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34화 - 필연(必然)(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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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중부(仲父, 아버지 바로 위의 형)다."
"I'm Your father"도 아니고, 갑자기 등장한 큰 체구의 선비가 광선검도 없이 검은 가면도 쓰지 않고 저 말을 하면 어찌 믿을까.
"김시신(金時愼). 그게 네 아버지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주명 자신이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로부터 강제적인 반복학습으로 주입받아 기억하고 있는 직계 조상님의 이름이 나왔을 때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중부님이라는 저 사내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김시신이라는 이름을 지닌 내 아버지(?) 바로 위의 형이라는 것.
실제로 김시신이란 이름은 주명의 조상님 존함이며 그분의 형제 중 김시민 장군이 있다는 것과 조합해 생각해 보면 알수 있는 사실은?
주명 눈앞에 서 계신 저분이 바로 김시민 장군이라는 것이다!
"아들. 우리 집안에 위대한 장군님 한분 계신 거 알제? 진주대첩을 일궈낸 그분 말이야!"
한국에 있었을 때의 내 진짜 아버지가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말씀했던 집안의 자랑이자 조선의 영웅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김시민 장군.
진주대첩의 영웅이자 맹장.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 해의 10월.
파죽지세의 기세로 조선을 짓밟은 일본군.
급기야 전라도를 얻어 이순신에게 발목을 잡히던 보급문제도 해결하고 조선의 저항능력을 없앨 목적으로 3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침공한다.
전라도는 최대의 곡창이기 때문에 조선에겐 최후의 보루이며, 그곳을 빼앗기면 홀로 바다를 지키던 이순신 장군님의 본진이자 조선 최고의 검인 전라 좌수영이 있는 곳.
그렇기에 전라도로 가는 길을 막는 유일한 저지선인 진주성을 빼앗긴다는 것은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패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벌어질 전투의 승패는 바로 전쟁의 승패와 직결되는 것이라 이땅의 운명이 진주성에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나가오카와 하세가와란 장수가 이끄는 전쟁으로 단련된 3만의 일본군.
그에 맞서는 김시민에게 주어진 병력은 그 10분의 1도 안되는 3,800명의 병사뿐.
그마저도 조선군 답게 훈련도가 개판이었다.
김시민은 그 악조선 속에서도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일주일동안의 혈투 끝에 결국 진주성을 지켜냈다.
이로서 일본군의 전라도 침공은 좌절되어 최후의 보루를 지켜낼 수 있었으니 김시민이 조선을 구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전쟁귀신이라던 당대 일본군의 뛰어난 전투력에도 무려 1만의 사상자가 발생해서 놈들은 사기를 위해 시신을 화장해 사망자수를 숨기려 할 정도였다.
얼마나 치욕적이었으면 일본의 수장인 히데요시가 직접 보복을 천명했을까.
하지만 큰 승리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전투가 벌어지면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섰던 맹장이었다는 것이 탈이었을까, 마지막 날에 결국 적의 탄환을 맞고 장렬히 전사하게 된다.
조선은 나라를 지킨 대신 영웅을 잃었다.
불같고 직선적인 성품을 지녔지만 솔직하고 인간적인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고 하는데, 일본군이 진주성을 침공할 때 성 안의 백성들이 합세한 것과 그가 전사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성 안이 울음바다로 변했다는 것에서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그런 존경스럽지 마지않는 분을 만나 영광이기도 했고, 우리 집안의 자랑이기도 했던 분을 만나 괜시리 가문뽕에 차올랐다.
우리 아버지가 평소 많이 느끼셨던 그거 말이다.
그러나 아까 설명했다시피 불같고 직선적인 성격이라는 점 때문에 주명은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수도없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당황해야 했다.
"다행이구나."
"예, 예?! 무슨 말씀이시온지?"
"네 아비의 얼굴을 하고 있구나. 또한..."
거기까지는 친자확인의 단계에서 응당 일어하는 일.
