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7화 - 왜적들에겐 오니(鬼)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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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그저 행동이 가볍고 말만 빠른게 아니었군."
정씨 어르신의 말대로 였다.
아무리 역모로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경험을 하며 생각이 많이 트였다지만 평생을 선비로 살아와 유교적 문화에 익숙한 정여수로서는 샤를의 그 방종처럼 보이는 자유분방함과 진중하지 못한 언행이 마음에 들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내심 탐탁치 않아하고 있었고 그건 주명도 동의하는 바였는데.
그의 신묘한 항해술 덕분에 나베시마의 추격을 피할 수 있게되어 위험을 피하고 나니 녀석의 실력을 알 수 있었고 놀라게 된 것이다.
"녀석 덕분에 항구에서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어서 껄끄러운 일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력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숫자가 적기도 했고 별다른 챙길 거리도 없었던 주명 일행이 빨랐던 것인지, 아니면 멘탈이 작살난 나베시마의 병력들이 늦은 것인지 참수리호가 항구를 떠나 바다를 항해하고 있을 때가 되서야 추격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늦었던 것.
그렇다고 하더라도 수백척의 배들이 정박하거나 움직이고 있는 저 나가사키의 바다에서 그냥 공해를 지나가는 것마냥 미끄러지듯 배가 움직일 수 있는 게 어디 쉬운일이던가.
오늘 보여준 샤를의 항해술은 너무도 훌륭에 예술의 경지에 닿아 있었다.
마치 자유로운 바람이 배들 사이를 빠르게 지나가듯 빠른 속도로 번잡한 나가사키를 빠져나와 바다로 향하는 그 항해실력은 정말 예술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것도 참수리호 같은 낡은 해적선을 끌고 말이다.
분명 샤를에게 익숙한 서양식 범선을 쥐어줬다면 더욱 엄청난 성능을 보여줬을 거란 데에 생각이 미치자 주명은 참수리호의 스펙이 많이 아쉬웠던지 씁쓸했다.
참수리호는 처음 얻은 배라는 상징성과 의미를 제외하면 속도가 다른 배보다 빠른 것을 빼고는 그다지 좋은 배는 아니었으니까.
"그 처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는가?"
"...네."
"하긴. 그런 일을 당했으니."
주명에게서 나미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들었기에 정씨 어르신은 그녀를 이전처럼 '방정치 못한 왜인 여자'로 부르면서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인 하나를 모욕을 주고 무너트리기 위해 한 지역의 지배자라는 사람들이 작당하여 대낮에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 얘기를 듣고 매사에 침착한 정여수조차 너무 화가나 욕설이 절로 나왔을 정도.
선머슴같이 쾌활한 그녀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람을 그리 무참하게 짓밟으면 아니되는 것이다.
온몸에 피칠갑을 하며 주명에게 업혀온 나미에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하지만 심각한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오는 그 상처입은 몸으로도 끝끝내 손에서 검을 놓지 않은 나미에.
그래서 그녀의 집념만큼은, 그녀가 진짜 무인이라는 사실을 한때 무관이었던 정여수도 인정했다.
검의 이가 다 나가있는 모습에서 직접 만들어 주었기에 그 뛰어난 내구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정여수는 얼마나 격한 검격이 오갔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이 준 웬만한 갑주보다 훌륭한 가죽찰갑이 넝마가 되어있는 모습에서 그 검격이 오간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고 험악했는지도 알 수 있었으니까.
무구가 부서져 가고 있던 중에도 그녀의 투지는 사그라들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무인의 모습이란 말인가.
그런 무인의 검을 꺾고 무너트리기 위해 그딴 짓거리를 벌였다니.
여인 하나가 보기 싫다고 그녀가 무너지는 광경을 여흥으로 감상하기 위해 무사 하나, 영주 둘, 수백의 병력이 모여 만들어낸 그 짐승같은 검투장이란 야만성.
