과 가장 가깝고 가장 큰 규모를 지닌 곳이 그곳이었으니까.
쓰시마 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원론적으로 간파쿠(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름을 드는 사람도 있겠다. 특히나 일본을 통일한 입지전적인 인물인 그라면 일본 전국의 주인이라 할만 했으니까.
덴노(천황)는 전혀 언급되지도 못한다는 점에서 안습인 부분도 있지만 그자가 들러리가 된 거는 수백년도 넘은 전통아닌 전통이었으니까 일본인 그 누구도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들어가면 봉건제 국가인 일본의 특성상 다이묘이자 이 땅의 지배자 소씨 가문의 제19대 당주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를 들 수도 있지만,
지금 이곳 왜구의 본거지에서 주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신사부로(信三甫羅), 긴지로(緊要時羅), 마고지로(望古時羅)의 세명을 들을 것이다.
각기 수십 척의 대선단과 수백의 병력을 거느린 대해적이자 이곳의 진정한 지배자라고 할 수 있는 왜구들의 수장격인 존재가 바로 저 3인이었다.
그 세명이 모여 회동을 하고 있는 가옥은 척박한 쓰시마와는 어울리지 않게 지나칠 정도로 화려했다. 명나라산 도자기와 비잔, 조선산 모피 등 각지에서 약탈한 물산들이 마치 과시하듯 진열된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부유함에 어울리지 않게 이곳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조정 놈들. 필요할 때는 잘도 부려먹더니 결국 우리를 버리다니!"
"개같은 새끼들! 상납금은 잘도 받아 쳐먹었으면서 결국 이건가!"
상대적으로 젊은 두명의 중년 왜인이 분노에 차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면, 머리가 희끗한 초로의 노인은 표정은 무거우면서도 행동 자체는 다른 두명과는 달리 진중했다.
그가 바로 실질적인 왜구들의 수장 신사부로(信三甫羅)였다. 하지만 관록에 따른 침착함이 있다고 해서 그의 두 눈에서 이글거리는 분노의 열기가 다른 두명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
오히려 누구보다도 그가 분노했다는 것을 알기에, 분노하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기에 긴지로(緊要時羅)와 마고지로(望古時羅)의 고성은 그의 나지막한 제지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조선에서 통신사를 보내려면 장해년의 일(정해왜변, 1587년)에 대한 처벌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깟 통신사가 대체 뭐길래! 대체 왜 우리를 버린다는 겁니.."
성질을 못 참고 황소같이 생긴 긴지로(緊要時羅)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는 신사부로의 눈길에 금세 기가 죽어 눈을 깔았다.
"...간파쿠(히데요시)의 왕관이지. 일본을 평정했다는 것을 외국에서 사절을 보내 사실상 국제적으로 인정받겠다는 거야."
"...그럼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나서겠군요."
한성깔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쥐상의 얼굴에 비열한 인상을 지녀 좀 더 간사해 보이는 마고지로(望古時羅)는 왜 신사부로가 통신사 얘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번 일은 일본의 주인이 원하는 일이라는 것.
고작 해적에 불과한 자신들을 제물로 조선에서 통신사가 온다면, 저 까마득한 위에 군림하고 있는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오히려 이득이라는 것.
히데요시의 의중이 그러하다면 이 대마도에 돌이킬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칠 것이다.
"우리는 바다에서 활동하니 모리(毛利)의 수군이 오겠군요."
마고지로의 확신에 찬 물음에 신사부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 모리? 미친, 우리가 아무리 용맹하다지만 모리 수군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콧김까지 내뿜어 대며 길길이 날뛰었던 그 긴지로마저 겁에 질려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모리 가문의 수군은 엄청난 존재였다. 그저 해적에 불과한 왜구와는 차원이 다른 전투력을 지닌 수만의 병력을 어찌 막는단 말인가.
"우리에게 남은 방법은 두 가지다."
신사부로가 눈을 부릅뜨며 일어서자, 긴지로와 마고지로 역시 뒤따라 일어서며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집중했다. 수십년 동안 왜구의 왕으로 군림해온 그라면 뭔가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에.
"하나는, 쓸려 버리는 게 두려워 이대로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 허나 본거지인 이곳을 버리면 우린 그저 어중이떠중이 해적 나부랭이만도 못하게 되겠지."
"또 하나는..."
신사부로는 허리에 매고 있던 왜도를 뽑아 쓰시마의 다이묘가 묶는 성을 향해 겨누었다. 이름난 명장의 손에 의해 벼려진 일본도는 달빛을 받아서인지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가 이곳 쓰시마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히데요시 그 원숭이 새끼라도 일단 다이묘가 된 나를 타국에 팔아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본인이 쓰시마의 다이묘가 된다는 말에 신사부로의 눈은 더이상 커질 수 없다는 듯 부릅떠졌다. 그 말을 내뱉은 것 만으로도 격동에 차오르는지 실핏줄이 터져 충혈된 눈은 사람의 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붉었다.
그리고 그가 하려는 일 또한 붉은 피를 뿌리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