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2화 - 필연(必然)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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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4대 국왕이자 사후 선조(宣祖)라는 묘호로 불리게 될 자,
본래는 하성군으로 끝났었을,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방계왕족에 지나지 않았던자 이연(李昖)은 지금 기분이 너무 좋았다.
요즘 기분이 많이 불쾌했었다.
보름달이 기울어 하현달이 되고, 그믐달이 되어 다시 삭이되는 일련의 순환 속에서 지금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이 하현달이란 사실이 조금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근 각지에 심어둔 정보원들에 의해 들리는 소식이 요즘 느끼던 불쾌함의 원인.
마음에 들지 않는 저 혼(광해군의 이름)이 녀석을 세자로 만들자는 여론이 서인 당원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지? 한때 맹렬한 사냥개의 역할을 다해 잠시 총애를 준 정철이라는 놈이 주도하여 말이다.
역시 물이 고이면 썩는 법이란 옛말은 틀린 법이 없다.
한번 판을 뒤집고 물갈이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통치에 감화되어 귀의했다는 왜인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금새 미소가 지어졌다.
"산적한 문제가 많기는 하나, 몇년 전 종계번무(宗系辨誣)도 그렇고 이번 일로 여의 대에 유학의 가치를 크게 받들었다 말할 수 있겠으니 이런 성취감 덕분에 그래도 여가 왕 노릇을 하는 게지."
그의 생각엔 상국인 명나라가 보관한 문건에 태조의 조상이 잘못 기록되었다는 문제를 바로잡은 종계번무만 해도 충분히 사서에 명군으로 기록될만 했다고 여겼다.
거기에 국왕인 이연 자신의 통치에 짐승같은 왜인마저 조선에 감화되어 귀의했다는 대사건이 사서에 더해지만 조(祖)라는 존숭의 묘호를 받을 자격마저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이연의 입꼬리는 더욱 말려 올라갔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사서에는 분명 유교가 진흥하여 법통이 바로서고 변방의 인물들마저 감화된 '태평성대'였다고 기록될 테니 그 외의 자잘한 것들은 무시해도 좋으리라.
비록 산적한 문제가 남아있지만,
니탕개의 난 이후로도 계속해서 심상치 않게 준동하는 야만스런 여진의 무리라던지, 군역을 붕괴시키고 재정을 좀먹는 방군수포의 폐단이라던지 하는 소소한 문제는 그저 그의 머리를 잠시 아플게 했을 지언정 가슴에 와 닿지도 않는 문제였다.
뭐 방군수포야 민생에 닿아 있으니 성군이란 말을 듣기 위해서는 노력하는 척은 계속 보여줘야 성군의 면모가 사서에 비쳐 지겠지만.
불같은 더위에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나가더라도, 태풍이 들이닥쳐 가옥이 쓸려나가고 초목이 뽑혀 나가더라도 국가적 차원에서 봤을 때 크게 동요하거나 흔들릴 필요가 없는 문제로 봐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상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절대로 개인의 그것과 같을 수 없음이니, 동정과 연민이란 가치를 제외하고 군주의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보면 저런 문제들은 용상에 아무런 미동도 가할 수 없어 그저 소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조선 내부의 권력에 닿아 있는 사람들이 꾸미는 일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누구보다 먼저 그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파문을 던져 판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기축년의 그 이가 갈리는 일을 보아도 뭐가 중요한 문제인지는 자명하지 않던가.
최근에 짐승같은 왜인들의 저들끼리 싸우는 것을 멈추고 통일이 되어 아국을 침공할 전쟁을 준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지만 이연이라는 군주는 그것을 그다지 중요한 문제로 보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저 배은망덕한 서인놈들이 제 당파를 키워준 주인마저 뛰어 넘고자 한다는 사실.
저 남쪽에서 불 것 같다는 전쟁의 바람, 그러니까 남풍(南風)을 이용한 수작질의 본질은 진작에 꿰뚫어 봤다. 전쟁 분위기를 조성해 지금의 서인에게 유리한 판이 뒤집어지지 못하게, 오히려 서인 위주로 더욱 힘이 쏠리도록 하려는 작당이 아니던가.
전쟁 위협을 주장하여 이미 서인 위주로 굴러가고 있는 조정의 덩치를 키우고, 덩달아 서인들의 세력도 확충할 것이다.
"전하! 이 엄중한 시국에 '검증'된 인재를 써야 하옵니다!"
전쟁을 막는다는 명분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져 국왕의 인사권마저 농단하겠지.
