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13화 (13/77)

〈 13화 〉 12화 - 악연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큰 칼을 찬 중년인이 본인이 만들어 낸 끔찍한 참상을 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산혈해(屍山血海)

단 한사람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십명의 시신이 산을 이루고, 그들이 중년인에 의해 죽음이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에서 흘렸던 피로 온 사방이 붉어 피의 바다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놀라운 점은 그 시신들 모두가 평범한 일반인도 아니고 검과 갑옷을 입고있어 제대로 된 무장을 한 자들이었다는 것이다.

"버러지 같은 놈들."

모시던 주군을 배신하고 적에게 붙어 같잖은 이익이나 탐하던 한 무사단이 단 한명의 손에 전멸했다.

"의뢰는 완수했군."

한때 무사라는 당치도 않은 이름으로 불리었던 자들의 잔해를 차갑게 노려보며 중년인은 저주하듯 침을 뱉었다.

무사의 충의는 무엇보다도 중한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주군에게 은혜를 입었다면 무사는 그 명예를 걸고 목숨을 던져서라도 반드시 갚아여 하는 것이다.

그걸 망각하고, 아니 알면서도 무시하고 제 잇속만 차린 놈들의 죄는 백번 죽어 마땅했다.

가다가 남에게 칼을 거꾸로 들이대는 만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이곳에 모여 술판을 벌이다니. 전국시대란 전장에서 살고 있으면서 전혀 경각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경계하지 않는 자는 순간부터 네놈들은 이미 죽은 것이다.'

물론 저들중에 무고한 몇몇도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 떠밀렸다는 죄로 같이 자신에게 척살당했을 뿐인.

하지만 보은(報恩)이란 도리의 무게를 가늠하지조차 못하는, 한없이 가벼운 그 생의 무게로 하잘것 없는 시류따위에 떠밀려 다니는 그런 잡놈들에 대해 사내는 일말의 동정심도 가질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칼을 쥔 자라면 도리를 깨달아야 하며,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은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거늘.

하지만 희생이란 데에 생각이 미치자 분노와 냉소로 언제나 굳은 표정을 지을 것 같은 사내의 얼굴에도 이질적인 감정이 떠올랐다.

'어떤 희생이라도 말이지. 그...어떤 소중한 것일지라도.'

회한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는 한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누구보다도 고귀한 자였으며 그 지고한 위치에 걸맞는 영웅이었다.

전장에서 그에게 목숨을 구함받았던 자신은 사내가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충심을 품었다.

'주군...'

하지만 결국 전국시대의 압도적인 광기에 영웅은 무너졌다.

무너져가는 막부 최후의 불꽃답게 그 최후마저도 장렬했다.

수십개의 칼을 바닥에 꽂아 넣은 뒤, 그 칼로 배덕한 역적의 무리들을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베어넘기는 투혼를 보여주었으니까.

최후까지 분투하던 주군은 결국 다다미를 뒤엎어 시야를 가린 흉적들의 간계에 당해 수십여 명이 든 긴 창에 찔려 결국 숨이 끊어졌다. 그 사실을 뒤듯게 안 사내는 너무도 안타깝고 원통해서 피눈물을 흘렸다.

그 마지막 순간을 지켜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주군은 가이샤쿠(介錯)조차 받지 못하고 그리도 끔찍하게 참살당했으니까.

해서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증거, 작고 여린 그 아이를 지키는 것이 자신이 그 영웅에게 바칠 수 있는 유일한 보은이라 생각하며 다짐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존재를 숨기고, 불타는 관저에서 빼내기 위해, 그녀의 목숨만큼은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간신히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의 보은은 성공하나 싶었으나, 가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문에게도 은혜를 입었다.

비록 가문의 이익을 위해 다른 가문의 양자로 거의 팔려나가다시피한 자신이지만, 자신이 세상의 빛을 보게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은혜를 이미 내려주었던게 그의 가문이다.

