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44화 (44/77)

〈 44화 〉 43화 - 북풍한설(北風寒雪)(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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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를 떠나 두만강으로 올라가기 위해 필히 지나야 하는 동해의 초입부, 울산 앞의 검푸른 바다를 한 척의 배 흰 포말을 만들며 지나고 있었다.

이곳이 강이었다면 지금 느껴지는 강추위와 매서운 겨울바람에 분명 얼어붙었을 것이지만, 여길 지나는 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바다라 아직까지는 유체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허나 그 배가 향해야 할 목적지이자 조선의 최북단 지역이며 동해의 북쪽 끝인 두만강 하류에 도착하게 되면 다를 것이다.

더욱 거세지고 차가워진 북방의 추위는 두만강에게서 온기와 함께 유체의 형상을 박탈할 것이며, 더 심해지면 그 앞바다에서조차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니까.

거센 바람과 혹독한 한기가 몰아치는 황량하고 눈 덮인 대지 북방.

그 혹한의 대지를 향해 나아가는 참수리호의 항해는 점점 강해지는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더 추운 곳으로 가야 한다는 머뭇거림 때문인 건지 평소와는 달리 더디기만 했다.

나미에는 두꺼운 옷들로 온 몸을 최대한 꽁꽁 싸매면서도 뱃전에 서서 차가운 겨울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며 할 말은 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입술만 달짝이던 주명은 고개를 한번 털고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주명이 다가오자 나미에는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질문을 건넸다.

"무슨 일인데?"

하지만 질문을 건넸음에도 그저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인 주명에게 나미에는 약간 짜증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고마워."

"뭐? 풉. 난 또 뭔 말인가 했네. 겨우 그말하려고 그렇게 뜸들인거야?"

나미에는 뭔가 맥이 빠지는 느낌에 피식 웃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이 이렇게 어렵게 전할 말인가 하는 황당함과 함께 대체 뭐가 고맙기에 그렇게 뜸을 들였는지 재차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 북방까지 따라와 주기로 한 거 말이야."

"에? 검술 가르쳐 줘야 하잖아. 너, 아직까지는 수련이 더 필요해. 처음 배웠을 때와는 달리 이제는 조금 봐줄만 하긴 하지만. 솔직히 아직도 그냥 힘만으로 휘두르는 거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부대를 운영하기 위해 물자와 재원을 생성하느라 그다지 여유는 없었지만 최근 원정으로 조총병까지 얻게 되면서 필요해진 화약이란 전략물자를 직접 생성하느라 쪼들리는 CP 상황.

뭔 '생성'이냐고? 화약도 오브젝트니 스캔-아이디 확인-콘솔 명령어로 획득 공식으로 얻는다는 말이었다.

자원을 생성하는 명령어는 종류에 관계없이 1 포인트에 딱 정해진 양만 주는 것인지  8천근(5,000kg)의 화약을 한번 생성하고 나니 고작 50정의 조총으로는 소모하는 게 티도 안 났다만.

8천근이 어느정도 양인가 하면 무려 수만명의 병력이 화력전을 치렀을 때 울산성 전투에서 소모했다는 화약량에 비견되는 수치이니 콘솔 명령어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화약은 그렇게 딱 한번 생성하고 그 이후엔 명령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 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CP가 쪼들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이이첨에게서 경고를 들은 후백의종군을 하라는 선조의 교지가 도착하기 전까지 주어졌던 몇주 동안 여유 CP를 최대한 검술에 투자했던 주명.

그 덕분에 검술 스킬을 20레벨의 중중(中中) 수준까지는 맞춰 놓았고 놀란 나미에의 흔들리는 동공과 함께 그녀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오! 검 휘두르는게 이제는 좀 봐줄만 해."

재능이 없다며 검을 쥐지 말라는 악평까지 들었던 초창기에 비해 정말 괄목상대의 성과였던 것이며, 이 모든 변화와 성장이 고작 몇달만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 놀랄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빛나는 재능을 지닌 천재 검사인 그녀에게서 무려 검술로 칭찬을 받고도 자신의 검술에 있어서의 급격한 성장이 왠지 주명에게는 달갑지 않았다.

