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11화 - 인연(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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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죠(ID : 181818)"에게 3일 동안 디버프(발기부전)가 부여되어 '불능'이 됩니다.]
"가성비 최고인데?"
남성에게 인생 최고의 트라우마 겸 굴욕을 선사할 수 있는 그 명령어가 CP 1포인트 짜리라니.
게다가 지속시간도 무려 3일!
아무리 실제 전투에는 도움이 안되는 마이너한 디버프라지만, 1포인트 짜리 방어력 버프의 지속시간이 30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극도의 효율을 자랑하는 명령어였다.
콘솔 명령어 자체가 기본적으로 다 사기성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무슨 혹시 명령어의 설계자가 있다면 그자의 고의성까지 다분히 느껴질 정도.
세이죠란 놈과의 '협상'에서 돈을 뜯겨 기분이 더러웠던 바였다. 어차피 명령어로 불러온 돈이라 주명에겐 데이터 쪼가리 정도의 미미한 가치밖에 지니지 않아 큰 손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뜯긴 거는 뜯긴 거니까.
그렇기에 놈의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3일 한정이지만 박탈했다는 생각에 주명은 너무 고소했다. 딱 봐도 그런 종류의 쾌락을 좋아할 만한 부류 같은데 놈의 큰 즐거움을 박살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저 여자는 아직도 못 깨어났네."
어젯밤 구해준 여검객이 객잔의 방에 마련된 침대에 누워 었었다.
어젯밤 그 난리를 겪으면서 구해줬음에도 정작 이름을 못 물어봤지만, 마지막에 세이죠란 놈에게 입은 부상이 심했던지 정신을 잃었기에 부득이 이리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하긴 칼에 배가 관통당했으니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는데 당한 사람은 어떠겠어? 벌써 회복하는 게 말도 안되는 일이지."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상을 입히지는 않았다고 놈이 지껄였지만 여자의 상태로 봐선 그말도 장담할 수 없었다. 구해줬음에도 죽어버렸다는 찜찜하고 씁쓸한 결말 따위는 바라지 않았기에 마지막 마무리까지 하려고 포인트를 모으는 중이었다.
"역시 명령어 외에는 답이 없겠지? 마침 이제 포인트도 다 모였겠군."
'target_heal_all'
[대상의 모든 부상과 질병을 치유합니다.(CP 10 소모)]
[남은 CP : 0/10]
옥현이란 소년에게 시전했던, 완전회복 명령어를 여검객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효과는 즉각적이었고 또 강력했다.
"으음...여기는."
이름난 의사를 수소문해 응급처리를 했음에도 파상풍에라도 걸린 것인지 고열에 시름하며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여검객이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초점을 찾은 그녀의 눈동자엔 압도적인 괴력으로 세이죠 패거리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세이죠에게 꽤나 큰 양보를 한 덕분에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었다. 목숨은 물론, 남자가 아니었으면 죽는것보다 비참한 경험을 했을 것이니 목숨을 구해준 것 이상의 도움 역시 받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녀의 미간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찌푸려졌고, 남자에게 전하는 고마움의 말에서도 차가움과 건조함이 조금 묻어나왔다.
"...고마워."
다행히 눈앞의 모태솔로 남자 주명은 그런 미묘한 감정의 단초들을 알아볼 재주따윈 없었기에 그저 고맙다는 의미만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꾸벅
남자를 향해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러면서 자신의 시선이 가려지자 숨길 수 없는 아쉬움이 그녀에게서 묻어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끝에는 이곳에 없는 다른 누군가가 그려져 있었으니까.
'노구치 사부...'
큰 검을 든 미중년의 사내는 언제나 그렇듯 그녀를 향해 웃어주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마찬가지로 그를 생각하는 나미에의 표정 역시 언제나 그래왔듯 다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하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걸 주명은 보지 못하지만.
"어..?!"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여검객을 보며 주명은 괜히 머리를 긁적거렸다.
출중한 미색을 지닌 저런 미녀에게 그가 언제 저런 감사를 받아봤겠나. 경험의 부족으로 스스로가 숙맥이라는 것을 의도치 않게 드러내고 있었다.
더욱이 어제 봤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자 주명은 왜 얼굴이 빨개지는 것일까.
그녀의 무사로서의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얼굴이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주명의 심박수를 빠르게 하고 있었다.
"뭐, 이, 이런 걸 가지고. 별거 아니야."
그래서인지 주명은 나름 멋진 멘트라도 날려보려 의도는 했다만, 입밖으로 나온 건 떨리는 음색으로 내뱉게된 시시하고 변변찮은 단어들 뿐이었다.
"이 빚은 반드시 갚겠습니다."