그곳에서 그녀의 분투를 그저 웃음거리로 삼으며 조롱하며, 그녀의 패배를 즐기며 웃으며 즐겼을 그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심성의 왜인들.
'짐승같은 놈들! 세상 천지에 저런 것들이 또 어디 있을까!
그래서 그 짐승같은 왜인들의 땅을 떠난다는 부분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조선으로 향할 것이라고?"
고국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더어욱.
"네. 다이묘란 자들과 척을 졌으니 이제 수배가 붙어 쉬이 왜국의 주요 항구에는 들어오지 못할 테죠. 휴, 세력을 일군다고 했는데 결국 일본 땅에서는 사람 두명만 얻고 끝이었네요."
참수리호와 전직 왜구인 해병대원 20명은 다나카를 처단했을 때부터 진작에 주명의 손 안에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대마도를 포함해 일본에서 얻은 성과라고는 검술사범인 나미에와 항해사인 샤를 둘뿐이었으니 거창한 목표에 비해 이룬 성과는 미미한 것이라 답답했던 것.
"원래는 대마도에 들렀다가 조선으로 가려고 했는데..."
고개를 들어 신나게 몰입하며 배를 운항하고 있는 샤를의 모습을 쳐다보며 주명은 말을 이었다.
"항해사가 너무 뛰어나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는군요."
끄덕끄덕
아무리 주명에게 교화를 당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거친 바다사람들이 해병대원들.
그들이 샤를의 실력을 인정해 고분고분 그의 지시에 따라 노를 젓고 돗을 움직이는 모습을 쳐다본 정씨 어르신도 주명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가를 돌며 왜구들을 소탕할 계획입니다."
주명이 계획의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을 입에 담았다.
바로 조선의 복잡한 해안선을 따라 움직가며 경상도와 전라도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주워담을 계획이라는 것.
왜 쓸어버리지 않고 주워 담는다는 표현을 한 것인가 하면 해병대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기 때문.
악질적은 놈들은 죽이고 폭력으로 멘탈을 만져주면 마치 낱알이 탈곡되듯 왜구가 해병대로 거듭나는 마법을 보여줄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해서 세력을 확충할 생각이었던 것
당연히 왜구의 배는 뭐 주명의 배가 되겠지.
또한 앞으로 다가올 임진왜란이란 재앙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형을 숙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바로 그곳이 수군의 주요 격전지가 될 것이니까.
왜구의 본거지로 가서 쓸어버리고 깃발을 꽂으면 될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보았지만 이 잡초같은 놈들은 그저 본거지를 털었다 하여 근절될 놈들이 아니다.
털어먹을 백성들이 가까운 조선에 위치한다면 바람에 잡초가 날려 퍼지듯 본거지를 다른 곳에 옮겨서라도 계속해서 나타날 놈들이란 거다.
방법이란 건 근본적으로는 조선 수군력을 강화하여 감히 찝적거릴 엄두를 못내게 만드는 건데 충무공도 없는 조선 수군이 그럴 수 있을리가.
남은 방법은 주명 자신이 조선 수군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
조선의 바다를 지키는 수군이 마땅히 지녔어야 할 공포. 마땅히 적들에게 심어 주었어야 할 두려움을 대신 심어주는 것.
막중한 임무를 지닌 참수리호는 바다를 저공비행하는 참수리처럼 빠르게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고 있었다.
조선의 바다로.
***
이영남(李英男)은 마음이 무거웠다.
몇년 전 21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여 처음 무관이 되었을 때는 양성(陽城) 이씨 가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스스로도 마음이 벅차 올랐다.
큰 책임감과 결의를 가지고 이 조선의 산하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고작 율포를 지키는 종9품 권관(權管)에 불과한 자신에게는 적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방비를 할만한 큰 권한따위는 주어지지 않았고, 그가 아무리 결의를 다진다고해도 그의 휘하에는 고작 수십의 병졸만이 배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권관 나으리! 왜, 왜구놈들이 추봉도에 쳐들어 왔다고 합니다!"
