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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해적왕-53화 (53/77)

〈 53화 〉 52화 - 기반(基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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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게 올리는 장계를 바치러 북병사가 머무는 종성진에 들른 주명은 이일에게 크게 칭찬을 받고 있었다.

"정말 잘 했네!"

"부하들의 용맹 덕분입니다. 소관은 한 게 없습니다."

"그 대담한 기습, 그리고 기습이 가능하도록 한 신출귀몰한 기동, 거기에 화공까지! 비록 전쟁은 병사가 결국 이루는 것이 맞지만 시작은 분명 장수가 하는 것이야. 허허, 자네같은 장수가 이곳에 또 있었더라면 저 여진놈들을 진작에 밀어냈을 것을. 이럴 게 아니지, 여봐라! 게 누구 있느냐?!"

가볍게 끝날 줄 알았던 칭찬의 자리는 북병사 관사 내의 모든 무장이 함께하는 승전연이 되어 버렸다.

"만나서 반갑네! 자네의 명성은 내 익히 들었네. 이번에 여진 놈들에게 크게 한방을 먹였다지?"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운이 좋았습니다."

당연히 모든 장수의 시선과 관심이 주명에게 쏟아졌던지라 아주 죽을맛이었다

거기다 백의종군중인 주명 입장에서는 하늘같은 장성들이 즐비한 곳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 자체가 불편한지라 어서 빨리 떠나고 싶었지만 주연은 그의 마음도 몰라주고  밤새도록 이어졌다.

무장들인지라 주량 자체가 일반인들과는 차원이 달랐기에 정말 밤새도록 미친듯이 퍼마셨고 그걸 또 같이 대작해야 하는 입장인 주명 역시 미친듯이 퍼마셨다.

오우거 수준의 힘이라는 건 근력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체력과 맷집또한 그렇다는 것이니 아무리 퍼마셔도 말짱한 탓에 별 상관없지 않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게 오히려 다른 무장들을 자극했다.

"호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군!"

"내 자네가 취하는 모습을 꼭 봐야겠네!"

집중적인 술잔, 더 나아가 술병의 폭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마셨음에도 취하지 못했고 결국 '대작'의 형식을 빌은 폭격이었던지라 장수들이 먼저 나가 떨어졌다.

"매일 오늘같이 이리 승전연을 베풀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하하!"

상석에 있던 이일마저 그걸 좋다고 껄껄거리며 술을 홀짝이다가 결국 그게 쌓이고 싸여 뻗어버렸던 덕분에 술자리는 동이 거의 트기 직전에 가서야 파장될 수 있었다.

"무식한 양반들 에휴...오늘 병사들만 좋아라 하겠네. 저런 꼴로 업무를 볼 수 있을리 없으니. 근데 왜 난 수십리터는 술을 퍼마신 거 같은데 왜 멀쩡하다냐?"

분명 쓰려야 하지만 그냥 알딸딸한 취기만이 느껴지는 자신의 몸이가진 위력에 내심 놀라며 자리를 뜨려 했던 주명은 북병사 관사 정문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꼭 만나려고 일찍부터 나와 있었는지 추위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백성들의 모습을 봤던 것.

"나리, 꼭 뵙고싶었습니다. 너무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제 아버님이 니탕개란 놈이 이끈 여진 놈들에게 돌아가셨습니다. 흑. 나리께서 여진 놈들을 쓸어버렸다는 소식에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니탕개의 난, 그리고 그 전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졌던 여진족의 침략에 희생당한 이들의 가족들이었다.

조선의 국운이 쇠하여 그 방어선이 헐거워지자 그 틈을 노리고 쳐들어온 여진족들에게 가족을 잃었던 이들.

여인, 노인, 아이를 비롯해 각양각색의 사람 수십이 주명을 향해 절을 하는 모습은 주명의 가슴이 뭉클해지게 만들면서도 또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얼마나, 얼마나 여진 놈들에게 맺힌게 많았으면 이리 찾아왔을까.'

그리고 없이 살았는지 이 추운 북방에서도 겨우 삼베옷 몇겹으로 꽃샘추위를 버티며 어떻게든 자신을 만나려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화가 치밀었다.

