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54화 (54/77)

〈 54화 〉 53화 - 기반(基盤)(2)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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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에 주명이란 이질적인 존재가 등장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그는 쉬이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물음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두 전투에서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 망설이지 않고 답할 것이다.

역사책을 읽으며 한명의 한국인으로서 느꼈던 울분과 안타까움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으며, 또한 미친듯이 강해질 수 있게 해주는 이 게임 시스템이 자신에게 주어진 데에는 무언가를 해 내라는 사명도 같이 주어졌던 거라고 믿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같은 말을 쓰고 같은 문화를 공감하는 동족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죽어가는 옥현의 모습을 보며, 그 어린 소년이 주명 자신이 하는 말과 같은 언어로  ‘엄마’를 말하며 죽어갔을 때 사명을 찾고 다짐했었다.

이런 고통받는 아이들이 무수히 생겨날 임진년과 병자년의 두 재앙이 조선에 닥쳤을 때 자신이라도 나서서 창칼과 전란을 막아보겠다고.

그러기 위해 피로 얼룩진 수라의 길을 걷는 거라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여기며 손에 피를 묻혀왔던 것이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막고 나면, 당장의 사명을 해결하고 나면 뭐가 남는가?

재앙 앞에 선 피에 굶주린 악귀라면 재앙을 이악제악을 한다는 의미라도 있을 터인데, 그 재앙이 없어진다면 그저 악귀만 남아버려 자신을 보며 괴로워하겠지.

창으로 창을 막을 순 있다.

그게 창(戈)을 그친다(止)는 무(武)라는 한자의 뜻.

하지만 겨눠진 창이 거둬지고 나면 처음에 자신이 쥐었던, 이제는 피가 묻어버린 창만 남아있을 뿐이니 진짜 왜놈들이 말하는 그 괴물같은 오니가 되어 버리는 거라고 생각이 드니 그건 너무도 싫었다.

피묻은 창을 쥐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황무지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조선인들, 특히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겠는가.

뭔가 다른 생산적인 것을, 창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

더군다나 게임 시스템뿐만 아니라 막강한 콘솔 명령어까지 있는 자신은 더욱 대단한 것을 할 수 있다.

바로 시대를 개척해 나가는 것!

전란을 막고나서도 조선 조정은 전혀 변하지 않고 오히려 성리학을 더욱 엄격히 강요하는 골수 유교 탈레반이 되어 버린다.

조선 백성은 전란 전과 마찬가지로 굶주림과 수탈에 허덕인다.

조선은 이대로 가면 윗대가리는 성리학적 소중화란 행복회로에 빠져, 백성들은 굶주림이 딸린 삶이란 수렁에 빠져 역사대로 아무런 족적도 남기지 못하고 더 나아가지 못하다가 일본에 허무하게 먹히는 운명이 되는 것이다.

일본과 여진이라는 이웃 깡패들에게 선빵을 쳐맞고도 각성하지 못하고 그냥 혼자만의 성리학 속에 빠져 ‘난 착한 군자야’ 하고 있었으니 결국 패배할 수밖에.

그래서 주명이라도 대신 조선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개척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첫단계는 바로 녹둔도에 만든 실용학문을 가르치는 학교였다.

윤아를 비롯한 고아들을 돌봐주는 고아원 역할도 겸하는 그 학교에서 아이들은 주명이 짠 현대적인 커리큘럼대로 새로운 인재로 거듭나고 있었다.

상업을, 공업을 가르치는 이 학교의 이름은 바로 대한(大韓)학교이니, 대한학교를 통해 구시대의 조선(朝鮮)이 신시대의 대한(大韓)으로 나아가고 거듭날 기초를 닦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인재로 거듭나려먼 단지 실용학문을 가르치기만 해서는 안된다.

조선 후기의 실학이 근대화의 맹아로라도, 가능성이라도 될 수 있었던 것은 선구자이자 거인이었던 정약용이 있었던 것처럼, 단지 사람과 시설의 모임에 불과한 학교 그 이상의 거인이 필요했다.

