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9화 - 백성들에겐 도깨비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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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정리가 끝난 이후의 율포에선 한창 식도락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큰 부상을 입은 이는 있었지만 다행히 죽은 이는 없었기에 분위기는 밝았고, 맛좋은 음식에 구수한 탁주가 더해지자 분위기는 더할 나위없이 화기애애했다.
한가지 특이한 점이라면 미각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이곳 경상도의 사내들은 그 누구도 음식에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살아온 강인한 입맛을 자들인데도 연신 음식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고 있다는 점.
"이게 내가 알던 국밥이 맞능교?"
"너, 너무 맛있대이!"
이 기적을 만든 주인공은 같은 재료와 레시피로도 하늘과 땅 정도의 격차가 나는 맛을 구현하는 맛의 연금술사 샤를.
그가 갑자기 열리게 된 이 잔치의 숙수로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국의 요리에 도전해 보는 것도 꽤나 신선하군. 내 요리의 지평이 더 넓어지는 느낌, 나쁘지 않아. 그보다 그대, 요리를 사랑하는 그 손이 너무도 곱소."
"어, 어머.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지만서두 왠지 뜻을 알 것 같아 설레..."
그 숙수새끼는 요리계의 원탑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인 답게 어떤 곳에 가서도 확정적으로 훌륭한 미각을 구현할 녀석이고, 밥에 대한 한국인들의 그 진심 만큼이나 연애에 진심인 프랑스놈들 답게 어떤 곳에 던져놔도 작업을 칠 새끼니까.
수많은 사람이 모였음에도 시선을 확 잡아끄는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나미에였다.
"선녀님인가..."
"우와.."
남자들은 그 미모에 넋을 일어 그녀 근처에만 다가가면 왁자지껄한 잔치 분위기가 마치 다른 공간에 온 것처럼 조용해졌으며,
"저 여시같이 생긴 년은 누꼬?"
"참말로 이쁘기는 하다만 짜증난대이."
여자들은 피어오르는 질투심에 눈을 흘기며 일부러 그녀에게는 식은 음식과 간이 덜되거나 너무 많이된 음식을 주는 식으로 린치아닌 린치를 가하고 있었다.
우물우물
"마시썽."
뭐 저 식귀는 그런 걸 전혀 개의치 않고 그 옆에 그릇만 쌓아두고 있지만.
그래도 일전의 그 패배와 모욕을 겪었던 일로 한동안 우울해 하며 나와 말도 섞지 않았던 모습 보다는 훨씬 좋아보여 다행이라고 주명은 생각했다.
나미에가 그리 된 일로 마음속 우상이 무너진 충격에 덩달아 우울해 했던 옥현이 녀석도 오랜만에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또래의 아이들을 만나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하며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다.
이제는 완전히 장인, 아니 공돌이의 혼을 지니게 되었는지 정씨 어르신은 이 잔치에 끼지 않고 오로지 무기만을 바라보고 계셨고.
물론 옥현이를 가끔 바라보며 웃음을 짓기는 하셨지만.
주명과 대작을 하고있는 이는 이곳의 책임자이자 관료인 이영남이었는데, 오늘의 구원에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니 그의 이름을 역사에서 배워 아는 주명으로서는 상당히 난감했다.
이영남 장군이 어떤 분이던가.
이순신 장군을 도와 나중엔 가리포 첨사(종3품)라는 고위 장수에 오를 정도로 임진왜란에서 큰 공울 세웠던 장군이고, 거기에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던 충신이 아니던가.
한국의 역사학도로서 마땅히 고개를 숙이고 경의를 보여야 마땅한 분이란 말이다.
아마 저렇게 감사를 하는 이유가 오늘 누구도 잃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게 너무도 기쁘고 고마워서라고 확신이 드니 더욱 그가 존경스러웠다.
원씨 성을 가진 '일본국'의 해군 장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부하들의 피해야 어떠했든 지놈의 전공을 위해 전투에 지친 부하들을 시켜 수급이나 자르고 있었겠지.
