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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해적왕-32화 (32/77)

〈 32화 〉 31화 - 나에게는 그대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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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이 거제도에 터를 잡고 2기 해병대를 유격으로 잡아 돌리며 군기와 복종심을 잔뜩 심어준 지도 한달이 넘게 지났다.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왜구들이 충원되는 통에 졸지에 400명 넘는 전직 왜구이자 현직 훈련병들을 가르치는 무술 사범이 된 나미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힘드네."

정말로 강행군이었다.

아주 기초적인 동작을 가르치는 것임에도 홀로 무려 400명의 인원을 감당하는 것은 그녀가 천재라는 것과는 상관없이 벅찼다.

게다가 주명과 옥화, 그리고 저 400명을 이끌게 된 20명의 1기 해병대원들에게는 고급 검술까지 가르쳐야 했으니 하루 일과가 끝나면 녹초가 되어 쓰러져야 했다.

그나마 샤를이라는 느끼한 눈빛의 요리사가 만드는 맛있는 요리들을 매일같이 먹는 즐거움이라도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거다.

아마 매일같이 쳐맞고 굴려지며 죽지못해 살아가는 불쌍한 목숨들인 2기 해병대원들도 짬밥이 너무나도 맛있어서 버텼을 거다.

다들 정말 밥심으로 버텼다.

물론 자신을 계집이라 멸시하며 여자라고 무시하지 않고, 존경의 눈으로 한명의 무사를 보듯 대해주는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기축년의 마지막 날이라 그런가 조금 한산하기라도 하네."

그녀의 말대로 오늘은 1589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새하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코끝으로 서늘한 바람에 실리고 약간의 물기가 느껴지는 설경의 향취가 느껴졌다.

눈에도 체취가 있다면 이럴 것 같다는, 조금은 비릿하지만 시원한, 그리고 바다에서 흘러온 짭조름한 냄새와 산에서 묻어온 초목의 푸르른 냄새가 섞여 신비한 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새하얀 눈이 사방을 덮고있는 그 순백의 풍경을 바라보면 녹초가 되어버린 몸과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어느새부턴가 자주 찾게된 달 모양을 닮아 동그란 노란색 경단을 집어 입에 넣으니 너무 달고 맛있었다.

그 단맛에 절로 웃음이 지어지는 것을 느끼던 나미에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고 역시나 웃음을 지었다.

"누나~"

명랑하고 또 맹랑한 조선인 소년 욕현이 왔다는 것을 알았기에 짓는 웃음이었고, 웃음을 짓게하는 존재였기에 녀석이 자신의 품에 안겨와도 개의치 않았다.

새로 옷을 지어 입었는지 녀석의 옷 역시 그 새하얀 옷감 덕분에 주변의 설경과 너무나도 어울렸다.

"요 귀여운 녀석. 누나가 사부님이라고 부르랬지?"

"치, 주명 형은 안 그러는데 왜 나만 그래야 하는데."

"그 녀석하고 너하고 같니? 걔는 그냥 검술 기술만 가르치는 거고.."

"알아요 사.부.님! 저는 무사의 도리까지 가르치니까 다르죠!"

귀에 딱지가 들어앉을 정도로 들은 소리라 그런지, 급히 말을 끊으며 그녀가 하려 했던 말을 대신 줄줄 읊어대는 녀석의 모습도 그저 귀여웠다.

사부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인지 녀석의 허리춤에는 나미에가 지닌 검과 똑같은 모양이면서 크기는 아이의 몸에 맞게 좀 더 작은 검이 매여 있었다.

일본 특유의 칼날이 휜 일본도와 조선식의 직선형 환도의 절충점이라도 되는 것 같은 그 검은 바로 녀석의 할아버지이자 뛰어난 장인인 정여수가 만들어준 그 검이었다.

"근데 사부님, 무사는 아끼는 검의 이름을 지어준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전에, 검은 그저 도구일 뿐이야.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

"헤헤 전 이미 정했는 걸요!"

"아야..힝"

아무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녀석이라 해도 기본적인 예절은 가르칠 필요가 있었는지 가볍게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바람을 닮은 풍검류의 고수인 그녀가 날린 딱밤이기에 마치 질풍처럼 쇄도하여 폭풍과 같은 잔상을 남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어린 아이에게는 꽤나 아팠을 것이다.

"녀석! 사부 말을 끊지 말라고 했지!"

"네에.."

본인의 손으로 날린 거라지만 고작 한방의 딱밤에 제압되어 풀이 죽은 옥현을 보며 그 무사답지 못한 맷집에 고개를 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핑 돌정도로 아팠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얼굴을 찡그린 그 모습마저도 귀여워 보인 나미에였다.

