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26화 (26/77)

〈 26화 〉 25화 - 무사(武士)(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그날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언니가 얼마나 비참하게 유린되어야 했는지 이 눈으로 봤지만 그래도 이렇게 추악하고 무례한 짓을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죽여버릴꺼야!'

설마 죽은 뒤에도 그 신체의 일부마저 저렇게 조롱거리로 삼아지다니.

사람의 몸은 절대로 저렇게 훼손되어서도, 그저 물건으로만 취급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그것도 참혹한 죽음을 가한 저 원수의 손에 의해 말이다.

'반드시 죽여버릴 거야!!'

이글거리는 증오와 살의를 담아 나미에는 진스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검격을 날렸다.

강철이라도 베어버릴 듯이 무척이나 강렬하고 빠르게 휘둘러지는 그녀의 검격이 지척까지 다가온 그때.

곧 진스케 자신의 목을 저 검이 베어버리기까지 고작 찰나의 시간만 남은 그 순간.

"느려."

진스케의 눈빛이 달라지던 것과 동시에,

도저히 범인의 눈으로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섬전같은 빠르기로 그의 검집에서 뽑혀진 검에 의해 나미에의 검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맥없이 막혔다.

검의 동작범위가 무척이나 짧아 가속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본래 큰 힘을 지니지 못할 역격(逆擊)이어야 하건만 아니었다.

전력을 다한 검격처럼 엄청난 속도와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치 전신의 회전을 통해 힘을 축적하여 내지른 검격이라 해도 믿었을 정도.

그 한번의 움직임에 진스케가 추구하는 거합(居合)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그 역격(逆擊)이 지닌 거대한 파괴력과, 그로인해 생겨난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미에는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갈 것 같은 충격에 다급히 물러나야 했다.

겨우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으로 애쓰는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며 조소했다.

"역시 계집이란 어쩔 수 없다니까."

짝짝짝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듯, 상석에 앉아 수행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앉아있는 사내의 얼굴에는 저 진스케 만큼이나 가학적인 만족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훌륭하다 진스케. 내 영지에서 소란을 피운 저 빌어먹을 계집년의 비명소리를 네 덕분에 즐겁게 감상할 수 있겠어! 크하하하!"

뱀의 눈을 닮은 가문의 문장, 즉 가몬(家紋)을 지닌 사내.

마치 흉폭한 거대 구렁이처럼 강맹함과 잔인함과 겸비한 무장이자, 동시에 규슈의 대영주이기도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가 바로 그 사내의 정체였다.

사내가 앉아있는 높은 단상은 임시로 만들어진 듯 급조한 것 같은 티가 역력했지만 꽤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던지 사람 10명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넓고 사람 어깨만큼이나 높았다.

그 단상 내에서 같은 반열의 위치에 앉아있는 자는 바로 이 나가사키의 주인이며 히젠의 곰이라고 불리는 사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였다.

"가토 공과 저 진스케란 무사 덕분에 그저 남만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번잡하기만 할 뿐인 내 영지 나가사키에서 이런 여흥을 꾸며 즐길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준비한 이 여흥이 마음에 드는지요?"

"마음에 들다 마다요! 나베시마 공, 내 이 즐거움을 꼭 기억하고 보답할 것이외다."

"별말씀을요. 허허, 그나저나 미색이 출중한 저 계집이 망가지는 것을 보는 것 또한 나름의 즐거움이 되겠지요."

곰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비열하고 교활한 인상을 주는 나베시마의 저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음심(淫心)이 드러나 있는 것이, 이 결투에서 이기지 못하면 나미에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될 지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저 둘이 앉아있는 연단을 기점으로 수백의 병사들이 나미에와 진스케를 가운데 두고 원을 그리듯 늘어서 있었는데, 도무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빠져나갈 수 있을만한 조그만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가토와 나베시마의 여흥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의 벽으로 둘러싸여진 임시 검투장이라도 만들어진 것 같은 모습.

당혹감, 그리고 절망감이 드리우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나미에의 떨리는 눈에 진스케가 서 있는 뒤편으로 웬 털보 거한과 함께 서 있는 낯익은 인물이 들어왔다.