아마 백성과 부하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이영남이 아니라 그 균이라는 이름을 지닌 패전의 스페셜리스트께서 이곳에 있었다면 절대로 이런 잔치를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놈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놈인데 피같은 재물을 쓰겠나.
한참이나 주명을 향해 고개를 숙이던 이영남은 전후 처리를 두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상부보고에 대해 이야기가 미치자 이영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부로 보고할 장계에 특정 글귀를 적어달라는 주명의 부탁에 난감했던 것이다.
"은공께서 말한 대로 적는 것쯤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나라에 해가 될 구석이 전혀 없으니. 하지만 상부에선 평소에도 내 말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는데 과연 전달이나 될 지 의문이오."
"권관님처럼 훌륭한 장수를 그렇게 취급하는 분들이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닐까요?"
지금 조선군의 실태가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이영남의 장계를 개무시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주명도 짐작했지만, 그래도 이런 충직하고 훌륭한 분의 말조차 귀담아 듣지 않는 경상 우수영에 대한 감정이 절대 좋을리 없었다.
바야흐로 16세기말의 조선 군부는 별들의 세기.
저 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향연, 아니 똥별들의 구린내 나는 향연이 아니던가.
신립이 말몰아 달리며, 원균이 배를 모는 어메이징한 환장의 시대.
어찌보면 신립과 원균을 들고 히데요시와의 빅매치에서 판정승을 거둔 조선이 대단해 보일 정도.
"그래도 말씀드린대로 작성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저 멀리서 조선인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다며 굳이 잔치에 끼지 않고 자원하여 해병 2기들을 굴리고 있는 야마모토를 필두로 한 해병 1기 대원들이 보였다.
오늘 전투에서 닥치는대로 쳐죽인 왜구가 놈들의 수괴 긴고지로를 포함해 족히 100 가까이 되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로 잡은 놈들이 무려 200명.
이미 굴려지고있던 60명을 포함하면 무려 260명의 대병력이 주명의 손 안에 들어온 셈이니 제정신을 지닌 어느 국가가 이정도의 무장 병력을 경계하려 하지 않을까.
역도들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구 Ver.2.0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고.
아예 조정과 척을 지고 밀항만 반복할 작정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조선 조정의 허락이든 묵인이든 받아내야 했다.
그래서 이영남에게 부탁한 것은 자신의 이름은 빼고, 그저 왜인 출신의 무인이 조선의 문명에 감화된 나머지 왜인으로 구성된 자경단 수백을 조직하여 왜인들에 대항하려 하며, 그들이 자신에게 통보 후 거제도에 잠시 터를 잡았으니 어찌해야 하는지 비답을 내려달라는 내용을 적어달라는 것.
전투에 대한 내용이야 사실대로 적으면 어디 믿겠는가.
당장 장계를 집어 던지며 그걸 적어보낸 이영남을 파직하라고 소리를 지를 게 눈에 보인다.
'자경단 수백'이라는 말과 '조선의 문명에 감화된'라는 부분이 핵심인데, 수백의 무장병력이라는 글귀 때문이라도 반역에 무척이나 민감한 조선에서는 필터링 되지 않고 반드시 조정에 전해질 확률이 높아진다.
그거 필터링 했다가 진짜 난이 일어나면 연좌로 뒈지는 거니 누가 그러겠어.
또한 '조선의 문명에 감화된'이란 마법의 단어는 스스로 나중에 소중화를 칭하기도 했던 저 유교 탈레반들에게 엄청난 국뽕을 들이키게 만들어 절대로 주명 자신을 적대적으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가 되어줄 것이다.
뽕 하면 K-국뽕 아니겠는가. 우린 뽕을 척척 내어주는 주모까지 있는데 니들은 그딴 거 없지? 두 유 노 'KIA'?