주명의 생각에 그건 바로 선구자, 정약용과 같은 거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는 하늘이 내린 혜안과 사고력을 지닌 그 선구자란 존재가 있다면 아이들을 이끌어 새로운 시대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니,

아이들이 그의 인도대로 나아간다면 이 조선도 대한(大韓)으로 진보하는 것이다.

굳이 조선이라는 국체가 바뀌지 않아도 사람이 바뀐다면 나라가 바뀌는 것이니까.

자신이 세운 대한학교가 단지 학교를 넘어 시대의 첨병이자 기수인 상아탑이 되려면 반드시 선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처음 학교를 세웠을 때웠던 몇달 전에, 윤아와 아이들이 즐겁에 웃으며 수업을 받았던 그날에 바로 질렀다.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를 모셔와 아이들을 일깨워줄 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면, 하야타카에게 반쯤은 포기한 마음으로 던져줬던 수만금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뭐 어차피 두시간 짜리(CP 2포인트) 설탕 일만톤이면 그깟 돈은 떡을 친다.

돈으로는 절대 미래를 살 수 없다.

미래는 사람들이, 아이들이 열어가는 거니까.

단지 미래를 열어줄 사람을 사올 수는 있겠지.

무한의 자원과 역발산의 무위는 그 자체론 가치가 없다.

오로지 교육을 통해 시대를 열어줄 아이들을 재물로 기르고 무위로 보호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아이들이 남는다면 자신이 든 피묻은 창과 자신이 걸어온 수라의 길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

"음? 왜 그러니 윤아야?"

"새로오신 선생님이 너무 무서워요. 숙제도 너무 많고, 특히 그 수학이라는 과목은 정말 너무 어려워요."

당장은 그 괴팍한 성격을 지닌 '선구자'씨에게 아이들이 시달리겠지만 말이다.

그 선구자는 고집도 세고 다혈질에 독설가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아이들이라고 특별히 상냥하게 대해줄 리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피사의 대학에서 시간강사지만 교수로 일하던 사람이 초, 중생을 가르치게 되었으니 아이들을 더욱 보채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인벤토리의 설탕을 꺼내려는 주명이었다.

'대신 나중에 아저씨가 정철 그놈은 어떻게 해줄게. 근데 이미 강원도 관찰사로 갔던 것은 막을 수 없으니 관동별곡은 못 막겠네. 미안.'

힘들어하는 윤아를 달랜 뒤 주명은 발걸음을 옮겨 학교로 향했다.

대충 건물의 형태만 잡고 무식하게 지었던 주둔지와는 달리 제대로 각잡고 재원을 아낌없이 투입하여 지었던 탓에 학교는 멋들어진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제는 녹둔도의 만호가 되었던 탓에 김갑수가 쓰던 관청을 주명이 쓰고는 있지만, 그 관청보다 훨씬 크고 넓은 이 건물은 누가봐도 녹둔도의 중심처럼 보였다.

교육이 모든 것의 기본이자 기반이라고 생각하는 주명에게 있어 그런 모습은 당연했지만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는, 특히 꼰대 무장이었던 김갑수가 불만이 컸지만 돈만 쥐어주면 닥칠 놈이었으니 금방 태세를 전환시킬 수 있었다.

학교는 중앙의 거대한 학습동과 뒷편의 기숙사동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기숙사동은 일종의 고아원을 겸하는지라 돌봐줄 아낙들을 고용하여 사감 겸 보모로 두고 있었다.

물론 여진족의 침략으로 가족을 잃은 아낙들을 위주로 정책적으로 고용하는 생계대책 마련의 성격도 있는지라 필요 인원보다 많은 아낙들로 북적였기 때문에 일종의 여자들만 모인 여초(女超)회사의 분위기가 나기도 했다.

중앙의 수업동 우측에는 새로 지어진 멋들어진 건물이 위치해 있었는데, 하야타카로부터 갈릴레이가 온다는 소식을 서신으로 듣자마자 주명이 그를 위해 만든 연구소였다.

그 연구소에 들른 주명의 눈에 초췌한 모습으로 자료분석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거금을 들여 주명이 그와 맺었던 계약서에 의무로 명시했던 아이들에 대한 수업시간이 이미 끝났던지라 갈릴레이는 연구소에서 주명이 준 각종 물리학 자료들을 보는 데 자유시간을 쓰고 있었던것.

