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16화 - 오니(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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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쇼(젠장)!"
8척 장신의 거한(巨漢)이며 뛰어난 싸움꾼이기도 한 자, 대마도의 항구를 공격한 왜구들을 이끄는 3명의 인물 중 하나인 자,
또한 스스로 일본국 해적집단 내의 정정인 3대천왕의 일원을 자처하는 자인 긴지로(緊要時羅)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재수없는 늙은이, 신사부로(信三甫羅)가 자신의 야망을 위해 세운 계획이지만 그가 듣기에도 완벽한 계획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냥 항구를 불태운다는 일종의 보복(報復)에 불과했으나, 신사부로의 능력과 야망이 합쳐져 정복(征服)에 한걸음 더 가까워 졌다.
어느정도는 주변인에 가까웠던 해적들이 대마도의 주인이 될 발판을 이번에 마련할 작정이었고 다들 자신감에 차 있었다.
먼저 허장성세를 위한 빈 배들을 이곳에서 영주성이 있는 산을 건너면 나오는 반대편 바다에 적당히 늘어놓는다. 그러면 귀빈을 데리고 있어 조그마한 움직임에도 과잉대응이 강요되는 대마도주는 일부 병력을 분산할 수밖에 없다.
히데요시의 조정측 인사도 분명 조선에서 온 국빈인 통신사와 같이 있을 것인데, 명백히 보이는 위협에도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마도주는 히데요시의 추궁이 두려워 잠일 이루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놈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게 허장성세요 성동격서임을 모를 리 없기 때문에 진짜 전력은 남겨둘 것이다.
그놈들을 끌어내 위한 방법이 대마도의 주인이 되기 위한 계획의 핵심이었고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긴지로 본인이 이끄는 '주력군' 3,000명이 쳐들어와 항구에 불을 지르며 난동을 피우면 옳다꾸나 쾌재를 부르며 제대로 때려잡는답시고 그 무거운 궁둥이를 움직일 것이다.
실제 '주력군'으로 적들이 오판할 부대는 숫자만 모은 어중이 떠중이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그 엄청난 수효에 누가봐도 이게 진자 주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그리고 소탕을 위해 기세등등하게 내려와 압도적인 전력으로 신나게 자신들이 주력으로 위장한 2선급 병력을 상대로 '승리'를 거듭하며 밀어내면? 그때부터 계책이 발동되는 것이다.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에 스스로 걸어가게 된 꼴이니까.
비록 '패배'를 위장해야 하는게 지휘관인 긴지로로서는 기분나쁜 일이었지만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여겼다.
삼면 포위.
대마도주의 병력이 승리에 취해 깊숙하게 포위망 안에 들어왔을 때, 불안한 치안을 이용해 미리 숨겨둔 진짜 주력군 2,000명에 현지에서 포섭한 불량배 무리 1,000명을 더하여 밀리던 병력과 함께 합세하고 대마도 주력군을 섬멸한다는 것.
특히나 싸움판 자체가 익숙한 환경이었다. 시가전이 벌어지는 상황은 바로 자신들 같은 왜구들이 가장 유리한 난전의 상황이니 승률은 더욱 높아지니까. 현지 불량배는 당연히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대마도주가 모든 상황을 눈치채고 거의 팔천 명에 이르는 자신의 모든 병력을 집결해 투사하는 돌발상황만 생기지 않는다면 필승의 계책이었고, 신사부로는 절대로 그런 돌발상황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 단언했다.
그런데 정말 그의 말대로 일이 흘러갔다.
대마도주는 거짓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그 방면으로 배치하고, 통신사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대다수의 병력은 영주성에 배치한 채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가신이자 무사인 마에다(前田)가 이끄는 주력군 2,000명만을 이곳으로 파견했다.
대마도주는 그정도의 군세만으로도 2,000명 ~ 3,000명 사이로 예상되는 왜구의 '주력군'으로 보이는 무리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고, 그건 긴지로 자신도 인정한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대마도주도, 주력군을 이끄는 마에다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미 저들을 상대로 포위하여 잡아먹으려는 함정이 탐욕스런 두꺼비처럼 쩌억하고 입을 벌리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에 기세좋게 적의 주력이라 생각되었던 놈들을 밀어붙였기에 녀석들의 사기는 더없이 높게 치솟았다.
하지만 그게 결국 신사부로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두 무리의 적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되었다.
마에다와 대마도 주력군에겐 최악의 방향으로.
갑자기 신사부로 본인이 직접 이끄는 2,0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의 주력군이 나타났을 때, 지금까지 상대했던 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맹함을 지닌 그들의 출현에 정신이 나갈 정도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을 거다.
