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16화 (16/77)

〈 16화 〉 15화 - 결의(決意)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스*이림이란 게임의 그 콘솔(console)같아 보이면서도, 시동어를 제외하곤 명령어는 스*이림은 물론 그 어떤 게임과도 같지 않은 콘솔. 레벨업이나 각종 아이템에 대한 설정이 온갖 게임에서 가져다 덕지덕지 쳐바른 것 같은 누더기 같은 '게임 시스템'.

거기에 악마를 때려잡는 게임으로 유명한 디*블로의 요소가 또 한 숟가락 얹혀 더욱 짬뽕스러워졌으니, 그 한 숟가락에 해당하는 게 바로 '조부'란 이름의 개사기 거검(巨劍)이었다.

핵&슬래쉬 장르라 원래도 플레이어가 먼치킨처럼 사 썰어버리는 디*블로라는 게임에서마저도 그 미친 성능으로 먼치킨성을 몇제곱 배가시키는 최고의 사기템.

거검(巨劍) '조부'.

특별한 요소가 딱히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무기'란 키워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데미지와 명중률을 환골탈태 수준으로 높여주는, 정말 하늘에 계신 조상(조부)께서 굽어살펴 주시는 것 같은 그런 검인 것이다.

하찮은 튜토리얼 보상(능력치 상승 스크롤)에도 꼼수를 쓰는 주명인데, 당연히 이 엄청난 물건에 꼼수도 안 쓰고 순정으로 그냥 쓸 리가 없다.

수련으로 몇시간 동안 콘솔을 건들지 않아 축적된 포인트에서 결과적으로 대박을 친 갬블링을 하는데 소모된 포인트 몇점을 제외하곤 가 '조부'의 교화력 겸 깽판력 강화에 쓰여졌고,

[이름 : 거대한 검 '조부(祖父)']

[레벨 : 35(경험치: 0/17.5)]

[효과 : '파괴불가', +135% 증가된 피해, +45% 명중률 상승, +3 모든 능력치 상승, +135% 피해저항]

[모든 검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추앙받는 검입니다.]

행성파괴급은 아니지만 밸런스파괴급의 미친 성능이 구현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섬나라 야만인들에게 참된 교화의 칼질을 보여주는 것일 뿐.

나중에 문명개화(文明開化)론을 부르짖으며 명치유신 어쩌고 서구열강 흉내를 내게될 저 일본놈들에게 문명'교화'(文明敎化)를 먼저 시켜줄 시간이 왔도다.

원래 유가에서 말하는 교화의 첫걸음은 서당에서 천자문을 못 읽은 아이에게 드는 회초리였으며, 교화의 끝판왕은 오랑캐들에 들이대는 사랑의 매 아니겠나?

하지만 우쭐해 있는 주명에게 찬물을 끼얹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신감을 보이는 건 좋은데. 그것뿐이었던 것 같네."

"무슨소리야?"

"대체 어떻게 싸울 생각이야. 설마 힘만 믿고 돌격할 생각인건 아니겠지?"

솔직히 무슨 거창한 계획이 있어 자신있게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냥 원래 왜구는 때려잡아야 하는 놈들이고, 경험치가 필요하던 참이었으니까 공격대 뛰는 기분으로 가볍게 나선 것 분이었으니까.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흠."

스스로도 답변이 궁색했는지 머뭇거리던 주명은 뭔가 떠오른 게 있었는지 등 뒤에 자랑스럽게 차고 있던 거검 '조부'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가슴을 탕탕 치며 외쳤다.

"일단 우리들의 무기나 갑옷 성능이 압도적으로 월등하잖아! 템빨이라고 템빨! 이 검으로 적들을 쓸어.."

나미에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심함이 듬뿍 담긴, 그녀 자신에 대한 자조도 가득 섞여있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더니,

짝!

엄청난 내구성을 지닌 주명의 볼이 그저 따귀를 맞았다고 빨갛게 퉁퉁 부어오르지는 않았지만, 심상세계에서만큼은 적어도 그런 데미지를 입게된 것 같다.

"...?!"

"....이런 새끼를 잠시나마 듬직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병신이지."

다행이라면 다행인 것이 뭔가 재미있는 얘기라도 그 순간 꺼낸 건지 지금의 이 상황이 대원들이나 일행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뺨을 맞았다는 짜증과 분노보다는 자신의 뺨을 때린 인물이 나미에라는 것을 알고서 오는 당혹감이 더 컸기에 주명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매우 상심한 것 같은 그녀의 슬픈 표정에다 대고 도저히 화를 낼 수 없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특히나 허세라도 빌려 우쭐대고 잘 보이고 싶은 대상이 자신에게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에서 더욱.