바로 그 가문이 영웅을 굴복시키고 죽음으로 내몰았기에 마음이 쓰라렸지만.

거기에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된 가문이 자신에게 요구한 건...

그 아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비록 얼녀(孼女 : 귀족 아비와 천민 어미의 딸)에 불과한 미미한 존재지만, 아비의 고귀한 피를 반이나마 이어받았기 때문에 후일 화근이 될 씨앗이라며.

가문은 영웅의 모든 흔적이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랐다. 가문의 일원인 자신과 그 아이는 애초에 서로 가까울 수 없는 악연(惡緣)이었던 것이다.

주군에게 품은 충심, 가문에게서 받은 일신의 몸.

두 보은의 길이 충돌할 때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더군다나 그 아이는, 그 어여쁜 아이는, 자신의 거짓으로 점철된 삶에서 유일한 안식처이자 삶의 즐거움이었다.

이세상 모든 귀중한 것들과 가치있는 것들을 가져다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순간들이 그 아이와 사제지간으로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었다.

행복과 의무 사이에서 얼마나 갈등하고 방황했던가.

그래서 자신은, 자신이란 비겁자는 결국...

이미 진작에 전사했다 알려졌던 사내, 노구치 후유나가(野口冬長)는 슬픈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란 놈은 역시 절대로 편하게 죽어서는 아니된 거다. 절대로.'

밀려오는 회한과 자책감에 오늘도 술 생각이 간절했다.

왜냐하면,

그의 제자였던, 후유나가란 이름을 가진 썩고 앙상한 나무 위에서도 싱그러운 노래를 지저귀던 작은 새 같은 그 귀여운 아이를 버린 쓰레기가 자신이었으므로.

날 때부터 어미를 여의고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아비를 잃은 그 가여운 아이가 감기에 걸렸을 때 독을, 독을 약이라 속이며 이 손으로 먹였다.

고통없이 빨리 아이의 생명이 다하길 바라는 마음과, 아이가 웃음짓는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보고 싶기에 극독(劇毒)마저도 버텨내 주길 바라는 이중적인 마음이 공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천운인지, 천벌인지,

고귀한 피를 타고난 그녀는 극독마저도 버티고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그녀가 걸렸던 감기가 사실은 역병(疫病)이었다는 자신의 허황된 거짓을 믿어 주었다.

은인의 딸을 가르쳐 주었으면서도 죽이려 했던, 보은과 배덕 사이에서 어느것도 제대로 택하지 못한 우유부단하고 역겨운 괴물이 바로 자신이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아이를 처리하라는 가문의 명을, 가문에게 입은 은혜를 자신은 절대 거부할 수 없었다. 속박과 의무라는 쇠사슬들로만 이뤄진 그의 신념에서는 반드시 은혜를 갚아야 했다.

비록 한번의 독살 시도로 그걸 갚았다 자위하는 것도 비웃음을 살 일이지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이유를 드는 그의 주위로 무겁고 탁한 바람이 잠깐 불었다가 결국 땅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에게 독을 먹인 이후에 자신의 묵직한 검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다.

묵직함을 추구했던 자신의 검이 어느새부턴가 한없이 부드러운 그것을 추구하고 있었던 이유가.

쇠사슬에 묶인 인생인 자신과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자신같은 놈은 감히 검으로 담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그 존재.

바람.

후유나가 자신은 그때부터 바람이 가진 자유를 바랐던 것이다. 가당찮게도 말이다.

자조적으로 올려다본 하늘에 새 한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래 순백의 색을 지녔을 그 새는 석양을 뒤로하며 붉게 물들어 있었고, 커다란 날개를 힘차게 펴며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새의 자유로움과 온갖 사슬에 얽매여 있는 자신은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악연(惡緣)은 아무리 추억으로 치장해도 인연(因緣)이 될 수는 없는 법인가.'

