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35화 - 세력(勢力)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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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 그는 진주대첩은 들어봤어도 열공대첩이란 건 들어보지 못했다.
솔로대첩은 잠깐이나마 휘발성으로 설레기라도 하지.
한쪽은 쳐들어온 왜놈들이 박터지게 깨지며 방어전투를 이기는 거고 한쪽은 주명 자신이 대가리 터지게 암기, 또 암기하도록 벼락치기를 시켜 무식에서 유식으로의 진공(進攻)이 성공을 거둔다는 거 정도의 차이겠지.
둘 다의 공통점은?
항상 맹렬하고 불같은 김시민의 지휘가 이뤄진다는 것.
불같이 화끈하게 아프다.
퍽
"주상전하께서 너에게 경서를 친히 하사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것을 고작 장식품으로 둘 생각이더냐?!"
퍽
"안동 김문의 후예가 어찌 일자무식이란 말이냐! 지하에 계신 선조들 뵙기 부끄럽지도 않느냐!"
지난번 나가사키에서 가토 기요마사는 그 특유의 감각으로 주명의 강함을 깨닫고는 재빨리 도주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김시민 역시 탁월한 무장 답게 주명이 아무리 세게 때려도 피해가 별로 없다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주명의 경이로운 맷집을 알고부터 김시민은 거의 장군목(성문을 닫는 데 쓰이는 단단한 버팀목용 나무) 수준의 몽둥이를 들고 마음에 차지 않을 때마다 회초리를, 아니 몽둥이질을 하는 식으로 미친듯이 주명을 몰아 세웠다.
대체 어쩌다 공부판이 열렸는지, 어쩌다 왜 저런분이 와서 이렇게 되었는지 원망스러웠지만 어쩌랴.
"제 가문의 시조도 모르는 네놈을 내 이대로 그냥 둘 수 있겠느냐?'
지은 죄가 있으니 수그리고 입닫고 공부하는 수밖에.
갑자기 열린 공부판에 낮에는 경서, 밤에는 족보를 스파르타식으로 탈탈탈 털려가며 달달달 외웠다.
하지만 정말로 억울하고 화가 나느냐면 그것은 또 아닌게 그런 김시민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진심을 옅볼 수 있었으니까.
지금 김시민은 무척이나 한가해 보이지만 무려 휴가중이다.
얼마 되지도 않은 휴가를 자신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데 썼고, 또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도 쓰고 있는 거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의 조카(?)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조선의 양반사회에서 천시되는 서얼(庶孼).
외국인은, 특히 왜인을 천시하는 풍토상 서자(양민 어머니 소생)와 얼자(천민 어머니 소생) 중 실질적으로 얼자에 한없이 가까운 신분이 바로 주명 자신인 것.
친자식도 아니고 그저 최근에 다시 찾은 조카일 뿐이며 사실상 얼자에 불과한 주명의 공부를 그가 이렇게나 신경쓰고 있다는 건 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서얼을 천시하기도 했고 어차피 문과 응시를 하지 못하기에 그들에게는 학문을 가르치는 것이 낭비로 여겨졌을 정도이며, 엄청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난 가풍을 지닌 집안이 아닌 바에야 방치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공부를 전력으로 가르치는 김시민의 행동은 주명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존중과 아낌으로 다가왔던 것.
"시조의 존함 김숙승(金叔承)을 만번 쓰거라!"
다른 이유도 있었던 것 같지만.
짧지만 굵었던 일주일간의 시간 동안 왜인들을 경계하는 데 쓰이는 시간을 빼고는 남는 시간을 오로지 공부에만 쏟은 결과 주명은 족보를 외우고, 천자문을 뗐으며, 급기야 소학을 암송할 정도가 되었다.
"이제 조금은 사람 구실은 하겠구나."
눈 밑이 거뭇해진 조카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고는 김시민은 급히 말을 타고 귀경길에 올랐다.