"니 부하들을 해병대(海兵隊)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했지. 그 녀석들 네 부하야. 알아?"

"...잘 알지. 내가 병신도 아니고 모를리가."

뺨을 맞아서 불쾌했던 것인지 주명의 목소리도 날이 서 있었다.

"그걸 아는 놈이 닥치고 돌격이야?! 난 그래도 기대했어. 니가 기분좋게 싸우자고 나가길래, 자신있게 저 녀석들에게 싸움을 준비시킬 때. 근데 넌 아무런 작전 지시도 없었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결과 아무 대책없이 스스로의 힘만 믿고 뛰어들 생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지."

"용맹하게 싸우는 게 잘못인가?"

"그저 용맹하게만 싸우는 건 잘못이지. 왜냐하면 이건 전쟁이니까. 넌 부대의 지휘관이니까."

주명을 질책하는 그녀의 표정은 서릿발처럼 날이 서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얼어붙을 것 같은 그 차가운 태도에 주명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 녀석들, 출신이 해적들이라는데 그것까지 변호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녀석들을 부하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면 이제 지난날의 죄가 문제가 아니잖아?"

"니가 정말 대장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이라도 해 보았으면, 그냥 무작정 돌격한다는 병신같은 생각만으로 녀석들에게 싸우라 말하지 않았겠지."

그녀의 질책이 팩폭을 하고 있어서 주명은 아무런 말도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 말대로 무책임과 무대포의 극치였으니까.

"그건 아냐? 저 녀석들 어제 단체로 절에 몰려가 기원하더라. 좋은 대장을 만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다고, 부디 대장이 무탈하게, 만수무강하게 해 달라고."

"...!"

야마모토가 찾아와 저녁때 잠시 대원들을 데리고 갈 데가 있다고 하길래 허락해준 기억이 있는데, 거기가 근방의 절이었다니.

싸우러 가게 준비하라는 자신의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지시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무장을 준비하고 있는 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믿는 것인지 정씨 어르신과 옥현도 그 사이에 껴서 웃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저들의 목숨이 자신의 결정에 달렸다는 그 간단한 사실이 이제야 와 닿았다.

진작부터 가지고 있었어야 했으나 지금까지 외면해 오고 있던 무거운 책임감이 이자까지 더해 가슴을 내리 누르고 옥죄는 것 같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 새끼들을 데리고 전장에 간다는 놈이 뭐? 템빨? 용맹?! 고작 도구를 믿고 싸운다는 놈이나 힘만 믿고 싸운다는 놈이다 둘다 병신이야. 근데 넌 둘 다이네? 이 개병신 새끼야!"

"..."

병신이란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도 주명은 혼란스럽고 부끄럽던 마음이 진정되며 차분해 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을 객관화 하여 바라보게 된 것이다.

전쟁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확고한 지론과 신념을 듣고 있으니 적어도 그녀가 참전 경험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너, 전쟁을 겪어봤구나?"

"...그랬지. 한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자 지금까지의 매섭고 차가운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뭔가 슬프고 후회가 가득한 나미에의 표정에서 주명은 확신할 수 있었다.

욕을 달고 다니는 선머슴같이 괄괄하고 쾌활한 그녀의 모습과, 놀랍도록 신중하고 차가운데다 슬픔을 머금고 있는 모습. 두 모습 사이의 괴리에는 분명 전쟁의 경험이, 전쟁에서 얻은 상처가 자리잡고 있을 거라고.

"전쟁을 겪어봤기에 잘 알 수 있어. 지금 너와 네 부하들 수준으로는 이 전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해. 설령 네가 그 괴력으로 앞장서며 적들을 엄청 많이 죽인다고 전쟁을 이기진 못해. 사람이란 한계가 있으니까."

"전쟁은 수천, 수만 단위의 사람들이 모인 군대라는 거대한 괴물들끼리의 싸움. 설령 네가 수십을 벤다고 해도 그저 돌격하기만 한다면 수백의 적이 널 에워쌀 거야. 네 힘이 아무리 뛰어나도 화살 세례와 철포(鐵砲 : 조총) 일제사격 한번이면 저승길 확정이라고."

"네가 그렇게 쓰러지면 부하들은? 지휘관 잘못만난 죄로 다 몰살되는거야. 차라리 깨끗하게 죽어버리면 나을걸? 화약 몇줌을 얻기 위해 노예로 팔려나가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는 삶을 살아가는 것보단. 병신이 되어 평생을 구걸하고 다니는 것보단."

