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38화 (38/77)

〈 38화 〉 37화 - 세력(勢力)(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하야타카의 의뢰를 맡아 끝마친 운 좋은 왜구의 이름은 조선의 어떤 왕 묘호와도 같은 선조(宣祖)는 아니고 왠지 누구의 이름과 닮은 것 같은 신조(晋三)였다.

아베(安倍)라는 성을 가지면 뭔가 더 잘어울릴 것 같은 분위기의 이름을 지녔으나 아쉽게도 평민 출신인지라 성 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이 오른 너구리같이 생긴 신조는 해병대 훈련소의 목책 안에 마련된 넓은 공터에 걸터앉아 목책 밖으로 보이는 하늘을 물끄러비 바라보고 있었다.

"아씨. 빨리 돌아가고 싶다."

이미 의뢰주로부터 두둑한 대가를 받았기 때문에 그 돈을 쓰기 위해서라도 빨리 풀려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중.

풀려나기만 한다면 하야타카로부터 받은 돈으로 사람들을 모아 보다 본격적으로 해적질을 할 생각이었다.

"후미오(文雄)란 놈에게도 연락해서 해적단을 꾸며야지."

성향이 비슷했던 친구의 이름이 떠오르고, 친구와 노닐었던 언덕에 큰 밭이 있는 고향마을 생각에 잠시 회상에 잠기는 신조(晋三).

어찌 왜구따위를 풀어주냐 하겠지만 이놈은 조금 사정이 달랐다.

비록 왜구라고 하지만 애초부터 약탈의 의도를 지니고 쳐들어온 놈이 아니라는 것을 그가 전한 하야타카의 서신을 받고 알았기 때문인지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며 곧 풀어준다고 약속했던 것.

대신 왜구를 완전히 믿을수는 없으니 풀어주기 전까지 지금처럼 훈련소 내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너, 근데 좀 빨갛다? 에이 그냥 놔주지 뭐."

피아식별 스킬의 힘으로 저놈이 문제를 일으킬 것 같다는 건 진작에 알았지만 어차피 별로 중요해 보이는 놈도 아니고 놈에게 의뢰를 한 하야타카의 체면을 생각해서 이번만은 살려준 것.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뻔 했다는 것을 모르는지 신조의 얼굴에는 답답함과 짜증으로 그득했다.

"빨리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다지만 여긴 너무 답답해."

이 훈련소란 처음 들어보는 해괴한 이름의 장소.

높다란 나무기둥같은 목책들이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어 마치 감옥같은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곳은 어제 처음왔을 때부터 신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훈련소의 훈련병들이 유격훈련이라는 것을 받을 때엔, 이대로 그냥 가만히 억류되어 있는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리가 땅에 닿는다! 다시 2회 추가!"

"아악!"

저 보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유격훈련과, 그 훈련에 꼭 포함되는 정말 개같이 힘들어 보이는 괴상한 체조를 안 받을 수 있어서.

"본 교관은 너희 훈련병들에게 실망했다. 니들이 이러고도 해병이야?!"

실망했다는 말을 달고사는 붉은 갑옷을 입은 교관들을 보며 저딴 훈련을 받는 놈들이 오히려 더 절망한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정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훈련병이란 놈들은 정말 개같이 구르고 있었다.

'이제 끝났나 보군.'

훈련 후 녹초가 되어버린 훈련병들에게 신조는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훈련병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그를 없는사람 취급했고 대꾸를 하지 않은채 저들끼리 불만을 떠들고 있었다.

원래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대충 눈치를 파악하는 데는 도가 텄기에 신조는 저들이 자신을 따돌리는 이유정도는 금방 파악하고 있었다.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는거지.'

어차피 다 같은 일본인이고 다 같은 해적출신인데 동료가 아닐게 무언가라고 울컥하며 말하고 싶었지만, 교관들이 훈련병이라고 부르는 저놈들은 되지도 않은 조선어도 가끔 섞어가며 절대로 신조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오 '씨양'!, '씨블것'. 빌어먹을 '이여트'같은 8번자세 때문에 뒤지겠네!"

"저 교관은 하루에도 몇번씩 '파루번' 자세만 시켜대는거야? 지가 8번 순번이라고 애착이라도 갖는거야 뭐야 '씨빨'! 순번 걸고 결투나 신청할까?"

