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6화 - 세력(勢力)(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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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 때 사량진 왜변이 일어난 결과로 생긴 정미약조(丁未約條)로 인해 가덕도 서쪽에 도착하는 자는 적왜(賊倭)로 규정하게 되었다.
그러니 상인들의 도시 사카이에서도 이름난 거상이자, 일본국의 해운을 통한 물류운송의 큰 손이라할 수 있는 거물 카와무라 하야타카라 할 지라도 대놓고 주명이 있는 거제도를 방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주명이 왜구들을 상대로 초계활동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착안하여, 일부러 '붙들릴' 왜구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손에 편지를 쥐어주는 식으로 소통을 시도했고 그 소통의 결실로 오늘 주명과의 접견이 가능해진 것.
왜구들을 고용하는 불법적인 일을 하는데서 오는 위험, 또 왜구 놈들에게 쥐어줘야할 엄청난 재물.
그것들을 감수하고 또 소모하고서라도 하야타카는 주명이란 자와 거래를 트고 싶었다.
"이걸 다 산다는말씀이십니까?"
"물론. 네가 말한 그 가격대로 바로 지불하지."
협박도, 흥정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그따위 푼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그깟 돈 벗겨먹혀도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바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절대로 푼돈이 아니었다.
그 푼돈 덕분에 오판으로 재고가 쌓여 자금흐름이 막히는 등 위기에 처해있던 자신이 다시 재기할 수 있지 않았던가.
'저자는 용이다.'
마치 하늘에서 노니는 거대한 용이 지상의 낙엽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듯한 그자의 큰 배포를 보면서 하야타카는 확신했다.
반드시 이자에게 선을 대야 한다고.
일본국이 조선과의 전쟁을 준비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던가.
고작 무구만 팔 뿐인 상행이 무슨 이적행위인 것도 아니고, 또 상인이 돈을 쫒아야지 국적을 쫒아서야 되겠는가.
이번에 만나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당장의 거래도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자와 장기적인 거래를 가져갈 수 있는 관계를 구축하는 것.
그자를 만나기 위해 바닷가에 버린 돈은 우습다 느껴질 정도로 그와의 이번 거래에서도 큰 거래를 얻을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일이 잘 풀려 장기적인 거래를 가져갈 수만 있다면 일본 제일의 거상이 되는 것도 꿈이 아니리라.
***
"관송(觀松) 형님, 정말 보고를 하지 않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국법에서 금한 왜국과의 밀거래, 또한 더욱 엄격히 금하고 있는 무기의 거래를 도모하려는 자신의 행동을 알면서도 눈감아주고 있는 이이첨이 주명은 너무도 고마웠다.
아무리 같이 일하게 되면서 술도 마시고, 같이 밥도 먹고, 심지어 전투에도 같이 나가게 되는 통에 결국 형동생 하는 사이로 무척 친해졌다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친 호의였다.
"주상께서 전례를 깨고 스스로 무장할 수 있는 권한을 내어주시지 않았던가. 이 나라의 무관인 초관(哨官)이 나라를 위해 사비를 들여 무장을 한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가 될게 있나?"
선조가 국뽕에 취해 쥐어준 권한이란 건 사병을 병적으로 엄금하는 조선의 분위기를 깨고 기존에 주명을 따르던 병력들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유지해 준다는 것이었다.
대신 그 대가인지, 재정문재로 악화된 군사력으로인해 공백지에 가깝게 변해버려 왜구들이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는 바다에 대한 초계활동을 임무로 내려주긴 했다.
병력수야 원래 자신의 부하였던 자들이 돌아온거라 뻥을 치면 어떻게든 넘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 병력들의 무기나 갑옷을 추가로 장만하여 전력을 높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선조는 외국과의 교역을 허가한 적이 없으니 상부에 보고가 된다면 매우 큰 문젯거리가 될 사안이였다.
아무리 수도와 거리가 멀고 숫자도 미미하다지만 무장병력이 활보하게 놔둔다는 것은 반란을 걱정하는 중앙에서는 극도로 경계할 사안이었으니까.