군기시(軍器寺)의 업무가 아무리 최전방이나 병조의 다른 부서에 비해 그리 힘들지 않다지만 워낙 책임감이 강한 그의 성품상 그곳의 판관(判官)으로서의 임무를 너무 오랫동안 내팽개칠 수 없었던 것.
폭풍같이 밀어닥쳐와 불같이 자신을 불태웠던 김시민의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주명의 표정에는, 이제 그 지옥같은 공부에서 벗어나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해방감이 아닌 떠나보내야 하는 아쉬움이 더욱 짙게 깃들어 있었다.
"너는 틀림없는 내 조카다. 왜인 소생이라느니, 서얼이라느니 하는 그딴 헛소리들은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내 조정에 가는 길에 목천에 있는 본가에 들러 단단히 말해둘 것이야."
자신을 정말로 조카라고 생각하는지, 김시민은 스스로 울타리가 되어 주겠다고 했으니까.
스스로 밝혔던 안동 김씨의 후예라는 말이 정말로 인정받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고 바라지도 않았다.
수백년의 세월을 거치며 공고해진 신분제의 벽 앞에서 한낱 저 왜국에서 흘러온 이방인이 양반이라는 울타리 내에 들어갈 수 있을리가 없었고 오히려 반상의 제도를 능멸했다며 비난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차마 아버지로부터 받은 그의 성씨만큼은 버릴 수 없어 사실대로 안동 김씨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저 조선인의 하나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로 던진 것들이 이렇게 되돌아 올 줄이야.
김충갑(金忠甲)의 3남이었으나 가장 출세한 이는 바로 김시민이었고, 장자인 김시회(金時晦)를 대신해 집안의 주요 대사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부친인 김충갑이 엇나가는 4남 김시신의 훈육을 3남인 김시민에게 맡겼던 것도 사실상 김시민을 가장 믿고 의지해서 그런 것이었으니 사실상 가문의 가장 정도의 위치.
아무리 서얼에 대한 차별이 더욱 극심해진 조선 후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조카'라고 가문에 공식적으로 인정받도록 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균의 홍길동전이 이 시기에 나왔다는 것을 상기에 보면 서얼은 호형호제가 불가능했으니,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절대로 김시민의 조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비의 후처 소생에게 왕위를 빼앗길 뻔한 일로 단단히 빡친 태종 이방원에 의해 서얼에 대한 차별이 시작된 이래, 성종대에 와서는 조선의 성문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아예 빼도박도 못하게 명문화 되어 버렸다.
문과응시 금지나 승진에서의 제한과 같은 공적인 차별은 당연하고, 집안 내에서의 차별은 홍길동의 수모에서 알 수 있듯이 더 악랄하고 극심해 공적인 차별 못지 않았다.
그런데 김시민이 주명에게 장담하고 간 말은 그런 집안 내에서의 차별을 본인이 막아준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냥 귀화 왜인 1명으로 잠시 관심받다 끝날 줄 알았는데 졸지에 명문가의 일원이 되어버린 상황에 주명은 얼떨떨 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김시민에게 고마웠다.
아직도 골통을 울리는 것 같은 매타작의 충격마저도 잊어버릴 수 있을 것 같은.
'감사합니다. 숙부님.'
멀어져가는 김시민의 뒷모습을 향해 주명은 고개를 숙였다.
***
"역시 씨도둑질은 못한다더니..."
횡음무도한 삶으로 인생을 낭비하더니 요절한 그녀석도 자질 자체는 뛰어났다.
증조부 이후로 가문에서 끊겼던 것이 바로 진정한 양반임을 증명하는 과거시험 합격.
정확히 말하면 과거시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는 것은 조부와 부친 모두가 열망한 가문의 기나긴 숙원이었다.
그런 바람을 들어줄 수 있는 인재로 기대받았던 인재가 바로 동생인 김시신 그 녀석.
구도장원공이라는 율곡선생의 일화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천재적인 두뇌를 어렸을 적부터 뽐내지 않았던가.