"야, 넌 지난번에 그렇게 깨졌으면서 말도안되는 소리 마라. 그 히로시란 교관놈 보기와 달리 겁나 세다고! 괜히 8번인 게 아니라니까."

"그새끼 지가 8번이라고 계속 8번 자세만 시키는 거 아냐? 이런 씨발 온몸을 비틀어 버릴 새끼 같으니!"

교관이라 함은 1기 해병대원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빨간 모자를 쓰지는 않았지만 빨간 갑옷을 입으니 마치 현대에 있었을 적 군대에서 봤던 교관이 연상되어 주명이 교관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면서 호칭이 굳어진 것.

'이런 게 이지메(イジメ)라는 건가?'

신조는 자신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으면서, 저들끼리는 온갖 격렬한 반응들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해병대 훈련병들의 모습이 자신을 대놓고 따돌리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또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특히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거는 저렇게 훈련 욕을 하면서도 막상 훈련할 때는 너무도 지나치게 열심히 참여한다는 거였다.

마치 동료보다 한발짝이라도 더 앞서 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뭐 경쟁이라도 붙었나보지.'

저희들끼리의 요상한 경쟁심을 불태우는 녀석들을 보며 신조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적들 하면 독기 가득한 깡다구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 반항심이 있어야 할텐데, 녀석들을 보기 있자니 그 늑대같은 해적들의 모습이 아니라 마치 길들여진 개새끼들처럼 굴고 있는 것 같아서.

저렇게 교관 욕을 해대는 것도 개가 주인이 하라는 데로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발랑 엎어져 헉헉대는 모습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던 것이다.

평소 신조는 바다를 누비는 자신과 같은 해적이야 말로 일본의 야마토혼(大和魂)의 이상을 가장 잘 따르는 사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해적이야말로 진정한 일본인인 것.

'저놈들은 이제 일본인이라고 할 수 없어!'

물론 그 생각에 자신을 왕따시키는 녀석들에 대한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어쨌든 녀석들의 그런 해적물이 빠진 나약해진 모습들을 지켜보며 신조는 역시 제안을 거절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해병대에 들어오게. 이곳에 진짜 삶이 있네."

야마모토란 노땅이 어젯밤 찾아와 자신에게 던진 제안.

비록 생각이 더 필요하다며 거절 비스무리하게 말을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해병대 훈련병들의 저런 개같이 훈련받는 모습과 또 정말 개처럼 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자꾸 올라왔다.

'이딴게 진짜 삶은 개뿔. 바다를 누비며 칼을 물고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해적의 삶이 진짜지!"

자유롭게 마음먹은대로 살아가는 해적의 삶을 동경하는 그로서는 절대로 그런 삶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스스로의 선택을 합리화하던 신조(晋三)의 눈에 웬 아낙들 여럿이 훈련소로 들어와 녀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그녀들이 머리에 이고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떡의 모습을 본 훈련병들은 환호했고, 연신 아낙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떡을 받아먹고 있었다.

이미 익숙한 일인지 아낙들도 훈련병들의 그런 모습에 까르르 웃으며 푸짐하게 챙겨온 떡을 나눠주는 모습은 무척이나 평화로워 보였지만 신조의 눈에는 매우 불쾌한 광경이었다.

'마치 개밥그릇에 던져진 먹이를 보고 좋아하는 개새끼들의 모습들이 아닌가. 저딴 것들이 한때 해적이었다니!'

해적은 가로막는 것은 뭐든지 베어버리고 가지고 싶은 것은 뭐든지 빼앗는 바다의 진정한 사나이들이자 늑대들.

해적은 저리해서는 아니된다.

해적이었다면 떡을 약탈하고 반반해 보이는 저 아낙들은 모조리 겁탈했어야 했다.

그런데 저 배밑에 깔려 헐떡여야 할 고작 계집들에게 그저 밥을 준다며 머릴 조아리는 저딴 놈들이 어찌 해적이란 말인가!

울컥한 마음에 마음속 말을 그대로 내뱉어 버렸다.

"개새끼들이 다 되었구만. 칼로 빼앗는게 해적의 숙명인데 개새끼들처럼 꼬리나 치다니 크크크."

