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6화 - 무사(武士)(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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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는 본래 대장장이의 아들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변을 당한 후 오다 가의 패권을 두고 발발한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칠본창(七本槍)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건 히데요시의 먼 친척이라는 이점 덕분이기도 했는데, 명문가가 아니라 별다른 가신단이 없었던 히데요시에게 친척이면서 능력도 뛰어난 가토는 중용하지 않을래야 하지 않을 수 없는 측근이었기 때문.
출중한 용맹과 지휘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던 그는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에서도 큰 공을 세워 히고국(肥後国)의 절반을 영지로 받아 석고(石高) 17만석의 대영주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인 가토에게, 혹시 무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면 그는 주저없이 가장 용맹한 자라 대답할 것이다.
한자루 겸창(鎌槍)을 쥐고 전장으로 용맹하게 뛰어들어 승리를, 성공을 이뤄낸 자신과 같은 용맹한 자가 바로 진정한 무사.
그 용맹함 덕분에 가토 자신은 고작 대장장이의 아들에서 입신양명을 이뤄 지고한 신분인 대영주로 우뚝 설 수 있었다고.
하지만 용맹이란 것은 자신과 같은 사내에게나 어울리는 것이라고 믿었던 가토에게, 그의 성공의 원천이었던 그 용맹함을 웬 계집이 쥐새끼가 창고의 쌀을 갉아먹듯 훔쳐가 버려 너무도 기분이 더러웠던 적이 있었다.
앙숙 고니시와의 빈번했던 전투에서 불리한 상황에서도 앞장서 돌격하고 발군의 검솜씨를 뽐내며 용맹함으로 널리 각인된 여검객.
용맹함은 자신만의, 사내들의 전유물이어야 했다. 고작 계집따위가 지닐 만한, 훔쳐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용맹함에 대한 칭송은 오로지 자신만이 받는 전유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고작 계집을 상대하고자 직접 나서기에는 그의 자부심이, 체면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년을 죽이라고 유명한 검객인 진스케를 고용했다.
하지만 놈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그저 그년을 농락하고 모욕하기만 했을뿐 놔 주었다.
그렇게 보고를 받았을 때 너무 화가 치밀어 올라 진스케를 베어버리고 싶었지만 때마침 부인이 회임을 하는 경사가 있어 피를 보기 싫었기에 그냥 넘어가 주었다.
또 가토에게 있어 진스케는 꽤나 마음에 드는 사내였던 것도 놈의 목을 베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가토의 무사도란 용맹이었고, 진스케의 무사도란 검을 드는 것 그 자체에 있었다.
그 단순하지만 명쾌한 무사도가 둘은 너무도 닮아 있었고 그런 영향인지 행동방식이나 취향도 코드가 잘 맞았다.
'계집년에게 용맹하다는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하지만 자신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용맹함을 계집과 조금이라도 나누었던 더러운 기억은 잘 잊혀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응어리로 남았다.
나미에의 용맹했던 활약은 그만큼 가토의 무사로서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던 것.
그리고 고니시를 견제할 외교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나베시마와의 친목 도모차 방문했던 이곳 나가사키에서 그 응어리를 풀 기회가 찾아왔다.
처음 고용한 이후에도 자주 자신과 고용계약를 맺어 왔기에 사실상 가토군의 전속용병이나 다름 없었던 진스케와 함께.
나미에란 계집이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검을 쥔 채로 자신의 눈에 띄었는데 죽여 버리려 한다는 진스케의 말에 가토는 기뻤다.
죽여버리려 하는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진스케는 그녀가 검을 들었다는 이유로, 가토 자신은 용맹함이란 자신만의 가치를 도둑맞았던 더러운 경험에 응어리가 졌다는 이유로.
일단 그 계집이 이곳 나가사키에 있는 사실의 진위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자신의 병졸 출신이었다는 놈으로부터도 그 계집의 출현을 이미 들은바 있었기에 교차검증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어찌 사실을 알았는지 나베시마가 접근해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가토 공. 재미난 유흥을 보지 않겠소?"
어차피 이곳은 그의 영지이고 응당 하려고 했던 계집년을 죽이려는 일에 그저 재미난 즐길거리를 더해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금욕적인 가치를 중시 여겼기에 평소 나베시마의 방종하고 해괴한 짐승같은 짓거리들을 역겨워 하던 그 가토마저도 오늘 너무도 즐거웠다.
수도에서 보았던 값비싼 연극보다도 훨씬 마음에 들었다.
