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1화 - 확장(擴張)(4)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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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병들을 확보하는 것은 쉬웠다.
놈들이 지닌 무기가 위협적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적어도 본진에 주둔할 때는 조총을 따로 모아 별도로 관리하게 왜구들이 조치를 취해놨던 덕분이었다.
이미 성이 떨어져 보호해줄 전위의 병력이 작살나고 있는 상황에서 무기마저도 없으니 조총병들이란 그저 알보병보다도 못한 전투력을 지닌 잉여에 불과했던 것.
"하, 항복!"
그렇게 손쉽게 50명의 조총병들을 확보하게된 주명은 따로 보관된 조총과 놈들이 사용하려 가져왔던 소정의 화약을 해병대원들에게 일러 보관장소에서 가져오게 한 뒤에 놈들에게 제안을 건넸다.
"너, 내 부하가 되라!"
"네?!"
급 당황해 하는 조총병들을 보며역시 밀짚모자 해적물 만화는 구라였다는 생각에 어떻게 녀석들을 구슬릴까 고민하던 주명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급여에 대해 얘기를 해볼.."
"부, 부하가 되겠스므니다!"
"...응?!"
너무나도 손쉽게 수락하는 녀석들의 모습에 이번에는 주명이 외려 급 당황하게 되었던 것.
"전국시대에는 전투 중에도 진영을 바꾸는 게 수시로 일어나. 더군다나 노예로 파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고 부하로 받아준다는 것은 이녀석들에게는 관대한 제안인거야. 받아들여도 돼."
우리 중 일본에서의 전쟁을 그나마 가장 많이 경험했던 나미에의 보증에 그말이 맞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던 마음도 있었지만 상태창이 그렇다는데 의심할 이유따위는 없어 보였다.
[부대명 : 조총병대]
[부대 등급 : 1]
[적용효과 : 공격력 +1%, 방어력 +1%]
[병력 : 50/50]
[사기 : 60/150]
"너희들은 성벽 위에서 적들의 지휘관을 저격한다. 할 수 있겠나?"
"맡겨만 주십시오!"
나베시마가 주명을 죽이려 보낸 자들이기에 최고의 사격술을 지닌 이들로만 골라서 보낸 정예병이었다는 사실을 몰라 괜한 질문을 한 주명이었다.
물론 저들을 완전히 믿을 수 없어 따로 등 뒤에서 감시를 할 병력은 배치할 계획이었다.
좁은 성문만 틀어막으며 버티면 되기 때문에 교대할 예비병력을 따로 두더라도 여유가 있기도 했고.
언제까지 버텨야 하는 것을 주명에게 묻는다면 답은 '꼬라박는 적들이 모조리 뒈질 때까지'라고 답변할 것이다.
"나미에, 남동쪽 문을 수비해줘. 최정예 애들로 50명 정도 데리고 가고."
"알겠어."
짧게 목례를 하고 뒤돌아 떠나려는 나미에에게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달싹이던 주명은 그녀를 제지하고는 결국 마음속의 말을 꺼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무리하지 말라고. 알겠지?"
"무리할 상황이랄 것도 없어. 괜한 걱정이야."
피식 웃으며 뒤돌아 뛰어가는 나미에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렸지만 주명은 그것을 볼 수는 없었다.
아직 새벽이라 어두워 사위 분간이 안되는 시간임에도 온 사방에 불을 잔뜩 밝혀 놓고 이쪽을 향해 우르르 몰려오고 있는 수천의 적색 물결을 보았으니까.
이젠 디펜스의 시간이었다.
캐슬 디펜스.
압도적으로 수성이 유리한 건 상식인지라 이를 뒤집으려면 병력의 우위는 물론이고 원거리 무기의 지원을 받거나 공성무기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불행하게도 이쪽에는 마치 초록색 피부의 '블레이드 마스터'가 보라색 피부의 '아처'를 썰어버리듯이 적들 후위로 단숨에 뛰어들어가 적의 유일한 원거리 전력인 궁수대를 부대단위로 궤멸시킬 전술병기가 존재한다는 거다.
공성무기? 그딴게 왜구들에게 있을리가.
병력의 우위? 수성전에서 그게 뭔 상관이며 어차피 경험치 때문에 바라던 바가 아니던가.
"야마모토!"
"하이(예)!"