"아저씨, 저도 아저씨 따라 같이 싸우고 싶어요! 아부지의 복수를 할 거에요!"

특히나 옥현이보다도 어려 보이는 어린 아이가 아비의 복수를 외치며 자신과 함께 싸운다고 했을 때는 이나라 조선이 너무도 증오스럽기까지 했다.

그 아이의 손에 쥐어진 조잡한 죽창을 보며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씨발, 대체 이지경이 되도록 뭐한거야?'

국가가 백성을 지키는 것은 의무이지 선택이 아니다.

그 당연한 것을 대신 나서서 해줬을 뿐인데 이리 고마워하는 저들을 보며 주명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무책임함에 화가 났던 것이다.

진작에 적들을 정벌해서 위엄을 세우던가, 아니면 방어선을 굳건히 세우던가 해야했다.

그마저도 할 수 없다면 백성들을 뒤로 물려 안전한 곳에서 살게 해야 했다.

하지만 이일이 고백했듯이 정벌은 그냥 요식행위였을 뿐이며, 방어선은 더욱 헐거워지고 있을 분이었다.

그리고 사민정책은 여전이 족쇄처럼 백성들을 이땅의 방패로 내몰고 있었다.

세종때부터 시작된 이 사민정책은 방어선의 유지를 위해 백성의 거주가 필요했고, 방어선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된 지금에 와서는 이제 백성의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나라 조선은 무려 수십년 넘게 제 백성을 방치했고, 더 나아가 비겁하게도 백성들 뒤에 숨어 버렸다.

여진족들이 물러가기 위해 필요한 건 누군가의 피와 땀.

자신 대신 백성들이 여진족의 칼날에 피를 뿌리며 희생되고 땀흘려 일군 것들을 빼앗기도록 방조한 셈이지, 조선은 사민정책으로 이 땅에 백성을 묶어 방패로 삼았던 것이다.

"나으리, 변변치는 않지만 아들놈이 장가갈 때 쓰려구 만들어둔 탁주를 부디 드셔 주십시오. 아들놈이, 아들놈이 어흑흑. 이미 죽어버렸지만 아들놈이 꿈에서 계속 장가를 간다고 웃는통에, 흑 저걸 차마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허나 나리께서 드려 주신다면 아들놈도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장수들과 함께 마셨던 고급 술의 뒷맛이 매우 썼다.

국가가 무엇인가?

백성의 방패가 되어주어야 하는 게, 그들의 울분을 달래줄 검이 되어야 하는 게 국가가 아니던가.

"아부지가 죽을 동안 관군은 코빼기도 안 보였어요! 저라도, 저라도 나서지 않으면 우리 아부지 원한은 누가 풀어요!"

대체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

***

북병사 이일의 장계를 받아든 선조는 무릎을 치면서 어울리지 않게 화통하게 웃는 모습이 기쁨을 감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크하하하! 이 얼마나 장한 일이란 말인가. 다들 이 장계를 보았겠지?"

애초에 늘 하던대로 침전에 들어박혀 홀로 장계를 보지 않고 이곳 대전에서 굳이 신료들이 보고있는 가운데 장계를 읽는 행위 자체가 의도성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세운 업적을 신료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쇼와 같은 모습.

하지만 주명에게 사병을 실질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무거운 권한과 또 역모에 연루되었음에도 백의종군이란 가벼운 처분을 내린 자가 바로 임금이므로 김주명의 공은 곧 왕의 공이었다.

"수만의 적이 우글거리는 곳에 겨우 일천의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할 생각을 하다니 이 얼마나 용맹한가. 전조의 전조에 여진을 벌벌 떨게 했던 그 문하시랑(척준경)과도 비견될 정도 아닌가!"