단지 검술을 가르친다는 이유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자신의 검술을 봐 주기 위해 선생이자 동료료 같이 다니고 있는 나미에는 이제 주명의 검술이 어느정도 수준까지 올라왔으니 떠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사실 무사의 명예 운운하며 검술을 가르쳐 준다고 하긴 했지만 그게 전장에까지 따라온다는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난 대마도에서의 전투도 그렇고 지금까지 검술교습 이상의 도움을 받아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심각한 상처를 입으면서까지도 악착같이 동남쪽 성문을 지켰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했다.

그런 도움에 고맙고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론 계속해서 그녀가 지금처럼 자신의 주변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주명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검술이 성장할수록 그녀가 더 멀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이대로 검술 스킬을 올리는 데 CP를 투자해야 하는 고민과 머뭇거림이 있었다.

'해병대 애들에게 말했던 대로 내가, 내가 길을 열어야 해. 지금까지보다 더 강한 힘을 얻어서 말야. 그래야 나도 살고 부하들도 살 수 있어.'

하지만 저 먼 타향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실력향상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검술을 올렸던 것.

이제 주명이 어느정도 수준을 갖췄으니 그녀가 검술을 더이상 가르쳐줄 이유가 사라진 상황.

자신이 백의종군을 해야 할 저 북방까지 그녀가 따라올 수도 있었지만 그걸 내심 원하면서도 이성적으론 그녀가 따라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태어난 일본으로부터 매우 멀기도 하며 따뜻한 남방에서 자라나 그곳의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가 거기 가서 적응을 잘 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

그가 겪어야 할 백의종군이란건 죄인의 신분으로 죄를 받으러 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장군들이야 일전의 지위에 준하는 대우를 받겠지만 말단 군관에게까지 그러겠는가.

거기서 온갖 고생을 겪고 천대를 받을 게 뻔하기 때문에, 또 그런 악조건 속에서 최소 몇달은 복역해야 했으니 단지 검술을 더 가르쳐줘야 한다고 그녀가 따라오게 하는 것은 말도 안 되었으니까.

"딱히 너한테 매료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라고."

그런 건 기대하지도 묻지도 않았는데요라고 말을 하기엔 지금도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삶을 살아와서인지 두껍게 껴입었음에도 몸을 살짝 떨고있는 그녀의 모습에 똑같이 장난스런 말을 건넬 수 없었다.

"아직은 좀 더 가다듬어야 해. 이제는 꽤나 봐줄만한 수준이지만 내 명예를 걸기도 했으니 내가 봐도 훌륭한 수준이 될 때까지는 더 가르쳐줄게."

당초 주명과 약속한 검술교습의 목표수준 이상의 가르침을 너무도 흔쾌히 말하는 나미에를 보며 뭐라도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계속해서 독백처럼 이어졌기에 그저 묵묵히 듣고 있기만 했다.

"근데 너는 내 생각보다 빠르게 검술이 늘기도 하고 그러니 그런 경우에는, 음....아! 혹시 네 실력이 금새 더 늘더라도 네 곁에 있는 옥현이는 내 하나뿐인 제자니까 계속 따라다니게 될 것 같아."

어떻게 되서든 자신을 계속 따라온다는 그녀의 말에 주명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떤 이유를 대서든 자신을 계속해서 따라오려 하는 모습이 역력해서 말이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매서운 추위가 두껍게 입은 옷을 뚫고 살을 할퀴는 것 같은 추위에서도 몸이 더워지는 것 같았다.

추위 때문인지 안 그래도 빨갛게 물들었던 그녀의 얼굴이 더 빨개진 것 같다는 건 착각일까.

"흠. 그냥 너 따라다니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북방의 검술은 어떠할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야. 무사로서의 경험을 더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지."

굳이 묻지도 않았는데도 따라가야 하는 다른 이유, 부끄럽지 않을 많한 그럴듯한 이유를 늘어놓으며 고개를 돌려 북쪽의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흘러오는 바람에 그녀에게서 지난번 그녀를 안고 갔을 때 맡았던 싱그러운 향기가 다시 느껴졌다.

그녀를 따라 북쪽 바다를 쳐다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주명은 처음 그녀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고마워."