***
임시로 만들어진 목책은 그 높이가 무척이나 높다는 게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정작 특이한 점이라면 외부의 적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려는 게 아니라 마치 내부의 누군가를 탈출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게 목적같아 보인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야 정찰을 위한 망루를 목책 내부에 배치하지 저렇게 외부쪽에 올려 놓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 특이한 목책을 향해 봇짐을 짊어지고 다가가는 무리가 있었다.
"즈기가 그 왜인들이 수련을 받는다는 곳인감?"
"그렇제. 내 듣기론 족히 수백은 된다고 하던디 나라에서 별 말이 없는게 특이하당께."
젊은 보부상 두명의 의문에 답을 해준 이는 맨 앞에서 그들을 인솔하고 있던 털보 사내였다.
조선군 군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군인이 틀림없어 보였는데, 특이하게도 목에 가락지가 매달린 목걸이를 차고 다니는 큰 체구의 사내였다.
"이미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진 일이니 쉰소리들 마시고 가던 길이나 갑시다."
"야(예), 알겠시유."
잠시 조용해진 일행이었지만 장돌뱅이들의 억척스러움이 어디 가겠는가.
금새 다시 이야기 꽃이 피게된 일행이었다.
"근디 말이여. 이곳에서 물건값을 그리도 잘 쳐준다지?"
"말도 마. 두배를 불렀는디도 그냥 사주더라니까. 그 말을 한 내가 더 미안했을 정도여. 그랴서 그냥 원래 가격에 조금만 더 붙였지. 사람이 차마 금수처럼 행동할 수는 없지 안갔어?."
그들의 이야기의 화제가 된 목책은 2기 해병대원들을 교육하는 훈련장 겸 조선에 마련해둔 일종의 거점지역이었다.
그것에서 비싼 값으로 물건을 사들이고 있으니 아까 이곳으로 오던 자들처럼 상인들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어찌나 많은 물건을 사재끼던지 일시적으로 경제가 호황이 될 정도였다.
주명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돈이야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수준이니 의미가 없었고 그것으로 보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면 되었다는 생각이었다.
수백의 인원이 훈련을 받고 있다면 당연히 먹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우선순위가 된다.
군대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처리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보급이 아니던가? 이미 저들은 군대의 규모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보급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주명이 택한 것은 바로 지금처럼 장마당의 활성화!
지역 경제에, 그리고 조선 경제에 보탬이라도 될 겸 후한 가격으로 보급품들을 사재껴 보급을 해결한 것.
물론 선결 과제로 조선 조정의 승인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금세 해결되었다.
"참으로 장한 왜인이로다! 여(余)는 즉위 초부터 성현의 가르침을 받들어 백성에게 문명을 베풀고자 했었다. 그런 여의 통치, 이 조선의 유학이 저 왜인에게마저 인정을 받아 너무 기쁘구나!"
"참으로 옳으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본인들의 유학이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왕과 신료를 가리지 않고 한껏 국뽕에 취한 조정이었고 심지어 간관 역할을 하던 삼사마저도 왜인(?)에게 벼슬을 내려야 한다 청하는 지경이었다.
그덕에 K-유교에 대한 뽕이 강해진 조정은 병력의 체류에 대한 허가 뿐 아니라 벼슬까지도 그 갸륵한 왜인(?)에게 내렸고, 예상치도 못하게 주명은 비록 그저 이름뿐이라지만 초관(哨官)이 될 수 있었던 것.
비록 조정에서 붙인 감시자&감시병력이 따라붙고 정기적으로 병력현황을 보고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당초 목적했던 바를 이루었기에 주명은 불만이 없었다.
지방의 반란에 대한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한 감시체계를 지닌 이 조선에서 무장병력이 체류할 수 있게 된거 자체가 기적이었으므로 말이다.
'씨발 내가 왜놈으로 적히는 개같은 수치를 감내하고 하는 건데 이정도 결과는 받아 내야지!'
비록 기록성애자 조선 답게 분명 기록이 남겨질 것이고, 자신에 대한 사서의 첫 기록에서 왜인으로 쓰여질 것이라는 사실에 분통이 터졌지만.