주명은 왠지 그녀의 말에서 묻어나는 감정의 흔적들을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를 잃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의 후회와 죄책감, 그리고 슬픔을.

"그러니, 부디 이제라도 다시 생각하자."

주명이 평정심을 되찾자 자신의 설득이 먹혔다고 생각했는지 나미에의 어조가 누그러졌다.

"어차피 이건 너의 전쟁이 아냐. 또한 전장은 네 놀이터도 아니라고."

"전장에 섰을 때 판돈으로 덩달아 내걸리는 네 부하들의 목숨값이 중한 줄 이제라도 안다면, 일단 전쟁에 서면 그 값진 목숨들의 무게가 그저 말 한필, 칼 몇자루, 땅 몇뼘보다도 가벼워 진다는 것을 안다면..."

그녀는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말라고. 자신처럼 후회하지 말라고. 전장에 가지 말라고.

그럼에도 들어줄 수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진지하게 자신을 설득하는 그녀의 그런 모습이 상처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그 설득은 적어도 너는 나처럼 상처받지 말라는 배려심과 걱정에서 나온 것임을 알면서도.

세상 천지에는 무수한 '개'같은 놈들이 벌이는 무한한 '좆'같은 일이 가득한데, 그냥 외면하다 보면 세상은 그저 관성대로 '개좆'같아질 뿐이다. 그것은 엔트로피 확장이라는 자연법칙에도 닿아 있으니까.

"엄마. 엄마..흑."

어미를 잃고 원수에게 짓밟힌 어린 소년은 왜 이땅에 생겨났는가.

"....달거리를 하네요."

지아비를 잃고 원수에게 유린당한 여인은 왜 원수의 씨를 품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놓여 있는가.

'개좆'같은 놈들, 가까운 예로 왜구 놈들에게 힘이 없어 그저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힘이 있음에도 침묵한다면, 외면한다면 콘솔의 권능을 들고 이땅에 자신이 온 이유가 없다.

'할배요, 제 말이 맞죠?'

자신은 악마들이 판치는 세상에서도 가장 추앙받았던 이 위대한 검의 주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괜시리 검이 울리는 것이 진짜로 에고 소드라도 들고 있는 것 같아 심쿵했지만, 그건 자신의 손떨림에서 기인한 거겠거니 하고 쓸데없는 기대는 접었다.

이 한없이 냉정하고도 진지한 세상, 원래대로 흘러가다 보면 결국 씁쓸하거나 슬프거나 한 현실의 '개좆'같은 맛에 질식될 뿐이다. 자신은 자신의 방식대로 간다.

저기 왜구들이 있다. 왜구들은 '조부'앞에서 찢어 발겨져야 한다.

어디 한낱 경험치들 따위가 이 '조부' 앞에서 숫자를 믿고 까부느냐. 레어(Rare)는 커녕 노멀(Normal)템도 못 떨구는 무능력한 그지깽깽이들이.

"참전할 필요가 없..."

주명은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드라군이 출동한다면 어떨까?"

"...?! 이 씨발.."

쌩뚱맞은 말을 들은 나미에는, 적어도 주명이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에 욕지기가 튀어 나왔다. 진심을 다해 말을 했는데도 저따위라면 정말 사람이 싫어질 정도라 배신감이 들 정도였는데,

"하지만 드라군은 없으니 오니(鬼)가 출동하면 어떨까? 일단은 오니도 괴물이잖아? 그럼 군대라는 괴물에 홀로 맞설 수 있겠지."

"미친 새끼야!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노려보는, 실망감과 분노에 눈을 파르르 떠는 그녀를 마주 응시하며, 주명은 '조부(祖父)'에 손을 가져대 대었다.

그리고 연무장 주변의 바위로 이뤄진 공터에 다가갔다.

쩌억!

주명이 전력을 다해 휘두른 검격에 대지가 둘로 갈라졌다. 아니 그 압도적인 강맹함과 강렬함에 찢겨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공터에 새겨진 족히 3장(10미터)은 넘는 길쭉한 흉터. 그곳이 단지 물렁한 흙더미가 아니라 단단한 바위로 이뤄진 암석지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저 한 명의 인간이 했다고 믿고싶기엔 너무나도 충격적인 결과였다.

나미에로부터 배운 풍검술이 지닌 '증폭'의 검리도 약간은 기여를 했지만, 주명의 엄청난 힘과 '조부'검의 사기적인 스펙이 합쳐진 결과물이었다.