털보 거한은 진스케에게 나미에가 나가사키에 왔다는 것을 알린 자였으며, 점원은 여기 대장간에 들어왔을 때 봤던 그 작자였다.

분명 저 둘이 이 상황을 초래하는 데 뭔가 역할을 했을 거란데 생각이 미치자 나미에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운이 좋았네 낄낄낄. 저년이 너무 빨리 떠났으면, 일이 어그러져 허탕을 쳤으면 내가 뒈졌을 텐데 말이야."

"얌마, 어찌 이런 신박한 생각을 금방 해낸 거야? 크크."

"낄낄. 정말 신박하지? 근데 내가 한게 아냐. 나 같은게 뭐라고 이런 거창한 무대를 만들 수 있었겠어."

점원은 턱짓으로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가리킨 뒤 두팔을 과장되게 벌리며 말했다.

"영주님 정도는 되어야 이 커다란 검투판을 벌이시는 게 가능하지. 낄낄."

점원은 썩은 입에서 더러운 악취가 나는 걸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놈의 입에서 이 일에 대한 내막이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전에 잠깐 가토님의 군에 종군했을때 안 건데. 가토님이 저년을 찢어죽이고 싶어셨다는건 나같은 병졸들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꽤나 유명했지. 나베시마님도 그걸 아셨을걸? 뭐 칼을 든 여자라는 점에서 흥미가 돋으셨겠지만."

"근데 가토님과 저년이 딱! 정말 운 좋게 나베시마님의 영지인 나가사키에 있는걸 그분이 내 덕분에 알았네? 평소 좋아하여 자주 열곤 했던 검투판을 이곳에서 벌이시는 거지. 거기에 검투판에 그 투희를 집어넣어 망가트리면 본인도 즐기고 또 가토님과의 친분도 돈독하게 하고. 뭐 그런 생각이셨겠지?"

가토의 병졸 출신이었다는 비열한 쥐상의 점원은 이 땅의 영주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피튀기는 결투를 보는 것을 즐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주군인 류조지 가문의 것을 찬탈했다는 오명을 의식해서인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신경쓰며 자신의 저택에서 은밀히 노예들끼리의 피튀기는 사생결단을 즐기곤 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들었다.

허나 지난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때 시마즈 가문을 공격하던 히데요시를 나베시마가 도와주면서 그의 장악력은 공고해 졌고, 더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것이 없어진 그는 이제는 대놓고 그런 취미를 즐겼기에 그건 이 나가사키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술취한 남만인들의 금화를 건 결투, 몰락한 낭인끼리의 명예를 건 검투, 노예끼리의 면천을 두고 벌이는 혈투 등 각양 각색의 미친 검투회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즉흥적으로 열어대었다. 저택이나 교외의 공터는 물론이고 시장바닥이나 민가도 가리지 않고 그의 유희의 장소가 되었던 것.

하지만 기괴한 음탕함을 지닌 작자였던 나베시마가 특히나 좋아하던 건 투희(闘姫)가 들어간 싸움이었는데, 조신하고 얌전해야만 하는 당대의 수동적인 여성상을 너무도 능동적인 투희가 육감적인 몸매를 뽐내며 부수는 파격과 해방감에 묘한 쾌감을 즐겼던 것.

또한 여자가 무기를 들고 뜨거운 숨을 내쉬고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건, 그녀들의 몸에서 일렁여 코까지 흘러들어오는 비릿한 땀냄새를 맡는 건, 특히나 헐벗은 여인이 가슴을 덜렁이며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의 음탕한 취향을 저격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안그래도 벌써부터 아랫도리가 불끈한 것인지 나베시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뜨거운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오오..."

심지어 발정난 곰이 내는 듯한 저 요상한 신음소리마저 토해내고 있었으니 이런 류의 변태적인 취향을 가졌다는 것은 사실인듯 싶었다.

그런 인간이었기에 이런 해괴하고 한가한 짓거리를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야, 역시 나베시마 영주님은 통도 크셔. 나도 저 계집년을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망신준다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판이 커지다니. 역시 다이묘 같은 분들은 우리랑 생각하는 게 차원이 달라."

