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45화 (45/77)

〈 45화 〉 44화 - 북풍한설(北風寒雪)(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h‎‎tt‍‎‎p‍s‍‍:‍‎‎/‍/‎‎t‎‎.‎‎m‍‎‎e/Nov‍e‍lP‍o‎‎rtal

"전투위치로!"

적습이 알려지자 녹둔도에 설치된 조산보의 병력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본래 78명의 병력이 주둔해야 하지만 3년전 큰 피해를 입었고, 지금처럼 수시로 야인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반복하는 통에 그때 전사했던 16명의 빈자리는 계속해서 공석으로 남아 62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토성을 끼고 방어를 한다고 하지만 단 62명으로 모든 곳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진 기병의 기동력과 돌파력은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토성의 취약한 부분을 찾아 치고 들어오면 토성은 그 시간부로 무의미해졌다.

기병에게 토성 따위는 큰 의미가 없었다.

지휘관이라도 있어야 무너가 방도를 찾을 수 있겠지만 이곳의 지휘관은 성벽에 모습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적이 코앞까지 쳐들어온 이 긴박한 상황에도 전날 먹은 술이 덜깼는지 아직도 모습을 내비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덜떨어진 놈.

"돼지같은 새끼."

평상시에도 갑옷을 입는데 버벅이는 놈이니 전시에는 오죽하랴.

만호를 욕하는 신씨의 얼굴에는 놈에대한 경멸과 함께 이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가야할 지 모르겠는데서 오는 부담이 역력했다.

실질적으로 이들을 이끌고 있는 선임 대장(隊長, 분대장)인 신씨 자신의 어깨에 모든 것이 걸려 있었다.

오로지 지금 이 병력들을 가지고 방어선을 펼치며 적을 격멸해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어려운 일임에도 해 내야 하건만 자꾸만 움츠려드는 어깨에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수십 병졸의 눈을 의식해 최대한 태연한 모습을 가장하는 것으로도 벅찼다.

생각이, 방도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그분이었다면 방법을 찾으셨겠지...'

이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서도 태산 같이 굳건하게 서서 방법을 찾아낸 사람이 문득 떠올랐다.

3년 전 이곳에서 불과 수십의 병력으로 1천기의 여진기병을 상대로 역습까지 가해 붙들려가는 백성들을 일부나마 구했던 그 만호.

그분이 여기 있었다면, 그분과 함께였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셨을 텐데.

하지만 이순신이란 이름의 그 만호께서는 지금 전라도의 정읍으로 내려가 현감으로 재직 중이며, 지금의 만호인 저 돼지새끼는 그냥 시간만 때우는 술주정뱅이에 불과하다.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초래될 결과에 신씨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겨우 저정도 병력으로 이 조산보를 점령하려 하지는 않을 테니 그저 약탈의 목적이겠지만, 그 약탈로인해 이미 쓰러져가고 있는 이 녹둔도는 더욱 황폐해질 것이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목숨들이 헛되이 스러져 갈 것이며 얼마나 많은 구슬땀들이 한번의 약탈에 무의미해 질 것인가.

또 얼마나 많은 고아들이 부모의 시체를 부여잡고 통곡할 것인가.

신 대장(隊長)의 눈에 강가에 떠내려온 물고기의 사체라도 찾을 겸 나와 있다가 여진인들을 발견하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어른들이 많이 죽고 끌려간 이 녹둔도에는 돌봐주지 못해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 아이들도 그들 중 하나였다.

"저, 저저!"

야만적인 여진놈들이 껄껄 웃어대더니 도망가는 아이들을 향해 그냥 짓밟으려는 듯 말을 몰아 달려들었고 그걸 바라보는 그는 발을 동동거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저 아이들을 구하자고 뛰쳐 나갔다간 평지에서 기병들의 밥이 될 거고 그러면 약탈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이 조산보가 점령될 수 있었다.

"빌어먹을 개자식들 같으니"

잘 되면 조선군의 전멸, 안 되어도 조선군의 군심을 뒤흔들어 놓을 수 있으니 놈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겠지만 잔인한 선택지를 강요당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가 갈리는 일이었다.

"으아아앙!"

급기야 개중 가장 어린 아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울고 있는 모습에 그는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 어린것을 낄낄거리며 짓밟는다고 달려드는 저 변발의 짐승놈들을 모조리 쳐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이 잘 알았다.

이번의 습격에서 처음 희생될 목숨이 저토록 어린 것이라는게 군인이자 한명의 어른으로서 너무도 참담했다.