그가 던진 말에 식도락의을 즐기던 훈련병들의 즐거운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저년들도 꽤나 반반한데 쩝. 아쉽네. 내가 칼만 있었으면 다 따먹어 버리는 건데."

훈련병들이 먹고 있는 떡이 우수수 떨어졌다.

일그러진 표정과 이글거리는 눈으로 신조의 주위로 다가가며 에워싸는 훈련병들.

"왜 다들 죄다 몰려와 지랄인데? 병신들. 개새끼들이니까 개떼처럼 몰려다니는 꼬라지 하고는."

하지만 훈련병들 중에서도 가장 큰 덩치를 지닌 대원 하나가 그의 멱살을 잡아 올리면서 지껄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 뭐라고 지껄였냐? 저분들을 뭐 어쩐다고?"

"계집년에게 같잖은 존칭은 무슨."

"우리에게 떡을 주려고 고생하신 분들인데 그딴 식으로 말하지마!"

덩치 대원은 신조를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 오니라 불리는 무서운 주인이 내어 준 쌀로 만든 거라지만, 그저 보수를 받고 그러는 거라지만 그건 저 여인들과 주인 사이의 일이지 않던가.

저 여인들과 자신들 사이에서는 그저 떡을 짓어 가져다준 그녀들의 정성만이 남는 것이다.

그런 거래관계를 빼고 본다면, 적어도 그녀들이 해준 떡을 맛있게 먹는 자신들은 여인들에게 감사해야 함이 마땅했다.

힘들게 떡을 만들어 자신들에게 나눠주는 저 여인들의 노고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어찌 그딴 식으로 말을 하는가.

그런 고마움을 떠나서 이 훈련소에서 생활을 하게 되면서 깨어난 마음속의 어떤 마음 때문에 그녀와 같은 조선인들에 대한 부채의식이 생겨나 그 망발을 듣고 참지 못했던 것.

여인들이 일본어를 못 알아들었기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덩치 대원은 너무 부끄러워 그녀들에게 고개를 들고 다니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집을 위해 나선 것으로 보이는 덩치의 태도가 더 신조의 속을 긁어 버렸다.

"지랄 육갑을 떠네. 저년들이 고생한 게 무슨 상관이야. 해적이 농부의 쌀을 고개숙이며 빼앗디? 계집의 치마를 허락받고 들추디? 마음에 들면 빼앗고 따먹고 하는거지.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 게 우리 해적들 아니냐고!"

힘의 현격한 차이 때문에 비록 멱살은 붙들렸지만 해적질을 하던 깡다구는 어디 안가는지 그럼에도 계속해서 하고싶은 말을 지껄이는 신조.

"안그래?! 니들이 해적이지 그럼 뭐야. 밥이야 잘 먹여준다고 하지만 저새끼들이, 하다못해 저년들이 우릴 사람으로 봐줄 것 같아? 일본인들을 짐승으로 생각하는 저 조선놈들이? 지랄같은 소리. 해병대라고 불러주니 니들이 정말 군대라도 된 거 같냐구?!"

하지만 주변 훈련병들의 죽일 놈을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들이 계속해서늘어나자 신조는 점점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놈의 주변으로 모여든 모든 훈련병들의 머릿속에는 군체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매일 밥때마다 자신들에게 음식을 하러 와주는 이 섬의 아낙들의 모습이 똑같이 떠올랐다.

자신들이 이땅에 무슨 짓을 해왔는지, 하려 왔는지를 알면서도 그녀들의 태도 역시 푸근하고 정감이 넘쳤다.

"뭐하는 기꼬? 밥심으로 사는 거 아이가. 퍼뜩 와서 묵나."

훈련이 힘들어 보인다며 웃는 얼굴과 정감 넘치는 말로 자신들에게 밥을 퍼주었고 힘든 훈련이 있을 때마다 떡을 지어 전해주었다.

푸근한 얼굴의 그녀들이 행하는 마음 따뜻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보면서 훈련병들은 고향에 두고온 어머니나 누이가 괜시리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 경험은 해적의 삶을 살아온 그들이 잃어버리고 있던 사람으로서의 양심을 다시 불러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어린 소년들이 놀러와 피치못하게 그녀석들과 벌였던 눈싸움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을 주었다.

"해병대 아저씨 짱이야!"

"어, 아직은 해병이 아니므니다."