"우수사 영감께 장계를 올리겠다. 전 병력 탑승하여 출진 준비를 해라!"
그 수십의 전 병력을 가지고서라도 열의를 가지고 적을 방비하기 위해 뭔가 하려 해도 한계에 맞닥뜨렸다.
"나, 나으리...이미 적들이, 적들이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런 식이었다.
전선이라고는 고작 30명 미만의 인원만 탑승 가능한 병선(兵船) 한척 뿐이었는데, 느릿느릿한 저 병선 한척가지고는 재빠르고 날랜 왜적들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더 슬픈 현실은 그 유일한 전선인 병선의 스팩이 왜구들의 재빠른 쾌속선(快速船)에게 그저 속도만 밀린다는 게 아니었다는 것.
한선(韓船) 특유의 그 튼튼한 내구성 외에는 속도와, 탑승인원에서 도저히 저 왜구들의 배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날랜 승냥이 같은 저들을 일단 쫒을 수도 없었거니와 설령 접선하더라도 승조원의 숫자에서 밀리니 수전에서는 매우 불리한 여건.
게다가 왜구들은 숱한 노략질과 해전으로 단련된 숙련된 전투원이었기 때문에, 그저 기피되는 천역(賤役)에 끌려와 어거지로 자리를 채울 뿐이었던 조선 수군과는 단병접전이 벌어질 경우 싸움이 될 리 없었다.
놈들의 백병전에서의 매서움은 바로 몇주 전 경험한바 있었다.
평소와는 달리 노략질에 열중하느라 내빼는 게 늦었던 왜구들과 함상에서 백병전을 벌였고, 다행히 이영남 본인의 출중한 무위로 패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영남의 뛰어난 무위에도 불구하고 아군 수졸들이 크게 상하는 것은 그가 아무리 활약을 해도 막을 수는 없었다.
저 왜구들과 백병전에서 현격한 실력차를 보이는 부하들을 이끌고 싸움을 벌인 대가였다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입이 썼다.
최근들어 요 몇주 사이에 왜구의 침입이 급증하고 있어 놈들의 실력을 잘 아는 이영남은 또다시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수군이 죽어나갈지에 생각이 미치자 안타까웠다.
"지금 한창 출몰하는 놈들의 수괴가 마고지로(望古時羅)라는 놈이라 했던가. 정해년에도 그리 해악을 끼치더니 또다시..."
분명 통신사를 보내는 조건으로 저 마고지로를 포함해 정해년의 최과가 있는 왜구들의 수괴 3인방을 압송하거나 수급하기로 약조가 되었다고 들었다.
아무리 왜인들이 신의가 없다고는 하지만, 왜국과의 화의를 위해 조선의 통신사가 출발한지 몇달이나 되었다고 또다시 이리 난동을 부린단 말인가.
왜국과 대마도주는 분명 통신사 방문을 조건으로 왜구의 준동을 억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하는데 과연 이 왜구들은 어찌된 연유인지 계속해서 나타나는가.
그리고 왜인들의 신의없음은 차치하고라도 사실장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백성들의 불행이 진행중인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논하는 조정이 이영남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국의 근간인 백성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고 아국의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는데 어찌 한가하게 평화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
비분강개한 마음에 장계를 적어 올리려 했지만 지휘계통에서 막혔다.
"어허 이 권관, 어찌 이런 일로 조정에 심려를 끼치려 하는 겐가?!"
을묘년이나 정해년의 왜변처럼 종묘사직에 해가 가는 경우가 아니면 만성적인 재정부족, 북쪽 여진족의 준동, 동서 붕당의 대립으로 골치가 아픈 조정이었다.
괜히 쓸데없는 일로 장계를 올려 봤자 임금과 대신들의 짜증만 유발하게될 게 자명한 상황.