"저 계집년, 이 바닥에서는 꽤나 유명하다구. 뭐 안 유명했어도 칼든 여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우리 영주님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셨겠지만. 이제 우린 부자가 되겠네 낄낄낄. 답답한 대장장이 영감 씨다바리 짓은 당장 때려칠 수 있을 정도로!"

나베시마가 약속한 묵직한 재물을 생각하며, 또 무참히 농락당하는 그녀의 모습을 여기서 감상할 거란 기대감에 침을 질질 흘리는 점원의 모습은 너무도 역겨워 보였다.

그랬구나.

그때, 그 참혹한 일이 있었던 때처럼 만들어진 판에 놀아난 것이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적들을 베며 얻은 그 승리가 온전히 그녀의 것이라도 믿었었지.

진스케라는 사내를 위해 병사 수십을 제물로 하여 만들어낸 무대였고 그녀는 그런 미끼에 꾀여 격퇴당하는 조연에 불과했었지.

오늘도 그저 저 진스케가 날뛸 수 있도록 짜여진 무대였다.

두명의 영주.

이 무대의 주인이자 판의 기획자인 나베시마가 진스케를 배우로 쓰며 가토라는 귀빈을 초청하며 만든 무대. 그녀가 무너지는 모습을 즐겁게 여흥으로 지켜볼 자들의 무대.

건방진 여검객이 무너지고 고통받는다는 각본은 이미 쓰여졌고, 주연배우인 진스케의 압도적인 검술 실력에 그 각본대로 밀어붙일 힘이 놈들에게는 있겠지.

자신이 고통받은 모습을 즐기러 친히 강림한 두 영주에 의해 진스케와 저 두놈은 뒤탈은 커녕 큰 보상이나 받겠고 말이다.

"그러게 어디 쥐굴에나 기어들어가 숨어 살 것이지. 쯧. 뭐 상판데기를 보니 매음굴도 나름 괜찮은 선택이었던 거 같지만."

여유가 가득한 진스케의 이죽거림에 나미에는 답할 수 없었다.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암담함,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그 실력차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막막함, 짐승같은 영주들에 의해 자신의 처절한 분투마저 그저 유희거리로 농락당할 것이라는 참담함에 입술을 뗄 여유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개같은 자식들. 역겨워. 토할 것 같이.'

홀로 자신을 짓누를 것 같은 압도적인 실력의 검사도 증오스러웠지만, 하지만 더욱 이가 갈리는 존재, 더욱 역겨운 존재는 그 검사를 부리는 저 영주놈들 이었다.

"저년을 죽여 버리고 토막내 소금에 담아 군사들에게 뿌릴 것이야! 저 빌어먹을 년때문에 내 체면이 얼마나 상했던지. 썩을 년 같으니."

"음, 토막내기보단 길들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토 공. 저 미천한 여인을 순종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흐음 가장 확실한 게 있지요."

순종이라는 단어에 가토 기요마사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탕하기로 유명한 나베시마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다는 눈치.

"하하하! 진정한 '사내'인 공께서 저년을 굴복시킨다면 내 어찌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공의 것을 빼앗으려 하겠소? 하지만 진스케의 검이 날카롭기 때문에 순종시키기 전에 이미 못쓸 물건이 되는 게 아닌지 걱정되오."

"이 험난한 전국시대에 어찌 온전한 음식만을 맛보기를 바라겠소이까. 설익거나 상한 물건들도 먹었던 본인이 그저 생채기가 났다고 음식을 가리지는 않소이다. 고작 생채기 뿐이라면 그 비릿함에 오히려 맛보는 풍미를 돋우기도 하지요. 껄껄껄."

나베시마의 이상성욕은 꽤나 유명했다.

그놈이 어린 소녀나 나이든 중년의 여인도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대로 취하며 온갖 변태적인 짓거리로 농락다는 것을 떠올린 가토는 내심 그런 음탕함을 경멸하는 속마음을 숨긴채 최대한 호탕하게 웃음을 지어보이며 답했다.

"최대한 상하지 않게 조심히 다루라고 진스케에게 말하겠소. 히젠의 주인께 드리는 진상품에 어찌 칼집을 심하게 낼 수 있겠소. 하하하!"