"전하! 이 엄중한 시국에 기축년에 이미 반심을 내보인 무리들을 등용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조정의 단합이 중요하다는 핑계로 동인들을 더욱 옥죌 것이다.
"전하! 조정의 중론이 이미 모아졌사옵니다. 순리를 따라 처결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커져버린 조정은 국왕인 이연 자신마저 잡아먹으려 하겠지.
"네놈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야."
평소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있을 때 하던 습관대로 탁자를 손으로 두드리며 그는 차갑게 다짐했다.
결심이 서자 용포를 입은 사내의 입에서 가뭄이 들어 갈라진 것 같은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상선 있느냐? 우상에게 여가 찾으니 오라 전하라."
"예 전하."
마치 허공에서 나온 목소리처럼, 문 밖에서 존재감 없이 대기하고 있던 내시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저 분수를 모르는 신하들이 내시들 같이 순종한다면야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떤 식으로든 거세를 할 필요가 있겠지.
그가 찾은 이는 우의정이자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李山海)였고, 그가 지금 꾸미려 하는 일에 중요한 장기말이 되어줄 이였다.
함정을 팔 것이다.
지금까지 주인덕에 얼마 없는 벼슬자리라는 이름의 밥그릇을 쳐먹고 살이 통통하게 올랐으면서도, 이제는 주인을 향해 그 이빨을 드러내려는 그 서인이라는 이름의 개들을 때려잡기 위한.
세자라는 화두는 분명 훌륭한 미끼가 되겠지. 그걸 선점하면 서인의 미래마저 공고해 지는 탄탄대로를 구축하는 것이니 어찌 침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기 왕권을 세워준 공신이 될 기회를 낚았다는 생각에 침을 질질 흘리며 달려들 것이다.
때려잡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자신의 용상을 위협할 놈은 아무도 없을 정도로 공고한 왕권을 거머쥘 수 있으리라.
'그러면 신성군을 세자로 삼는다고 밀어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인빈 김씨의 소생이며 자신이 총애해 마지않는 신성군을 생각하자 그 어린것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왕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들을 위해 저 태종대왕처럼 길을 닦고 반석을 마련해 놓아야 한다.
다른 왕자들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매우 편협하고 선택적인 부성애 이지만 뭐 왕에게 그점을 지적할 간큰 인사는 없겠지.
태종대왕과 세종대왕의 성세처럼, 조라는 묘호를 받은 자신과 그의 아들 신성군이 만들어 나갈 찬란한 조선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아 이연은 미소를 지었다.
***
오사카(大阪)에 위치한 거성 오사카성(大阪城)의 가장 높은 곳인 천수각의 누대 위에서 한 사내가 거대한 대도시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거대한 오사카의 번영을 상징하듯 밤이 늦었음에도 대낮처럼 밝게 불을 밝히고 있는 불야성의 모습을 보며 그 화려함이 지금까지 자신이 이룬 위업을 보여주는 것 같은 느낌에 사내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작은 체구, 까무잡잡한 피부에 마치 원숭이를 닮은 추레한 인상이었지만 그 누구도 사내를 외모만으로 평가절하하지 못한다. 아니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것이란 말이 정확할 것.
풍신수길(豊臣秀吉)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 불리는 당대의 천하인(天下人)이자, 일본 천하를 사실상 통일한 명실상부한 지배자였다.
"허나 고작 이정도에 만족할 내가 아니다. 진짜 나의 천하는 고작 일본 따위가 아니니까."
적어도 이 세상의 중심이라고들 불리는 중원 정도는 도모해야 천하라는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자신은 충분히 그런 정도의 위업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자신이 누구던가,
아비가 누군지도 모를 정도로 비천한 출신이란 한계를 극복하고 수백 수천년의 세월동안 선조들이 이룩한 위업들 위에 서 있는 자들을 모두 꺾어내고 일본을 통일한 자 아니던가.
오로지 칼의 힘으로 말이다.
오사카의 저 화려함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의 진정한 힘은 바로 칼을 든 무사, 창을 든 병사들.
이번에 호조 가문을 정벌하는데 들인 병력만 무려 22만
그조차 자신의 전력은 아니었으니 그 무시무시한 동원력을 안다면 히데요시의 자신감과 그가 가진 엄청난 힘을 가늠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자신은 검술에 뛰어나 일검에 적의 목을 벤다거나, 일전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나 에치고의 용이라 불리는 우에스기 겐신처럼 신묘한 전술로 적을 격파하는 자는 아니다.
하지만 전략적인 차원으로 들어가면 그 누구도 히데요시를 따라잡을 수 없다.