혈통이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전자 검사서 같은 빼박 증거를 봤을 때 보여지는 확인 신청자의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아무리 김시신이란 분이 주명의 조상님이고 피로 이어져 있다지만 수백년 전의 조상님과 유전적으로 그다지 가깝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김시신이라는 분과 주명의 모습이 닮지 않을 수도 있었고, 지금까지 조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꾸며온 모든 날조들이 거짓이라 탄로날 수 있는 위기상황.
혹시 얼굴이 전혀 닮지 않았음에 의문을 품고 추궁했다면 큰일이었는데,
'장군님이 너무 좋아하신다.'
이런 반응을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환하게, 너무도 환하게 씨익 웃음을 지으며 기뻐하는 장군님의 얼굴을 주명도 보았으니까.
정말로 잃어버린 친조카를 수십년 만에 찾은 아저씨의 감동한 모습.
하지만 문제는 잠시 뜸을 들인 뒤에 장군님이 말한, 그 다음에 나온 말이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이, 네 아비와 같은 글러먹은 잡놈은 아닌 것 같아서."
"컥. 그, 그게."
너무나도 충격적인 그분의 발언에 사레가 들릴 정도였지만 감정을 수습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고 김시민의 후속타가 훅 들어왔다.
"아들녀석은 그래도 사람이구나."
웃픈 사실은 조카(?) 앞에서 그 아비(?)를 욕하는 저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아까 전의 조카를 만나 감동한 그 표정은 계속 지으며 환하게 웃고 계신다는 것.
동생놈의 아들녀석은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말은 그 동생이라는 분은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나.
'아니 대체 어떤 분이셨길래 친 형으로부터 저런 평가를 받으신 겁니까 조상님?'
문득 아버지께서 제사 때마다 해 주셨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 안동 김씨는 뼈대있는 가문이다 아이가! 씨가 다르다고. 알긋나? 우리 조상님들은 뛰어난 하나같이 뛰어난 피를 이어 다들 뛰어난 자질을 지니셨지. 그러니까 조선 후반기를 지배한 기라!"
평소에도 아버지의 그런 혈통 결정론적인 말씀에 다 동의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이 시대의 산증인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건 완전 사실이 아니었다.
혈통이 능력을 결정한다면 한번 들어선 왕조가 망할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혈통 결정론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유비의 아들내미인 안락공 유선만 봐도 한방에 논파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 후반뿐만 아니라 당대에서 명문가였고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단한 가문 출신의 사람이 형제로부터 사람 취급도 못받는 지경에 이를 정도면 대체 얼마나 망나니였다는 말인가.
보통 그 사람의 사후에는 고인보정을 받아 많이 미화되는데도 이정도니 말이다.
그런 주명의 상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눈가가 벌게지고 눈자위가 시뻘개진 채로 불쑥 다가와 자신의 어깨를 꽉 부여잡는 김시민의 행동 때문에.
"잘 자라줘서 고맙구나."
"못난 아비를 두고 타국에서 그 기구한 삶을 살아오고도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줘서 너무 고맙고도 미안했는데, 이렇게 잘 자라주기까지 하다니. 정말 고맙구나, 내 조카야."
물기 가득한 그분의 목소리에 왠지 자신의 마음에도 파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진심으로 조카를 만나 기뻐하는 그의 모습에서 그저 조선에서 활동하기 위해 편의와 필요를 위해 만든 삶과 인연이 다르게 다가왔으니까.
파문이 일이키는 잔잔한 물기에 젖어가며 주명은 문득 그런 마음이 들었다.
이 조선에 당도하기 전까지 살아왔다는 날조된 삶, 그 모든 거짓부렁들이 사실이고 싶은 마음과.
김시진의 아들이자 김시민의 조카라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인연이 진짜 있었던 인연이고 싶은 마음이.
어차피 자신의 삶의 행적은 거짓된 날조지만, 그의 조카라는 인연은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그 날조된 삶의 거짓들이 자신을 이끈 결과가 저 훌륭한 분과 만난 거라면 결과론적으로 좋은 게 아닌가 하고.