"오셨습니까? 지구가 돈다는 것을 넘어 태양계라는 개념을 알려준 것만해도 이건 시대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력이라니, 모든 것은 서로 당기는 힘이 있다니...이건 혁신입니다!"

이미 젊었을 적부터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주장된 지동설을 신봉하고 있었던 갈릴레이에게 지구가 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 것은 그저 이론의 검증이자 신념의 확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주명이 그를 초빙하기 위해 만든 비장의 물건인 태양계 모형도를 보며 크게 놀랐던 갈릴레이는 자신의 눈을 틔워준 동방의 현자(?)를 찾아가기 위해 이 이역만리까지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여기서 그가 계속해서 던져주는 시대를 앞서간 지혜에 계속해서 놀라고 그것을 즐겁게 탐닉하며 정말 오길 잘했다고 확신이 들었다.

"저는 그저 개략적인 개념만 제시해 드리는 건데요. 이걸 이론으로 만들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학문으로 구체화 하는 것은 온전히 교수님만 할 수 있으며 결국 이건 교수님이 발견하는 것입니다."

아직 대학은 있지도 않지만 교수라고 그를 부르는 주명이었다.

그저 시간강사에 불과했던 갈릴레이는 그렇게 자신을 존중해 주는 주명의 이런 배려가 무척이나 고맙기도 했다.

거기다 아직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는 수학자일 뿐인 자신에게 아무리 종신계약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큰 금액을 쥐어주는 고용계약을 맺어주었을 뿐 아니라 백지수표를 쥐어준 게 허언이 아니었다는 것 증명하듯 그가 원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구해주고 있었다.

이탈리아에 있을 때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그 값비싼 재료와 실험기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이 연구소가 온전히 자신의 것이란 것이 너무 신나서 주명이 마련해준 저택은 그저 먼지만 날릴 정도로 연구소에서 먹고자며 생활하고 있었다.

한동안 쉴새없이 주명과 물리학 및 천문학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갈릴레이는 주명이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 상기하자 급히 자세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차, 교수로서의 업무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깜빡했군요."

매주 한번씩 학교의 상황에 대해 보고를 받으러 주명이 오는 자리였던 것.

원래대로라면 자신이 찾아가는 게 맞지만 이게 다 자신을 존중해서라는 것을 갈릴레이도 느끼기에 안그래도 마음에 드는 저 고용주가 더 호감이 가는 갈릴레이였다.

"아이들은 아직은 제 수업을 어려워합니다만 그래도 너무 총명한 아이들이라서 조금씩 따라와 주는 아이들도 생기더군요. 특히 이름이 윤아라는 여학생은 타고난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갈릴레이의 수업을 대학생들도 어려워할 텐데 어린 아이들이라면 말해서 무엇하랴.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 따로 있었으니, 놀랍게도 갈릴레이는 조선어로 주명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수업 자체는 순조롭습니다. 제가 이곳의 말을 할 줄 알게되니 그 샤를이라는 친구가 번거롭게 통역을 해 줘야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강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처음에는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나 이탈리아어까지도 가능했던 샤를이 통역을 해 주어야 해서 수업이 매우 불편했고 강사인 갈릴레이나 학생들 모두 힘들어 했다.

하지만 갈릴레이의 천재성과 주명이 지닌 콘솔의 사기성이 만나 얘기가 달라졌다.

단 몇일만에 조선어를 스킬로 습득한 갈릴레이의 탈인간급의 지능과 천재성.

또 그 1레벨짜리 스킬도 뻥튀기할 수 있는 주명의 벨런스 말아먹는 콘솔명령어의 사기성.

두가지가 만나 갈릴레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선어를 꽤나 능숙하게 사용할 수준까지 올라왔던 것.

거기에 그의 천재성이 더해져 몇일만에 주명의 콘솔로 11레벨이 되었던 조선어 스킬을 17레벨로 올리기까지 했으니 주명도 놀랄 정도였다.

[이름 : 갈릴레이]

[능력 : ---, 지능 35]

[기술 : ---, 조선어(Lv17)]

'근데 왜 샤를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언어스킬이 없는 건가?'