자신도 그런 가문의 숙원을 알기에 부디 그녀석이 가문을 빛내 주기를 바랐건만, 그래서 그 어린 녀석에게 기대했건만,
"왜, 왜! 나한테 이런 삶을 살라는 겁니까! 대체 왜!"
녀석은 그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8살이 되어야 비로소 배우기 시작한다는 소학(小學)을 6살 때 이미 뗀 녀석이었지만, 그 이후로 아무런 성취도 없었던 것이다.
녀석의 학문 수준은 시간이 멈춘 듯 정체되어, 남은 생애동안 6살 때의 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아무리 훈계해도, 김시민이 아무리 눈물로 호소해도 그때의 그 총명했던 녀석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망나니만이 남았을 뿐.
하지만 그녀석의 핏줄은 너무나도 달랐다.
26세쯤 되었으려나.
너무도 황당한 얘기지만 10살의 동생이 왜인 여자와 동침하여 얻었다는 조카의 나이는 김시민의 동생이 그와 2살 터울이라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출생년이 가정(嘉靖) 44년(1565년)일 테니 그쯤 되어 보였다.
동안인 모양인지 그보다 어려 보였지만 그거야 동생놈도 그러지 않았던가.
동생의 얼굴을 쏙 빼닮은 조카는 그 자질마저도 닮아 있었다.
"단 일주일만에 천자문도 다 못외우던 녀석이 문자(한자)를 배우고 소학을 익히다니."
고작 사람구실을 하게 되었다고만 박하게 평가했지만 그건 본심이 아니었다.
조카의 엄청난 학습능력에 가르치는 그 자신이 너무도 놀랐지만 조카가 교만해질까봐 차마 칭찬하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것.
혹여 저 빛나는 재능의 아이도 그 녀석을 따라 스스로 무너질까봐 두려워서.
조카의 재능은 실로 하늘에 닿아 있었고 일단 무력에서는 이미 독보적인 수준을 이룩한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적어도 이 조선에 저 아이의 적수는 없을 것이다.'
스스로 뛰어난 무장이자 용장으로 자부하는 김시민이지만 조카의 앞에서는 절대로 승리를 자신할 수 없었다.
아니 절대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십초지적이라도 되면 다행이겠지.
허공이라는 무(無)의 공간마저 뚫고 존재감을 뿜으며 전해지는 조카의 강맹한 기세를 무인의 감각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으니까.
비록 대련따윈 해보지도 않았지만 견적이 나왔다.
일신의 무력뿐만 아니라 쌓아가고 있는 그 공적과 인망 역시 산처럼 거대했다.
그 뛰어난 용력으로 왜적들을 쓸어버렸다는 위업도 자랑스러웠지만, 그 위업을 이룬 게 자신의 조카라는 점에서 조차의 공적이 자랑스러웠지만, 정말 자랑스러웠던 건 따로 있었다.
"나, 나으리께서 우리 장군님의 아저씨가 되시는 분입니까?"
조정의 무관에게 말을 건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백성들이 전하고 싶었던 것.
"여, 여기 목청(木淸)을 캐왔는데 부디 드셔 주십시오 나으리. 장군님께서 우릴 지켜주시고, 먹여주셔서 어찌나 고마운지 모릅니다요. 어떻게든 은혜를 값고 싶은데 한사코 거절하니 부디 나으리께서 받아 주십시오! 제발, 제발 부탁드립니다."
"..."
고마움이었다.
녀석의 아저씨(중부)라는 김시민 자신을 통해서라도 백성들은 조카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던 거다.
이 거제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 계룡산(鷄龍山)이라는데, 백성들에게 녀석은 산과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던 것.
산과 같은 인망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실패하고 무너져버린 아비의 핏줄.
그 못난 아비의 하룻밤 장난질로 잉태되어 이미 아비로부터 버려졌고, 태어나자마자 모친을 잃어 어미의 온기조차 받지 못하고 자라온 불쌍한 아이.