그렇기에 왕은 주명이 이룩했던 위업을 마치 자신이 세운 것 마냥 자랑하면서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적들의 눈을 피해 기습적으로 야습을 감행하고 또 화공을 더해 이십분지 일도 안되는 일천의 병력으로 적병 이만 중 수천을 사상케 하고 수급 300구를 베었으니 이 얼마나 뛰어난 병략인가 말이야. 그렇지 아니한가?!"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그 자랑질에 붕당을 떠나 신료들에게 이견을 제시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은 고작 무장의 전공이니 조정에 풍파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전공 자체가 너무도 흠잡을 수 없이 완벽했기 때문에 이견을 제시할 수도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

굳이 태클을 걸자면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공격을 허락해준 이일(?)의 결단력이 더욱 칭찬받아야 한다는 말을 할 수도 있겠으나 굳이 무장따위의 일에 신료들은 왕의 기분좋은 심기를 거스르는 모험을 하고싶지 않았다.

"이 공은 백의종군을 풀고도 남음이니, 내 상찬(賞讚)을 하여야 겠다!"

군주로서 위엄을 세울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왕은 자세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교(傳敎)를 내렸다.

"대저 국가란 국왕의 위엄에 의해 그 흥망이 좌우되는 것은 요순과 걸주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노라. 함경도의 수십만 군민이 그저 저 야인들의 침탈에 당하며 비명을 지르기만 할 때 오로지 김주명이란 자만이 함성을 지르며 야인들을 쓸어버리고 국왕의 위엄을 만방에 떨쳤으니 이 어찌 장한 일이 아니더냐!"

수십만 군민을 얘기할 때는 쓸모없는 버러지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주명을 얘기할 때는 애지중지하는 보검을 볼 때 짓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왕.

하지만 엎드려 부복해 있는 신료들로서는 그의 표정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없었다.

"쓸모있는 자를 치하하는 것은 국왕 일이니, 또한 국왕의 위신을 세워 조선의 위신을 세운 이를 상찬하는 것은 의무일지니 내 어찌 상찬하지 않을 수 있으랴."

왕에게 있어 국왕의 위신이 조선의 위신인 것과 마찬가지로 왕은 곧 국가였다.

굳이 왕권신수설이라는 서양의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유가에서도 이미 왕은 백성들의 어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버이는 자식의 모든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지니 가장이 곧 가문인 것처럼 국왕은 곧 국가인 것이다.

"이번 경인북정(庚寅北征)에서 큰 공을 김주명의 공이 매우 크니..."

경인년(1590년)에 북쪽을 정벌했다는 경인북정이라구 굳이 칭하며 거창하게 들먹이는 이유는 국왕의 치적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한 장수의 분전이 아닌 정부에서 기획하고 장수는 그저 그 뜻을 받들어 정벌을 행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말이다.

이일에게 자신이 미리 극비리에 명령을 내렸다고 하면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설마 국왕을 의심할 것인가?!

어쨌든 본인이 스스로 정벌이라고 말했으니 이렇게 성공한 정벌에는 반드시 공신이 있어야 했다.

"김주명의 백의종군을 풀고 그를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는다. 녹둔군(鹿屯君)의 작위에 만호(萬戶)의 직위를 내리니 김주명은 그의 식읍(食邑)으로 내릴 녹둔도를 지키는 것은 북방을 막는 든든한 방패로서의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실 선무공신이라는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리되었으니 역시나 원래 역사에 없었던 '경인북정'의 공신 이름으로 기록에 남을 터였다.

정벌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공신책봉을 짐작했던 신료들이라 그리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지만 식읍이라는 얘기에서 웅성거림이 커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된다! 식읍이라니. 그 엄청난 것을 어찌..'

식읍이 무엇인가?! 수조권(收租權)을 얻을 수 있고 면세(免稅)의 특권을 지닌 공신전을 아득히 넘어서는 특혜중의 특혜가 아니던가.

공신전에 그곳의 백성들에게서 노동력마저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더한 것이니 사실상 이건 영지가 아니던가?

하지만 녹둔도라는 말에 웅성거림은 잦아들고 끄덕이는 이마저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달라졌다.

비록 조선 초기까지만 시행된 제도라지만 아예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또 너무 파격적인 혜택이라지만 북방의 척박함과 야인의 위협, 그리고 결정적으로 녹둔도라는 곳의 빈곤함을 고려해 봤을 때 저건 경기 지역의 공신전을 내리는 것만 못한 빛좋은 개살구였다.