닿을 수 없는, 그 외에는 뜻을 알 길이 없는 말만이 그의 마음속으로 메아리치듯 되뇌졌다. 그런 후유나가의 주위로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문득, 사슬에 얽매여 있는 자신 따위와는 달리 제자는 저 새처럼 바람을 진정으로 검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바람의 검을 제자에게 전한 이유는 그녀가 자유를 찾기를 바라는 사부로서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산들바람은 마치 날아 올라간 새를 뒤쫒듯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

"...아니 역병(疫病)이었으면 다른 사람들은, 그 사부란 작자는 왜 아무런 탈도 없.. 크억!"

단지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했을 뿐이었다.

역병(疫病)하면 전염성, 전염성 하면 역병(疫病)아니던가.

세상에 단 한명만 콕 찝어서 걸리게 하는 역병도 있던가? 무슨 나노 기술로 만들어져 특수한 유전자에게만 반응하기라도 하게?

하지만 사부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째려보는 것을 보니 그 얘기는 더이상 하지 말고 그냥 닥치라는 것 같았다.

"또 빈틈이야."

거기에 기분이 상당히 나빴는지 칼등으로 어깨를 세게 내리치는 그 매서운 손속에 너무나도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감정을 섞어 친게 틀림없어. 분명히. 썩을!'

그나마 이번에는 사정을 봐줬는지 칼등으로 내리 쳤다는게 다행이지만, 그 세기가 남달라 웬만한 사람이었다면 분명 뼈가 부러질 정도였고 주명에게도 뼈가 시릴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뭐 그녀에게 맞는 거야 지금 검술 수련을 받는 입장이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나미에가 옥현과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기로 결정한 후. 주명은 머물던 객잔의 주인에게 넉넉한 재물를 쥐어주며 수련에 걸맞는 장소를 구해줄 곳을 요구했다.

그저 이곳 물정을 모르기에 그냥 딱 봐도 부유해 보이는 주인에게 부탁했고, 그자는 꽤나 수완이 뛰어난 자였던지 아니면 주명이 쥐어준 재물에 눈이 돌아갔는지 금세 햇볓이 잘 드는 넓은 연무장을 금세 구해주었다.

"이치(하나)! 니(둘)!"

기아에 허덕이던 참수리 호의 왜구들도 옥현의 귀띔에 그들의 상황을 그제서야 깨달은 주명에 의해 구원받아 이곳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마시 산소를 들이키는 것마냥 흡입하던 왜인들의 절박함에 주명이 머리를 긁으며 쓴웃음을 짓긴 했지만.

잘 먹어 때깔이 좋아진 스무명의 왜구들은 자체적으로 익힌 검술이 있었는지 웬 나이든 왜구의 주도하에 주명의 눈치를 보면서도 저들끼리 모여 수련을 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때부터 주명과 옥현은 연무장에서 나미에에게 검술 수련을 받았고, 지금도 그런 수련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수련의 강도.

주명의 탁월한 맷집과 엄청난 괴력을 잘 알고있는 나미에는 탁월한 '맞춤형' 지도를 택했는데, 그게 진검으로 실전을 방불케하는 대련을 한다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처음에는 실전적이라는 의미를 잘 몰랐지만, 실시간으로 대련을 빙자한 매타작 겸 칼부림을 당하고 보니 깨달았다.

'시발! 내가 지옥문을 열었구나.'

차라리 방금 전 사부를 입에 담았다 쳐맞았던 것처럼 칼등으로 당하는 것은 아프면서도 견딜만 했다. 문제는 정말 칼날로 베이게 되는 경우.

'저 미친년은 진짜 사람을 벤다!'

보통 진검으로 하는 대련은 너무도 위험하다. 스쳐도 부상을 입고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디 주명이 보통 사람이던가. 스쳐도 기스하나 안 나고, 전력을 다해 베지 않는 이상 치명상을 입지 않으니 실전적인 대련에 딱 맞는 훌륭한 상대였다.

"으악!"

"엄청 튼튼한 주제에 살짝 베인걸로 엄살은!"