또한 아무리 애초에 없던 인연이라지만, 김시민의 동생은 자신의 조상이고 자신은 그 후손이라는 혈통이 있으니 미약한 실이나마 이어져 있으니 아예 없는 인연은 아닌가 하고.
사실 주명도 아버지에게 김시민 장군의 일화를 듣고나서, 그리고 자신의 조상이 그분의 형제였다는 것을 듣고나서 언제부턴가 마음속 한구석에 어떤 마음, 어떤 꿈 같은 게 있었다.
멸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의 운명을, 패배해 가던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꾼 진주대첩의 영웅.
전란 속에서 누구보다 앞장서서 위험을 무릅쓰고 싸웠던 용장이자 맹장.
그리고 패배해야할 운명의 조선을 구한 위인.
하지만 구국의 영웅이자 용맹한 맹장이었기에 왜적들에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이 찾아왔다.
사실상 진주성 싸움이 대패로 끝나가는 상황에서 분개한 일본군은 어떻게든 전투의 영웅인 김시민이라도 죽이려 시체들 사이에 저격수를 배치했다.
졸렬한 왜놈새끼들 같은 치졸한 계략이었다.
하지만 김시민이었기에 그 계략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
마치 우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지닌 계백장군님이 교활한 김유신놈이 꾸민 화랑들을 자살돌격시키는 그 술책에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이치 말이다.
용맹한 장수이자 솔선수범의 대명사였고 책임감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분은 어떻게든 더 철저히 적을 방비하기 위해 직접 전장을 순시하다 왜놈 저격수의 총탄에 왼쪽 이마를 맞고 전사하셨다.
자식조차 남기지 못하고 말이다.
그런 분의 가족이 되어보고 싶다면, 그분의 최후를 바꾸고 싶다면 그게 매우 큰 잘못이거나 욕심일까?
자신을 친조카처럼 진심으로 대해주는 김시민의 모습에 주명 역시 평소에도 존경했고 가까이 있고 싶었던 마음을 담아 공손하고 극진하게 대했다.
주명의 진심도 김시민에게 와 닿았는지 처음만난 조카를 위해 이것저것 챙기는 모습이었는데,
"학문은 어디까지 익혔느냐?"
"예?! 아니 그것은 말입니다..워낙 살아온 삶이 험난하고 싸움이 많았던지라....."
"어허! 아니될 말이다. 당장 시작해야겠다. 공부를!"
"어어어...얽...."
특히 공부에 관해서는 더더욱 철저했다.
***
일본어를 교단에서 가르칠 때는 스스로 요시꼬라고 부르기도 하는 중년의 여인.
이길자(吉子) 여사는 오늘도 족보를 바라보며 헤벌쭉 웃고 있는 남편에게 다가가 등짝을 후려 패 주셨다.
"아악! 뭐하는긴가?!"
"그놈의 족보는 그만좀 봐요! 그거 본다고 뭐가 달라져요?"
족보에 대한 모욕은 절대 참지 못하는 그녀의 남편 김상택씨는 크게 성을 내며 족보의 위대함을 재차 주입시켜 주려고 했지만 평생 남편과 살아온 이길자 여사가 당할 리가 없었다.
"우리 가문이 말이야! 조선 후반기에 실질적으로 조선의 왕이였다고! 조선이 우리 가문 꺼였어!"
그래서인지 부정적 평가가 훨씬 더 많기에 양날의 검이기도 했던 안동 김씨의 리즈시절인 세도정치까지 꺼내 드셨다.
김상택씨에게는 나름의 필살기였으나,
"이봐요 김상택씨? 그 훌륭하신 안동 김씨의 시조가 누구시죠?!"
"이제야 우리 가문의 위대함을 알아 보는군! 신라 마지막 왕이셨던 경순왕의 손자 김숙(金叔)자 승(承)자 되시는 분이 우리 시조시라고.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냐면..."
아내가 자기 가문의 위대함을 알아준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침을 튀겨가며 설명을 이어가려던 남편의 말을 이길자 여사는 매몰차게 끊었다.