핏기가 가신 파리한 안색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봐도 설렜는데, 혈색이 완전히 돌아와 본연의 아름다움을 100% 드러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주명은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결의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그녀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피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마음 한켠에서 아쉬웠던 건 그녀가 말한 빚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는데, 그저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계산적인 채무-채권관계로 그녀와의 인연이 규정되는게 왠지 아쉬웠던 탓일까.
그런 아쉬움은 마음 저 구석으로 밀어버리고는 최대한 그녀와 눈을 맞추려 노력하며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 했다. 빚만 갚아진다면 다시 떠나갈 것 같다는 불안감에 최대한 세상이 빚어낸 한폭의 걸작 인물화를 그의 기억속에 인화해 놓고 싶어서.
"그보다 몸은 좀 괜찮아?"
본인이 누구보다도 콘솔 명령어의 엄청난 효능을 잘 알고 있을 것임에도 왜 굳이 괜찮냐고 쓸데없이 물어보는지.
스스로도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입도 떼지 못하고 그냥 주구장창 머리만 긁적거리며 어버버할 것 같아 뭐라도 말하려 그런 것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충격적으로 예쁠 수 있냐?!'
숨결이 느껴지는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쳐다보니 더욱 그 미색에 눈에 들어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을 정도였다. 잘 씻지도 못하고 고생했는지 허름한 옷차림에 남루한 행색을 하고 있음에도.
"그건..."
눈앞의 남자가 보이는 어리바리한 모습에 나미에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져 갈 때쯤, 뭔가를 깨달았는지 갑자기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몸이, 몸이 이리도 개운하다니."
항상 자신을 옥죄어 오던 저주스러우면서도 익숙한 무언가가 사라졌음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항상 가슴에서 느껴지던 묵직한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렸을 적 사부와 함께 있었을 때 이름모를 역병(疫病)에 걸리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뒤부터 자신과 함께했던, 신체의 일부와도 같았던 고통이었다.
시원한 바람을 들이마셨을 때의 그 청량함을, 폐부를 가득 채운 산소의 충만함을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을뿐 그 이후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세상은 천연의 색으로 칠해져 있었으되 그녀가 바라본 세상의 색 배합은 답답함 때문에 회색, 괴로움 때문에 검은색, 아픔 때문에 붉은색이라는 세가지 색이 다른 사람이 보는 세계에 칠해져 있었다.
그 이후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깨끗함과 시원함이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난 이유는 역시...
주명을 바라보는 나미에의 시선이 변했다.
"설마 당신이?"
"아 그거? 그건 말이지..."
치료 명령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며 말꼬리를 늘리던 주명의 말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뭐, 뭐하는거야?! 이러지 않아도 돼!"
갑자기 벌떡 일어선 그녀가 자신을 향해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숙였던지라 당황했던 것이다. 그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목소리 톤 역시 달라져 있었는데, 감정이 별로 담겨있지 않을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에서 예전
"이 미즈시나 나미에. 당신에게 큰 은혜를 입었으니 무사의 명예를 걸고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은인에게 보은을 맹세하는 무사의 결연한 의지가 돋보여야 하는 광경이어야 하겠으나, 두 가지 점에서 그럴 수 없었다.
첫째, 그 무사가 너무 예뻐서 눈앞의 남자는 다른 포인트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꼬르륵
둘째, 무사의 배에서 큰 소리로 울려퍼진 공복을 알리는 민망한 소리 때문이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
***
나미에를 평할 만한 긍정적인 단어는 많았다.
곤궁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무사도를 포기하지 않은 긍지높은 검객, 다수의 적을 상대로 한치도 물러섬 없이 당당했던 기개있는 무사 등등.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한 주명 역시 지금 당장이라도 최소 열 개 이상은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보여주던 약간은 차가운 태도에 역시 미인은 한없이 도도한 존재인가 하는 고뇌를 주명에게 던져 주기도 했는데,
우걱우걱
'아주 한없이 먹는구나.'
지금 상황에서 주명이 그녀에 대해 가져다 붙일 수 단어는 딱 하나였다.
대식가!
그가 묵고있는 이 객잔은 이 섬에서 최고로 치는 고급 객잔인지라 음식값이 터무니없이 비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돈이 딱히 부족하지 않았고 목숨을 구해준 김에 밥한끼 대접하는게 무에 대수랴 하는 생각에, 사실은 미인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한 70%정도 되어서 그녀에게 마음껏 먹고싶은 걸 시켜보라 했는데...
"이게, 이게 야끼우동(焼きうどん)이구나. 감칠맛나..."
후루룩
많이, 정말 많이 먹었고 또 지금도 먹고 있었다. 그녀의 식탁엔 산더미처럼 음식그릇이 쌓여 있었고, 그에 못지않은 엄청난 양의 음식들이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내뿜으며 놓여 있었다.
"타타키(たたき: 생선구이)? 담백해..."