그 광경에 놀라 동공지진을 일으키고 있는 나미에, 입이 떠억 벌어져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을 바라보는 대원들을 돌아보며 주명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난! 왜구들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러자 충격에 정신이 가출해 있었던 것인지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급히 무거워졌다. 특히 왜구 출신의 해병대원들은 표정이 굳어졌고.

"근데 해병대 애들을 보니 고통받는 것은 왜구들도 마찬가지더라고. 안 그런 놈들, 그러니까 진짜 해적놈들도 많지만."

"..."

해병대원들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은 풀리는 것을 쳐다본 주명은, 고개를 돌려 다시 나미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부'로 자신이 만든 충격적인 위업을 가리킨 채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군대가, 결국 전쟁이 괴물이라고 했지? 나 정도 되는 괴물, 그러니까 오니라면 충분히 전쟁도 친히 발벗고 나와 일기투를 벌이며 싸워주지 않을까? 괴물 대 괴물이면 격이 맞을 것 같은데?"

"말장난 하지 마!"

발끈하는 그녀를 주명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확신에 가득찬 눈으로 응시했다.

"너야말로 말장난 하는거야. 아니,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야."

"뭐라고? 씨발. 야!"

"나도 처음엔 몰랐어. 적이라고 하면 모두 다 괴물로 보였지. 근데 아니었어!"

마치 사자후를 외치는 것 같았다. 큰 소리로 그녀의 말을 부정하는 주명의 박력에 나미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던 입술을 더 뗄 수가 없었다.

주명은 조부(祖父)를 들어 해안가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의 진원지, 물밀듯이 밀려오는 수천 왜구들의 출몰지인 수백척의 함선들 사이에 꽂혀있는 커다른 깃발을 겨누었다.

"저 빌어 쳐먹을 깃발! 저 깃발과 그걸 휘두르는 놈들이 진짜 괴물이다. 반면에, 단지 그 깃발에 모인 녀석들은, 적어도 내 해병대원들은 괴물따위가 아니었으니까. 슬프고 힘든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전직 왜구인 해병대원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주인에게 이해받는 것에 감동한 나머지, 그에게 '빨갱이'소리를 들으며 쳐맞았던 아픈 기억들도 모두 잊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7살짜리 옥현이는 저 빌어먹을 깃발 중 하나였던 거에 가족을 잃었지."

옥현의 이름이 나오자 그의 마을을 습격했던 해적단 출신이었던 해병대원 사이에서도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섞인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귀여운 소년의 부모를 앗아간 게 자신들같은 왜구라는 사실을, 소년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알았으므로.

거대한 검 '조부(祖父)'가 겨누는 방향은 쓰시마 섬의 영주가 있는 영주성에 걸린 깃발로 옮겨졌다.

"또한 평범한 청년이었던 히로시는 다른 깃발의 주인이 눈과 귀를 쳐막고 저 산에 짱박혀 폼이나 재고 있는 동안 누이를 잃었다!"

주명의 말에 히로시의 눈이 커졌다. 주명의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대마도주가 제대로 통치자의 역할을 했다면 그 부하인 사무라이가 자신의 누이에게 손을 대어 결국 그녀가 자결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나미꼬 누나...'

울먹거리는 옥현과 핏발선 눈을 하고 있는 히로시를 한번씩 눈에 담은 뒤 재차 나미에를 쳐다보며 주명은 일갈했다.

"개인이 항거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따윈 허상이다. 저 깃발든 놈들은 우리가 그렇게 믿기를 바라겠지만. 전쟁은 단순해. 깃발을 찢어 버리고, 깃발을 쥔 놈을 찢어 죽이면 이긴다."

적군 전체를 아군 전체가 상대한다는 거창한 전쟁을 하며, 인산인해에 질량으로 짓눌리고 시산혈해에 투지가 마모되는 걸 택하지 않겠다. 그건 책임을 져야 할 윗대가리들이 그 숫자에 숨어버리는 비겁한 방식이니까.

그래서 자신은 군심을 박살내고 수뇌부의 대가리를 따 전쟁수행 의지를 없애는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 일본이 수억의 일본 백성들을 미군과 싸우게 하며 옥쇄시킨다는 미친 발상을 했지만 핵폭탄 두방에 바로 살려달라고 항복하게 된다. 주명에겐 핵폭탄은 없지만 그에 어느정도 비견되는 이 '조부'가 있으니 비슷하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다들 이상해. 어떻게 저런 헛소리를 믿는단 말야?'