하나의 명검이 아닌, 하나의 부대가 아닌,
국가의 무력의 총화, 군대라는 '칼'을 휘두른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자신이야말로 천하제일검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손자가 모공(謀攻)편에서 말했듯, 전략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적을 알고 나를 아는 것.
나의 칼은 도합 30만이라는 전쟁으로 단련된 정병이며, 그들의 힘이 되어줄 2,000만 석이라는 전 일본의 엄청난 경제력.
너구리 같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금 거슬리지만, 그조차 대세를 알고 자신에게 납작 엎드리며 차남인 오기마루를 인질로 보내지 않았던가.
반면 적의 칼은?
중원의 엄청난 힘을 생각하면 솔직히 버겁다는 생각이 들며, 전국시대의 승리자인 자신조차 승패를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의 범위를 이웃나라 조선에 국한하여 생각해 보면 놈들의 칼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최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17만에 일본의 고쿠다카로 환산하면 500만석으로 언뜻 보기엔 손쉽게 상대할만한 수준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허나 세작들이 보내온 정보를 종합해 보건데 실제 동원할 수 있는 정병은 채 3만도 되지 못할 것이며 수백년 평화에 젖은 놈들의 구멍뚫린 행정력으론 실제 유의미한 경제력은 200만석도 못될 것이다.
10배의 차이!
무려 10배나 강한 칼을 쥐고도 저 문약한 조선놈들을 짓밟지 못한다면 무사라는 이름을 버리고 접싯물에 코박고 죽어야지.
히데요시는 손을 뻣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보름달이 되기엔 다 완성되지 않은 상현달이 떠 있었다.
마치 아직 미완인 자신의 천하를 보는 것 같았다.
자신의 검이 움직여 조선을,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원을 도모하면 자신의 천하, 보름달이 완성될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나야말로 진정한 천하인이 될 것이다!"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이 도저히 도모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던 저 오다 노부나가에 대한 마음속 두려움과 열등감도 떨쳐내고 역사상 가장 위인으로 등극할 테니까.
오다 노부나가도 이루지 못한 것이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자 자신이 야마시로에 사실상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두어 버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 義昭)가 떠올랐다.
비록 몇년 전 그 직위를 히데요시 자신이 요시아키로부터 거두고 공식적으로 없애긴 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 지고의 직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며, 그 자신도 내심 오다도 등극하지 못한 그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었다.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그 자리를 얻을 수 있다면 요시아키 따위의 양자가 되더라도 손해가 아니겠지.
***
'Kill_"이연"'
[존재하지 않는 명령어입니다.]
'Kill_"도요토미 히데요시"'
[존재하지 않는 명령어입니다.]
"에레이 그럴 줄 알았다. 씁."
기대했던 적도 없지만 콘솔이란 막강한 치트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게 있다.
"아오, 좆병신과 원숭이새끼 두 놈 다 그냥 뒈져버리면 평화로울 건데."
선조의 죽음은 조선 내면의 평화, 원숭이가 죽으면 세계평화란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이 알고있는 대로라면 아마 지금 이맘때쯤 선좆께선은 조(祖)로 기록되려는 부푼 꿈을 꾸고 있을 것이고, 원숭이새끼는 세계정복의 꿈을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한편 쇼군(將軍)이 되려 수작질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고작 한 인간의 개꿈일 뿐인데 그놈들의 밑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시대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수십만이 죽고 수백만이 고통받는다.
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은 너무나도 밝지만, 이 세상에 드리운 전쟁의 어둠을 걷어내기에는 그 빛이 너무도 미약했다.
어둠의 원흉을 손쉽게 제거할 수 없다면, 남은 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뿐.
흉악하고 탐욕스러운 저 너머의 전쟁이 몰려와, 나약하고 허상과 같은 이곳의 평화를 덮치려 한다.
전쟁과 평화의 그 교차점에서 덧없이 부서져갈 생명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려면 그곳에 자신이 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가오는 전쟁에 홀로 서지는 않을 것이니.
"믿어요 할배. 할배가 짱이에요."
[이름 : 거대한 검 '조부(祖父)']
[레벨 : 100(경험치: 0/50)]
[효과 : '파괴불가', +200% 증가된 피해, +110% 명중률 상승, +10 모든 능력치 상승, +200% 피해저항]
[모든 검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추앙받는 검입니다.]
모든 것을 찢어버릴 할배가 다가온다.
장유유서(長幼有序)란 이름의 폭력이, 지하철의 자리부터 세상의 저 끝까지 그 어떤 곳에서도 할배가 먼저다.
폭력 반드시 폭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