자신의 패배를 무슨 유희를 즐기는양 맛보고 조롱하기 위해 강림한 저 두 명의 영주. 저들의 말마따나 지금의 처지는 진스케라는 칼에 의해 썰려질 도마위의 생선보다 나을 게 뭐란 말인가.

'...개같은 자식들.'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저들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자들이었으니까.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던 나미에는 주명의 표현의 의하면 진정한 의미의 괴물들이라는 저 영주들의 힘을 잘 알았다.

수천, 수만의 칼을 거머쥐어 뭇 인간들을 위에 군림한 인간 이상의 존재들.

지금 놈들이 거느린 수백의 정예병이 온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것도 섬뜩한 광경이었지만 저 병력이 끝이 아니다.

저들의 뒤에는 무려 수만에 달하는 창칼이 번뜩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고작 지금 눈앞에 보이는 위협 정도로는 그들의 진정한 무서움을 가늠할 수 없겠지.

저 높은 곳에서 펄럭이는 두개의 깃발에 새겨진 문장(가몬)들을 보는데 왜 그녀석이 떠오르는지.

그 정신나간 그 조선인의 말이.

-저 빌어 쳐먹을 깃발! 저 깃발과 그걸 휘두르는 놈들이 진짜 괴물이다!-

그때 주명이 그 녀석이 자신을 보며 외쳤던 말이 왜 불현듯 떠오르는 것일까.

-하지만 드라군은 없으니 오니(鬼)가 출동하면 어떨까? 일단은 오니도 괴물이잖아? 그럼 군대라는 괴물에 홀로 맞설 수 있겠지.-

검술도 서투르면서 무모한 행동을 고집하는 그 바보같은 녀석.

하지만 녀석은 홀로 군대에, 전쟁에 맞서며 스스로를 증명한 멋진 녀석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날 깃발을 찢으로 간다고 외치며 당당히 출전하는 그녀석의 등이 참으로 커 보인다, 남자다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그 남자의 등이 지금 내 곁에 서 있어주었으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하는 생각에.

'치, 쓸모없는, 약해빠진 생각이야!'

그저 누군가에게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삶을 살기에는 사부로부터 배웠던 무사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굶주림에 몰려 도둑질까지 하던 몸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무사란 자의식을 놓지 못했다. 어느새부턴가 무사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이 되어 버려서.

'나미에 너는 무사라고 무사!'

진스케가 내뿜는 살의와 지난 패배의 기억이 그녀의 용기를 옥죄었고, 주위를 둘러싼 영주들의 군세가 주는 중압감에 투지는 짓눌려 버릴 것 같았지만 나미에는 묵묵히 검을 들었다.

비록 자신은 주명 같은 오니(鬼)가 아니니 그녀석처럼 초인적인 힘으로 저 괴물에 맞서지는 못한다. 그저 평범한 인간일 뿐이니까.

그래도 자신은 무사(武士).

무사라는 자긍심을 지니고 지켜야할 무언가가 있다면 그때부터 무사. 그 무사도를 가진 채 검을 쥐면 무사인 것이다.

비록 일전의 패배로 긍지는 실추되고, 소중한 이들은 잃었으며, 가진 검은 부러졌지만.

저 눈앞의 거대한 적들에 당당히 맞서 물러섬 없이 싸우면 그 자체로 무사의 긍지인 것이다.

"나, 나미에. 이게 다 무슨 일이니? 내 이놈들을! ...컥!"

바깥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 것을 안에서도 느꼈는지 대장장이 할아범이 나와보았다 분기탱천하여 날뛰려다 놈들에게 제압당하는 것이 보였다.

그깟 검술이 뭐라고 자신을 진정한 무사라고 우러러보는 해병대 녀석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소중한 이들은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지켜야할 인연은 남아있다.

정여수가 준 이름모를 명검이 자신의 날카로운 예기를 내보이려는 듯 비쳐온 햇빛에 빛무리를 흩뿌렸다.

검은 부러졌지만, 이 손에는 다른 검이 쥐어져 있다.