"아니, 사람을 진심으로 베어놓고 무슨 그런말을 하냐! 이 피 안보여?"

"훗, 그정도론 별 피해를 안 입는다는거. 또 금방 회복된다는거 다 아는데 약한 소리는 그쯤 하지?"

"야?! 내가 무슨 샌드백이냐?!"

"샌드백이 뭔지는 모르지만, 상대방이 다칠까봐 걱정할 필요 없이 진심으로 공격해도 괜찮은, 내구성 좋은 상대방이란 의미라면 맞는 걸지도?"

"썅! 그게 샌드백이지 뭐야?!"

"말이 많은 걸 보니 기초체력 훈련 난이도를 좀 더 높여야..."

"..!'

기초체력 훈련이라는 소리에 주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잔뜩 기합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저는 훌륭한 샌드백입니다!"

쳐맞고 베이고 하는건 잠깐 눈을 질끔 감으면 어떻게든 그 순간을 모면할 수 있었는데, 저 독한 여검객이 시키는 기초체력 훈련은 정말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미친듯이 힘들었다.

그저 생각만 했을 뿐인데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

"그럼, 다시 간다. 하아아!"

그런 주명의 반응에 나미에는 만족스러워 하며 재차 검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잠깐 중단되었던 비명소리와 신음소리의 향연이 재개되었다.

"끄아아!"

그 살벌한 광경을 보며 왠지 왜구들은 혹시 저 여자가 그 오니(주명)보다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오니보다 무서울 수도 있는 그 여자가 가끔 자신들을 쳐다볼 때는 그저 힘없이 눈을 내리깔을 뿐이었다.

'대체 저 사람은 뭐지?'

원래 성격 자체가 삐딱해서인지 주명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그래서 그가 불시착할 뻔 했을 때 가장 먼저 반심을 품었던 젊은 왜구 히로시는 혼란스러웠다.

'무척이나 무서운 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압도적인 괴력으로 그가 속해있던 다나카 해적단을 박살내고, 왜구의 본거지에서 정탐선 3척도 닭 모가지를 비틀듯 손쉽게 작살내는 그의 무시무시한 위용을 보며 오니의 현신이라고 두려움을 품었다.

반심이 보인다는 그 망할 관심법으로 동료들을 구타했을 때는 마음속으로 분노하며 복수하겠다는 마음도 품었다.

자신을 포함해 왜구에게 있어 주명은 악운(惡運) 그 자체였으며, 악연(惡緣)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바다에 나가면 아무짝에서 쓸모가 없는 어린 소년과 힘없는 노인, 그리고 여인마저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들여 보호했던 그 자비로운 모습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자신들을 거둬 들여 좋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이렇게 훈련까지 받을 수 있게 지원해 주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왜구들은 참수리호에서 굶어죽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만큼 주명은 배고픔의 괴로움을 이길 정도로 무서운 존재였으며, 그가 떠나지 말라고 한 이상 배에 식량이 없다 하여 배를 떠날 수 없었으니 이대로 간다면 굶어죽을 운명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리 방치한 것이 그동안 유예되어 왔던 자신들에 대한 처분을 아사(餓死)라는 형벌로 내린 거라고.

근데 다시 찾아온 그가 던진 말은 그런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끄응. 이거 참 미안하군. 다들 배고프지?"

그러더니 자신들을 이끌고 간 곳은 평생 쳐다보지도 못했던 쓰시마 최고의 객잔. 구곳에서 그 눈돌아갈 정도로 비싼 음식을 종류별로 시키더니 마음껏 먹으라고 했다.

왜구들은 태어나 처음으로 극락이란 이런 것인가 하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그래 이런게 행복이야..'

바다로 나가 큰 사람이 되겠다는 치기어린 포부도 있었지만 살길이 막막해서, 배가 너무도 고파서 히로시는 왜구가 되었다.