뭐라 쏘아대고 싶었지만 나미에는 주위의 분위기가 끓어오르는 게 피부로 느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해병대!"

"예! 대장!"

"죽을지도 모르는 바다를 향해 익숙한 고향을 등지고 떠난 순간부터 우린 사나이인 것이다. 죽일지도 모르는 적을 향해 칼을 든 순간부터 우린 전사인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불타오르는 전의와 끓어오르는 고양감에 눈빛을 이글거리는 해병대를 향해 주명은 싸우자고 외쳤다.

"같은 배를 탄, 같이 칼을 든 사나이들이여! 저 왜구들의 깃발로부터 사람들을 구하자. 이땅에는 또다른 옥현이가 생기지 않도록! 저 산의 깃발이 지금 못하고 있는 걸 우리가 해야 한다! 또다른 히로시가 생기지 않도록!"

사실 주명은 대마도 사람들에게 조선인들과 같은 친밀함이라던지 사명의식을 느낄 수는 없었다. 반쯤은 왜구 지망생이자 후보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대마도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왜구의 침공에 노출된 그들이 당해야만 하는 일은 너무도 자명했고 그걸 적어도 같은 인간으로서 지켜볼 수는 없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도 사람인지라 해병대원들이 내뿜는 분위기에 동조될 수밖에 없었고, 적어도 지금은 진심으로 그들을 구하고 싶었다.

주변에 넘치다 못해 하늘로 솟을 것처럼 넘치는 투지의 물결에 응답하듯 주명은 '조부'를 높이 하늘을 향해 치켜 들으며 외쳤다. 마치 전쟁을 선포하듯.

"우리는 저 해적새끼들의 깃발을 찢어버리러 간다!!"

"와아아아!"

군대와 부대 사이의 전혀 균형추와 격이 맞지 않는 영혼의 맞다이, 깃전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미에는 저 사나이이자 전사들이 뛰어가는 '길'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씨발, 다들 정신이 나갔어. 어떻게 저런 말도 안되는 소리에 투지를 불태울 수 있지?"

말로는 욕을 내뱉으며 투덜거렸지만, 아무리봐도 헛소리라고 생각되는 주명의 '깃발을 꺾으면 전쟁을 이긴다'라는 헛소리가 괜히 마음속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막으려 해도 말이다.

그것도 그거지만 그녀의 마음 가장 깊숙이 계속해서 여운을 남기는 말은 따로 있었다.

"일단은 오니도 괴물이잖아? 그럼 군대라는 괴물에 홀로 맞설 수 있겠지."

군대라는 괴물에 홀로 맞서다 부하들을 잃은 누군가와는 달리, 저 오니같은 미친 녀석이라면 정말 전쟁과 맞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니가 전쟁에 홀로 맞선다는 그 정신나간 녀석의 모습이 마치, 폭풍을 앞에두고 검 한자루를 쥔 채 달려나가던 누군가의 뒷모습을 닮아 있어서.

'칫, 무슨 말도 안되는 생각을. 어찌 사부님과 저런 풋내기를 비교해?'

저 무모한 녀석이 전장에서 칼맞고 스러지기 전에, 제정신인 자신이라도 가서 어떻게든 퇴로라도 확보해야 겠다고 다짐하며 나미에는 질풍처럼 뛰어 주명과 해병대원들이 향했던 방향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세이죠 패거리를 상대로 믿을 수 없는 활약을 보여준 주명이라 할지라도 전투로 단련된 왜구들의 군단에 맞서서는 처음부터 큰 곤경에 빠질 거라 나미에는 생각했었다. 그런데,

"으아아악!"

"오, 오니... 오니가 나타났다!"

'맙소사. 저게 말이 돼?!'

칼질 한방(一刀)에 최소 2~3명의 적이 피분수를 뿜으며 양단(兩斷)되는 압도적인 무력앞에 추풍낙엽처럼 쓸려가는 적들의 부대(部隊)를 보며 생각을 고쳐먹을 수 밖에 없었다.

"끄아아아!"

"오, 진짜 스*이림의 거인 일격같은데!?"

그리고 갑자기 어디선가 가져왔는지 거대한 몽둥이를 들어 아래에서 위로 쳐 올리자, 무거운 갑주를 입고있던 왜구의 무인 한명이 괴성을 지르며 하늘에 닿을 기세로 솟구치는 것을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네.'

주명이 만들어 가고 있는 전쟁은, 자신이 알던 전쟁과는 너무도 달랐다.

인간들의 전쟁에 오니(鬼)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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