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6화 - 훈풍(薰風)(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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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를 이용해 어떻게든 자신이 이곳저곳을 활보하며 전공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 했지만 워낙 격렬하게 여진족을 털어대고 다녔던지라 금방 들통날 수밖에 없었다.
"...큰 공을 세웠다더군."
그래서 이렇게 지금으로 치면 투스타라 할 수 있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일을 대면하고 있는 것이고.
슬슬 소문이 퍼질 때도 되었기 때문에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고민하고 있던 차에 이렇게 전격적으로 들이닥치니 할 말이 있을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처분은 달게 받겠습니다."
그래서 주명은 백의종군중에 복무지를 이탈한 죄를 스스로 고하고는 무릎을 꿇었다.
성웅을 모함했다는 저 이일이란 자에게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 저자에게 잘못보여 자신이 투옥되기라도 해 버리면 녹둔도에 일궈놓은 일들은 다 허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어금니를 깨물고 한 선택이었다.
수틀린다고 다 뒤집어 엎어 버리기엔 조선은 아직까지 자신이 상대할 체급이 아니었으며, 최근에 알게된 고아소녀 윤아를 비롯한 녹둔도의 아이들이 눈에 밟혔다.
불호령과 온갖 욕설을 각오하고 귀에 잔뜩 힘을 주며 저항력을 가다듬고 있던 주명에게 들려온 이일의 말은 전혀 의외의 내용이었다.
"고맙네."
그리고 그 유명하다는 해병이 어떤 이들인지 보고싶다는 그의 말에 급히 추진된 사열식에서 이일이 꺼낸 말 역시 처음 봤던 무례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참으로 정병이로다. 최소한 이 북방에는 그 적수가 없을 것이 분명한."
원숭이같은 놈들이라고 처음에 비웃었던 게 누군데라는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투스타 앞에서 이병도 못되는 죄인이 말을 할 수 있을리가.
거기다 해병대를 보는 이일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아 도저히 이죽거릴 마음도 들지 않았다.
"잠시 걷겠는가?"
투스타가 까라면 까야하는 미천한 백의종군 죄인인 주명은 그의 말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일을 수행해온 무장들과 녹둔도의 원래 병력들이 있는 관청을 벗어나 그와 함께 말없이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두만강 너머가 보이는 강가였다.
완연한 봄기운에 푸르른 들풀이 강가에 잔뜩 피어나 있었다.
그가 강 너머를 바라보길래 주명도 덩달아 그쪽을 쳐다보며 어색한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곳으로 주명을 불러낸 장본인인 이일이었다.
"자네에 대해 알아보았네. 어떤 죄인이길래 대체 초관 신분에 백의종군을 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거든."
북병사 영감에게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주명이었지만 뭐 답은 언제나 그렇듯 선조 그새끼 때문이 아니겠는가.
"남쪽의 따뜻한 곳에 안온하게 정주해 있는 이들은 이 북방의 추위와 혹독함을 모르지."
갑자기 왜 그 얘기를 했나 싶었지만 북쪽 사람들이 남쪽 사람들에게 부러움 섞인 자격지심 같은 걸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난 뺑이치는데 저것들은 편하네? 이런 심리 말이다.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악조건 속에서도 잘 싸웠다는 것쯤은 알았지. 그자가 결백하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어..."
무슨 얘기를 하나 긴가민가 하다 녹둔도 전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주명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이일은 지금 이순신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불과 8년 전의 일이 떠올랐지. 경원진이 함락되자 조정은 경원부사 김수(金璲)를 참수했고 당시 북병사를 유배 보냈지. 근데 유배를 보낸 이유가 뭔지 아는가?"
이일의 표정에서는 진한 분노와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
"3일 후 참수하지 않고 6일 후 참수했다는 이유에서였네! 자신이 직접 가지 않으면 원군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에 포위망을 뚫고 사지를 헤쳐나와 울며 원병을 청한 부하를 상관으로서 고작 3일 더 살려두었다는 이유에서 말야!"
이일의 분노에 찬 말이 강가를 울렸고 주명은 두만강의 물살이 왠지 더 거세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자신을 뒷조사했다는 얘기가 갑자기 이순신과의 악연에 얽인 내막, 그리고 조정의 행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는 그런 급전개에 주명은 도무지 그의 의도가 파악이 안 되었다.
"조정은 무관들을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하네. 오로지 채찍만으로 기강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북방의 차가운 바람에, 저 야차같은 여진 놈들을 온 몸으로 막느라 상처투성이인 무장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야. 상처를 입었다고 목을 베어가는 게 조정이었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조정이 북방의 무장들을 대하는 방식에 매우 큰 문제가 있었다는 요지는 주명이 알아들었다.
"내 평생 가장 빛나는 군재였네. 이 만호는, 아 지금은 정읍부사니 이 부사겠군. 이 부사는 조선을 지탱할 기둥이 될 인재였어. 그자와 함께 녹둔도에서 싸운 이경록(李慶祿) 역시 뛰어난 인재였지."