짐승같은 왜인들의 틈바구니에 던져져서도 그 근본을 잃지 않고 이렇게 잘 자라준 대견한 아이.
"반드시 우리 가문에서 품어야 한다."
조카가 가지지 못했던 친족의 따스한 품을 이제라도 내어줘야 한다는 가족으로서의 부채감과, 가문의 숙원을 이뤄주고 빛내줄 인재를 찾았다는 기대감에 말이다.
어쩌면 저 녀석이라면 가문의 바람을 이뤄줄 지도 모른다.
문과 중에서도 최종합격을 하여 관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증표인 홍패의 붉은 자태와, 조카 녀석이 항시 입고다닌다는 붉은 갑옷이 김시민의 머릿속에서 겹쳐졌다.
서얼이라 문과 응시가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그 어미의 출신이 왜인이라는 것 때문에 서얼에, 아니 얼자에 한없이 가까운 조카이지만 오히려 그점 때문에 길이 있었다.
조카의 친모가 지닌 신분은 외국인이라 사실상 공백상태이니 굳이 따지고 들면 양인인지 천인인지 애매한 구석이 많았고 그점을 들어 설득하면 될 것이다.
요즘 주상전하의 총애를 받고있는 저 녀석이라면, 탁월한 재능 덕분에 더 중용될 것이기 때문에 그 설득이 더욱 수월해 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한가지 더.
김시민은 아내인 서씨(徐氏)와의 결혼생활이 20년에 가까워 지는 데도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이제는 양자라도 들여야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내에 대한 미안함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자주 집을 비워 독수공방하게 만들었다는 원죄가 있기에, 그래서 더 자식이 안 들어선 것 같았기에 그녀에게 항상 미안한 김시민이었으니까.
양자같은 건, 자식같은 건 자신의 삶에서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저 훌륭하게 자라준 조카라면, 어쩌면.
김시민은 목천의 본가로 향하며 달리던 말에 박차를 가했다.
가문이 기다리던 아이가 돌아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
[이름 : 김주명]
[레벨 : 11(250/12,000)
[능력 : 힘 40(+10), 민첩 27(+10), 지능 28(+10)]
[기술 : 통솔(Lv2), 투척(Lv5), 검술(Lv13), 피아식별(Lv201)]
"미쳤지 미쳤어..."
아무리 봐도 주명은 스스로가 미친 선택을 한 것 같아 후회 막심이었다.
공부가 힘들었기로서니 그저 어떻게든 버텨내려는 다급한 마음에 지능 따위를 올리다니 말이다.
왜구를 토벌하며 지금까지 얻은 16,000의 포인트 덕에 3번의 레벨업이 가능했고 그로인해 얻은 6점의 능력치 포인트를 죄다 지능에 때려 박았던 것.
김시민의 무식하고 맹렬하게 사람을 때려잡아대는 가르침은 마치 맹장의 그것과 같아서 도무지 지능을 올리지 않고서는 그 불길을 피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나도 강화된 '조부'의 깡스펙 덕에 모든 능력치 상승 효과도 큰 기여를 했고.
20대 후반의 능력치가 인류라는 종의 극에 달한 정도의 수준이라고 봤을 때, 탈 인간급으로 오우거에 비견되는 힘을 제외하고도 이미 모든 능력치가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수준이었다.
거기다 인간의 레벨은 10레벨이 사실상의 만렙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 격도 탈인간을 완료했다.
수신(修身)은 완벽하니 이제 제가(齊家)를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자신이 일궈낸 세력을바라보는 주명의 표정은 본인의 상태창을 바라봤을 때의 똥씹은 표정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저 멀리 훈련소에서 훈련받고 있는 해병대가 무려 600명.
박살내버린 선박들을 제외하고 거둬들인 왜구들의 선박들을 더하면 참수리호까지 포함한 배가 무려 20척.