"동생도 알다시피 내가 좀 반골 기질이 있지. 절대로 군자가 될 위인은 못돼."
그가 유명한 간신이 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차마 그대로 긍정할 수는 없어 주명은 그저 머뭇거리면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정도가 아님을 알면서도 마음속의 그 충동때문에 결국 걷고 싶어하고, 그렇게 스스로를 책망해 가면서 그 길로 나아가면 너무나도 재미있었지. 마치..."
이이첨은 유교가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상에서 엄청난 치부가 될 수 있는 사실을 훤히 드러내 보였음에도 오히려 후련한 듯 보였다.
"그 길이 나의 진짜 길이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 말을 고백하는 이이첨의 말은 후련함과 함께 아쉬움이 진하게 배여 있었다.
"사림들이, 그래 저 군자들이 지배하는 이 나라에서 나의 길은 없다는 것도 잘 알았지. 저들에게 난 김일손이라는 군자를 죽인 소인배의 핏줄일 뿐이니 그 낙인이 어디 가겠는가."
그가 이극돈의 후손이라는 것 때문에 사림들로부터 얼마나 배척을 받았는지 배워서 알고, 들어서 아는 주명이었기에 그런 그의 말에 안쓰러웠다.
"그래서 저들이 날 이곳에 보낸 게 아니겠는가. 짐승같은 왜인을 상대하는 데에는 소인배의 후손이 어울린다고."
"형님이 왜 소인배입니까?! 아녜요, 아니라고요! 형님같은 참 선비가 어디 있답니까. 형님이 아니었으면 굶어죽었을 유민이 몇이며, 또 형님이 물을 맥인 탐관오리가 몇이랍니까. 저는 형님이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이었다.
아직은 열혈 청년의 기질이 남아있던 이이첨은 주명을 접하고 그런 면모가 더 강해졌는지 넘치는 의기를 지니고 이곳저곳을 들쑤시며 사람을 구하고 탐관오리와 아전들의 비리를 탄핵하고 다녔던 것.
사실과는 별개로 어떻게든 자신을 변호해 주려 하는 주명의 마음이 와 닿았는지 이이첨은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꼈고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인배 맞네.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군자따윈 될 생각도 없고. 끄딴 거는 저 사림 놈들이나 실컷 되라지. 이름난 스승만 잘 만나면 뒤로는 뭔 짓을 해도 잘난 이름값 덕에 칭송받는 빌어먹을 군자따윈 필요 없어."
"형님.."
"허나 선비는 될 수 있을 것 같았네. 군자든 소인배든 결국 지향하는 바는 백성을 보듬고 지키는 사대부(선비)가 아니던가?"
어떤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인격적으로 흠결이 없는 군자라는 허울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백성을 위하는 위정자이자 정치가인 선비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었다.
"동생 덕분이네."
"형님은 이미 진작부터 선비셨습니다. 그게 어찌 제 덕분입니까?"
갑자기 이이첨이 주명에게 따라오라 손짓한 후 등을 돌려 어디론가 향하자 주명은 당황했지만 이 상황에서 선택지가 있을 리가.
주명은 군말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한 아늑하게 생긴 초가집이었다.
최근에 만들어진 것인지 정겨운 흙냄새가 묻어있는 벽은 매끄러웠고, 싱그러운 풀냄새가 나는 풀로 덮여있는 지붕은 포근한 느낌을 자아내었다.
"어? 나으리!"
총명하게 생긴 한 아이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한 아이가 이이첨에게 다가와 꾸벅하며 인사를 올렸다.
한참을 재잘대던 아이에게 덕담과 격려를 해 준 뒤 이이첨은 그 초가집 옆에 햇볕이 잘 드는 공터에 심어져 있는 작은 소나무 묘목을 가리켰다.
"내 호가 관송(觀松)이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주 어렸을 적에는 그 소나무가 되고 싶었지. 그 기개와 기상을 닮은 군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굳이 본다는 의미의 관(觀)을 붙인 것은 그때도 이미 소나무가 될 수는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모양이야. 내가 눈치 하나는 좋거든 하하하."
