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42화 - 북풍한설(北風寒雪)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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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저의사건(建儲議事件)
표면적으로는 섣부르게 세자 책봉을 내세우는 실책을 저지른 서인이 몰락하고 동인이 득세한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미 지금도 책봉이 많이 늦어 있었기에 섣부르단 말은 개소리였단 점에서 왕의 숙청이었고, 그 숙청이 서인의 몰락까지 이어질 수 있는 데에는 반대당의 정치적인 대공세가 있었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인의 복수였던 사건.
기축옥사로 너무도 비대해진 서인의 권력을 깎아낼 필요가 있었던 선조는 동인들을 이용해 세자 책봉이라는 함정으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을 끌어들인다.
함정은 치밀하게 사전에 설계되었다.
선조가 동인의 영수인 이산해를 불러가며 세세한 조율까지 하는 상황이었으니 결론적으로 말하면 건저의사건은 선조가 권력강화를 위해 동인을 이용해 꾸민 흉계요 모략이었던 것.
본인이야 왕권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한 대계(大計)라고 자화자찬하겠지만 말이다.
마치 행동대장처럼 불같은 성미를 지닌 정철을 충동질하여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함께 입모아 외치기로 '협의'한다.
하지만 일단 발동이 걸리면 멈추지 못하는 정철과는 달리 이산해는 이미 뒷걸음질을 칠 수 있도록 준비를 한 상황.
약속된 당일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에서 너무나 공교롭게도 갑자기 병에 걸린 이산해는 그 시간부로 발을 뺐다.
반면에 이미 주변에 세자을 이번에 세울 거라 호언장담했던 정철로서는 성미상으로도 그렇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도 있고 해서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정철 혼자서 나선 모양이 되어 버리고 당연히 선조의 (계획된) 불같은 분노를 뒤집어 쓰게 되었다.
"여의 나이가 많지도 않은데 경은 어찌 국본을 벌써 세우자고 하는가?! 대체 무슨 삿된 의도가 있는 것이냐!"
공교롭게도 때마침 동인들이 '신성군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기름까지 끼얹어 버리니 그 불길은 서인을 활활 태워버렸다.
정철 본인은 물론, 성혼과 윤두수를 비롯한 주요 서인들이 모조리 유배형에 처해지니 서인은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때문에 서인 우위였던 조정의 국면은 이 갑작스러운 환국(換局)에 의해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그 뒤바뀐 조정에서 지금 가장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이미 주요 인물들이 죄다 유배를 가버린 서인들이 아니었다.
한번 떠난 유배는 사약을 받지 않는 이상 복귀할 수 있는 희망이라도 있지, 한번 떠나버린 아비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이젠 차디찬 돌바닥 위에 놓아버리는 인물.
아무것도 하지 않았것만 이 시국의 가장 중대차한 죄인으로 취급되는 인물이자, 차라리 이 괴로운 궁을 떠나 유배지로 멀리 떠날 수 있었다면 좋겠다며 마음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인물.
"전하, 이 죄인이 석고대죄를 하고자 하오니 부디 벌하여 주시옵소서!"
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냥 사람들의 입에 세자에 적합한 인물로 오르내렸던 것이 그토록 죄라는 말인가.
그게 아니라는 건 광해 자신은 물론 조정의 사정에 조금이라도 아는 자라면 알 수 있었다.
이미 아비의 총애를 받는 아우 신성군의 존재로인해 임금은 그녀석이 세자가 되는 데 걸림돌인 광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죄라고 생각된다는 것을 어찌 모르랴.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이 차디찬 돌바닥에 겨우 거적데기를 깔아놓고 몸을 떨어가며 듣는이도, 죄를 청하는 이도 진심을 믿지 않는 이 쇼를 해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근신이나 하라고 꾸짖으셨겠지.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귀화 왜인과 자신이 엮이며 일이 꼬여 버렸다.
광해 자신이 옷을 내려 그 왜인을 위무했다는 사실은 분명 날조가 틀림없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무리 중 성격급한 놈들이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무력을 확보하여 후일을 대비한다는 천지분간 못할 짧은 생각을 하는 바람에 결국은 광해군의 이름으로 그들에 대한 지원이 계속 이어졌던 것.