평소 그들에게 뒷돈이나 찔러대며 굽실거리던 암흑가의 불량배 무리들이 칼을 쥐고 왜구의 편에 가담한 것 역시 충격이었겠지.
손쉽게 이길 수 있으리라 믿었던 싸움에서 포위되고, 안그래도 난전이 벌어지며 대마도군이 전투력에서 크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다 숫자와 기세에서도 현격히 밀리기 시작하니 탈영하는 놈들마저 속출했다.
긴지로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있다 확신했다.
평소 정규군이랍시고 자신들을 멸시하고 깔보던 녀석들에게 한방 먹여준다는 생각에 희열을 느낄 정도.
"하하하! 이 얼마나 멋진 대공세인가!"
이번에 왜구들이 동원한 병력은 엄청났다.
무려 5,000에 이르는, 사실상 일본의 모든 왜구들이 집결했다.
평소 해적이라고 자신들을 멸시하는 가증스런 관군 놈들을 쳐죽이고 놈들을 처자를 유린하며 재물도 약탈할 수 있다는 매력적인 제안을 신사부로의 큰 영향력으로 설파한 결과 가능한 결과로 말이다.
거기에 평소부터 교류가 있었던 현지의 불량배 무리를 다수 포섭한 결과 1,000명의 병력을 더할 수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대마도주가 예상한 3,000명의 두배에 달하는 6,000명이 동원된 것이다!
무식해서 글을 모르기에 손자병법을 읽은 적도 없는 긴지로지만, 싸우기도 전에 미리 이기고 시작한다는 글귀는 이번 전투에 딱 어울리는 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 앞에서도 적들은 시시각각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긴지로 본인도 관군을 썩은 짚단 자르듯 베어 넘기던 중이었고.
"뒈져라! 크하하핫!"
놈들이 방진을 구축하고 병과의 유기적인 협동을 통해 정규군의 굳건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지금처럼 쉽게 무너트리는 불가능했겠지만, 이곳은 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도심지역.
사이사이의 공간이 비좁아 정규군이 자랑하는 이점들을 도저히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반해 자신들은 이곳의 지리에 빠삭한 현지 세력들이 협력하고 있었고, 난전의 전문가인 해적들이 싸움을 이끌어가 지리와 인화가 모두 갖춰진 유리함이 의미하는 것은,
"이 비겁한 놈들! 끄어억"
"저 쪽에서도 적들이?! 으아악!"
안그래도 전황도 크게 불리한 가운데 좁은 골목과 길목에서 기동하게 되니 필연적으로 분산되어 버려 먹잇감으로 전락한 대마도의 군대와 그걸 각개격파하는 자신들의 호쾌한 승전보였다.
무리에서 떨어진 사슴을 악어떼가 몰려들어 갈갈이 찢어버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런데 적어도 자신이 맡은 이 방면의 전역(戰域) 만큼은 상황이, 전황이 돌변했다.
"오니가 나타났다!(おにが あらわれた!)"
"크아아악,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명망높은 사무라이들이나 입을법한 상등품의 갑옷인 당세구족(当世具足)을 입은 수십의 무리가 등장했을 때 조금은 긴장했다. 하지만 그정도의 긴장은 눈앞의 붉은 괴물에게 마땅히 품어야 하는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곧 확인되었다.
자신들이 사용하는 왜도(倭刀, 일본도)와는 달리 거대한, 거의 사람 한명의 키만큼 거대한 양손검(劍)의 형상을 한 그 기괴한 물건을 좌우로 휘두르니 부하 두명이 순식간에 위아래로 분리됐다.
놈이 파고들어 이번엔 위에서 아래로 검격을 휘두르자 놈의 갑옷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훌륭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철로된 투구까지 쓰고 있던 부하 한명이 갑옷째로 좌우로 양단(兩斷)됐다.
거기까지도 말이 안 되지만 놈이 갑자기 휘두른 몽둥이를 닮은 무언가에 갑주를 든든히 걸치고 있던 부하 하나가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구름까지 뚫고 치솟았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피를 흩뿌리며 수십미터나 사람이 치솟는 광경은 그 자체로 아군의 군심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충분했다.
"마, 맙소사. 정녕 저놈은 오니(鬼, おに)란 말이던가! 사람이 어찌 저런 말도 안되는 무력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긴지로의 눈에 그 붉은 갑옷의 괴물이 자신을 응시하는 것이 보였다.
"너구나?!"
놈의 시선이 마치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이 된 것처럼 몸이 움츠려들고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원래 놈의 갑옷이 붉었던 것이 아니라, 단신으로 순식간에 수십의 아군을 썰어버리며 묻은 피로 갑옷이 붉게 물들어 버렸다는 사실이 기억 저편에서 인지되자 그놈의 시선이 너무도 공포스러워 진짜 오줌마저 지릴 것 같았다.