'크흠. 그래도 고작 20호도 채 못되는 녹둔도를 내린다는데 이정도면 괜찮은 거 아닌가? 지금은 여진의 준동이 심해져 그보다 더 가호가 줄었을 테니 이건 뭐 그냥 빈땅이 아닌가.'

'식읍이라는 게 파격이긴 하지만 전하께서 공을 세운 이를 크게 상찬 했다는 말이 듣고싶으신게지. 후한 군주로 기록될 게 아닌가.'

고작 변방의 무관직인 종4품 만호 벼슬을 내리고 말고의 문제는 애초에 그들의 관심사항도 아니었다.

조용히 눈빛을 교환하던 신료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왕의 뜻에 찬동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

주명에게 뜻하지 않게 근거지(根據地)와 기반(基盤)을 얻게되는 순간이었다.

***

사카이 거상 하야타카는 주명의 의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년의 상행경험으로 얻은 관록으로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기에는 의뢰비로 받은 금액도 지나치게 컸을 뿐더러 너무나도 요상한 의뢰였던지라 그럴 수 없었던 것.

서양의 요상한 총기를 천금을 주고 구해오라고 했을 때는 무기에 관심이 많겠거니 하는 마음에 이해라도 갔지만 이번 일은 도저히 이해 불가의 영역이었다.

"나야 돈을 많이 주면 되니 상관은 없다만..."

돈만 준다면, 그리고 조국인 일본국에 정말로 큰 해악이 되지 않는다면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용의가 있었다지만 눈앞에서 하늘의 별만 바라보고 있는 저 호기심 많은 청년을 보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려 만냥이다 만냥! 대체 저런 자를 구하기 위해 그 거금을 내어놓은 이유가 뭐란 말인가?"

피사의 대학에서 수학교수를 하던 저 사람을 데리고 와 달라고 자신이 받은 설탕과 모피의 가치가 그정도였고 그건 현대의 가치로 100억원이라는 미친 금액이었다.

거기에 저 사람을 설득하는데 쓰라고 준 족히 100억원은 넘어보일 커다란 금덩이와 주명의 이름으로 된 백지수표를 생각하면 정신이 아득해질 지경이었다.

대체 저 학자 나부랭이가 뭐라고 수만냥을 쓴다는 말인가!

물론 저 학자는 그런 것 보다는 주명이 쥐어준 물건, 그러니까 요상하게 생긴 둥근 구체들 8개를 가운데의 거대한 구체 주변으로 배열한 뜻모를 물건을 보고 수락한 것이라고 의뢰를 수행하러 유럽에 간 네덜란드 상인의 말을 듣긴 했지만.

하지만 그자가 해주었던 말, 저 학자 나부랭이가 그 물건을 보고 지껄였다는 말을 들으니 하야타카는 미치광이를 데려오는데 수만냥을 쓴 주명의 행동이 재물을 바다에 갖다 버리는 것쯤으로 느껴졌다.

"그때 뭐라고 했다지? 지구가 돈다고?! 병신같은 소리! 저새끼 머리가 돈 거야!"

수평선 너머로 점점 가라앉아 사라져가는 대마도의 모습이 마치 바닷물에 버려지는 재화처럼 느껴져 상인의 감수성으로 허탈하게 바라보며 하야타카는 이번에야말로 주명이 실수를 한 거라 단언했다.

아마 자신이 주명과의 거래로 사카이의 거물중의 거물이 되지 않았다면 네덜란드 상인을 통해 일을 추진할 수도, 그리고 이런 국제적인 거대한 의뢰를 할 수도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 엄청난 의뢰의 결과물이 저런 머저리에 미치광이라니.

허탈함에 술이 당겨왔지만 머저리 학자가 요상한 거울같은 걸로 하늘을 쳐다보다 눈이 아프다고 방방 뛰는 꼴을 보니 화딱지가 나서 술맛이 확 달아났다.

"저딴 머저리를 태우고 녹둔도로 가야 하다니 휴...이름이 뭐였더라? 갈릴레이?! 참 이름도 머저리같이 책상물림처럼 지었네."

과학이 녹둔도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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