저대로 놔두면 1시간 가까이 그놈의 족보 얘기를 계속 들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지만 실은 한마디 말로 남편을 넉다운 시킬 비기를 오늘 알았기 때문.
그걸 알아내는 과정에서 옆집 안동 권씨댁 며느리에게 얼마나 비웃음을 당했던지를 생각하면 이가 갈렸다.
"김좌근이 세도정치를 했다고 하는데, 여기 핸드폰 보면 왜 이렇게 써 있을까요 여보? 대체 이분의 시조는 왜 김선평(金宣平)이라는 분이실까? 왜 그럴까요 안동 김씨 아저씨?"
"어... 그, 그것이...."
"그 족보. 우리 집안 꺼 맞아요? 하아, 정말. 아니 족보를 사서 신분을 세탁한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다른 집안 족보를 우리 꺼라 우기는 건 내 처음보네! 거기에 다른 집안 족보를 그렇게 애지중지해?! 에라이!"
할 말이 없었다.
구 안동김씨였던 김상택씨의 가문과 헬게이트 조선을 열어재낀 신 안동김씨는 다른 씨족이었으니까.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만년 과장으로 어린 상사들에게 치이고 후배들에게도 무시받으며 사는 그의 허름한 인생에 조선을 쥐락펴락 했다는 최고 명문가의 타이틀은 유일한 위안이었다.
스스로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게 필요했다. 거짓일 지라도.
"내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비루하지만 내 몸속에는 조선을 지배했던 위대한 가문의 피가 흐른다고!"
세월에 마모되는 자아와, 무능력에 구겨지는 자존감을 드높여 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세도가의 후예라는 '사실'이 한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하찮아 보이는 그의 인생에 정말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비참함이 더 두려웠다.
너무도 초라해 보이는 자신의 삶을 그런 식으로라도, 그런 거짓과 날조에 의지해서라도 포장해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조상을 꾸어 오는 짓거리는 개새끼도 하지 않을 미친짓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신라 왕족의 후예이고 혈통적 연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 아닌가.
경순왕의 손자(김숙승)나 경순왕의 재종질(김선평)이나 어차피 신라 왕실인데 그게 그거 아니냐!...는 아닌 것 같지만.
아내에게는 말해봤자 조롱만 당하겠지.
그럼 우리 모두 한민족이고, 단군의 후예 아니냐고.
"..."
풀이 팍 죽어있는 남편의 모습에 이길자 여사도 더 몰아붙이지 못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요즘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새벽에 홀로 일어나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안주도 없이 부어마시는 모습에 너무 안타까웠으니까.
코로나19로 남편의 회사가 많이 어렵다고 들었다.
대규모 감원이 예정되어 있다는데 고령의 저성과자를 대상으로 칼을 댄단다.
요즘 트랜드라는 재택근무를 할 수도 없으며, 계속 근무를 해봤자 더 뽑아낼 성과도 없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바로 그녀의 남편같은 사람들을 말이다.
젊은이들이 무협지를 읽으며 잠시나마 호연지기를 빌려오듯, 저이는 남의 족보를 읽으며 자존감을 빌려오는 것이리라.
그런데 저 남편이란 인간은 옛날부터 그 빌린 '가문의 영광'을 아들에게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않았던가?
"여보. 혹시 주명이한테는 사실대로 말을 한거죠?"
"아, 아니...하지만 이제와서 사실대로 말하긴 틀려 먹었어. 녀석이 '조상'들이 부끄럽다고 족보를 한번도 안 쳐다봐서 지금까진 괜찮았지."
"아이고 이양반아, 이 화상아!"
"아악!"
아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아들은 너무 지나치게 책임감이, 정의감이 강한 아이였다.
정신대로 끌려가는 어린 소녀들을 한명이라도 구해주려 홀로 싸우다 허망하게 돌아가신 시증조부님을 꼭 닮은 것 같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문제라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문제라면 어떻게든 자기가 다 짊어지고 해결해 보려는 답답하지만 마음 따뜻한 남자가 바로 그녀의 아들내미.