"성문에서 총 지휘를 맡아라. 무사 출신인 너밖에 맡길 이가 없다."
"맡겨만 주십시오!"
평생 맡아보지 못한 중책을 맡았다는 사실에 격동에 차올랐는지 그의 몸이 전율에 부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에게 혹시 성벽 위를 기어오르는 놈들을 막기 위한 병력을 200명 정도, 성문이 쪼개지며 생겨난 좁은 통로에는 100명 정도 배치한 뒤, 나미에가 데려간 병력과 조총병들을 감시할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200명 정도를 예비대로 두어 100명 단위로 로테이션을 돌리라고 지시를 해 두었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성벽 위의 병력과 조총병을 감시하는 병력에게도 로테이션의 기회를 주라고 말을 해 두었다.
전투에 참전하는 것 자체로도 경험치가 오르겠지만 적을 직접 죽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름 : 훈련병의 깃발]
[효과 : 직속 부하들의 경험치 획득률이 408% 증가합니다.]
한놈을 잡아도 네놈을 잡은 것 같은 경험치를 주는 사기템도 수중에 있으니 폭렙이 이뤄질 터.
그래서 레벨업은 공평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런 것이다.
이미 최대치인 사기지만 조금이라도 녀석들의 투지를 끓어오르게 할 수 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에 주명은 돌격해 오는 적들을 등지고 성문 앞에 서서 해병대원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 너희들에게 난 길을 낸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지 않은가?"
"맞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기대하는 건 딱 하나다."
수천의 창검의 물결이 뒤에서 요동치며 달려오고 있는데도 마치 소풍에 나온 것 마냥 태연한 모습으로 등지고 서 있는 주명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풍당당했다.
그 위풍당당함에 해병대원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저분이 자신들의 주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또 저분과 함께라면 절대로 패배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무저어억!"
그가 온 사방을 짓누를 정도로 강맹하게 선창하자,
"해벼어엉!!!"
사방을 진동할 듯한 기세로 수백의 해병대원들의 입이 하나되어 후창하였다.
"무적해병!"
"무적해병!"
이후 이어지는 함성 속에서 물끄러미 자신들을 응시하는 주인을 보며 해병대원들은 왠지 그분이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믿는다.'
그 믿음에 보답하고자, 그리고 왠지 그분의 뒤에 서 있는 것 같은 마음씨 착한 조선인들이 손을 흔들며 응원하는 것 같은 착각에 해병대원들은 결의를 다지며 무기를 부서져라 꽉 잡았다.
정말로 무적의 해병대가 될 것이라 다짐하며.
"으아악!"
"오니(鬼)가 나타났다!"
수천의 병력을 마치 양떼 사이를 거닐듯 찢어 발기며 달려가는 자신들의 주인의 든든한 뒷모습을 보면서 해병대원들은 왠지 적어도 이 전투에서는 누구도 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토록 강한 주인이 꽃길을 깔아주는 데도 무적의 해병대가 될 수 없다면 나가 뒈져버려야지.
해병대원들은 어깨에 느껴지는 갑옷의 묵직한 무게감에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 든든함에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인께서 자신들 같은 하찮은 목숨에게도 이렇게 사무라이나 입을 법한 갑옷을 내려주셨으니 절대로 죽을 수 없다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파르살루스 전투를 끝내고 이리 말했다지.
"왔노라(VENI)! 보았노라(VIDI)! 이겼노라(VICI)!"
그렇다면 주명은 오늘 전투를 이리 표현할 것이다.
"몰았노라, 썰었노라, (레벨, 등급)업했노라"
주명에 의해 궁병들은 순식간에 말 그대로 궤멸되었다.
반지의 제왕이란 영화를 보면 처음 부분에 사우론이란 악마가 철퇴를 휘두르며 압도적인 강함을 표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철퇴 한방에 대여섯명씩 날아가 버리는 무시무시한 강함에 절대반지의 엄청난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지.
그런 장면을 동양 버전으로 바꾼 게 그때의 활약이었다.
칼질 한방에 대여섯씩 썰려대니 멘탈이 터져 도망가는 놈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무려 100명의 궁수가 육편이 되자 왜구들도 깨달았다.
저 거대한 검을 든 오니가 이 전장에 왔을 때부터 전쟁은 이미 끝났던 거라고.