무인 흉내를 내는 계집이 쓰러져 가는, 감히 용맹함을 참칭했던 그녀의 투지가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그 참상을 내내 손에 땀을 쥐며 지켜보았다.
"오오!"
저도모르게 은근히 혐오하던 나베시마처럼 들뜬 감탄사를 내뱉기도 했을 정도.
그녀에겐 수치스럽고 잔인할 뿐인 이 싸움, 이 결투라 쓰고 농락이라 읽어야할 싸움을 관객으로 지켜보던 가토는 너무도 만족스러운 나머지 그녀를 죽여버리겠다는 당초의 다짐마저도 흐릿해질 정도였다.
그래서 노리개로 삼기 위해 목숨은 붙여 놓아 달라는 나베시마의 제안에 응했던 것.
계집의 살결이 진스케의 검에 무참히 갈라지고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는 광경을 보며 마음속의 응어리가 이미 풀리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뿌지직
그 덕분인지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변비마저도 방금 전 시원하게 묵은 변의 굵은 똥줄기를 배출함으로써 해결해 컨디션도 최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다.
용맹함이란 무사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저 가토에게 만약 자신의 용맹함이 무색해질 정도로 압도적인 무언가가 나타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드라군은 없으니 오니가 출동하면 어떨까?
가토가 뒷간에서 일을 끝마치고 무명 천으로 뒤를 닦은 뒤, 바지를 입기 전에 입는 사각의 속옷을 막 입고 있었을 때 그런 일이 터져버렸다.
콰앙!
갑자기 웬 거검을 든 사내가 유희의 장이었던 임시 검투장에 난입하더니, 그놈이 휘두른 검격에 땅이 비명을 지르며 갈라졌다.
"으아악!"
굳건한 대지조차 그러한데 사람이라고 무사하랴.
일격에 4장(12m)의 땅을 찢어버리며 여덜의 목숨을 앗아간 놈의 검격은 이곳에 재앙이 강림한 것 같았다.
본래 가토는 스스로 성공한 무사라고 자부해 왔었고, 오늘 뒷간에 가기 전까지 앉아 있었던 두 다이묘를 위한 단상의 높이가 다른 이들과 자신의 차이라는 생각하며 우쭐한 마음이 들었었다.
이 단상위에 서서 자신의 이름과 문장(가몬)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홀로 오연히 존재할 수 있는 자라는 자의식에 뭔가 뽕에 취한 것 같은 황홀함도 느꼈으니까.
하지만 저 괴물같은 놈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는 순간 그딴 자의식은 박살났다.
놈의 첫 일격에 동시에 저승으로 가버린 아시가루(하급무사)와 일반 병졸의 분리된 신체조각들이 흐르는 핏물에 사이좋게 나동그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저 괴물 앞에서는 무사든 병졸이든 다 같이 평등하다.
자신의 드높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던 높은 연단도 저 괴물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다.
또한 가장 앞장서서 용맹하게 달려들었던 놈의 육편과 도망가려고 뒤돌아 있었던 놈의 육편이 섞여서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는 생각했다.
저 미친 괴물 앞에서는 용맹하고 자시고 아무 의미가 없다고.
그런 생각에 뭔가 자신을 지탱하던 신념의 한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은 충격을 느꼈지만 지금 심상세계의 내상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용맹함이란 타이틀을 달고 이 험한 전국시대를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의 탁월한 견적능력에 있었으니, 뛰어들어 날뛸 수 있는 곳과 반드시 뒈져버릴 사지이니 피해야 할 곳을 구분할 줄 아는 혜안이 있어야 맹장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였다.
가토의 마음속 견적서가 숫자로 전투력을 표시하는 그런 거라면 미친듯이 뛰어오르는 듣도 보도못한 엄청난 전투력이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뿌직
너무도 긴장했는지 잔변이 흘러나와 속옷을 적셨고,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과 함께 구리구리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 이! 저게 무엇이냐?! 당장 저놈을 물리쳐라!"
지금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고 믿는 저 멍청한 나베시마놈은 여색을 밝히며 그저 궁둥이만 쫒아다니는 평화롭고 쓸모없는 삶을 살았으니 모를 것이다.
저 일격에 담긴 힘이 의미하는 사실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주명이 내지른 단 일격만 보고도 도저히 도모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견적이 섰던 가토는 결정했다.
'무조건 도망이다.'
숱한 사선을 넘어왔기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핸 최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판단의 속도가 나베시마와는 달랐다.