"흠, 딱히 걱정해서 준게 아니니 오해하지 말게나. 크흠."

인연이라는 이름으로 얻게된 검이.

***

나가사키의 거리를 걷는 두 사람.

청년은 거대한 거검을 뒤에 매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고, 어린 소년은 꼬치를 양 손에 쥐고 음식을 우물거리며 그를 따라가고 있었다.

다람쥐처럼 양 볼이 부풀어오른 소년이 앞서가는 청년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형, 근데 무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그거? 야만인처럼 칼부림을 하다가 제 뜻에 맞지 않으면 칼날로 자신의 배를 갈라 자해하는 거지 뭐겠냐."

"..."

성암 히씨의 시조이자 축국(蹴鞠)의 거성이요 성현이신 히동구 선생께서 해주신 진리의 팩트를 말했음에도 옥현은 주명의 말에 별로 납득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무라이가 뭔데!? 아니 칼좀 잘쓴다고 폭력에 그냥 미친 놈들이 미화가 되냐? 칼만 잘 쓰면 인성이고 나발이고 볼 것도 없이 만사 오케이야?"

"아니야!"

갑자기 버럭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옥현의 반응에 주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생글생글 웃으며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녀석이 그러니 당혹감이 큰 것이다.

"나미에 누나가 말한 무사도는 그런게 아니야!"

우리 초희누나 어디가고 왜 저런 여자 여기있냐고 싫어할 때는 언제고.

주명은 옥현의 태세전환이 놀라웠고 대체 언제부터 그 일본여자에게 호의를 가지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얌마. 대체 왜 그러나 했더니 어린노무 자슥이 벌써부터 왜색(倭色)에 빠져 일뽕을 거하게 들이켰나본데. 형이 사무라이란 잡것들의 실체를 까발려 줄게."

일본놈들의 문화를 추종하다니. 저 노란 싹수를 고쳐줘야 한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주명은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은 쪽바리들이 출몰하는 놈들의 터전인 만큼 분명 저 저열하고 야만적인 쪽바리들의 실상을 알려줄 만한 증거가 주변에 차고 넘칠 거라 확신했다.

그의 눈에 포착된 것은 한 사무라이가 노점의 상인들을 상대로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었다.

때마침 적절하게도 사무라이가, 딱 그의 사무라이 혐오의 빼박 증거가 되어줄 놈들이 보여 주명은 쾌재를 불렀다.

"감히 이따위 쓰레기를 돈을 받고 팔아? 날 모욕하려는 것이냐?!"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사, 살려주십시오."

물건의 품질이 떨어진다 트집을 잡으며 칼을 빼어들고 상인을 위협하는 사무라이.

"내 검이 보이지 않는게냐?!"

모욕의 대가로 '품질이 떨어지는' 물건을 공짜로 제공해 줄 것에 더해, 배상금까지도 요구하는 저 사무라이의 날강도 같은 모습은 주명이 생각하는 진정한 사무라이의 모습이었다.

칼든 강도.

언제든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신분의 증표이자 그걸 증명하는 유형화된 상징이 일본도. 그걸 들고 약자를 위협하고 핍박하는 쓰레기들이 사무라이다.

"저거 봐. 저렇게 강도질을 밥먹듯이 하는게 사무라이들의 실체야. 칼을 들고 선량한 사람을 위협하다니 이 얼마나 끔찍한 생각이니? 저놈들에겐 저런 폭력이 일상이야."

손가락으로 그 모습을 가리키며 옥현에게 사무라이 개새끼론(武士 犬子論)을 열심히 설파하던 주명이었지만 아무리 팩트를 주입해도 옥현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기만 할뿐 전혀 생각이 바뀐 것 같지 않았다.

"하아. 이녀석아, 어린 녀석이 벌써부터 일뽕에 물들면 어떡하냐."

"..."

묵묵무답인 옥현의 반응을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던 주명의 눈에 또다른 증거가 되어줄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무슨 큰 볼거리라도 있는건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는데, 마치 원을 그리듯 어딘가를 둘러싼 이곳 병사들이 창을 번뜩이며 서 있는 모습에 기가 눌렸는지 사람이 운집한 곳에 들렸어야 하는 소음은 들려오지 않고 조용했다.