얼마나 강한 힘이면 절단면이 저리 깨끗함에도 불구하고 동료들의 몸이 터져 나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지다 못해 이승에서 탈주하고싶은 지경이었다.
동료들의 신체였던 것들이 파편처럼 비산하는 충격적인 모습에 똥오줌을 지리며 주저않는 왜구들도 있었다.
터져버린 멘탈, 그것들이 모여 나타난 모랄빵 상황에 궤주하려 발걸음을 뒤로 돌리려 했지만 마치 성문으로 몰이사냥이라도 하려는 듯 놈은 퇴각하려는 왜구들이 모이는 지점마다 나타나 썰어댔다.
마치 성문을 기점으로 반원을 그리듯 압도적인 스피드로 종횡무진하며 썰어 재끼는 통에 왜구들은 어쩔 수 없이 성문 쪽으로 죄다 몰려갔다.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그 성벽의 문만 넘어서면 살길이 보일 것 같아서.
하지만 그 또한 착각이었다.
검술을 제대로 배운 모양인지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절대로 그들의 아래가 아니었으며, 갑주는 그들의 무기로 뚫을 수 없었고, 놈들의 무기는 그들이 지닌 조잡한 무기를 절단하며 목숨을 앗아갔다.
탕
"컥."
이미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들은 그들이 지닌 깃발을 보며 죄다 주명이 썰어버린 통에 중간 지휘관들이나 간부급들이라도 뭔가 질서를 잡아줘야 했지만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50구의 총구는 지휘를 할라 치면 그들의 목숨을 허무하게 앗아가 버렸다.
무려 몇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그 사냥, 학살의 현장에서 해병대원들의 피해가 누적되고 주명 마저도 힘이 들어올 때쯤 드디어 주명이 원하는 반응을 보이는 놈들이 나오며 전투가 종결될 수 있었다.
"하, 항복하겠습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원래부터 붉은 색이 옅어 주명이 신병 후보생으로 눈여겨 보고있던 자들이 무기를 버리고 백기를 들자 주명은 이제는 한계에 다다라 힘겹게 겨우 유지하던 몰이망을 풀고 도주하는 왜구들을 그저 내버려 두었다.
전과를 확대하려면 적들이 도주할 때 추격을 해야 한다는 게 정석이지만 들판에 뉘여있는 수천 구의 시신, 혹은 시신의 조각들이 말해주듯 더 확대할 전과도 없었으니까.
2,650여 명의 적들 중 무려 1,800명이 죽고 2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도주한 이들은 고작 650명뿐이니 이미 전과를 더 확대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엄청난 대승이었다.
"우리가 이겼다!"
"이겼다아아!"
주명의 선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그에 뒤따라 성벽과 성문에서 울려퍼지는 승리의 함성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거대한 몰이사냥의 현장이었던 전투가 종결되자 그 결실은 달콤했다.
[이름 : 김주명]
[레벨 : 13(150/15,000)
[능력 : 힘 40(+10), 민첩 31(+10), 지능 28(+10)]
[기술 : 통솔(Lv5), 투척(Lv5), 검술(Lv16), 피아식별(Lv201)]
주명은 더욱 강해졌고,
[부대명 : 해병대]
[부대 등급 : 5]
[적용효과 : 공격력 +9%, 방어력 +9%]
[병력 : 420/620]
[사기 : 170/170]
해병대 역시 더욱 강해졌다.
비록 병력 현황에서 보듯이 상당한 부상자가 발생은 했지만 병력 최대치가 변하지 않은 것을 보면 사망자는 없다는 것이라 다행이었다.
정말로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이다.
"무적해병!"
"무적! 무적!"
그 사실을 본인들도 알고 있는지 자부심이 벅차올라 환호하는 해병들을 바라보며 나름 훌륭한 전과를 세웠던 '신입' 부대 하나는 부러운 눈치였다.
[부대명 : 조총병대]
[부대 등급 : 7]
[적용효과 : 공격력 +13%, 방어력 +13%]
[병력 : 50/50]
[사기 : 60/180]
"우리도 주군으로부터 저런 멋진 이름 받고 싶다."
원래부터 정예중의 정예병이었기에, 또 소수부대였기에 등급이 올라가는 폭이 해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조총병대였다.
그런 정예 조총병들의 마음속에 어느샌가 주명은 주군으로 자리잡아 있었다.