"검의 이름을 뭘로 정했는데?"

물어봐 주길 바라는 것을 사부가 묻자 갑자기 화색이 들며 옥현은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엣헴. 무려 혈귀(血鬼)에요 혈귀! 엄청 멋있어 보이지 않아요?"

"끄아악. 히잉."

어린 녀석이 이상한 겉멋에만 빠져가지고는.

괘씸한 마음에 다시한번 사랑의 딱밤을 날렸다.

"검은 또다른 자아이자 분신이라 내가 말했을 건데? 옥현 네가 피에 미친 귀신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이 사부에게 무사도를 사사받는 네가 말.이.야. 응?!"

꽤나 화가 났는지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매섭게 말하는 나미에의 모습에 옥현은 재차 풀이 죽었는지 모기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더 맞지 않기 위해 택해야 할 정해진 답했다.

"아, 아녜요..그치만"

하지만 그래도 무사도를 가르친 보람이 있는지 굴하지 않고 혈귀란 이름의 필요성을 작은 목소리지만 항변하기 시작했다.

"주명 형은 핏빛 오니라고 하잖아요? 저도 형처럼 강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검의 이름을 그렇게 붙인 거에요! 형처럼 강한 사내가 되고 싶어요! 형처럼 피칠갑을하고 오니가 되어 죄다 쳐죽이..."

"아악..."

굳어진 얼굴로 다시한번 딱밤을, 이번에는 사랑의 딱밤이 아니라 분노의 딱밤을 날린 나미에의 손속에 옥현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나미에의 얼굴을 올려다본 옥현은 너무나도 차갑게 굳어있는 사부의 얼굴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련하게 검 들어."

너무나도 차갑게 내뱉어진 그 한마디를 뒤로 더이상 다른 말은 이어지지 못했고, 대신 이어진 건 아무말 없이 옥현이 틀릴 때마다 검집으로 자세만 교정해 주며 묵묵히 침묵속에 이어지는 고된 훈련뿐이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옥현을 지도하는 나미에는 그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야, 그 뭐냐. 나 할말있는데."

"뭔데?"

그날 찾아온 주명의 얼굴은 너무나도 무거워 보였다. 지금 그녀가 짓는 것 이상으로.

그 무거운 얼굴로 털어놓은 고민은 너무나도 황당한 것이었다.

"나. 괴물로 안 보이지?"

"무슨 소리야? 네가 왜 괴물이야? 힘이야 조금 많이 세다만."

"있잖아. 원래 일정 경지의 무인들은 싸움을 계속 하다보면 그..."

"아 진짜 답답하네! 뜸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하지만 황당한 그 고민의 내막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사람을 죽이면, 죽이게 되면 막 최대한 잔인하게 죽이고 싶어하고. 그 아무런 죄책감도 못 느끼고...그......하아...썅."

그 강해보이는 녀석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터놓았던 그 마지막 한마디가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으니까.

"사람을 죽이면 기분이...기분이 너무 좋아지냐?"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한명의 오니가 되어 전장을 압도하고 홀로 전쟁을 승리하는 압도적인 괴력의 이면에 대가가 있을 줄이야.

"처음에는 그냥 내 숨겨진 폭력성이라고만 생각했어. 근데. 아우 씨 내가 궁상맞게 왜 이러는지. 흐윽."

눈물을 흘리며 자신에게 힘겹게 말을 이어가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그 대가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당시 나미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후우. 내가 이 괴력을 얻은 뒤부터 뭔가 이상했어. 그리고 전에 왜구들 수천을 상대로 날뛰었을 때 감을 잡았지. 아니 씨발, 사람을 쳐 죽이는 데 웃음이 나오고 들뜨고 너무 미친듯이 즐거운거야.  내가 마치 미친 것처럼...그게 썅, 사람이야?! 응?! 그래서, 그래서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무사인 너에게 묻는거야. 검을 쥐는 무사들은 원래 그렇게 변해나는 건지를."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녀도, 물어보는 주명 자신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물어보면서도 스스로가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로 느껴진다는 절망감에 울었던 거겠지.

"나, 괴물 아니지? 인간 맞지?"

하필 그날 녀석은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쓸어버리고 온 지라 피를 묻이고 있었기에, 피칠갑을 한 녀석의 모습 앞에서 차마 그녀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옥현을 한참이나 굴리고 녹초를 만드는 것으로 단단히 혼을 내준 뒤, 나미에는 설경을 감상하던 그 언덕에서 계속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느새 하늘 위로 뜬 보름달.