대신 검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려온다는 것에서 무척이나 신기한 광경이었다.

"저기 뭔일인지 가보자. 수틀리면 이유없이 칼부림부터 하는 사무라이들의 폭력적인 본성을 내가 보여줄게!"

분명 칼부림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것도 큰 스케일로.

참나, 대낮에도 칼부림이라니, 역시나 왜놈들 클래스가 어디 안간다

폭력이 필요한 순간도 있지만 일상이 폭력이면 매우 문제가 있는데, 저 왜놈들은 중증 폭력성애자들이다. 그러니 그렇게도 침략전쟁을 벌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주명은 옥현의 손을 잡고 근처 가옥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병사들이 막아서고 있는 공간의 모습을 잘 지켜보기 위해서였고 이미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리하는 자들이 많았기에 내린 선택.

"폭력이 얼마나 나쁜 건지는 너도 알지? 적어도 우리나라는 대낮에 저런 짓거리를 하지 않고 대화로..."

왜구에게 가족을 잃은 옥현이는 분명 저들의 폭력적인 모습을 목도하면 충분히 일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형, 저기, 저기있는 사람. 나미에 누나 아니야?!"

"...?!"

온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상처에서 난 피로 피칠갑을 한 여검객이 서 있었다.

무복 안에 받쳐 입었던 경갑주는 이미 그 역할을 다하고 넝마가 된 지 오래.

무복에게선 애초에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기에, 더이상 갑옷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그녀의 전신은 낭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핏빛으로 물든 무복은 군데군데가 찢어졌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베여 찢어진 무복의 앞섶에 가슴 한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모습.

하지만 그 누구도 그 모습에서 외설적인 감상을 품을 수 없었던 것은, 드러난 맨살 위로 깊숙하게 베인 처참한 검상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지혈도 안 되는지 상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로 대지를 적실 정도였으니까.

저리 서 있는 것조차 위태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떨림이 멈추지 않는 팔로 검을 상대에게 겨누고 있는 모습은 당당하지만 무척이나 힘겨워 보였다.

그 애처로운 힘겨움을 끝내준 것은 상대방이었던 왜인 검사의 검격.

대각선으로 길게 이어진 검격은 그녀의 흉부에 커다른 상처를 남기고 피를 뿌리며 여무사를 무너트렸다.

주명은 볼 수밖에 없었다.

나미에에게 다가가 고통스러워 하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린 왜인 검사가 칼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툭툭 건들며 조롱하는 모습을.

"그래, 이렇게 고분고분하게 있어야 계집 답지."

굴욕과 고통에 힘들어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좋다고 박수를 치며 깔깔거리는 깃발 아래의 무리들을.

"꽤나 저항했다만 역시나 무리였지요? 근데 저런 것도 무사의 투혼이라면 그래도 봐줄만 한것 같소. 음 본래 무사가 패배하면 할복을 하며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는데, 저년은 더 눈요기가 될 만한 것을 꺼냈지 않소이까. 허허허."

"나베시마 공의 말이 맞소. 봐줄만한 건 저년의 그 가슴과 반반한 면상밖에 없지요. 술이나 따라야 할 계집년이 칼을 들고 설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늘 진스케에게 이렇게 교육을 받으면 제 분수를 알겠지요 크하하하!"

주명은 조용히 거검 '조부'를 집어들어 놈들에게 겨누었다.

'WW1510_gain_EXP_100'

['거대한 검 '조부'(WW1510)'가 경험치를 100 획득합니다.(1포인트 소모)]

'WW1510_gain_EXP_100'

'WW1510_gain_EXP_100'

...

그리고 미친듯이 현재 가진 포인트를 모조리 조부에 때려박았다.

아까 상인을 겁박하던 사무라이 새끼 말마따나 자신의 검이 보이지 않냐고 외치고  싶을 정도로 강화되는 '조부'.

폭력, 결단코 폭력!

더 많은 폭력이 필요하다.

사람이 먼저이기 전에, 할배가 먼저고. 할배는 폭력을 싣고 간다.

할배와 폭력은 한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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