세상이 무너진 듯 울고있는 아이를 보며 신씨 역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이의 목숨이 짓밟혀 뭉개지고 스러지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그때.

바람같이 아이를 향해 쇄도하는 여인이 있었다.

일백기의 기병이 뿜어내는 흉흉한 살기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드는 저 검을 든 여인의 기백에 신씨는 먼저 놀랐지만 진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녀의 속도였다.

사람의 움직이라기엔 너무도 빠르고 자연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이 그녀를 밀어주며 속력을 높여주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투구를 썼음에도 비어져 나와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릿결은 마치 쏘아지는 화살에 달린 깃털처럼 세차게 물결쳤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나미에는 울고있는 꼬마를 스쳐 지나가 기병과 꼬마 사이의 공간에 당도했다.

그녀의 시야에는털가죽 옷을 입은 여진인이 자신과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비웃더니 그녀와 아이를 향해 둘 다 연이어 짖밟으려는 듯 박차를 가하는 게 보였다.

살짝 오른쪽으로 보법을 밟으니 놈이 반사적으로 그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순간적으로 말머리의 방향이 넘어져 있는 아이에게서 빗겨난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땅을 박차고 달려나간 나미에는 자신을 향해 내질러지는 창을 슬쩍 피한 뒤 검을 쥔 양손으로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사선을 그리며 놈의 오른쪽 다리를 베어버렸다.

"끄르륵."

달려온 가속력이 더해진 덕분에 그녀의 검격은 놈에게 깊숙한 상처를 내었고, 올라간 칼을 다시 당겨 내리며 자신의 어깨 뒤로 찌름으로써 낙마한 놈의 목에 칼을 박아넣은 나미에는 곧바로 목에서 검을 뽑아 놈이 타고있던 말의 숨통을 끊었다.

주인이 오른쪽 다리를 베일 때 말 역시 검격에 복부를 베여 넘어져 있었기 때문에 두 죽음 사이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녀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다른 여진 기병의 공격이 바로 이어졌지만 그의 죽음 역시 일전의 죽음과의 간격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

"크억!"

그 질량만으로도 성인 남성조차 밟아버릴 수 있는 기병이고 거기 탄 기수는 기동력의 이점은 물론 그 높이에서 우위를 점하기 때문에 보병과 기병의 싸움은 압도적으로 기병의 우위여야 하지만 나미에에게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듯 보였다.

교묘하게 보법을 밟아가며 인마의 죽음을 검끝으로 설계하고 검날로 실현한 덕분에 6번째의 인마가 베어졌을 때 그녀와 아이 주변에는 마치 인마의 시체로 만든 성벽이 둘러져 있었다.

동료의 시체를 함부로 밟을 수 없었고 또 말의 체구가 큰지라 장애물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활약에 나머지 94명의 여진기병들은 당황한 듯 싶었다.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진 후 여진기병들이 택한 것은 바로 활을 꺼내드는 것이었다.

그 낌새를 먼저 눈치챈 나미에는 아이에게 눈짓으로 엎드려 있으라고 말한 뒤 놈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큰 사냥감을 둘러싸 활로 잡듯이 그녀를 상대할 계획이었던 여진인들은 그녀의 대담한 돌격에 당황했고, 그 잠깐의 당황 덕분에 나미에는 두명의 여진기병을 베어버리며 놈들 사이로 파고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말과 평생을 같이 살아온 여진기병들의 말다루는 솜씨는 남달랐다.

그녀가 쇄도해온 부분에서 마치 부채살이 갈라지듯 재빠르게 벗어나더니 급히 말을 돌려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 것이다.

사방에서 활을 쏘아대면서도 화살의 유효사거리를 적당히 계산하여 아군에게는 살상력이 없도록 거리를 재는 놈들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마치 구심력처럼 그녀가 있는 중심을 향해 쏘아지는 수십발의 화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쏘아지는 화살이었지만 그녀의 검 역시 그에 상응하는 빠르기.

빠름에는 빠름으로 맞서서, 거기에 바람의 부드러움을 더하여 나미에는 그 화살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화살을 쳐내면서 어떻게든 쇄도하여 여진기병을 향해 검격을 날려렸고 몇놈의 목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소나기처럼 쏘아지는 화살에 그녀의 검으로 쳐내지 못하는 화살들이 생겨났고, 그 화살들은 여진 기병들의 놀라운 활솜씨 때문에 빗나가는 일 없이 그녀의 갑옷에 적중했다.