이제는 그의 상징이 되어버린 오니(鬼)의 깃발 아래 모여있는 저 세력들을 보며 내심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저 역사학도에 불과했던 평범한 직장인인 자신이 이런 대세력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것을.
'하지만 방심하면 안돼. 이제 시작이야.'
주명 개인의 무위가 하늘에 닿아있다 해도 그것은 고작 일신의 무위.
전술적 차원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무력으로 가져올 수 있더라도 전쟁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을 혼자서 다 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공손찬의 그 강력했던 당대 최강의 기병 백마의종이 전역을 넓게 가져간 원소의 전략에 전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다 소멸당해 결국 패배한 사례도 있지 않던가.
전술의 우위를 전략의 우위로 확대하기 위해서는 뒤를 받쳐줄 세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세계라는 장기판에서 보면 고작 이정도의 세력은 한줌의 의미도 되지 않는다.
수백만 병력을 뽑아내는 저 거대한 명나라는 물론, 히데요시와 선조같은 플레이어들이 가진 패는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주명 자신도 아직까지는 선조의 장기말이자 치적을 자랑할 장식품에 지나지 않던가.
다가오는 임진왜란이란 폭풍에서 뭔가를 하려면, 변수가 되려면 최소한의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런 주명의 눈에 거의 맨몸으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 같은 해병대원들의 모습이 들어와 눈살이 찌푸려졌다.
원래 훈도시라 해서 팬티바람으로 일본인들이 줄곳 돌아다니기도 한다지만 저렇게 뭔가를 덜렁거리며 다니는 모습은 아니지 않는가.
'저것들, 여자애 앞에서 뭐하는 짓거리들이야. 쯧.'
그것도 나미에 앞에서 말이다.
전신을 가리는 갑주를 갖춘 1기 해병대원의 늠름한 모습과 대비되는 저 허름한 모습을 언제까지 방치할 수는 없었다.
"다이쇼(대장), 전에 대마도에서 거래를 했던 그 사카이 상인이 왔습니다."
때마침 야마모토가 찾아와 군례를 올리며 거상이 당도했다 알리는 소리에 주명은 정말 적절한 타이밍에 상인이 와 주었다고 생각했다.
아마 600명을 무장시키는 갑주며 무기를 구하려면 엄청난 재물이 소요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든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player_gain_sugar'
[자원(설탕)을 5,000kg 획득합니다.(CP 1 소모)]
콘솔 명령어는 항상 답을 갖고있으니까.
설탕!
세종대왕의 어머니인 소헌왕후마저, 그 귀한 신분이자 원하는 건 다 먹을 수 있는 위치의 대비마마 마저 없어서 못 먹었던 게 바로 설탕이다.
그래서 세종이 모친의 기일 때마다 설탕을 올려두며 임종 전에 설탕이 없어 못 드린 것을 무척이나 슬퍼했다는 그것.
딱 봐도 엄청난 재물이 굴러올 것 같지 않은가?
어떤 웹소설에서는 설탕을 재배하여 재물을 모으기도 하던데, 주명은 재배할 필요도 없이 소환만 하면 끝이니 참으로 편리함의 끝판왕이 콘솔 명령어라 하겠다.
설탕쯤 되면 무구값을 못 댈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그걸 사고도 남을 것 같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걱정해야 할 지경이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쌀 수도 있는 이 설탕이란 엄청난 자원에 비하면 무구는 껌값이나 다름없다.
설탕이면 해병대원들을 충분히 완전무장 시킬 수 있을 것.
세력이 작다고? 지금 가진 세력을 더 폭력적으로 만들면 그만이다.
사극에서 보면 모든 병력이 광나는 두정갑을 갖추고 번뜩이는 환도로 무장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천쪼가리 갑옷도 쥐어주는 이 가난한 시대에 철갑옷으로 완전무장한 600의 병력이라.
아주 양떼 사이의 사자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