분명 웃음소리를 내는 이이첨이건만 그 안에는 감출 수 없는 씁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고향 근처 청주에 신항서원(莘巷書院)이라는 곳이 있었지. 율곡선생과 목은(이색) 선생을 기리며 받드는 곳이었는데, 처음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서원에 들어가려 한 그 첫날에 소인배 집안의 자식이라며 놈들에게 문전박대 당했지."
"...!"
"그 서원 안의 소나무가, 닿을 수 없었던 그것이 어찌나 푸르고 곧아 보이던지 계속 기억에 남았어. 그래서..."
이이첨의 눈빛이 돌변하여 분노를, 울분을 담았다.
"이 치욕을 반드시 기억겠다는 의미에서 지었네. 또 빌어먹을 잘난 소나무가 불타는 꼴을 보고싶다는 뜻도 있었고. 그래, 내 호는 와신상담의 의미였던 거지."
"형님. 그건 그놈들이 소인배라..."
다시 평온을 찾은 눈으로, 따뜻해진 눈으로 이이첨은 공터에 있는 작은 소나무를 가리켰다.
"내 호가 관송이라고 하니 저 어린 녀석이 공터에 소나무를 심어 주었네. 아비와 자신을 탐욕스러운 아전의 손에서 구해줬다는 그 이유로 말이야."
"그들을 구해준 건, 동생에게만 고백하건데 사실 내 자기만족이었네. 그저, 그 잘난체하는 사림놈들처럼 정의를 구현하는 깨끗하고 고결한 무언가가 되어보고 싶었거든. 또 동생처럼 영웅같은 일을 해보고 싶었거든. 하하하...그래 소인배의 치기어린 오지랍이었을 뿐이었어."
"하지만, 그런 소인배다운, 어찌보면 나다운 짓을 했는데도 결과는 백성의 생명을 구했고 또 저 소나무를 얻었지. 저 소나무를, 저 나무를 뭐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아이가 소개했는지 아는가? 선비 나으리 나무라고 했네."
물기가 묻은 이이첨의 목소리에 주명은 내색할 수가 없어, 그저 이이첨의 손이 가리키는 대로 물끄러미 소나무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같은 소인배도, 올곧지 못한 기질을 지닌 나같은 놈도 선비가 될 수 있음을 그때 깨달았네."
다시 마주친 이이첨의 눈에는 큰 뿌듯함과 확신에 찬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동생 덕분이야. 동생이 내게 백성을 구하고 위하는 인망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난 아이를 구하려 나설 생각도 못 했을 걸세. 또 동생이 이들을 보살펴준 덕분에 난 적어도 한 아이의 마음 속에서는 선비가 되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정말로 고맙네."
고개까지 숙여가며 고마움을 표하는 이이첨의 행동에 주명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그를 말렸다.
"이러지 마세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칭찬이 과하세요."
고개를 들어 주명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이첨의 눈은 뭔지모를 기대감과 즐거움에 빛나고 있었다.
"원래 나란 놈이 소인배인데, 나란 놈도 가야할 길보다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는게 재미있는 놈인데 어찌 동생에게 이래라 저라래 할 수 있겠나."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제는 웃음까지 지어가며 이이첨은 주명의 등을 두드렸다.
"어차피 동생이 칼을 거꾸로 쥐고 한양으로 달려갈 일이 없는이상 밀무역을 하든 병력을 늘리고 무장을 하든 내가 어찌 뭐라할 수 있겠나. 마음껏 동생 하고싶은대로 하시게."
그러더니 눈을 찡긋하며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이 형이 이래봬도 장계 하나는 기가막히게 잘 쓰거든. 누가 봐도 문제가 없도록 잘 꾸며쓰는건 내가 제일이야 크하하하."