을묘년이나 정해년의 왜변처럼 한양에 보고되어 큰 문제가 될 정도의 사안이 아니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는게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걸 알았기에 그가 소속된 경상 우수영의 고위 무관들은 이영남이 올리려는 장계가 상부로 올라가는 것을 계속해서 반려했다.
조정도 마찬가지다.
사실 장수들의 그런 복지부동에는 조정의 잘못이 더 컸다.
을묘왜변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잘한 왜구의 침입에도 크게 놀라고 노하며 대책을 강구하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을묘년에 크게 데인 후의 반작용인지 그정도 규모가 아니면 둔감해져 버린 것.
"우리 지금 한창 바빠 죽겠는데, 을묘년의 수천 왜구에도 사직이 무사했는데 겨우 수십, 수백명의 침입을 상주하여 대책을 마련해 달라고?! 그건 니들이 알아서 해!"
"지금 나라의 재정도 여의치 않는데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차피 왜구가 아니더라도 도적들이야 내륙에서도 잡풀처럼 나타나는 놈들이니 베어도 베어도 또 나타나는 저놈들은 그저 방치하는 게 답이 아닌가."
라는 식의 생각이었다 조정은.
조정은 왜구를 그저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 백성들에게 '조금'의 피해를 주고 결국 끝나는 무슨 자연재해를 대하듯 사실상 체념하고 있었다.
그저 태풍이 불면 그 사후처리로 구휼미만 대충 풀어 민심을 위무하는 것으로 때우는 그런 식으로.
분명 왜구는 인재(人災)인데 어찌 천재(天災)로 보고 그저 수수방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설령 천재(天災)라고 하더라도 을묘년의 왜란처럼 사직과 관계된 것이 아니었기에 방관하는 것이겠지.
백성들의 피가 계속해서 흐르고 있음에도 그 피값이 위정자의 저울에 매달려 종묘사직의 무게보다 가볍다 여긴다면 방관하고 있는 것이니.
종묘사직의 무게를 가장 높이 치는 이 조선에서 어찌 대책이 나올 수 있겠으며 방관하지 아니할 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한심한 작태였으나 고작 권관 나부랭이가 나랏일의 향방에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체제에 직접적인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조정은 눈을 닫았고, 조정이 크게 신경쓸 정도가 아니라면 장수들은 귀를 막았다.
자신이 거제도 율포의 권관으로 임명된 지 고작 1년이 지났지만 이 거제도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현장에서 병력을 지휘하는 이영남은 그런 방식으로 굴러가는 이 조선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받는 울부짖음이 들렸고, 그들의 피가 산천에 흩뿌려지는 모습이 보였으니까.
왜구들의 산발적 침입은 절대로 끊긴 적이 없었다.
이 거제도만 해도 1년동안 사람들의 정취가 사라져 백골만 남은 마을이 다섯 곳이 넘었으며, 알던 이들이 왜구들에게 노예로 끌려간 이들만 수십명이 넘었다.
고작 해적들의 준동조차 막지 못하는 조선이란 나라와, 나라의 무장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에 답답한 마음에 이영남은 남해바다를 응시했다.
차가운 바람과 푸른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 답답함이 조금은 가실 것 같아서.
찬 바람을 맞으며 답답함을 삭히던 이영남에게 한 털보사내가 다가와 털로 된 외투를 건넸다.
"나으리, 겨울이라 날씨가 찹니다. 외투라도 걸치시지요."
"박 대장(隊長) 아닌가? 근무시간도 아닐 텐데 왜 군영에 있는 것인가. 쉬지 않고."
대장(隊長)이란 13명 정도 구성된 1개의 대(隊)를 맡은 부사관으로, 박씨 성을 가진 털보사내가 가진 계급이었다.