신속하게 뒷걸음질을 쳤다. 대놓고 몸을 돌려 도망치기엔 무사로서 쪽팔리니까.
"모두 저놈을 포위해라! 사방을 에워싸란 말이다!"
"넌 지원병력을 불러와라! 특히 철포대를 다수 데리고 와!"
무슨 자신감인지 주변에 늘어서 있던 병졸들을 지휘하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어떻게든 저 괴물을 잡아보려 애쓰는 나베시마의 일견 굳건해 보이는 모습.
그 모습에 진짜 맹장이라 불리는 자가 가토 자신인데 이대로 도망쳐야 하나 망설임도 살짝 들었다.
"끄아아아!"
하지만 이게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던 두번째 공격을 보며 가토는 망설임을 버렸다.
'씨부럴, 부처님 맙소사.'
아니 아무리 검이 거대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이 올려친 거검의 검격에 사람이 두부 잘리듯 쪼개지는 것은 기본이요, 절단면의 윗부분이었던 비스듬히 잘린 상체가 검의 올려치는 힘에 의해 저 하늘로 솟구친단 말인가!
잘린 상체에서 폭포수처럼 콸꽐 쏟아지는 피가 상체의 궤적을 따라 뒤늦게 흘러내리며 연출하는 피의 기둥은 숱한 전쟁으로 단련된 가토의 정신줄마저도 박살냈다.
뒷간에 있었던 지라 나베시마의 굳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도주가 수월한 상황.
그 섬뜩한 피의 기둥을 보며 가토는 그나마 남아있던 무사의 체면 때문에 뒷걸음질만 치던 소극적인 도주를 수정하고 몸을 돌려 전력으로, 적극적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똥이 묻은 팬티, 아니 속옷 바람으로.
당연히 그를 수행하던 부하들이 뒤따라 뛰기 시작한 것은 물론이고.
가토도 몰랐지만 그의 부하들은 가토가 현명한 판단을 내려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감사해 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부하들도 현명한 것이 그 누구도 주군의 팬티 뒤에 묻어있는 갈색 덩어리의 정채를 묻지고, 내색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니 너는?"
"가, 각하(영주에 대한 경칭). 무사하셨군요."
한참을 도주하던 가토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발도술의 대가이자 자신의 전속용병인 진스케.
한창 계집 검사를 상대하고 있어야 할 그가 대체 왜 여기에 와 있는 것인지 궁금증이 밀려오던 차에, 전장에서 도주했다는 자각이 들었는지 한결 머쓱한 표정으로 진스케가 말을 올렸다.
"부끄럽지만, 속하는 발도(拔刀, 검을 빠르게 뽑는 일)에서 가장 빠르다고 하지만 납도(納刀, 검을 검집에 집어 넣는 일)에서도 가장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빨리 튀는 데 자신있다는 말을 뭘 그렇게 빙빙 돌려 말하느냐고 핀잔이라도 주고 싶었지만 자신 역시 다이묘로서의 체통은 다 버리고, 용맹함이 자신의 무사도라는 신념따윈 내팽개치고 개처럼 꼬리에 똥을 뭍히고 도주하고 있는 마당에 할 말이 없었다.
"크흠."
괜시리 무안해진 가토는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용맹함이 곧 무사도라는 기존의 신념과 개새끼처럼 도주하는 지금의 행동이 만들어낸 거대한 인지부조화에 고뇌하던 그의 괴로움을 평소 믿던 부처님이 보우하셨는지 마침내 기적의 논리를 발견했다.
그 기적의 논리를 발견한 기쁨에 달리던 가운데에서도 가토는 무릎을 탁 쳤다.
"끝까지 살아남는 무사가 진정한 무사인 법이지. 오다 노부나가님이 변을 당하신 것과 우리 태합전하께서 일본을 거머쥔 것을 보면 말이야."
"큽. 마, 맞습니다. 역시 각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바로 옆자리에서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토의 팬티에 묻은 구리구리한 배설물의 냄새에 가장 많이 노출되었던 진스케는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으면서 연신 가토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살아남아야 무사인 것이다!"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궤변이었지만 자기위안을 위한 행복회로를 한참 돌리고 있는 가토와 진스케에게는 너무도 합당한 말처럼 들렸다.
"무사란 때에 따라서는 도망갈 줄도 알아야 하느니. 이는 병법에서 말하는 병형상수(兵形象水)의 이치, 움직임과 형상이 무엇에도 구에받지 않는 물과 같아야 한다는 그 이치에 닿아 있음이다."