***
-신 참봉 이이첨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상소하옵니다.-
-초관 김주명은 왜국의 장기(나가사키)란 곳에서 일전에 큰 사달을 일으켰던바 그 목숨을 노리고 쫒는 이가 많사옵니다. 스스로 원수가 사방에 가득함을 염려하여 두려움에 떨던 차에 전하의 큰 위세와 밝은 덕에 이끌려 귀부한 것이오니 전하의 하해와 같은 아량이 없다면 이미 죽은 목숨입니다.-
붓을 들면서도 스스로 기가 막혔는지 무릎을 탁 치는 이이첨이었다.
"이러면 전하의 의심과 병력에 대한 문제는 해결했고!"
눈치가 빠른 간신 후보자 답게 그는 선조를 너무도 잘 알았다.
일단 반란에 대한 걱정 문제는 일단락 되는 것이, 저렇게 적이 많다고 적어 놓으면 분명 주명이 반심을 품을 여유가 없을 거라고 볼 거니까.
결정적으로, 그 작자는 자신이 목줄을 쥐고 있다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을 좋아하는 자이니 "전하 없으면 얘 죽어요. 적이 너무 많거든요."라는 내용의 장계를 보면 안타까워 하는 척은 하면서도 무척이나 맘에 들어할 것이다.
"얘 죽으면 안되니 병력 키우는 거 따로 말 안해도 오케이?"라는 말을 붙여볼 수 있는 것.
또한 귀화로 인한 국뽕의 단물이 빠져가는 상황에서 쓰는 수단은 선조 특유의 비틀린 감정을 이용하는 것인데, 잘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보다는 저보다 못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보고 상대적 우월감과 안도감을 느끼는 그자의 옹졸함을 이이첨은 파악하고 있었다.
아비의 나라를 찾아 용기있게 건너오고, 아비의 나라를 지켜주는 의인에서,
적들에게 쫒겨 두려움이 가득한 채로 도망오고, 살 방도를 궁리하기 위해 나라에 매달리는 겁쟁이로.
그런 극적인 추락을, 실상을 발견하면 속좁고 가학적인 성향의 선조는 매우 만족할 것이다.
-정해년에 맺은 약조에도 불구하고 상국(명나라)에 어떻게든 입조하여 문명의 밝은 혜택을 누리기 위해 가덕도 서쪽을 오가는 왜인들의 무리가 있어 차마 해를 가하지 못하고 다시 왜국으로 돌려보내고 있습니다.-
"이러면 밀무역도 아무 탈이 없겠지."
국뽕을 한번 이용했다면 이제 사대주의를 이용할 때다.
명나라 덕에 종계번무 문제를 해결한 선조나, 명나라가 세상의 전부인 사림들이 그 명나라에 입조하려 한다는 배들을 나포하거나 공격할 수 있을리가 없지.
뭐 배들에 물건이 가득 실려있다가도 그게 돌아갈 때는 없어진다거나 아니면 다른 물건이 실려있게 된다거나 하는 건 아주, 아주 소소한 문제겠지.
***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
안타깝다고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용포를 입고있는 그의 입가는 기괴하게 위로 말려 올라가 있었다.
"적이 그렇게 많다면야 그저 그자리에서 버티는 것도 벅차겠지. 뭐 순수하게 조선에 감화되어 찾아왔다는 것도 웃긴 소리였지만. 어쨌든 최소한 무도한 짓거리를 할 수가 없을 것이야."
그리고 누군가의 설계에서 놀아난다는 것도 모른채 기쁜 마음으로 알아서 설계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병력을 크게 늘리고 무장을 갖추라고 오히려 독려해야겠군. 너무 빨리 사라지면 안되는 패이니."
장계의 하단부를 향하는 그의 눈에는 곤란함이 내비쳤다.
"어허, 상국이 왜인들을 멀리하고 있다만 혹여 마음이 바뀌어 저들의 입조를 허락하려 한다면 큰 문제가 되겠군. 번국으로서 상국에 대한 사대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
생각을 마친 그 사내는 결단을 내린 듯 밖을 향해 특유의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여봐라! 게 있느냐? 경상도의 각 수영에 하달할 교서(敎旨)를 작성해야 겠다. 도승지를 들라 이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