그런 전력이 있으니 왜인들에게 내려졌다는 옷의 출처가 도저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과 맞물려 마치 광해가 옷을 내린 것으로 간주되어 버린 것이다.
용의자를 특정할 수 없으니 비슷한 일을 했던 놈을 범인으로 확정한다는 개소리가 반역이라는 사안과 만나면 실체가 있는 추론과 정황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정치판이라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무리들을 잘 단속했어야 했지만, 그날 왕에게 꾸지람을 듣고 좌절한 나머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돌아보지 못했던 것이 패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옷을 내린다는 게 어떤 의미던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등용'의 의미가 아니던가.
문제는 그 등용의 대상이 칼과 창으로 무장한 무장병력이라는 것이요,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마치 충성서약이라도 하듯 연명장을 첨부한 서신을 보내왔던 것.
"치밀하게 무장병력을 준비해 반란을 도모했다!"
저렇게 주장해도 딱히 해명할 길이 없어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에 서인인 정철이 '공식적'으로 왜인을 방문해 몇일 체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자 사안은 광해군이 서인과 작당하여 무장병력을 키워 반역을 도모한 희대의 역모사건을 커졌던 것.
이렇게 몇일동안 죄를 청하고 있으니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입술이 부르트고 입 안이 갈라져 괴로웠으며 목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아 목울대를 떨며 크게 외쳤음에도 쉰 소리만이 힘없이 공터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소인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죄를 청해야 했다.
저 대전의 문지방에도 닿지 않을 작은 목소리일지라도.
설령 소리가 닿았다 하더라도 과연 그게 아비의 마음에 와 닿을까 하는 물음에 도저히 그렇다고 말할 수 없는 광해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이대로 방치하여 소자가 죽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아바바마...아니 주상전하.'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마음 만큼이나 아비와의 끊어진 인연의 끈은 물론 그 거리마저 더 벌어지고 있었다.
저분은 아비가 아니라 주상전하일 뿐이다.
나와 저자는 군신관계일 뿐이고, 사실 그보다도 못한 원수지간일지도 모르지.
자신이 이렇게 죽게되면 홀로 남게될 아내 류씨에 대한 걱정,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림움이 마치 주마등의 예고편처럼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 왜인은 어찌될까?'
자신이 이 지경이니 그자도 좋은 꼴은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걸 만드는데 빌미가 된 그 김주명이라는 귀화왜인에게 광해 자신도 인간인지라 살짝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그자의 어미가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금새 생각을 고쳐먹었고 오히려 그가 어떤 처벌을 받게 될 지 걱정이 되었다.
어려서 어미를 잃어버렸다는 상처가 마치 자신과 같아 보여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어미의 얼굴과 그녀와의 추억이라도 남아있는 자신과는 달리 그냥 날 때부터 인생에서 어미가 사라진 그 기구한 삶에 대한 측은함이 들어 도저히 김주명이란 자를 미워할 수 없었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 역시 마치 고향이 아닌 타향처럼 느껴지는 이 답답한 궁궐에서 살아온 자신과 닮아 보였다.
"한번도 보지 못했지만 그대는 부디 보중하시게나."
비록 자신은 죽게 되더라도 그 김주명이란 자 만큼은 살아남아 행복해지길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자신이 준 적도 없는 그 옷이 살아서는 입어볼 일이 없을 수의(壽衣)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
"죄인 김주명은 어명을 받으라! 참람된 일에 연루된 그 죄가 크나 그간의 공을 참작하여 경흥진(慶興鎭)에서 백의종군하여 야인들을 막는데 힘을 보태라!"
엿같은 선조새끼.
오나라의 손제리를 넘어서는 그놈의 옹졸함은 익히 알고 있어서 언젠간 이지랄을 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당하고 보니 주명은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웠다.
이이첨이 미리 경고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네. 동생을 목표로 한다기 보단 동생을 이용해 뭔가를 엮어 누군가를 치기 위한 공작같다네."
"그게 누굴까요?"