그런 아들에게 조선을 말아먹은 조상님들을 자랑이라고 제사때도 자랑질을 해댔으니 아들의 성품상 도저히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혹시 역사책을 많이 읽었던 것도 '조상'의 죄를 명명백백히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조상님 속이면 죄받는다니까! 아휴, 노비 집안이 양반이라고 뻥 치는건 짠해서 이해해 줄만도 하지만 이건 뭐. 그리고 주명이가 모를 리가 없잖아요!"
"몰라."
"뭐?! 야! 거짓말도 정도껏 해! 우리 아들이 역사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것도 모를..."
"진짜루 몰라. 그자슥, 지 보고싶은 거만 봤는지 역사를 아주 띄엄띄엄 배웠어."
"..."
자신의 아들이 마치 신동처럼 역사적 사실에 대해 줄줄 읊었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던 이길자 여사는, 아들을 준-역사학도로 알고 있던 그녀는 할말을 잊었다.
***
"야이 미친놈아!"
퍽
"끄억!"
"허어, 아무리 왜국에서 살다 왔다고 해도 그렇지 어찌 가문의 시조를 다른 분으로 잘못 알 수 있다는 말이더냐!"
사실 왜국에서 살다온 적도 없었기에, 역사학도라 자부했기에 더 비참한 건 주명이었다.
'나, 역사학도 맞지? 아닌거 같아...'
풀 스윙으로 후려맞은 등짝보다 심마에 빠지게 될 것 같을 정도로 정신의 타격이 더 컸다.
김시민에게 붙들려 학문을 배우던 중이었다.
잠시 쉬어가는 시간에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왔고, 김시민과의 공감대를 높이기 위해 가문의 역사와도 관계된 전투에 대해 말을 꺼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시조, 그러니까 세도정치를 연 안동김씨의 시조로 알고있던 김선평(金宣平)이 태조 왕건을 도와 고창에서 후백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을 알았기에 그 고창전투를 꺼냈었는데,
"가문의 시조께서 무도한 견훤을 상대로 고창에서 큰 업적을 이룩하셨다고 들었..."
"대체 네가 말하는 그 시조는 어디 가문의 시조를 말하는 것이더냐?"
"당연히 김선자 평자를 쓰시는..끄악"
퍽
불같은 성격의 김시민에게 뒤통수를 쳐맞게 된 것이다.
"도저히 안되겠다. 우리 가문의 족보를 내 통째로 외우게라도 해야겠어! 오늘 잠을 잘 생각은 버리거라아아!!"
덩달아 그렇게도 싫어하던 족보를 강제로 달달 외워야 했고 말이다.
"아부지...왜 그러셨어요."
혈통으로 이어진 인연을 기록한 것이 바로 족보.
있지도 않은 인연(因緣)을 믿고 살아온 주명이었으나 이제야 거짓을 깨닫고 무연(無然)인 것을 알았다.
김시민과 주명의 인연 역시 거짓에 많이 가까웠지만 다른 점도, 희망적인 점도 있었다.
"아들. 우리 집안에 위대한 장군님 한분 계신 거 알제? 진주대첩을 일궈낸 그분 말이야!"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 중 그나마 진실이라고 할 만한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김시민이 같은 집안이며 주명의 직계 조상님 형제라는 것이었고 그건 사실이기 때문에.
거짓으로 날조된 '귀화한 왜인'의 삶과 애초에 없었던 '중부-조카'란 인연에 이끌린 김시민과 김주명 두 사람.
둘의 만남은 그저 우연(偶然)에 불과한 것이고 결국 무연(無然)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혹시 둘의 이 만남이 정말로 인연(因緣)이 되고야 말게될 두 사람의 필연(必然)일 것인가.
우연과 필연 사이의 기로에 지금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녀석! 대체 왜! 왜 이리도 외우지 못하는 것이냐!"
당장은 주명의 허접한 암기력 때문에 김시민의 폭력이 필연(必然)이었다.
폭력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