하야타카가 제공한 최상품의 갑옷을 정여수가 손봐 더 튼튼하게 만들고, 거기에 주명의 콘솔질이 더해져 엄청난 방어력을 자랑하는 갑옷이었기 때문에 갑옷에 적중한 화살들은 모두 튕겨져 나갔다.

"으윽!"

하지만 점점 그녀가 허용하는 화살들이 늘어날 수록 갑옷이 보호해 주지 못하는 부분에 적중되는 화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여진 기병들은 그녀를 근접전에서는 절대로 상대해서는 안될 존재로 인지했는지 절대로 거리를 내어주지 않으며 기병의 기동성을 이용해 오로지 원거리 사격전만 이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절묘한 보법과 바람같은 빠르기를 지녔다 하여 기병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반격을 할 생각조차 못하고 그저 쏘아지는 화살을 막기에 급급했다.

하나둘씩 화살이 그녀의 몸에 박히기 시작하며 점점 그녀의 움직임이 둔화되고 있는것을 지켜보며 성벽 위의 조선군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여인의 분투에 피가 끓어올라 당장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지휘관인 조산보 만호가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뛰쳐 나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씨발, 여자도 저렇게 용맹하게 싸우는데 우리 뭐하는 거야?!"

"만호, 우리도 나가 싸웁시다!"

나미에의 분전에 투지가 끓어오른 병사들이 나가 맞서 싸워야 한다고 고함을 쳐댔지만 만호는 아직도 취기가 가시지 않았는지 연신 신내나는 트림을 해대며 비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지휘를 할 상황이 아닌 만호를 대신하여 결정을 내려야 하는 신씨는 계속해서 고민만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성문을 열고 나아가 그녀와 함께 싸우고 싶었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자신은 너무 담이 작았고 또 이 조산보의 병력은 너무도 미약했다.

'병력이, 병력이 더 많았더라면...'

병력이 없어서 용맹한 여전사의 분투를, 그리고 최후를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한다는 생각에 자책감과 아쉬움이 들어 미칠 것 같았다.

시뻘개진 얼굴로 눈을 부릅뜨며 전방을 바라보던 신씨의 귀에 성벽 뒤쪽에서 다수의 병력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신씨는 가슴이 벅차올라 더욱 시뻘개진 얼굴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성문을 열어라!"

열린 성문에서 큰 함성과 함께 붉은 갑옷을 걸친 600의 해병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묵직한 갑주를 입었음에도 마치 천쪼가리를 걸친 것 같은 경쾌한 발놀림으로 전방을 향해 달려가 진형을 이루기 시작하는 해병대를 보며 신씨는 이제 저 야인놈들을 무찌를 수 있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히고 조선군에게도 성문을 나서 적들을 섬멸하라 말하려 했다.

"우리도 나가 싸....어?!'

하지만 600의 해병대가 뿜어내는 강맹한 기세가 무색하게도 상황은 야속하게 다시 반전되고야 말았다.

저 너머로 족히 사천은 되어보이는 엄청난 수효의 여진기병이 산처럼 거대한 흙먼지를 피워대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

"안돼..."

절망감이 너무도 컸던 탓일까.

신씨는 나가 싸우자고 소리치기 위해 높이 들었던 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몸이 얼어붙었다.

사천의 여진기병이라면 이미 조산보는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남은 건 어떻게 죽는지를 선택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하니 암담함을 넘어 이젠 허탈했다.

그의 눈에 수천의 기병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머뭇거림 없이 사각 대형을 이루고 있는 붉은 갑옷을 입은 왜인 병사들이 보였다.

저들은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것인가?

"무적!"

"해병!!!"

나이든 노병(야마모토)의 무적이란 선창에 약간은 어색한 조선말로 해병이라 후창하는 저들의 구호를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신씨는 무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무적이라고 아무리 외쳐댄다 한들 정말로 무적이 되겠는가.

저들이 아무리 중장보병이라 한들 어찌 보병이 기병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기세좋게 함성을 내지르며 달려간 저들의 용기가 무색하게도 용맹하게 분투하던 여전사는 점점 힘이 다해가고 있었고 사천의 여진기병은 점점 속도를 올려 붉은 갑옷을 입은 자들을 향해 돌격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늘이 무심하게도 여진기병과 붉은 갑옷을 입은 무리 사이에는 여전사가 구하려 했던 그 아이가 아직도 전장을 벗어나지 못한 채 오줌으로 적셔진 바지를 부여잡고 어쭐 줄 몰라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결국 처음 여전사가 뛰쳐 나가기 전의 상황의 반복, 아니 더 최악의 형태로 반복될 뿐이다.