"동인의 영수 아계(鵝溪, 이산해) 대감의 행적이 마치 뭔가를 꾸미는 듯 수상했다는 것, 최근에 이곳을 방문한 송강(정철) 영감(令監)의 얼굴이 도저히 계략을 꾸미는 자의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동인이 꾸민일이라는게 내 생각이네. 주상전하께서도 어느정도 개입된."
선조가 개입된 동인의 계략이라는 말을 듣고 감이 왔다.
선조놈의 신성군 사랑과 광해군 혐오를 제대로 보여주는 그 건저의사건이 벌어지고 있구나라고.
그래서 혹시 이게 세자책봉 문제와 관련이 되지 않았겠냐고 이이첨에게 물어보자 뭔가 섬뜩한 시나리오가 떠올랐는지 이이첨은 사색이 되어 경고했다.
"그렇다면 이, 이건 역모로 엮일 수도 있는 사안이야. 단단히 준비해야 하네!"
이이첨의 말에 따르면 옷을 받는 것은 등용에 응한다는 의미이고, 서신에 하필 부대원들의 이름을 적어서 감사의 서신을 보낸 것이 마치 무장세력의 충성결의문으로 비쳐질 가능성이 노후하다고 한다.
따라서 조정에서 광해군이 자신을 동원해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밀어붙이면 그 개연성만으로도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것.
그의 말을 듣고나니 마음이 급해진 주명은 어찌해야 할 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몇일을 고민한 끝에 나온 대책은 선조의 대응에 따라 두 가지의 다른 대응책을 가져간다는 것.
일단 선조가 아무런 짓도 자신에게 하지 않는다면 그냥 무대응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을 것이기에 뭔가 처벌을 내린다는 현실적인 결과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플랜 A와 플랜 B를 짜 놓았다.
먼저 최악의 경우이며 플랜 A를 발동해야 하는 경우이다.
의금부로 가야 하니 오라를 받으라거나 사약을 받으라는 개소리를 지껄이면 "하성군 런조 개새끼"를 시원하게 외치며 바로 튈 것이다.
김시민 장군님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일단 목숨을 건져야 할 것 아니겠는가.
다음으로 어느정도 수용이 가능한 경우이며 플랜 B를 발동해야 하는 경우이다.
아마 선조놈도 주명의 귀화 자체가 일종의 치적이기도 하며, 주명 덕분에 해상에서 왜구의 피해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이이첨의 장계로 아는 만큼 이렇게 손쉽게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주명을 버리기는 싫지만 자신과 엮어 광해군을 날려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는 더욱 놓치기 싫으니 자신을 소리만 요란하게 보여주기 식으로 처벌하고 광해군은 진짜 날려버린다는 결론을 내릴 확률이 높았다.
그 공갈포 같은 처벌은 십중팔구 백의종군일 것이고.
분명 저 멀리 북방으로 뺑이치라고 보낼 건데, 어차피 적을 찾아 전투를 벌이려 작정했던지라 전장이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가는 것 뿐이라면 크게 손해볼 것도 없었다.
그래서 플랜 B는 선조놈의 처벌을 수용하여 북방으로 간다는 것.
백의종군 때 부하들을 데려가지 말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으니 거기가서 여진족들이나 털어대며 해병 애들과 최근에 얻은 조총병들 등급 업이나 시키자는 생각이었으니까.
사실 계급과 명예를 중시하는 무장이란 범주의 관료들에게는 둘 다 앗아가 버리는 백의종군이 큰 처벌로 대중들에게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백의종군이라고 해봤자 진짜로 말단병사처럼 근무하기는 커녕 기존의 계급에 준하는 대우를 받으며 참모 비슷하게 기용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등이라기 보다는 보직해임에 가까운 가벼운 처벌이었다.
역사에서도 참수형을 받을 죄를 저질렀으나 참작해야할 전공이 컸을 경우 백의종군으로 대신하는 사례가 많았기도 했고, 녹둔도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이순신 장군도 그런 사례에 해당되었다.
플랜 A를 가동해야 할 경우보다는 플랜 B를 가동해야 할 경우가 그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A와 B가 뒤바뀐 것 같지만 그건 선조놈의 행태에 환멸을 가지고 있는 주명의 마음속 우선순위에 따른 배분일 뿐이었다.