나베시마가 그다지 인망이 있는 다이묘는 아니었고, 또 주명의 곁에 있다면 오늘처럼 유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일 수 있어 목숨을 부지하기 쉬울 거란 기대감에 그랬을 수도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의 말로 외치는 '무적해병'이라는 저 구호에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이는 조총병들의 모습을 볼때 꼭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투가 종료된 후 부하들에게 전장 정리를 맡겨놓고 가장 먼저 주명이 한 일은 나미에가 무사한지 확인하러 간 거였다.
자신이 달려오자 반갑게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괜찮겠거니 안도했지만,
"괜찮...지 않네."
갑옷이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고, 드러난 살에 깊게 베인 검상들이 드러나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옆에 서 있는 히로시와 야마모토, 그리고 1기 해병대원들이 다수 포함된 50명의 병력들의 상태도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의 발밑에 족히 이백명은 되어보이는 적들의 시신을 보며 고작 50명 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저들을 상대했음이 실감이 되자 주명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마 왜구들도 생각이란 게 있으니 후방을 교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정예병들을 모아 보냈을 것이다.
숫자도 4배 차이에 정예하기까지한 적들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엄청난 검술과 분투, 그리고 해병대원들의 분전 덕분이었을 것이다.
"야! 왜 죽상인데? 이정도 활약을 했는데도 칭찬이 참 인색하다?"
"많이 다쳤구나."
"씨, 이정도 상처는 전투중에는 빈번하다고. 그리고 무사의 분투에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망정 상처나 걱정하다니, 너! 혹시 나를 그저 여인.."
"아, 아냐! 나미에가 최고야!"
도대체가 무사란 자들은 얼마나 단순해먹은 생각회로를 지니고 있는지 급하게 엎드려 절받기로 공적을 칭찬받았음에도 입꼬리가 올라가며 헤벌쭉 웃어댄다.
그러고 보니 히로시와 야마모토같은 녀석들도 마치 칭찬을 받기를 바라는 강아지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는 것이, 정말 무사란 족속들은 다 이런 것인가 하는 선입견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너희들은 내 기대 이상으로 잘해주었다. 너희들이야말로 무적해병의 귀감이자 진정한 해병이다!"
"우와아아아!"
참으로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닌 게 무인들이라지만 주명은 그런 솔직담백한 모습이 절대로 싫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동료요 부하들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나미에가 내 부하로 취급되었으면 훈련병의 깃발이 주는 경험치 부스터 덕에 이정도 활약을 했으면 분명 렙업을 했을 거 같은데 아쉽네.'
그리고 나미에 그녀를 굳이 부하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에게 충심을 바치는 나미에라니, 상상할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왠지 싫은 주명이었다.
대마도 레이드는 한명의 사망자도 없이 성공리에 끝났다.
해병대의 정원은 200명이 늘어난 800명이 되어 현대로 치면 2개 대대급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함선은 쓸만한 것 위주로 15척 정도만 챙기고 나머지 배들은 한동안 왜구들이 활동할 수 없도록 모조리 수장시켜 버렸다.
수백척의 배들이 경험치에 목마른(함선 파괴 시에도 경험치를 준다) 주명의 검에 부서지는 광경은 장관이었고 해병대원들은 또다시 환호했지만 더 장관은 따로 있었다.
배마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물자들.
왜구들이 주로 명의 강남쪽에서 약탈을 해온 것인듯 명나라산 물건들이 많았는데, 쌀은 물론이고 비단부터 도자기까지 다양했다.
값어치를 매겨 보니 대략 9,000석 정도였다.
당시 조선의 쌀 1석(80kg)의 가치가 현대의 화폐가치로 약 100만원 수준이라는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약 9,000석이면 지금으로 치면 90억 정도다.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게 아니다.
일단 지금과는 물가 자체가 차원이 다르게 쌌던 시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20년간 물가가 10배나 오른 경험을 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왜 그런지 알 것이다.
또한 대동법을 시행하고 이앙법으로 농업 생산력이 폭발한 조선 숙종 때의 연간 세수가 100만석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번에 국가 재정의 거의 100분지 1의 소득을 얻은 것이다.
실로 엄청난 소득이었다.
'에이 씨. 무겁기만 하고. 배가 느려진거 봐바.'