"역시 각하십니다. 속하는 그 깊은 뜻 각골명심하며 새기겠습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주하는 와중에도 굳이 엄지척을 해대는 진스케의 모습을 보며 흡족한 마음이 든 가토.
오늘 자신의 무사도에 대한 교본이 있다면 한줄 적어놓을 글귀를 찾아낸 것 같아 스스로 대견했다.
"크하하. 우리에겐 내일의 밝은 해가 기다린다. 좌절감이 사나이를 키우는 것이야!"
근데 자뻑이 과했던 탓일까. 아니면 변비로 고통받은 세월이 너무도 길었던 탓일까.
뿌지직
아직도 대장에 남아있던 굵은 잔변이 뿜어져 나와 가토의 가장 뒤에서 달려오던 부하, 영주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중 하나인 깃발을 챙겨들고 있던 그의 얼굴에 튀었다.
문제는 뱀 눈알을 닮아 가운데 흰 구멍이 뚫린 형상인 가토의 깃발에 그만, 그 흰 구멍 부분에 갈색의 물체가 묻어 버렸다.
"..."
똥덩어리들이 눈앞을 가렸기에 충분히 눈앞이 안 보일 수도 있었지만, 깃발을 들었던 부하는 그게 아니더라도 눈앞이 캄캄했다.
'내게 내일이 있을까?'
***
주명은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적을 압도적인 힘으로 썰어 버리면서도 최단경로로 나미에에게 향한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녀의 상처가 즉사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당장 포인트를 써서 치유 명령어를 써야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판단에 '조부'를 강화하는 데 포인트를 쓸 수 있었던 것이고, 한층 강화된 조부의 깡스팩에 힘입어 그녀에게 가는 길은 더욱 짧아질 것이다.
단 두번의 공격에 길이 열렸고, 그 단 두번의 공격에 사기가 작살나 버려 행동이 굼떠진 적군 사이에 만들어진 그 길로 뛰어들어갔다.
32라는 민첩 능력치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스피드는 정말이지 스스로 스포츠가가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
그 압도적인 가속력, 그 미친듯한 최대속력, 그 우아한 기동능력을 사람에게 때려박으면 이런 움직임이 되지 않았을까.
'지난번처럼 인질로 잡히게 만들지 않을 거야.'
검격을 휘두르면서도 항시 눈은 나미에와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있는 빌어먹을 검사 새끼를 향해 있었다.
혹시 허튼짓을 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압도적인 스팩의 힘과 민첩성, 그리고 4레벨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없는 것보다는 나은 투척 스킬을 믿고 '조부'를 던져 놈을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비록 검을 던짐으로서 주명 본인이 한층 더 위험에 처하게 되겠지만 상관없었다.
피를 철철 흘리며 괴로워하는 나미에의 저 처참한 모습을 다시 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그녀를 탐탁치 않아 하는 정여수 영감님께 사정해서 검과 갑옷을 만들어달라 부탁한 것이 아니던가.
'뭐 영감님도 이미 내가 말하기 전부터 나미에에게 무구를 만들어줄 생각이 있으셨으니 부탁한 거라고 하기도 뭐하지.'
뭔가 츤데레 영감이란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어쨌든 그렇게 무구를 그녀가 받게 된 것이 끝이 아니었다.
본래 아이템이 아닌 오브젝트의 레벨업은 비효율의 극치이다. 정확한 숫자가 존재하지 않기에 뭐가 얼마나 향상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
그 랜덤성이 결과의 폭이라도 넓었다면, 그러니까 운빨 대박을 기대할 수라도 있었다면 조금이라도 쓸모가 있었겠지만 그렇지 았았다.
고작 1레벨만 경험치 꼼수를 통해 올려도 확 강해지는 아이템에 비해, 그냥 오브젝트는 10레벨을 만들어도 변화가 그리 체감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가죽갑옷의 경우 30레벨을 올렸다고 해봐야 '음, 뭔가 조금 단단해 진 것 같군. 화살 0.03방 정도는 더 막아주겠어'라고 말할 정도로 미미했다.
그럼에도 했다. 그녀의 무구를 강화하는 것을.
"하아..크으윽."
피를 흘리며 괴로워 하면서도 끝끝내 손에 쥔 검을 놓지 않으려는 저 지독함을 증명하라고, 저 근성을 증명하라고 내어준 무구가 절대 아닌데.