***

주명이 백의종군을 해야 하는 곳은 두만강 하류의 녹둔도(鹿屯島)였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기 전 근무지였던 그곳은, 조선의 세종 때 이뤄진 4군 6진의 개척 당시 얻은 땅이었고 그때 김종서가 쌓은 토성을 중심으로 방어가 이뤄지고 있었다.

녹둔도는 그 이름처럼 섬(島)이었지만 토성과 같은 방어시설이 반드시 필요했던 이유는 적의 침공로가 될 섬 북쪽의 수심이 그리 깊지 않아 시간을 조금 지체할지언정 도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건 녹둔도가 두만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삼각주였기 때문인데, 퇴적이 이뤄진 윗부분, 그러니까 여진족과 맞닿아 있는 부분은 수심이 그리 깊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퇴적작용이 더 진행되자 아예 북쪽의 연해주에 붙어버린 육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는 섬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지금도 수심이 깊지 않은 그곳의 방어 난이도를 더욱 높이는 것은 바로 북방의 추위.

살을 에는 강추위에 강물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니 평지와 다름없게 되어 버려 너무나도 손쉽게 도하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도하라는 말을 쓰기도 애매할 정도로 그냥 평지를 건너는 수준이니 북방에서는 강만 믿고 방어선을 짜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런 점에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지키기가 너무 어려운 땅이었던 것.

조선의 선조 대에 이르어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건의로 둔전이 설치되고 사람들도 꽤나 거주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순신이 겪었던 사실상 유일한 패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녹둔도 전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방어가 취약한 상황에서 지키기도 어려운 농작물을 기른다는 것은 굶주린 여진족들을 더 끌어들이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조산보(造山堡) 만호(萬戶) 이순신이 고작 수십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무려 1천여명의 여진기병에 맞서 분전했다고 하지만 결국 놈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녹둔도 전투의 결과는 조선의 패전.

애써 일군 식량은 약탈했고 녹둔도에 살던 200여명의 백성들은 놈들의 전리품으로 끌려 가버렸으니 정언신과 조정이 기획한 둔전은 대실패로 결론이 났던 것이다.

'기병을 어떻게 상대할 지 고민해야겠네.'

이순신마저도 곤경을 겪었던 기병을 상대로한 겨울의 녹둔도 디펜스.

그에대한 구상을 하며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녹둔도를 바라보는 주명의 얼굴엔 전장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기병에 부담감이 들 법도 했지만 오히려 여유만만이었다.

그리고 녹둔도로 가는데 왜 녹둔도가 멀어지냐고 묻는다면, 일단 이곳의 군무를 총괄하는 북병사가 있는 종성부(鍾城府)로 가 신고 절차는 밟아야 했으므로 두만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종성부는 종2품의 고위무관이었던 함경도의 병마절도사, 일명 북병사의 소재지로 진(鎭)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세종과 김종서가 개척한 4군 6진의 하나이기도 한 이곳 종성진(鍾城鎭)은 두만강 중류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북병사 소재지 답게 1,100여명의 병력이 주둔한 꽤나 큰 진영이었으며 다른 5개의 진을 통할하는 위치에 있었다.

지역방어의 거점이 될 진(鎭)을 중심으로 그 아래로 보(堡)들이 딸려있는 북방의 진관체제(鎭管體制)를 총 지휘하는 곳이 바로 종성진이었던 것.

진(鎭)은 거의 행정구역상의 부(府)와 같았고, 500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이 주둔한 진을 지휘하는 것은 종3품의 부사(府使)였으며, 대략 80명에 못 미치는 병력이 주둔한 보(堡)를 지휘하는 이는 종4품의 만호(萬戶)였다.

녹둔도가 속한 경흥진에는 서수라보, 조산보, 무이보, 아오지보의 4개 보가 위치했으니 한 개의 진에 800여 명 정도 되는 병력이 주둔한 것.

현재 6개의 진을 모두 관할하며 5,000여 명의 병력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인 북병사는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것으로 유명한 이일(李鎰)이었다.

상주 전투에서 제승방략에 따라 집결한 수천의 병력을 고니시의 조총 일제사격에 털려버린 그 이일 말이다.

사서에서도 난폭하고 독선적으로 기록된 그자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주명이었다.

'고민할 게 기병뿐만이 아니었네.'