그 노란 달을 바라보던 나미에는 낮에 먹었던 달달한 경단의 맛이 왠지 떠올랐다.

그때,

나가사키에도 떴던 그 보름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딸을 목 위에 앉히고 걸어가는 사내의 모습.

부녀의 단란했던 모습을 부러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괜히 피식하고 웃음이 지어졌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 부러웠던 부녀의 모습, 가지지 못했던 아버지의 사랑의 상징과 같았던 그 장면이 이렇게 가볍게 다가왔을까.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애초에 가져보지도 못한 것에 대한 상실감,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에 허덕이던 자신.

그렇게 마음의 가장 깊숙하고 가운데 있는 곳에 똬리를 틀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그 괴로움의 원천인 모습이었는데.

그런데 지금은 그 모습이 왜 그저 부끄러운 과거를 떠올리는 회상의 소재 정도로 기억의 저편에서 얕은 곳에 위치하게 된 것일까.

문득 노란 경단이 떠올랐다.

너무 달았고, 너무 따뜻했지.

진스케에게 패해 큰 상처를 입고 주명 그 녀석에게 안겨져 항구까지 왔을 때의 일도 떠올랐다.

'사실 그때 중간에 정신을 차렸었어.'

그 사실을 떠올리자 괜히 더워지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남자에게 안겨있다는 상황이 낯설었고, 자신의 약한 모습을 목도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 맨정신으로 대면하기엔 너무 부끄러웠으니까.

그날, 그녀가 다칠래라 최대한 조심스럽게 안아들고 최고의 빠르기로 벗어나는 녀석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계속해서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는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고, 거세게 뛰는 녀석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는 것을 떠올리자 화끈거리는 증세가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응? 저게 아직 남아 있었네."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접시와 노란 경단.

경단을 집어 입에 넣으니 분명 시린 겨울바람에 차고 딱딱하게 굳어진 그것이지만, 왠지 그 따듯함에 마음에 충족감이 드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응? 내가 만들었지만 이, 이정도로 뛰어난 검이라고 이게?! 주명 녀석이 밤마다 칼에 뭔가 하는 것 같았는데.."

옥현에게 언뜻 들었던 정씨 어르신의 넑두리와 같은 그 말이 떠오름에 허리춤에 맨 검을 뽑아들었다.

달빛을 받아 빛나는 검신, 하지만 달빛에 더해 그 자체의 은은한 빛무리랄까 그런게 더해져 달빛이 보내주는 빛 이상의 빛을 내뿐고 있는 그것. 아마 어둠속에 던져놔도 달빛같은 아름다운 빛으로 발광할 것 같았다.

신비한 기운이 담겨진 것이 그녀에게도 느껴지는 그것

검은 무사의 또다른 자아이자 분신이라고 했던가.

나미에는 비로소 검의 이름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지지 못한 달의 온기에 슬퍼하던 자신의 어린시절의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여자아이.

하지만 이제는 그저 달빛에 기대지 않고도 그자체로도 빛을 내뿜는 명검을 들고 무사로 서 있는 자신.

"월아(月兒, 달의 아이)."

나지막히 읊조린 단어에 마치 검이 그렇다고 대답하듯 진동하는 것 같았다.

가슴속에 아직도 머물고 있는 경단의 따듯함과 충만한 느낌, 그리고 검의 이름을 지어주어 스스로가 무사로서 더 완전해 진 것 같다는 성취감에 나미에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언제나 유유하게 흐르는 시간의 물결은 그 순간 기축년의 끝과 경인년(1590년)의 시작이 교차하던 그 시점이었다.

새해 첫날이 시작된 것이다.

"아? 나미에 씨. 여기 계셨군요. 후훗, 역시 그대도 낭만을 즐길 줄 아는 분이란 걸 내 진작에 알았습니다. 이제..."

첫날이라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목소리에 나미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목소리를 들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고개를 돌렸을 때 진짜 샤를이라는 놈이 찾아왔다는 것을 확인하자 고양되었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았다.

놈이 하는 어색한 일본어를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왠지 '그대'라는 단어는 마음속에 남아 계속 불쾌감을 내뿜는 잔류물처럼 느껴졌다.

"씨발."

욕지기를 내뱉었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더러운 기분에 나미에는 검을 검집에 도로 집어 넣더니 그냥 놈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대라는 말은 네놈따위에게 듣고 싶었던 게 아니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며.

***

[아이템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추가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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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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