"깃발!"
그리고 놈이 씨익 웃더니 알수 없는 말을 내뱉으며 자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자, 자칭 바다 사나이 긴지로는 아랫도리가 축축해짐을 느꼈다.
지렸다.
단 열걸음, 그 얼마 되지 않는 걸음수이지만, 그 걸음을 내딛으며 주명이 행한 위업은 단지 열이라는 작은 숫자와 아득히 거리가 먼 수준의 말도 안될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열걸음을 걸으며 휘두른 12번의 참격에 정확히 24명의 적이 반으로 쪼개져 절명했다. 거검으로 공격했음에도 절단면이 흘러나오는 피의 분수를 빼고 보면 너무나도 깔끔한 것이 주명의 압도적인 힘과 그가 든 거검의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걸음이 끝나 당도한 곳엔 오줌을 지리며 뱀 앞의 개구리처럼 굳어있는 덩치 큰 사내와, 긴지로라고 쓰여져 있는 큰 깃발이 놓여져 있었고,
"컥.."
아래에서 위로, 비스듬한 사선 방향으로 올려치며 휘둘러진 주명의 검격에 사내는 갑주째로 몸통이 절단되어 절명했으며 깃발은 땅에 떨어져 피에 적셔졌다.
"우와아아아!"
너무도 빠르게 이뤄진, 자신들이 끼어들 여지도 없이 벌어졌던 그 위업을 지켜보던 해병대원들은 끓어오르는 사기와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전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 붉은 갑옷의 무인(주명)의 활약 덕분에 목숨을 건지게 된 대마도주의 병력들도 마찬가지로 함성을 질렀다.
하나의 여(旅 : 500명)에 달했던 대마도의 후군(後軍)이 단지 졸(卒 : 100명)도 겨우 채울 정도의 숫자로 쪼그라들며 패색이 짙었던 상황이었다.
지휘관 무사는 이미 난전통에 목숨을 잃었고, 제대로된 지휘관도 없이 그 한데모여 소탕당할 순간만을 기다리던 시한부 패잔병들이 자신들이었다.
1개 사(師 : 2,500명)가 넘어가는 압도적인 숫자의 적에 맞서 죽을날만을 기다리며, 악귀같은 왜구놈들이 주변의 동료들을 하나둘씩 사냥하는 광경에 분노하고 또 절망하던 상황.
그런 상황을 단 한명의 무인이 개입하여 뒤집어 버렸으니 대마도군 입장에서는 기사회생이었고 그 무인에게 자연스러 경외감을 품게 되었다.
패잔병들을 이끌고 있던 나이든 병사이자 오장(伍長 : 5명의 병사 지휘)이었던 노병 이치로(一郎)는 자신들의 주변에서 환호하고 무사들 중 가장 고참으로 보이는 자에게 다가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혹시 저분은 누구십니까?"
해병대원들은 무사가 아니었지만 그들이 입은 갑옷이 워낙 훌륭해 보였기 대문에 이치로가 야마모토와 다른 해병대원들이 무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또한 지금 주명의 압도적인 활약에 힘입어 그냥 병풍처럼 서 있기만 했어도 해병대원들에 대한 평가가 수직상승한 것 역시 그런 오해의 원인이었다.
야마모토는 자신이 저런 위대한 무인의 부하란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꿈꾸어 왔던 건 이런 것이었다. 바로 주명과 같은 위대한 무인을 뒤따라 그의 힘이 되어주는 것.
비록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멀뚱히 그의 활약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앞으로는 반드시 다를 것이라고 다짐했다.
이치로를 향해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오는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야마모토는 물음에 답했다.
"우리의 다이쇼(大將)이시네."
쥐새끼들처럼 공포에 질려 흩어지는 왜구들을 보며, 정말 수괴가 죽어 버리자 썰물이 빠지듯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나미에는 생각에 잠겼다.
'정말, 정말로 깃발을 부수고 군대를 이겼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 그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긴지로라로 했던가. 놈의 수괴가 제 깃발과 함께 양단되는 광경을 보면서, 그녀는 '오직 군대와 군대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는 범접할 수 없는 두 괴물 사이의 투쟁'이라는 자신의 전쟁관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오니도 괴물이잖아? 그럼 군대라는 괴물에 홀로 맞설 수 있겠지."
주명이 자신에게 던지고 간 그 한마디 말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이게 자신의 전쟁이라고, 자신은 전쟁에 홀로 맞설 수 있다고.
그리고,
맞서다 뿐이겠는가? 단신으로 전쟁을 뒤집어 엎어 버린 자가 녀석이었다.
정말로 오니(鬼)가 저기 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