바들바들 떨면서도 어떻게든 반격을 해보려 하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듯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점점 의식마저 흐릿해져 가는 듯 눈동자도 풀려가고 있는 그녀의 모습.
'제길, 결국 막지 못했어.'
그럼에도 막지 못했던 지금의 모습이지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저 기분나쁜 일본인 검객이 그녀를 조롱하듯 상대해 왔다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주명의 그런 노력이 큰 기여를 했으니까.
진스케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더 버티려는 그녀의 용기를 응원하고 지원해준 셈이니까.
그녀의 긍지가 유지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 주었으니까.
끝끝내 그녀를 짓밟은 저 새끼는 곱게 죽이지 않을 것이다.
부릅뜬 눈으로 기분나쁘게 생긴 일본인 검객을 찢어죽일듯 노려보며 최대속력으로 달려가던 중, 주명은 이어서 벌어진 황당한 광경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저 새끼. 도망가잖아!"
주명은 몰랐지만 그가 첫번째 검격으로 대지를 가르는 일격을 선보였을 때부터 진스케의 동공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토 기요마사가 숱한 돌격의 전투경험을 통해 견적을 내고 빤스런을 한 거라면, 진스케는 무인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주명의 기세를 읽었던 것.
다행히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추태는 면했지만 이미 진스케의 몸은 퇴로를 염두에 둔 보법을 밟고 있었고, 주명의 이격이 피의 기둥을 만들었던 그 때에 놈의 정신은 미련을 완전히 버리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몸과 행동을 같이 했다.
쫒아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지만 일단 나미에를 구하는 게 우선.
잡혔던 머리채가 진스케가 도망가며 풀려지자 스스륵 무너지는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녀에게선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이게 그녀의 체취인 것인가, 체취가 원래 이리 향긋했던가 하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지만 온 몸이 난자당해 참혹한 꼴을 하고 있는 그녀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를 왼손으로 안아든 주명은 오른손으로 '조부'를 쥐며 왔던 방향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옥현에게는 이미 다른 일행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돌아가 짐을 꾸리고 참수리호로 향하라는 말을 해 두었기에 다행이었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 어서 놈을 포위하란 말이다! 어서!"
또한 나베시마가 고래고래 악을 쓰며 소리를 질러 보아어도 주명에게서 너무도 큰 두려움을 느꼈던 그의 병력들은 주춤거리며 도무지 다가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니 주명이 퇴각하는데 너무도 다행스러운 조건이었다.
"고작 무사 한명일 뿐이다. 고작 한명! 여기 가만히 있는 네놈들은 대체 무사가 맞느냐?!"
"..."
자신의 부하 사무라이들에게 역성을 내는 나베시마였지만 자리에 가만히 있는 건 부하뿐만 아니라 나베시마도 마찬가지 아니던가.
심지어 최대한 주명이 있는 쪽과 멀어지려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친 결과 가장 뒤에 서 있는 나베시마이니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
"병신 같은 가토 기요마사! 용맹한 사무라이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전투에서 개처럼 튀어버린 놈이 무슨 다이묘이고 사무라이란 말이던가!"
아마 똥까지 지린 걸 알았다면 더더욱 발광을 했겠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무사란 죽음을 각오하고서라도 적에게 맞서는 기개있는 자를 말한다고 내 평소 강조했거늘. 오늘 이 나가사키에 사무라이(무사)라곤 단 한명도 없구나!"
적어도 방금 한 말은 어느정도 진실에 가까운 말이었다만 틀린 것이 있었다.
단 한명.
누구들과는 달리 항거할 수 없는 적에도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끝까지 맞선 용맹한 무사, 짓밟히고 무너져도 끝내 빼어든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무사가 남아있었으니까.
저마다의 무사도를 큰 소리로 말하며 스스로 진정한 무사라고 자부하던 누구들이 가장 멸시했던 바로 그 여인이 남아 있었으니까.
멀어져 가는 나베시마와 놈의 병력들을 뒤로하고 참수리호가 정박해 있는 항구로 달려가는 주명의 귓가에 나미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으....나, 나는 절대로. 절대로 굴복하지 않아."
그녀는 의식이 가라앉아가는 이 힘겨운 몸상태에도 끝까지, 지금까지도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나미에의 체온이 조금씩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주명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 마음이 급해졌다.
그냥 '조부'를 강화하지 말고 포인트를 아껴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제발, 제발 버텨줘. 제발 버티라고!"
바람에 어지러이 휘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처럼, 주명의 말은 나미에의 귓가에 닿지 못한 채 그저 바람에 실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