앞에서 들이박는 기병도 무섭지만 뒤에서 총질하는 아군이 더 무서운 법이니까.

***

"자네가 바로 그 귀화한 왜놈인가? 짐승같은 왜놈 치고는 멀쩡하게 생겼군."

씨발새끼.

주명은 초면부터 바로 비하하는 말을 찍찍 내뱉는 북병사의 면상에다 대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안 그래도 백의종군을 하는 몸인데 그럴 수 있을리가 없었다.

괜히 왜인 어머니를 두었다는 설정을 스스로 날조해서 이런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스스로에 대한 짜증이 치밀어 오를 정도.

'나미에를 안 데려오기를 잘했네. 그랬으면 아마 또 그거가지고 지랄했겠지'

두툼한 입술에 눈매도 부리부리한 것이 딱 봐도 고집이 세 보이게 생긴 이일이라는 양반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존중같은 것은 진작에 갖다 버리고 온 것마냥 행동했다.

"백의종군하는 중에도 사비를 들여 허접스러운 왜놈들을 끌고 와준 건 기특하네만, 저 원숭이같은 놈들이 전투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 원숭이들에게 나중에 당신이 지대로 털립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던 주명은 그래도 나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리했다고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불쾌하기만 했던 신고가 끝난 뒤 경흥진을 들러 당시 경흥진 부사였던 변안수에게도 신고를 끝마친 주명일행은 드디어 녹둔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도 말단이었지만 이제는 계급장도 사라진 주명에게 그 누가 윗선이 아니겠냐만, 어쨌든 그렇게 줄줄이 이어진 윗선에 대한 신고도 조산보 만호에게만 하면 이제 끝이었다.

만호라고 하여 뭔가 대단할 것 같지만 몽골시대의 그 만호정도를 기대하면 오산이었다.

물론 없는 병력사정 때문에 고작 1개의 보에서 80여명 정도를 지휘하지만 기본적으로 종4품이라는 고위 무관이었기 때문에 주명같은 백의종군 처지에서는 까마득한 상관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부하들을 시켜 미리 준비해온 자재로 주둔지를 건설하게 한 뒤 만호가 기거하는 관청으로 향하던 주명의 눈에 황량하다 생각했지만 그 이상으로 황량한 녹둔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3년 전 일어난 녹둔도 전투의 상흔이 아직 가지시 않았는지 군데군데 검게 타버린 폐가들이 눈에 띄었고, 당시 수백명의 사람들이 끌려갔던 사실을 반영하듯 대낮인데도 걸어다니는 이가 눈에 띄지 않았다.

마치 유령도시를 보는 것 같았다.

차라리 진짜 유령들이 사는 곳이었다면야 그저 애도만 하면 그만이었겠지만 이곳은 아직 죽지못해 살아가는 기구한 목숨들이 기거하는 현실의 마을이었다.

"맙소사...."

녹둔도의 마을을 걸어가면서 주명은 그 참혹한 모습에 점점 할 말을 잃어갔다.

피죽도 먹지 못해 말라 비틀어진채로 쓰러져 가는 고목과 같은 노인들.

부모를 잃었는지 꾀죄죄한 모습으로 우르르 몰려 다니며 먹을 것을 찾아 다니는 고아들의 마치 쥐떼와 같은 처참한 모습.

가장 가슴이 미어졌던 건 한때는 온기가 느껴지는 사랑스런 젖먹이었을 아이의 시신이 마치 길바닥에 죽은 짐승의 그것처럼 추위에 미라처럼 메마른 채로 반쯤 무너진 폐가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참담한 모습을 봤을 때였다.

차라리 썩어 문드러졌으면 이렇게 처참하지는 않았을 텐데 북방 겨울의 차가움은 어찌 이리도 냉정하단 말인가.

그 어린 것의 시신 위에 놓여진 말라붙은 들꽃들은 이 처참함을 가려주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이번 겨울에 어떤 식으로든 부모를 잃고 저리된 것이리라.

슬피 울어대며 어미의 젖을 찾다가 목이 메이고 결국 목숨이 다해 사라진 어린 생명을 쳐다보는 주명은 안타까움에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제 동생이에요."