이번에는 아이뿐만 아니라 이 녹둔도마저 뭉개버릴 테니까.

그런데 신씨는 이해할 수 없었다.

"크크크 병신 새끼들!"

절망에 빠진 신씨를 비롯한 조선군과는 달리 저 붉은 갑옷을 입은 이들은 마치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오는 머저리들을 쳐다보는 듯 오히려 여진 기병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리는 게 아닌가.

'저자들 미친 거 아닌가.'

높은 깃대에 걸린 귀(鬼)라는 글자를 보며 설마 저딴 걸 믿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라는 의심이 신씨에게 든 순간.

땅바닥에 주저앉아 벌벌 떨고있는 아이와 여진놈들의 거리가 고작 십미터밖에 남지 않은 절체절명의 그 순간.

엄청난 속도로 뭔가가 성벽을 뛰어넘어 달려간 듯 하더니 그가 지나간 경로에 이어진 충격파에 성벽에 매단 깃발이 후들거리는 게 아닌가.

그것도 놀라운 광경일진데, 바로 직후 그가 보게된 광경의 놀라움은 도저히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콰앙

괴성을 내지른 사내가 높이 뛰어오르더니 땅으로 내려오며 전력으로 휘두른 거대한 검에 땅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충격파로인해 방사형으로 대지가 뒤집어 졌던 것.

수십미터나 되는 방사형의 상흔위에 서 있었던 기병 다섯은 그 즉시 조각난 육편와 흩뿌려지는 핏물로 화해 있었고, 그 놀라운 모습에 말과 사람이 놀라 뒤엉키고 넘어지는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압도적인 힘의 검격에 검이 박혀있는 땅을 시작으로 마치 거대한 손으로 땅을 긁어버린 듯 아래로 깊이 패여 있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여진놈들과 사내 사이에 흙으로 이뤄진 장애물이 생겨났다.

"빨리 성으로 들어가!"

놀랐던지 울음마저 그치고 딸꾹질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쳤지만 주명은 절대로 아이를 위험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의 등 뒤로 아무도 살려보내지 않을 것이니까.

"우와아아아!"

그 광경을 보며 붉은 갑주를 입은 600명의 사내들은 큰 소리로 환호했고, 신씨는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수정해야 했다.

저 엄청난 광경을 보면 자신이라도 질 거란 생각따위는 하지못할 거니까.

붉은 갑주를 입은 저놈들은 미친 게 아니라 미친듯이 믿는 누군가가 있었던 것 뿐이었다.

마치 3년 전 자신들이 그분을 믿고 10배가 넘는 여진인들 사이로 뛰어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주명이 검을 들어 뛰어들어가 '조부'를 좌우로 휘두르자 말에 탄 채로 양단되는 이가 여덜놈.

더욱 깊숙하게 파고들어가 원을 그리며 세번째로 휘두른 강맹한 검격에 공기를 가르는 검압 자체가 칼날의 연장이 되어 수십명이 인마가 각각 허리와 머리가 잘린 채로 피를 뿜으며 죽어갔다.

"도망쳐!"

사냥을 통해 싸움의 감각이 어렸을 때부터 체득하는 여진인들은 저 인간 재해에게 항거가 불가능하단 상황을 본능적으로 인지했는지 이제는 말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전력으로 달리는 말과 비슷한 속도를 지닌 주명 앞에서 무의미한 몸부림이었다.

일격에 많게는 수십에서 적게는 대여섯씩.

검격이 이어질 때마다 피를 쏟으며 좌우든 상하든 쪼개진 채로 죽어가는 여진인들의 비명이 잦아들게 된 것은 주명이 검을 16번 휘둘렀을 때였다.

무려 150의 인마를 갑옷째로, 뼈째로 잘라버린 검이지만 '조부'는 이 하나 상하지 않은 멀 쩡한 모습이었으며 그저 적들의 피를 듬뿍 묻히고 있을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상황판단이 빨랐고 뛰어난 기마술 덕에 방향전환도 빨랐던 덕분에 나머지 수천의 여진기병들은 달려오던 기세를 사력을 다해 죽이고 뒤를 향해 미친듯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

검을 가볍게 흔들어 피를 털어버리며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는 주명.