정말 마음같아서는 때려치고 조선을 뜨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이첨과 자신이 예측했던 대로 결국 백의종군의 처벌이 내려졌는데, 막상 정말 백의종군을 당하려니까 황당하단 마음도 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일군을 이끄는 장군급도 아니고 고작 최말단 무장에게 백의종군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워낙에 가벼운 계급장이라서 그걸 떼나 안떼나 그 무게차이가 없는 행위를 어찌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최말단 종9품(從九品) 초관 나부랭이를 백의종군 시키냐? 9급 공무원 계급장 떼고 무보수 노동시키는 거와 뭐가 다른데 대체. 에휴...'
어차피 처벌이 내려졌으니 플랜 A대로 조선을 아예 뜰 게 아닌이상 따라야 했다.
주명은 '백의'종군을 위해 광해군이 주었다는 삼베옷을 대충 흰 옷이라 우기고 입으며 해병대원들에게 떠날 준비를 시켰다.
원래도 이 거제도에 훈련소로 쓰려 만든 목책 외에는 별다른 기반도 없었기 때문에 사람만 움직이면 되는 문제라 떠나는 것은 무척이나 쉬웠다.
하지만 쉽지 않은 건 다른 데에 있었다.
800명의 해병대원들이 35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있자니 마을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아쉬워하며 울음소리를 내었던 것.
그 몇달 사이에 정이 들었는지 자신들을 지켜주느라 고생해준 해병대원들이 저 먼 두만강 끝자락의 북방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에 슬퍼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먹을 것을 챙겨주며 무탈하라고 기원해 주기도 했지만 이곳 율포에서 갑자기 열린 환송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저 사람들을 이대로 두고 가야한다는 생각에 주명의 마음 역시 무거웠고.
지금까지 방패가 되어주던 주명과 해병대가 사라지게 되면 그 공백을 금새 느끼고 다시 그 왜구들이 잡초처럼 자라나 활보할 것이다.
비록 대마도를 밟아 놓았고 선박은 죄다 부숴 놓았기 때문에 그 시간이 무척이나 더질 것이지만 주명이 자리를 잡고있어 왜구의 준동이 거의 0에 수렴했던 시절과는 달리 분명 이 바다는 위험해질 거란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가지 말아달라는 말을 너무도 하고 싶었지만 이미 큰 은혜를 입었기에 차마 입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고 있는 거제도의 백성들을 보며 주명은 최대한 빨리 돌아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선조놈의 처벌을 받는다는 거 자체가 개같은 거지, 거기서 공을 세워 다시 복귀하는 부분은 애시당초 어려움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원래도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자신들이 떠난다는 것에 슬피 우는 백성들을 보며 그 시간을 최대한 당겨야 겠다고 마음먹은 것.
하지만 빨리 오게 된다 하더라도 공적을 세우고 다시 그게 보고되기까지의 시간은 걸리기 때문에 아무리 빠르게 잡아도 최소 몇달은 걸릴 것이니 그 사이의 보호의 공백에 내던져질 백성들을 생각하니 이대로는 떠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하던 주명의 눈이 다시 열렸을 때, 그는 자신을 환송하기 위해 나와있는 이영남에게 다가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대책을 말해주었다.
이영남의 표정은 그전의 떠나보내는 아쉬움 반 미래에 대한 걱정 반으로 무척이나 어두웠지만 주명의 대책을 들은 뒤 한결 밝아졌다.
"고맙네 김 초관. 정말 고맙네."
이 대책을 위해 그가 어떤 것을 포기할 거라 방금 들었던 이영남은 원래도 그가 더 계급이 높았고 지금은 상대방이 백의종군을 하고 있는 신분임에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안그래도 찬 겨울바다에는 불현듯 북쪽에서 불어온 차디찬 바람에 그 한기가 짙어져 사람들의 몸을 덜덜 떨게 만들었다.
"오늘은 내가 쏜다!"
하지만 출항을 보류하고 술과 떡을 돌리라고 명령한 주명의 지시로 잔치판이 열려 훈훈한 온기로 채워지자 어느샌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 한기는 사라져 버렸다.