그걸 아시는 분이 어찌 이순신 장군의 병력증원 요청을 거부했으며, 악조건에서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모함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호이파 놈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올 거란 첩보가 있었네. 병력을 종성진에 집결해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그가 밝힌 내막에서 주명은 왜 이일이 이순신의 병력증원 요청을 거부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본진이 털리게 생겼는데 멀티에 병력을 어찌 지원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건 교활한 시전부락 놈들의 술책이었네. 나 스스로 뛰어난 장수라고 자부했지만 전혀 아니었지. 그걸 간파한 이는 오직 이 만호 뿐이었지. 시전부락 놈들이 천여명이나 되는 기병으로 녹둔도를 공격했다 했을 때 자책도 자책이지만 눈앞이 캄캄하더군. 그런데 이 만호는 그 엄청난 열세에도 조산보를 결국 지켜냈지."
이순신 장군님이 뛰어난 것은 자명한 팩트이기에 그건 놀랄 게 없었지만 궁금했던 것은 대체 왜 녹둔도 전투에서 분전한 장군님을 모함했느냐였다.
"이 만호는 조정의 큰 기대를 받고 있었더군. 마치 자네처럼 말이지."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큰 기대와 관심을 받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고작 종9품의 무과 병과 급제자가 승급에 필요한 근속연한도 제대로 안 채우고 몇년 만에 종4품의 만호로 고속 승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자의 관심과 결단이 필수였다.
근데 주명 자신은 그분과는 달리 이상한 의미에서 관심을 받고있는 거라 좀 다를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조의 치적 자랑용 장식품이자, 국면 전환용 소모품이 지금 주명의 위치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분명 조정에서 전투의 내막도 살펴볼 것이라고 여겼지. 허나 그걸 살펴봐야 할 동기가 필요했지. 무장에 대한 통제에 여념이 없었던 아국의 조정은 이 만호를 내가 변호했다면 분명 참했을 것이네. 비천한 무장이 부하의 죄를 덮으려 한다고."
"...!"
"허나 억울한 누명을 쓴 무장이라면 저 남쪽의 조정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나? 그들이 강조하는 올바른 선비의 자세로 진실을 캐내려 하지 않겠나?"
주명은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설명에 옹졸한 상관이자 무능한 졸장이라는 선입견이 무너지고 깨져 버렸다.
지금까지 이일이란 자를 잘못 알고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냥 옹졸한 소인배 하나만 욕을 먹으면 귀중한 무장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는 거니 얼마나 남는 장사인가."
등을 돌려 저 먼곳의 광야를 바라보는 이일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왠지 오욕을 뒤집어 쓰고도 그 가치가 있기에 후련하다고 여기는 자를 보는 것 같았다.
"일군을 이끄는 장수정도 되면 하고 싶은 일만 할 수는 없는 일. 해야 할 일은 무엇을 대가로 치르더라도 해야하는 법이지."
그의 저 말은 이길 수 없는 전투란 걸 알면서도, 오합지졸 병력들을 이끌고 싸워야 했음에도 끝끝내 전투에 임했던 미래의 상주 전투에 대해 하는 말처럼 들렸다.
"겨울의 한파에 초목이 얼어죽듯, 점점 강성해지는 여진놈들의 말발굽에 백성들이 죽어가고 있네."
"지난 두번의 원정으로 힘을 떨쳤다고 자부하지만 그때 죽인 시전부락과 추도 놈들의 수급이 고작 400급이었지만..."
북방을 노려보는 이일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여진 놈들에게 죽어간 백성들이 고작 그따위 숫자밖에 안 되겠는가?! 끌려가 가축처럼 부림받는 백성들도 그 숫자보다 많을 것이야!"
이일은 온 몸을 북쪽을 향해 분노를 토해냈다.
"점점 줄어들어가는 이 조선의 힘으로는 그저 살을 내어주고 뼈는 보존하는 식의 비겁한 대응밖에 할 수 없었지. 두만강을 건너 저 짐승같은 놈들에게 고작 생채기를 내고 승리했다고 자부하는 게 얼마나 비겁한가!"
신립과 함께 이일은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여겨지고 있었는데, 그 자신을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해준 2번의 정토를 그 스스로 비겁하다 혐오하고 있었다.
"아국을 쓰러져가는 집이라고 조롱하는 저 짐승새끼들에게 조선의 의기를 보여준 이는 당대에 오직 단 두명뿐이었네. 1천기의 적을 1백도 안되는 병력으로 막아낸 이 만호와...."
이일은 몸을 돌려 핏발 선 눈으로 주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
그 지목받음에 주명은 눈동자가 떨리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고맙네."
이일은 주명에게 다가와 어깨를 부여잡았다.