쥐떼와 같은 고아들의 무리에서 한 여자아이가 나오더니 주명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옥현의 또래쯤 되는 나이로 보였지만 잘 씻지못한 더러운 몰골에 그걸 확인할 길이 없었다.

대체 얼마나 굶었던 것인지 그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힘이 없어 보였다.

"땅이 너무 차갑고 단단해서 묻지 못했어요. 그래서 너무 미안해서 꽃을 올려둔 거에요."

말라붙은 들꽃의 연유를 알게 되었다.

"아저씨, 혹시 힘 세나요?"

"응. 그렇단다."

"그럼...그러면. 혹시...혹시 아저씨가 동생을 묻어주면 안될까요? 마을의 다른 아저씨들은 힘이 없어서 땅을 못판대요. 그러니 부탁드리면 안될까요?"

"그러마."

물기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체 이웃으로서 다른 어른들은 뭐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사는게 죽을만큼 힘에 겨워 저 소녀의 부탁에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을 거란 건 짐작할 수 있었다.

둔전이 사실상 박살난 이곳 녹둔도에서 북방의 백성들을 사는 곳에 묶어놓는 사민정책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살아가야 했던 이곳 주민들의 삶은 너무나도 피폐해져 있었다.

고목처럼 말라 비틀어진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차라리 풀뿌리라도 캘 수 있는 남방의 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감사해요. 흑."

소녀의 검게 칠해진 얼굴에서 맑고 투명한 눈물이 흐르며 그 탁함과 맑음의 대비가 주명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동생의 미라가된 시신을 품에 안은 소녀를 이끌고 도착한 언덕의 공터.

이제와서 따로 삽을 구할 수 없기에 '파괴불가'인 '조부'를 들어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스펙의 거검은 그 스펙과 검신의 크기 덕분에 훌륭한 삽의 대용이 될 수 있었다.

금방 파내린 구덩이 안으로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버린 아기의 시신을 묻는 건 소녀에게도 슬픈 일이었지만 주명에게도 참담함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다.

북풍한설(北風寒雪)이란 무엇인가.

그냥 자연이 만들어낸 추위에 불과했다면 체념하기라도 하겠지만, 이건 빈번한 야인들의 침탈과 별다른 호구지책을 마련해 주지도 않으면서 땅에 머무르기를 강제한 조정이 만든 인재(人災)였다.

북방의 백성을 고사시키는 진정한 냉해(冷害)는 말발굽소리와 함께 들이닥치는 여진인들이었다.

북방에 쌓이는 어깨 높이만큼 내리는 눈(雪)은 마치 감옥과 같이 백성들의 이동을 막았는데, 그 여진인들을 피해 도망갈 퇴로조차 막고 서서 정주를 강요하는 조정과도 같았다.

지금 땅에 묻힌 아이 역시 북품한설에 내몰린 목숨이라 생각하니 다시한번 이 시대의 잔인성에 대해 느끼게 되어 진저리가 쳐졌다.

"아저씨. 저, 저기!"

사시사무 떨듯이 몸을 떠는 아이의 손이 가리키는 북쪽 방향에 또다른 냉해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100명 정도 되어보이는 여진인들이 말을 몰고 눈바람을 날리며 녹둔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두만강이 얼어붙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얼지 않아도 도하가 가능한 얕은 북쪽의 강물.

그곳을 건너기 위해 달려오는 여진인들이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손에 병장기를 붙잡고 있는 모습에서 결코 그 의도가 좋을 리가 없었다.

소녀가 떨리는 손으로 주명의 손을 꼬옥 잡았다.

"괜찮아. 아저씨 힘세다고 한거 정말이야."

품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지막지하게 인벤토리에 쌓아둔 설탕을 한움큼 집어 아이에게 건넸다.

"다, 달아요!"

그 단맛에 아이는 조금은 두려움이 진정이 된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여 아이를 향해 최대한 밝은 얼굴로 달래준 후 주명은 차가운 눈으로 여진놈들을 노려보며 '조부'를 흔들어 무덤을 파느라 묻은 흙을 대충 털었다.

이 어린 아이가 두려움을 느껴서야 되겠는가.

두려움은 니놈새끼들이 느껴야지 말이야.

'조부'를 피로 씻을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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