안 그래도 자신이 봐야 할 손해 때문에 미안해 했던 이영남은 잔치가 벌어지자 더 미안해 했지만 이 재물은 어차피 다 콘솔로 꽁으로 얻은 거라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즐거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꽁으로 얻지 않은 것, 왜구들의 본진을 털며 얻은 그 노획한 재물들 역시 사람들을 위해 쓰이면 그 자체로 가치있는 일이겠지.
이영남과 술을 대작하는 주명의 시선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북쪽을 향해 있었다.
남방의 겨울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혹독한 북쪽의 바람과 맞서러 가는 그의 등에는 언제나 그래왔듯 거검 '조부'가 그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자리잡고 있었다.
***
대마도의 흑룡이라고까지 불리는 자, 대마도의 뒷골목을 장악한 거물 히데오는 야마모토를 통해 주명으로부터 전달된 엄청난 재물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재물만 있다면 그저 뒷골목의 거물이 아니라 양지로 나아가 대마도의 패권을 노려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마음속으로 주인으로 여기고 있는 주명에 대한 고마움이 더욱 커졌다.
왜구들에게 노획했을 때 주명이 얻은 9,000석이란 엄청난 재물은 지금 히데오에게 전달되었으며, 그걸 얻는 대가로 주명이 요구한 것은 무척이나 손쉬워 도저히 수지타산 따위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세력이 많이 꺾여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른 저 왜구들과 척을 지고 대립하며 견제해 달라는 것.
주인의 그 거대한 그릇에 비추어볼때 수지타산을 신경쓸 분은 아니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 요구조건에 비해 대가가 과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정도로 밑지는 거래를 시도한 주명을 호구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놈들과의 전투를 요구한 것도 아니고 그저 견제만 해달라는 수준의 요구는 주명이 이런 재물을 내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는 히데오가 생각외로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는 것은 대충 짐작했지만 설마 대마도 뒷골목을 장악했을 거라는 것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주명의 오판에 있었다.
히데오가 그저 꽤나 큰 정도의 세력을 지녔다고 생각했기에 세력을 길러 왜구들을 견제해 주길 바랐던 것이지만 이미 그의 세력은 대마도를 뒤덮고도 남았으니 '길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또한 아직 왜구들 전체와 상대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한 히에오를 움직이기 위해 약간은 무리해서 지출한 감도 없지않아 있었는데, 이미 몸통이 잘려나간 왜구 따위는 히데오의 상대가 될 수 없어 불필요한 지출이었다.
또 이미 주명을 주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던 히데오는 그런 거 없어도 그의 말을 따라줄 동기가 충분했으니 말이다.
왜구들이 대마도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곳 대마도는 왜구의 총본산이자 대외 약탈 시 왜구들이 항시 들르는 집결지였다.
이곳에서 히데오가 왜구들과 대립각을 세우고 견제해 준다면 놈들의 움직임이 확실하게 둔화되거나 억제될 것은 분명했다.
등 뒤의 칼을 두고 먼 바다로 나갈 바보는 없으니까.
하지만 너무도 큰 재물을 받아 버렸고, 또 음지를 벗어나 명성을 얻고자 했던 향상심도 충분했던 히데오에게 그저 견제 수준에서의 역할은 성에 차지 않았다.
"재물까지 내려주셨으니 정말로 본격적으로 나서 볼까?"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었다.
해적과 건달 사이의 밑바닥에서 벌어지는 전쟁.
그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있다면 전부터 스스로의 세력이 부족해 왜구의 눈치를 보던 대마도주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세력을 대마도에서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 누구 없나? 다들 모이라고 해. 총동원이다!"
히데오의 소집에 그의 조직 쿠도의 정식 조직원은 물론 숨겨진 더 많은 조직원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숫자인 전 대마도의 뒷골목 건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와의 전쟁을 앞두고 집결하는 모습이었다.
주명이 말했던 방책은 대마도의 주요 세력을 포섭하여 왜구들과 대립하게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그 이이제이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다면 조선의 바다는 당분간 주명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깨끗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