"그래두여! 결국 해병이 될 거 아녜요! 나도 아처씨처럼 해병 될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동심으로 돌아가는 경험을 하면서 마치 예전의 인간이었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해적의 삶에 낭만이 없다는 것은 긍정과 부정이 반반이었지만, 적어도 그 삶에 의미나 보람따위는 없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굶주림과 고달픔.

광기어린 욕망에 휩싸여 누군가를 죽이고 누군가를 겁탈하고 누군가의 것을 빼앗았지만 그 이후에 반드시 찾아오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인륜을 저버린 행동을 하면서부터 점점 인간의 마음과는 점점 멀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했으니 그런 허무함과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런 허무하고 굶주린 삶이 바로 신조가 말하는 늑대의 삶이자 해적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훈련이 힘들긴 했지만 항상 배가 불렀다.

원망섞인 눈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느샌가 사람들은 자신들을 한명의 인간으로 대해주고 있었다.

어렸을 적 경험하고서는 해적의 길로 들어선 뒤 다시는 갖지 못할 것 같던 그 따스함을 여기서 잠시나마 맛보게 되었는데 인간의 탈을 쓴 그딴 늑대의 삶으로 누가 돌아가고 싶을까.

신조가 옳다고 말하는 늑대의 삶에 대한 반감과 신조가 지껄이는 말에 대한 반감에 훈련병들의 분노는 불길처럼 타올랐다.

"미친새끼가 뭐? 여자를 뭐 어쩐다고? 죽고 싶냐?"

"씨발, 야! 저새끼 죽여버려! 목을 꺾어 버리라고!"

신조는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눈알을 뒤룩뒤룩 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떡을 이고 온 아낙들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겁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들을 마치 호위하듯이 훈련병들이 가로막고 있어 인질로 삼는다는 수작질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뭐 이미 목이 붙들려 있어 뭔 수작도 통하지 않겠지만.

"크억. 컥."

그러는 순간에도 목에 가해지는 힘은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목을 꺾어버리라는 동료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덩치 큰 훈련병이 눈을 이글거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려고 하던 찰나.

"이게 뭐하는 짓인가!"

때마침 훈련소로 들어오던 해병대의 최고참이자 1번 순번의 정규 해병대원 야마모토가 그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그의 위엄서린 목소리에 그런 일촉즉발의 갈등 상황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덩치는 신조의 목을 쥔 손에 힘을 풀었고 다른 대원들은 눈을 땅바닥으로 내리 깔며 신조에게서 물러섰다.

'1번'의 위엄이 돋보이는 광경이었다.

주명은 왜구들의 기초체력이 어느정도 갖춰지자 실력 향상을 독려하고 무료한 훈련생활에 활력소 비슷한 걸 주고자 일종의 랭킹 시스템인 '순번제'를 도입했다.

저명한 무인을 입회자로 둔 가운데 대련을 통해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고 우열을 나누어 번호를 매긴다는 것.

"이거 상당히 재미있는 제도로군!"

물론 그 저명한 무인의 역할을 역할을 주로 율포의 권관인 이영남이 해왔던 덕분인지 왜구들도 자주 마주치게 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왜국 출신이라 결투에 대한 문화가 있었던 해병대 훈련병들은 그런 제도에 좋아라하고 미친듯이 반응하며 대련을 해댔고 금세 랭킹, 그러니까 순번이 매겨지게 되었다.

고된 훈련에 불만이 쌓여가고는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배출되지 않은 건 그들이 미친듯이 순번을 올리는데 집착해서였다.

이영남이 제지하지 않았다면 하루에도 몇명 죽어나갔을 정도로 그 열기는 뜨거웠기 때문.

20인의 1기 해병대원들도 그런 랭킹에서 예외는 아니었는데, 훈련기간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나미에의 고급검술 지도 덕분인지 20인 모두가 최상위 순번을 다들 한자리씩 차지할 수 있었다.

주명이 정한대로라면 강함의 순서대로 앞번호부터 차지하게 되는 게 바로 순번이며, 그 순번을 1번부터 20번까지 1기 해병대원들이 차지한 것.

대망의 1번이자 최강자는 바로 전직 무사출신이고 경험도 많은 야마모토였다.