우걱우걱
미친듯이 음식을 흡입하고 있는 저 처자를 보며, 대체 '대식가' 외에 대체 뭐라 이름붙일 수 있단 말인가. 여자라기엔 키도 크고 몸도 다부지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엄청 굶어왔던 것 같네.'
꾀죄죄했던 행색, 다 낡아 헤져버린 소지품들을 보니 절대로 풍족하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주명은 그녀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사실.
'와, 근데 외모가 저렇게 받쳐 주면 게걸스럽게 먹는 것도 한폭의 그림이 나오는구나.'
반쯤 외모에 혹해 헤롱대는 상태였기 때문에 여인의 무식하기 그지없는 식사량에도 그러려니 했다.
"크흠."
하지만 정씨 어르신은 유교국가에서 살아온 세월이 반백년이 넘었던 관계로 그게 탐탁치 않으셨나보다. 불편한 기색을 최대한 누른다고 눌러 보았지만 누가봐도 언짢아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
그녀가 왜국의 처자라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로 직접 뭐라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나한테 뭐라 말하기에도 뒷담화를 하는 것 같아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냥 혼자 끙끙대는 상황.
근데 어르신은 알까,
"씨발, 너무 맛있어!"
음식에 최고도로 진지해진 저 나미에란 여자는 마치 배가 부르니 이젠 본색을 드러낸다는 듯, 육두문자까지 써가며 음식을 찬미하고 흡입하고 있다는 것을.
아마 알았다면 동방예의지국의 선비였던 어르신이 느끼는 불쾌감은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텐데.
"초희 누나는 괜찮을까요...?"
나미에를 보니 초희 생각이 났던지 옥현은 울상이었다. 우리 초희 누나는 저 눈앞의 왜국 여자처럼 이상한 여자가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같이 있지는 않았지만 꽤나 정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걱정이 컸다.
"초희는 참으로 방정하니 훌륭한 처자였는데 저 왜국 여인은... 쯧쯧."
초희 얘기가 나오자 단아하고 단정한 이미지의 그녀와 지금 눈앞의 나미에란 이름의 선머슴 같은 왜국 여인이 비교되던지 정씨 어르신은 혀를 찼다.
일행 모두 어떤 식으로든 초희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
"일단 의뢰는 해 놓았으니까 기다려 보자. 이 근방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자들이라고 하니 뭔가 단서라도 찾을 수 있겠지."
일행에게 부탁하여 부상을 당한 나미에를 챙기며 객잔으로 돌아와 의원의 진료를 받도록 하면서, 주명은 직접 발품을 팔아가며 근방에 사람을 찾는 일을 해줄 수 있는 조직이든 누군가든 찾아다녔다.
물론 그 와중에도 초희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일도 병행했지만 역시나 신통치는 않았다. 하필 늦은 밤중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가장 구석진 뒷골목에서 일어난 일이라 목격자를 찾기는 커녕 그곳의 위치를 설명하는 데에도 진땀을 뺐으니까.
그러다 결국 히데오란 자가 두령을 맡고 있는 '쿠도(工藤)'라는 조직이 사람을 찾는 흥신소 일에 제법 경험이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는 어찌어찌 겨우 찾아가 의뢰를 넣을 수 있었던 것.
히데오란 자는 적어도 세이죠같은 불량배와는 달리 뭔가 믿음직한 인상의 사내라 안심이었다.
안 그래도 처음 와본 익숙치 않은 대마도에서, 스스로 떠난 그녀를 이제와서 금방 찾기란 요원했기에 주명은 초희를 찾는 일은 히데오의 쿠도(工藤)에 맡기기로 했다.
원래 항해사와 검술사범을 구하려고 했었는데 적어도 검술 사범은 눈앞에 보이니 절반은 당초 계획했던 인력채용 목표를 이룬 셈이었다.
"씨발. 사바노미소니(サバの味噌煮 : 고등어 된장조림)도 너무 맛있어..."
우걱우걱
'와, 이젠 하는 말마다 씨발 소리를 달고 사네? 원래 저런 모습이었나? 아까는 안그랬던 것 같은데...'
물론 눈앞의 검객이 지금 보여주는 모습으론 많이, 좀 많이 못미덥긴 했다만, 그래도 지난밤 보여준 가락이 있으니 내심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저 여자 잡자고 세이죠란 놈이 다수의 인원을 끌고 왔던 것을 보면 더더욱.
"나미에 씨?"
"...?!"
"아까 은혜를 갚겠다고 했었는데..."
은혜라는 말이 나오자 마자 몽롱해진 눈으로 음식을 흡입하던 나미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어느샌가 눈빛이 살아있는 한명의 무사로 돌아가 있었다.