이번이 첫번째 해적질이었는데, 선임들 말로는 정말 대박을 쳤다지만 자신은 실감할 수 없었다.

빼앗겨 가는 생명줄 같은 식량에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이들, 가족이 유린당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막으려다 피를 흘리며 시신이 되어가는 이들, 피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백성들.

그들의 모습에서 없이 살았던 자신의 삶이 투영되자 히로시는 그 '대박'에 몰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장 역겨웠던 것은 여인들을 취하며 낄낄거리는 다나카 대장과 선임들의 모습이었다.

왠지, 왠지 윤간을 견디다 못해 피거품을 머금고 죽어간 조선인 여인의 모습에서 무사에게 잘못 눈에 띄어 노리개로 유린되다 자결한 누이의 모습이 떠올르는 것 같았다.

'나미꼬 누나...'

그 증오스러웠던 사무라이(무사)들과 저 선임들 사이에 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나도 다를게 없었다.

홀로 굳은 얼굴로 멍하니 바다를 응시하던 히로시를 선임들은 병신같다며 비웃고는, 심지어 이번에 산채로 잡아온 미색 출중한 여인을 나중에 차례가 되면 한번 맛보게 해준다는 말을 위로랍시고 건넸지.

'그 곰보 선임새끼는 목이 꺾여 뒤졌다지?'

온갖 강간의 경험들을 무용담삼아 늘어놓던, 별 시덥잖은 실력을 지닌 주제에 똥군기는 무척이나 잡아대던 개새끼였기 때문에 그가 주명에게 죽었다는 것을 들었을 때는 차라리 통괘하기도 했다.

게다가 조선인들의 증언을 통해 강간이나 살인의 범죄를 저지르적 있던 왜구들은 한명도 남김없이 주명에 의해 말 그대로 '찢겨져' 죽었다. 곰보 선임에게 범해졌다는 그 여자의 남편을 뭍에서 죽였던 이름모를 선임도 포함해서.

다나카 해적단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아 신병들 비중이 매우 높았고, 습격이든 약탈이든 주로 경험많은 소수의 베테랑 선임들이 주도했기에 그런 처벌 과정을 거치고도 20명이나 살아남았긴 했다.

동료를 그리 무참히 죽였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무척이나 주명이란 조선인이 싫었지만,

수십명의 왜구들을 혼자서 박살내는 그 압도적인 무위. 그리고 이렇게 살다간 평생 단 한번도 맛보지 못할 진미를 선뜻 자신들에게 내어주는 주명의 대범함과 자비로움에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열악하며 방종한 삶을 살아가는 자신들과 같은 왜구에게, 사무라이들에게나 가능한 연무장을 이용할 수 있도록 내어주는 대장이 어디 있었던가?

'...내 이런 분은 평생 처음 본다. 우리 같은 천것들에게 연무장을 내어주다니.'

처음 연무장에 나와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이 지긋한 베테랑 왜구였으면서도 주명의 전과이력에 따른 처단을 통과한 이상한 이력의 그 야마모토 영감이 너무 감탄한 나머지 입이 떡 벌어지며 내뱉은 말이 기억난다.

히로시는 어렸을 적, 그가 기억하기로는 가장 풋풋하게 아름다움을 뽐내던 나미꼬 누나의 손을 잡고 인근의 절에 가서 들었던 불법의 내용이 떠올랐다.

그때 스님은 인연을 강조했었다.

'삼라만상은 결국 인연(因緣)이 시작이자 끝일지니. 영원한 악연(惡緣)도 영원한 선연(善緣)따윈 없으니. 예단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정진하며 인연을 이어가야 한다.'

그 뜻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주명과의 인연이 이대로 계속 이어진다면 그게 자신의 동앗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다.

히로시를 비롯한 20명의 왜구들은 조금씩 그 오니(주명)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있었다.

두려움의 대상에서 고개를 숙이고 싶은 대상으로. 오니(도깨비)가 아닌 다이쇼(대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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