시간당 1,000만원(10석) 쯤은 금방 생성 가능한 주명에게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지만 해병대원들에겐, 심지어 나미에에게도 그 의미가 남달랐나보다.
그래도 왜구들에게서 노획한 은가락지를 끼어보고 고운 비단을 쓰다듬어 보며 기분좋아 하는 그녀의 흔치 않은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는 건 주명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음. 더 값나가는 거 없었나? 괜히 쥐어주고 싶게.'
사실 즐거운 일이었는지도.
***
"아가, 이제는 정말로 어엿한 무당이라고 불릴 수 있겠어. 고작 몇달만에 영기를 유형화하는 경지에 이르다니. 참으로 대견하구나."
"스승님의 가르침 덕분이에요."
소박한 옷을 걸쳐 입었음에도 그 영험하고 신령스러운 분위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들 것 같은 두 여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마치 저 멀리 허공을 의미없이 응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두 여인의 시선은 저 멀리 잘 보이지도 않는 대마도의 북쪽 섬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초희의 스승이 바라볼 수 있는 광경을 이제 그녀도 어렴풋이나마 따라할 수 있게된 영력으로 같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던 것.
동이 트기 직전이라 아직은 사위가 거뭇하지만 그런 어둠마저 그녀들의 시야를 가릴 수는 없었다.
스승의 말에 따르면 '패배할 운명을 뒤바꿀 역천의 기수', 그녀에게는 은인이 되는 주명이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이제 왜구 소탕을 끝낸 그분이 배를 돌려 돌아가려 하자 괜히 발이 들썩였다.
저곳은 그녀에게도 기억에 남는 곳이었다.
저곳에 불시착할 위기에 빠져 은인이 자신들을 배의 무기고에 안전하게 들어가 있으라고 굳은 표정으로 말해줄 때 그녀는 일이 최악으로 흐른다면 자결할 것이라고 각오하기도 했다.
남자들에게 유린당하는 그 끔찍한 경험들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은인은 결국 멋지게 그때의 위기를 극복해 내었고, 이제는 그 위기의 장소를 아예 통째로 소탕해 버리지 않았던가.
이제는 그녀도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따라가 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스승의 허락 없이는 떠날 수 없었다.
그게 제자의 의무이기도 하거니와 자신에게 역시 큰 은혜를 베풀어준 은인이 바로 스승님이었기에 그녀의 뜻을 반하고 떠나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분을 따라가고 싶은 것이냐 아가."
"....예."
비록 모기만한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초희는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 사실대로 스승께 답하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부디 조금만 더 참아주려무나."
"맞아요 스승님. 저도 아직까지는 더 수행이 필요합니다."
스승의 만류에 초희는 은인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접었다.
사람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마음을 존중하라 가르쳤던 그녀의 스승이 그녀가 가고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만류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너의 수행이 부족한 것은 아니란다. 네가 부족한 아이라면 저 삼한 땅의 거짓된 것들은 죄다 무복을 벗어야지."
"스승님.."
"다만 아직은 그분의 자리가 너무도 위태로워 그런 거란다. 내 눈에는 그분을 향해 다가오는 악의들이 보여. 추악한 용과 눈멀은 운학(雲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구나."
스승의 예언에 초희는 주명을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당대 최고의 신통력과 영력을 지녔을 거라 생각되는 그녀의 스승이 저리도 우려섞인 표정을 짓는 것은 그녀도 처음봤기 때문.
"아직 남쪽의 태풍이 불어오지도 않았는데. 북쪽의 찬바람에 부디 고뿔(감기)에 걸리지 않고 무탈했으면 하건만."
그녀의 스승은 돌연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한 것들이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운명을 타고난 이들에게는 큰 더러움이 되는 법이야. 기생이든 무당이든...그러니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초희는 기생이라는 부분에서 더욱 어두워지는 스승의 표정에서 왠지 그녀의 스승께서는 무당이 되기 전에 평양의 기생이 아니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가끔씩 드러나는 평양의 사투리며, 북방사람들처럼 심심한 음식을 좋아하는 입맛.
그리고 세파에 초탈한 스승께서 유일하게 감정을 내비치시는 물건은 마치 기녀들이나 쓸 법한 옥비녀였으니까.
그리고 그녀 생각에, 그리고 한창 물이 오른 영력으로 짐작건데 저건 그분의 정인으로부터 받은 게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