어차피 오해에서 비론된 착각이었지만 통신사 일행들에게는 사실상 공식적으로 안동 김씨의 서얼로 알려진 그가 왜인이라 주장하면 나중에 어떻게 말을 할 것이냐고 생각될 수도 있겠다. 설정 충돌이니까.
'안동김씨 사람들 중에 일본에 가 있던 사람이, 그게 아니더라도 동래의 왜관(倭館)에라도 들렀던 방탕한 이가 한둘은 있겠지?'
그래야 자신을 '집안에 뭔가 변고나 우여곡절이 있어 이런 타향까지 온' 안동김씨의 서얼 출신으로 여기는 황윤길 대감을 비롯한 통신사 일행들의 설정집과 충돌하지 않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우여곡절에다 안동 김씨의 방탕아와 왜인 여인 사이의 하룻밤이 만들어낸 혼혈이라는 기구함이 들어간 설정을 추가하면 말이 될 것이다.
어차피 황윤길의 내심에 의해 반쯤 공인된 '팩트'는 주명이 '안동김씨'의 '서얼'이라는 거였으니 나머지는 뭔 내용을 갖다 붙여도 되니까.
'미안해요 엄마.'
졸지에 일본인이 되어버린 어머니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뭐 현대에 있었을 때도 어머니가 일본어 교사라는 점이, 그녀가 일본 문화를 추종하는 일빠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근데 쪽바리 말의 언어적 아름다움을 침튀기며 강조하시는 건 좀 아니잖아 엄마? 이참에 아예 일본인으로 거듭나시게 해드릴게요.'
그래서 그에대한 반항기 섞인 소심한 복수 정도로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에 선조의 지랄같은 의심병을 피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백성들을 구했던 일에 자신의 개입을 최소화 하려 했었던 것인데, 이왕 이리된거 빼박 왜인이 되어버렸으니 그 선좆이라도 설마 외국인에게 반란을 걱정하지는 않을 것이라 다행이었다.
조선인 아비와 일본인 어미를 두었으나 결국 아비의 길을 택한 셈이니 조선의 K-혈통과 K-국적이 우월하다라는 식의 국뽕을 더 심어줄 수 있는 스토리라 조정에 호의적으로 다가가기도 좋았고 말이다.
어차피 이리된 거 그냥 일본식 이름도 지어 버렸다.
'내 이름 주명(朱明)이 일본어로 슈아키라(しゅあきら) 였다지?
여름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돌림자도 무시하고 지어주신 이름이었다. 주명이란 태양이 붉게 빛난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인데 여름을 상징하는 말이었으니까.
졸지에 그저 소주 한잔을 즐기며 축구를 보시는 게 유흥의 전부인 착실하셨던 아버지를 유흥을 즐기며 여자를 후리는 방탕한 위인으로, 일본어 교사였을 뿐인 어머니를 아예 일본인으로 만들어 버려 죄스러운 마음에 입맛이 썼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차피 시간을 거슬러 오게된 이 세상은 그가 살던 세상과는 다른 곳이네 크게 상관없을 지도 모른다는 자기위안을 가지기도 했지만, 적어도 자신을 스스로 일본 혼혈로 만들어 버린 것은 너무도 그 스스로 한 일이지만 짜증났다.
"에이씨, 근데 이딴 건 버릴 수도 없고. 하아 어쩐다."
선조가 왜인(?)을 기특하게 여겨 내려준 K-유학(儒學)키트, 그러니까 중 유교서적 꾸러미들이 괜시리 눈에 거슬렸다.
조정의 뽕맛을 담아 아주 고급스럽게 치장된 상등품의 책자였지만 어차피 읽지도 않을 것이니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특히나 진실된 행동과 효행을 강조한 글귀들이 무더기로 들어갔을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자신의 이런 날조와 불효를 꾸짖는 것 같아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
하지만 조선에서 온 관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한류(韓流)에 감화된 흉내를 내려면 저 책자들을 고이 간직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더군다나 왕의 하사품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