텁수룩한 수염뿐 아니라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남자다웠으며, 더욱이 비번 시간인데도 이렇게 군영에 나와볼 정도로 책임감이 투철한 나머지 이영남이 의지하던 자였다.
"요즘 왜적들이 자주 출몰하는데 쉬는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군인이 다 박 대장 같다면 왜적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을 텐데, 아니 윗선의 사람들이 박 대장의 반만이라도 닮았어도 상황이 더 나아졌을 텐데.
"새신랑이 그러면 안되네. 어서, 어서 집으로 돌아가게. 이건 명령이야."
지난 정해년의 왜변으로 아내를 참혹하게 잃었던 박 대장(隊長)이 얼마전에 새장가를 들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의 아내가 된 처자도 왜구들에 의해 남편을 잃고 대마도로 끌려갔다 돌아온 기구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상처를 지닌 이들끼리 짝으로 맺어져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모습에 절로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영남은 부디 그들이 혼인을 통해 다시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에 박 대장이 지금보다 더 가정에 충실하기를 바랐다.
박 대장같은 부하들의 행복을 지켜주기 위해 장교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책임감의 무게는 자신같은 장교가 가장 무겁게 지는 것이다. 부하에게 미룰 게 아니다.
"마누라가 저보고 더 나가보라고 보채서 말입니다. 허허허."
"음...자네 혹시 부실한겐가?"
"아닙니다요! 어제도 몇번이나 여편네를 극락으로..크흠"
"하하하, 그게 아니란 건 나도 잘 아네."
사실 대물로 유명한 이가 바로 저 털보사내였기 때문에 이영남은 그저 농으로 던져본 소리였다.
"죽지 말라고, 제발 당신만큼은 죽지말라고 눈물로 간청하는 통해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죽지 않으려면 나으리 말씀대로 경계에 충실해야 하겠다 싶어서 눈이라도 보태려고 나왔습니다."
"..."
털보사내의 아내가 어떤 시련을 겪어야 했는지 들어 알고 있었던 이영남은 무거운 마음에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아비를 두 번이나 잃고싶지 않은 상처받은 여인의 눈물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아이고, 소인이 실언을 했습니다요. 솔직히 소인이 왜 죽습니까?! 나으리같은 훌륭한 군관님도 계시고, 이제 우리 아그들도 군관님 훈련 덕분에 좀 싸웁니다!"
군문에서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사기저하로 이어져 금기에 가깝다는 것을 떠올린 털보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아부를 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적어도 털보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가 봐도 이영남이란 군관은 훌륭한 군인이었으니까.
10년이 넘게 군문에 있었지만 저렇게 책임감 넘치고 멋진 장교님은 처음 봤다.
그리고 지난번 백병전에서 그 흉흉한 왜구를 상대로 한치의 물러섬 없이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 앞서서 맹렬히 싸우는 그의 모습에 반해 버렸다.
"괘념치 말게나. 저 왜구들이 마치 호랑이 없는 곳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승냥이떼 같지 않던가? 이 나라가 호랑이처럼 보였다면 절대 저리할 수 없었을 게야."
나라에 위엄이 있었다면 새신랑인 털보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그의 아내가 시련을 겪을 필요도 없었겠다는 생각에 이영남은 괜히 털보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이 분발하면 이 나라가 호랑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저 나으리. 근디 여편네가 이상한 소리를 하긴 했는데."
"음 무슨 소리길래 이리 망설이는가?"
무슨 괴력난신을 말하듯 조심스러운 털보의 표정이 대체 무슨말을 하려는지 이영남은 궁금증이 들었다.
"오니인가 도깨비인가가 나타나면 왜적들이 그렇게 무서워 한답니다."
"그게 무슨소리인가. 그 전설의 존재를 무엇때문에 두려워 하는 건가?"
궁금증만 더해진 것 같아 더욱 의아해하는 이영남에게 한층 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털보가 답했다.
"진짜 있답니다. 여편네가 오니를 봤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