비록 피를 보기를 무서워한다는 결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왠일인지 언제부턴가 그런 소문이 쏙 들어갈 정도로 큰 활약을 하기 시작했고, 검술 자체는 그 전부터 원래 뛰어났던 자이기 때문에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

그래서 1번이라는 상징성 때문에 평소에도 다들 그를 어려워하고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가 붉게 칠한 갑주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왜구 출신 훈련병들은 마치 사무라이를 보는 것 같은 위압감을 느꼈을 정도.

다른 1기 해병대원들과 마찬가지로 항시 입고있는 게 저 붉은 갑옷이었지만 야마모토는 왠지 더 특별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치워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바로 파악한 야마모토는 턱짓으로 신조란 놈을 끌어내라고 지시했고, 신도는 야마모토를 뒤따라온 다른 해병대원들에 붙들려 질질 끌려나가야 했다.

"이 짐승같은 새끼!"

놈을 끌고가는 1기 해병대원들의 손아귀 힘이 감정이 섞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세서 끌고가는 내내 신조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질 정도였다.

급히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에 그쯤에서 불순분자에 대한 처결을 마무리한 야마모토는 모여있는 훈련병들을 바라보며 본론을 꺼냈다.

"전 대원들은 순번대로 줄을 서라. 무구를 지급할 것이다!"

그가 꺼낸 본론은 바로 무기와 갑옷을 지급한다는 것.

야마모토 본인도 입고있는 이 갑옷은 해병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고 일종의 군복이라고 봐야 했다.

그 군복의 의미를 지닌 갑옷을 내린다는 것은 주군께서 녀석들을 인정했다는 의미.

야마모토는 그 사실을 알기에 감개가 무량했다.

3개월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녀석들은 무척이나 힘겨운 훈련과 해상 초계활동에 동원되는 실전을 겪는 등 갖은 고생을 해왔다.

뭐 실전이라고 해봐야 초계활동에 나가는 배의 노를 잡은 것밖에 없지만.

저놈들의 죄가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주인은 쉬이 저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전격적으로 갑옷을 내려준 행동은 부하로 인정한다는 믿음과 함께 지금껏 지은 죄를 전투에서 갚으라며 기회를 주시려는 것 같았다.

'녀석들. 축하한다.'

600명의 훈련병들이 해병대원이 되어 주명의 부하로 인정받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그들에 대한 훈련을 총괄했던 야마모토는 마음속으로 녀석들에게 축하를 건넸다.

강하고 또 강한 자신의 주인의 깃발아래 같이 설 수있는 영광을 얻었으니까.

그 의미를 몰라 잠시동안의 멍하니 가만히 서있는 훈련병들이 만들어낸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예?! 무구를 준다니요? 무구라고 하면 갑옷도 포함된 것입니까요?"

사무라이도 아니고 고작 병사들에게 무구를 나눠준다는 얘기는 머리털 나고 들어본적 없었던 한 대원이 도저히 못참겠었는지 질문을 했다.

일본에서도 농민들은 평소 농사를 짓다가 소집령이 떨어지면 각자 마련해 놓은 무기와 갑옷을 들고 모여야 했다.

하지만 농민들의 살림살이가 풍족할 리 없으므로 무기라도 제대로 있으면 다행이었고 갑옷은 언감생심 절대 쳐다보지도 못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갑옷까지 지급받는 것은 최소 하급무사인 아시가루는 되어야 했고, 그마저도 질이 떨어지는 갑옷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이는 야마모토의 모습.

그리고 수레에 가득 담겨 들어오고 있는 햇빛에 눈부시게 빛나는 철로된 갑주들을 손으로 가리키는 모습.

너무 기뻐서 죽을 지경이었다.

마치 사무라이들이나 입을 것 같은 엄청난 갑옷이 아니던가.

거기다 갑옷의 모양이나 규격이 야마모토가 입고있는 붉은 갑옷과 다르지 않으니, 평소 1기 해병대원들이 입고있는 갑옷을 선망했던 저들로서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갑옷도 없는 니놈들이 무슨 해병이야?! 니들은 훈련병이야!'

1기 해병대원들의 곤조 탓인지 갑옷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혹시 스스로 해병이라고 했다가 그들로부터 뒤지게 얻어맞았던 적이 다들 한두번씩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쁨이 컸다.