처음 주명과 대화를 나누었을 대 보여주었던 그녀의 그 차가운 느낌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지만,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미친듯이 먹어대는 것을 주명 일행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떨리는 눈동자를 추스르며 이미지 전환을 시도한 것 같았지만,
툭
방금 본인 입에서 떨어지는 고등어 머리가 안 보일까. 그러기엔 이미 글러먹어 보였다.
더욱 커진 볼륨의 "크흠" 소리와 함께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하는 정씨 어르신, 그리고 환상을 깨트린 장본인을 보는 듯 뭔가 실망감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주명, 애초에 '우리 초희 누나는 어디가고 쟤가 왜 여기있어!'라는 생각에 좋은 시선으로 보지 않았던 옥현.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의 불편한 시선이 느껴지자 나미에는 괜히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정적이 있은 후, 당황한듯 어딘가 많이 어색하게 호탕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나미에가 주명의 물음에 답했다.
"하..하하! 무, 물론이다! 무사의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이니 반드시 지킬 것이다!"
"크음, 여인이 목소리가 어찌 저리 우렁찬 것인고."
물론 그 괄괄한 무사의 모습이 정씨 어르신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지만, 어차피 주명이 구하려던 것은 여인이 아니라 무사가 맞으니 상관 없었고 오히려 좋았다.
"나, 검술좀 가르쳐 줄 수 있어?"
"...겨우 그것뿐인 건가?"
주명의 쑥맥같은 어리버리함에 절대 그럴 위인은 아니라고 확신했지만, 설령 하룻밤을 요구할 지라도 무사의 명예를 내건 이상 어쩔 수 없이 들어줄 생각이었다. 몸으로 행한 청산이 끝난 뒤엔 짐승같은 저 남자에게 침을 뱉고 다시는 쳐다보지 않았겠지만.
주명이 요구할 것으로 가장 유력하게 예상했던 것은 수하로 사역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검솜씨가 꽤나 훌륭하다는 것은 어제 봤을 테네 최소한 자신을 빼내기 위해 들인 노력과 금전에 상응하는 만큼은 그를 위해 검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검이 이미 부러져 버렸지만...'
부러진 검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려왔다. 엄청난 명검은 아니었지만 사부로부터 처음 받았던 검이라 애정이 갔던 물건이었는데.
빚과 은혜의 차이점은 그녀가 생각하기에 거창한 것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단지 그 강제력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했으니까.
빚은 상대가 요구하는 청산조건을 들어본 뒤 들어줄 지 말지를 자신이 결정한다. 안 들어주기로 결정하더라도 다른 청산조건을 말하라 하겠지만.
하지만 은혜는 그게 무엇이든 상대가 말하는 청산조건을 들어줘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걸 어떻게 얼마나 달성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것일뿐.
그렇기에 은혜란 말은 함부로 내뱉지 않았다. 자신의 일신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구속시키는 사슬을 스스로에게 감는 일이니까. 그렇게 사부에게 배웠다.
근데 고작 요구하는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는 거라고?
"그거면 충분해. 내게 가장 필요한 게 그거거든."
"알겠다. 그대가 원한다면."
여검객은 주명의 물음에 가슴을 두드리며 답했다.
자신을 구속할 사슬을 상대방에게 주었는데도 그걸 마다하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적어도 그녀의 삶에서는 매우 희귀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지는 경험이기도 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는 것을 나미에는 알지 못한채, 은혜를 갚기 위해 자신이 알고있는 검술을 사부로부터 배운 비전을 제외하고 모두 주명에게 전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리바리한 주명이란 사내에게, 그 남자가 행한 일이 아니라 사람 자체에 처음으로 호의를 느낀 순간이었다.
"허허, 어찌 저렇게 행동이 방정맞아서야 끄응."
물론 정씨 어르신은 나미에가 스스로의 가슴을 치는 행동도 마음에 든 것 같지 않아 불편해 했지만.
"저, 혹시."
"응? 옥현아 무슨 일 있어?"
"혹시, 괜찮다면..."
옥현이는 할아버지의 눈치를 보는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다가 모기가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저도 검술을 배우면 안될까요?"
"..."
옥현의 어린 나이를 보며 나미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2인 검술과외가 시작되었다.
나미에게 먹고있던 거대한 음식접시들을 보며 주명은 뭔가 자신이 잊어버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누군가(들)에 대한 염려가 들었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뭐, 왜구들이야 거친 자들이니 알아서 잘 버티겠지? 설마 굶고 있기야 하겠어?'
***
주명이 참수리호에서 내렸을 때에도 식량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배가 고프므니다..."
그가 자리를 비운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기에 해골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왜구들이었다.
"도망가면 오니, 오니가 우릴 모두 죽일거야.."
"먹을 것을, 먹을 것을 주시..."
하지만 배의 주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마치 목줄이라고 매인 것처럼 아무도 그 배고픈 배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