입을 떡 벌린 채로 가만히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꼬마녀석이 눈에 띄자 검을 검집에 집어넣은 뒤 녀석에게 다가가 몸을 숙이며 부드럽게 물었다.

"너 왜 아직 안가고 있었어. 위험하게 왜 나와있었냐?"

하지만 꼬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긴 19금 장면을 어린 아이에게 보여주었으니 충격이 컸겠지라는 생각에 좀 더 세심했어야 한다고 스스로 자책한 주명은 품속에서 설탕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려 주었다.

아이는 설탕이 주는 단맛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아까의 놀란 표정을 금새 지우고 환하게 웃으며 설탕을 입속에서 혀로 녹였다.

"아이는 이렇게 웃게 해주는게 맞지."

고개를 돌려 나미에가 있던 방향을 쳐다보니 비록 군데군데 화살이 꼳혀 있지만 아직도 맹렬한 투지를 잃지 않고 도망가는 여진 기병 하나를 베어 죽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정도면 걱정 안해도 되겠네. 근데 혼자서 거의 30명은 죽인 것 같은데?'

나미에의 뛰어난 투지와 검술 실력에 감탄하던 주명은 바로 앞에서 들리는 쩝쩝거리는 소리에 피식 웃고는 다시 품속에서 설탕을 꺼내 녀석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마시썽."

아이의 머리를 헝클어주며 씨익 웃어준 주명의 귀에 성벽 아래 공터에 방진을 이루고  있는 해병대원들과 저 멀리 성벽 위에 서 있던 조선군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아!"

주명은 기뻐하는 조선군과 해병대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자신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주명의 모습을 보며 성벽위에 있던 신씨는 마치 그분과 함께했던 지난 3년 전의 그날이 떠오르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비록 그때의 처절하고 용맹적인 분투와 비교하면 오늘의 전투는 뭔가 명예를 찾기엔 기괴하면서도 싱겁게 끝났다고 할 수 있겠지만 군인들의 영광스러운 전투를 위해 백성들의 피가 흐르는 것은 사양이었다.

그때도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끌려가던 백성들을 이순신의 지휘 하에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역습을 가해 구해냈던 순간이 아니겠는가.

백성을 구해냈기에 감동적이었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억이었는데.

그럼에도 끌려가는 나머지 백성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렸는데,

오늘은 그때와는 달리 애초에 백성이 끌려가는 일조차 생겨나지 않았으니 이 가슴뛰는 마음의 격동은 그때 이상이었다.

어느샌가 신씨의 마음속에 주명은 3년전의 그분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되었으니, 녹둔도에 불어오는 살을 에는 찬바람에도 이땅의 그 누구도 이 순간만큼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

"씨발! 미친 개 씨발!"

해서여진의 일종인 호이파부(輝發部)의 족장 바인다리는 너무 놀라고 황당하여 미치고 팔딱 뛸 것 같았다.

누르하치라는 거대한 세력의 발호에 맞서 해서여진과 야인여진 사이의 연합이 논의되고 있는 이 시기에 굳이 이곳으로 온 건 야인여진을 연합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저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기 위해서였다.

몇년 전 녹둔도 전투에 대한 보복으로 북병사 이일이 2,7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시전부락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사건 이후 야인여진은 조선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는 힘에 부치는지 몇몇 야인여진 부족들이 연합 가입을 조건으로 녹둔도를 완전히 지워버려 복수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걸 실행하기 위해 자신이 온 거였다.

100기의 별동대로 대충 약탈하는 시늉을 하고 있으면 조선측에서 증원병력을 보낼 테니 그놈들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천의 본대로 쓸어버린다는게 그의 원대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처음엔 웬 계집이 나서 별동대의 발목을 잡더니, 나중에는 무려 600명 정도 되는 중장보병이 나타나 급히 본대를 꺼낼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충분히 대응가능범위 안쪽이었는데 막판에 난입한 그 괴물같은 놈은 대체 어쩌란 말인가.

"씨발, 사람새끼이긴 한거지?!"

하지만 복수고 나발이고 전 병력을 후퇴시킨다는 판단이 조금만 더 늦었다면 저 괴물같은 새끼의 손에 다 뒈질 뻔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괜히 야인여진 놈들에게 더 화가났다.

다시는 이곳을 얼씬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여 바인다리는 침을 퉤 뱉고는 혹시라도 놈이 따라올새라 자신의 주둔지를 향해 미친듯이 말을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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