그 기쁨에는 이제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믿음을 받았다는 데 대한 고마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녀석들에게 믿음을 주던 안 주던 홀로 능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던 주명에겐 그저 상인이 지금에서야 도착했다는 이유로 무기와 갑옷을 늦게 지급한 것 뿐이었지만.

그래서 지금까지는 1기 대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무를 깎아 만든 목검이나 목창으로 대련이든 훈련이든 해 왔었던 것이다.

수레에 가져온 물건 중에는 날선 병장기가 그 뛰어난 품질을 뽐내고 있었지만 갑옷에 묻혀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은 저 후광이 나는 것 같은 멋드러진 갑옷에만 죄다 쏠려 있었다.

"무구를 다 갖춰 입은 자들은 모두 순서대로 6열 종대를 이룬다!"

모두의 이목이 갑옷에 집중된 것을 확인한 야마모토는 주어지는 무구를 착용한 뒤 도열할 것을 명령했다.

나미에란 무사는 훈련병들이 보기에도 실력이 출중했고, 더 존경스러운 것은 딱 한번의 동작만 보고도 자신들에게 맞는 무기가 무엇인지 바로 짚어주는 그 능력이었다.

나미에란 교관에 대한 신뢰가 너무도 컸기에 훈련병들은 무기르 뭘 고를까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러준 무기를 순서대로 집었을 뿐.

'어서 빨리 갑옷입고 싶다!'

무구에 대한 열망이 평소에도 컸던 그들은 순식간에 완전무장을 한 채로 야마모토의 지시에 따라 도열했다.

"우리의 주인께서 갑옷을 너희에게 내리셨다. 이 갑옷의 가치를 모르는 놈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야마모토의 말에 사무라이나 입을 법한 귀중하고 성능좋은 갑옷을 받아 감격했던 해병대원들은 모두 하나같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옷을 내리는 의미는 그분께서 너희를 아끼는 마음을 자기고 계시며, 너희를 믿고 기대한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 훌륭한 갑옷을 받으면 정말로 전장에 서도 든든할 것 같다는 생각에 해병대원들은 야마모토의 말에 수긍하고 있었고, 그의 입에서 떨어질 다음 말에 눈과 귀를 집중하고 있었다.

해병대원들 사이로 들어가 그들 사이에 선 야마모토는 칼을 뽑아 높이 세워들으며 외쳤다.

"주인께서 너희를 해병대원으로 인정하신 것이다!"

해병대원이라고 불리고 있었지만 사실 아직은 정식 대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교관들도 주명의 영향을 받은 단어로 저들을 훈련병이라고 부르며 해병대원으로 인정해 주지는 않고 있었던 것.

"우와아아!"

진짜 해병대원이 되었다는 말에 저마다 지급받은 무기를 꺼내어 야마모토처럼 하늘을 향해 세워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훈련병 딱지를 뗀 것이라는 성취감에 그들이 내뿜는 환호 소리는 잦아들 줄 모르고 주변으로 울려퍼졌다.

"무적!"

그 넘실거리는 환호의 물결 속에서 누군가 어설픈 조선어로 무적이라는 단어를 선창(先唱) 했다.

"해병!"

그러자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들었는지 신기하게도 물결이 모여 한줄기가 된 것마냥 모든 해병이 입을 모아 해병이라고 단체로 후창(後唱)하는 모습은 장관과도 같았다.

4글자 단어가 만들어내는 장관은 지칠줄 모르고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시발. 저렇게들 진심으로 좋아하는데  진짜 뭔가 있는건가? 나도 저기 낄걸 그랬나?'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신조는 해병대원이 되는 것을 거절한 것이 과연 훌륭한 선택이었나에 대해 조금씩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끄아악!"

일단 쳐맞고 있는 지금 상황을 볼때 거기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괜히 녀석들을 도발한 것은 분명 큰 실수였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지만.

***

"인생 템빨이야."

[이름 : 훈련병의 깃발]

[레벨 : 1(경험치: 0/0.5)]

[효과 : 직속 부하들의 경험치 획득률이 10% 증가합니다.]

[훈련병들의 비명이 연병장에 메아리칩니다.]

어디 사냥터 같은 데 없을까 고민하던 주명의 눈에 저 멀리서 말을 몰며 다가오는 조정의 인물들이 보였다.

이산해가 당도한 것이다.

조정의 명을 전하는 대신으로서,

동인의 영수이자 주상의 신하로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