"저 짐승같은 놈들을 짓밟아 줘서. 조선의 의기와 위엄을 떨쳐 줘서..."
왠지 모르지겠지만 주명은 그가 끝내 말하지 않은 마지막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조선이 아직 저들의 밑이 아님을,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줘서.'
삼배구고두를 하며 머리에 피를 흘리는 능양군의 모습과, 놈들에게 끌려가는 수십만 조선 백성들이, 환향녀라 돌을 맞는 여인들의 모습이 괜시리 떠올랐다.
괜히 화가 나서 '조부'에 손이 가려 했다.
근데 능양군 새끼는 별로 동정이 안가는데?
그래서 이일이 했던 그 기나긴 커밍아웃의 결론은?
레이드의 범위가 더 확대된다는것! 여진 새끼들, 수레바퀴 이상의 키를 지닌 놈들은 다 쳐죽여 주마.
너! 내 경험치나 돼라!
***
"칸, 9개 부족들이 연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놔 두어라. 한번에 쓸어버려야 한번에 다 거두는 법이니 잘 되었다."
칸이라고 불리며 자신을 적대시하는 연합군의 결성에 오히려 만족한 반응을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의 이름은 누르하치였다.
명국의 패권이 아직은 살아있는 이 시대에 그 속방을 자처하는 그가 칸을 칭하는 것은 명에는 무도하고 자신에게는 위험한 일이나 완벽하게 부족을 장악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지닌 이 남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늘이 내린 군재를 지닌 이 남자의 머릿속에선 저 9부 연합군이라는 놈들을 처리할 방도가 금새 떠올랐다.
아마 9개의 부가 모였다는 자신감에 사기가 하늘을 찌르니 유인하여 매복계로 쳐부수면 될 것이라며 사내는 차갑게 조소했다.
그 비웃음은 굳이 죽으러 오겠다는 불나방들을 바라보는 불길이 짓는 표정이었다.
누르하치란 사내는 불같은 존재였다.
성격이 불같이 화통하고, 그의 군대와 병략은 불같이 파괴적이었으며, 그의 세력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마치 하늘로부터 이 세상을 전부 태워버리는 소명의 불꽃을 받기라도 한 것과 같은 존재.
건주여진의 부족민들은 그를 살아있는 신처럼 존경하고 따랐으니 하늘의 명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어도 타고난 카리스마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요하와 흑수(흑룡강)가 표시된 여진족의 터전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아직 만주라고 이름붙기 전인 이 땅이 마치 불붙기 전의 땔감처럼 보였다.
허나 그 눈은 그저 만주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으니, 이미 그의 구상에는 온 천하가 들어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유럽 신화에서 세상의 종말을 연 존재가 로키라는 거짓말의 신이라면 실제 종말을 구현한 존재는 불의 신 수르트.
그저 여러 신들중 하나일 뿐인 로키와, 세상의 멸망이라는 파괴적 개념 그 자체인 세계신인 수르트 사이의 격차는 분명했다.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수문장인 헤임달과 동귀어진하며 죽었지만, 수르트는 끝내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그건 마치 히데요시가 조선의 수호신 이순신에 의해 조선에서 패하고 둘이 순차적으로 사망했던 것과는 대비되는, 끝끝내 명나라를 물리치고 황제가 되었던 누르하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세상의 멸망을 불러일으키는 존재.
한족 중심의 중화 세계관.
한인 천자가 지배하는 이 시대를 하나의 세상으로 본다면 그 세상을 멸망시키고 만주족의 시대를 연 누르하치는 충분히 수르트에 비견되는 세상을 멸망시킨 존재가 맞았다.
그 파멸적 존재의 눈에 이질적인 무언가에 대한 불쾌감이 서렸다.
그의 눈이 향해 있는 곳은 조선의 6진 중 하나인 경흥진.
그곳에서 천하의 누르하치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첩보를 여럿 들었으니까.
수백년 동안 이토록 공격적으로, 지속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공세에 나선 자가 조선에 더 있었던가? 아니었다.
게다가 단 한번도 패하지 않고 그 행적이 신출귀몰하다고 하니 먼 거리에 있어 당장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고는 하지만 괜히 호기심이 동했다.
"조선에선 도저히 하는 짓을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를 일컬어 도깨비 같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군."
***
"이보게."
"왜 그러십니까 어르신?"
도저히 주명이 하는 해괴한 짓거리를 이해할 수가 없어 나선 정씨 어르신.
그는 수북하게 쌓여있는 수달가죽들을 보며 왜 저렇게 죄없는 동물들을 학살하고 다니는지 궁금하다며 물었고 주명의 대답은?
"자식 새끼를 잘못 싸지른 죄죠."
"응? 그게 무슨 소리인가?"
"수달 새끼들을 모조리 쳐 죽이면 애비없는 놈이되는 잡놈의 새끼가 하나 있어요. 건주여진 두목놈."
두만강에서는 죄없는 수달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