뭔가 이 시스템이란 것에 구멍이라도 있는 것 같았지만 비전투 스킬이니 주명은 그냥 원래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 버렸다.

"아마 신이 계시다면 이곳에 온 것이 제 소명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단 일주일 만에 이곳의 언어를 익힌 것을 보면 이건 신께서 이곳에서 활동하라고 계시를 내린 거라고 확신합니다!"

비록 천동설을 부정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갈릴레이가 기독교도가 아닌 것은 아니었으니, 그가 이곳에 온 것이 마치 신의 소명을 받들어 행하는 거라는 사명의식까지 품게 되었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던 소득.

사실 과학자라고 해서 신실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니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한참을 보고를 이어가는 갈릴레이의 말을 들으며 주명은 그가 자신에게 쥐어준 지금까지 연구한 과제들의 성과물들을 훑어 보았다.

'맙소사, 이미 만유인력의 개념에 거의 근접했어! 뉴턴에 의해 정립된 것보다 백년은 빨라지겠는데!'

'이건 또 뭐야? 미적분까지 정립하고 있잖아?'

고작 몇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역시 시대의 선구자이자 거인은 그 몇걸음 만으로도 몇 천리를 가는 대단한 존재였다.

또 진보의 세계에서의 시계추를, 시간을 가속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갈릴레이 하나를 영입한 것 만으로도 조선의, 아니 대한(大韓)의 과학력은 저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모피무역은 주명과 부하들이 동물들을 싸그리 족치고 있으니 언젠가는 고점을 찍고 몇년 내로 급속도로 쇠퇴할거다.

그 전에 이제는 자신의 영지와도 같은 이 녹둔도를 먹여살리기 위한 장기적인 대안이 필요했고 주명의 생각에 그건 기술력이 기반이 된 공업이었다.

그냥 장인이나 대장장이들을 모아다가 수공업으로 때우는 수준이 아니라 체계적인 분업과 협업이 이뤄지는 혁신적인 공장 체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고, 여기서 내놓을 상품들은 압도적인 기술력이 뒷받침되어야 품질에서의 상품성이 있어 자신의 구상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 공업의 기술력을 선도하려면 필요한 것은 기초과학일지니, 과학은 갈릴레이가 캐리하고 기술은 아이들을 키우면 될 거라는 게 주명의 생각이었다.

"이정도요? 아니 기초개념을 다 떠먹여 주시는데 이것도 못하면 학자라고 하겠습니까?"

절대 못한다.

당신 외에는 아무도 못한다.

갈릴레이니까 혼자만 아는 개략적인 개념도 누구나 납득할 이론으로 정립하고 구체화할 수 있는 거다.

갈릴레이는 근대에 수백년의 시간과 무수히 많은 천재들의 노력이 모여 집대성해낸 근대과학을 그저 주명이 떠먹여주는 개념만 듣고도 홀로 구축하는 미친 캐리력을 지녔다.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거인의 위풍당당한 캐리력에 주명은 조심스레 과학승리를 점쳤다.

그냥 느낌을 뿐이지만, 왠지 남들은 돌도끼 들고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저 안드로메다로 우주선을 날려 이 지옥같은 행성을 탈출할 것만 같은 이 우월감은 무엇일까.

***

정여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주명의 당부를 듣고 처음에는 망설였다.

장인들의 대표가 되어 그 '공장'인가 뭔가를 설립한다는 그의 계획에 망설였던 것은 도무지 그게 뭐하는 건지, 어떤 효과가 있는 건지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주명이 제시한 분업이라는 개념을 실제 실험해본 결과 그게 얼마나 압도적인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인지 체감할 수있었다.

"공장장 어르신, 분업으로 한 장인들이 무려 두배나 더 많은 화살을 만들었습니다!"

실험을 지시한 자신도, 실험을 수행할 장인들도 전혀 믿지 않았던 개념.

그저 작업을 쪼개서 각자 맡은 업무를 수행한다는 간단한 개념이 도입됨에 따라 작업의 효율은 무려 100%나 상승했으니 이는 분업의 혁신성과 기존 장인들의 작업방식의 비효율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서 지금도 열심히 지어지고 있는 최초의 공장인 무기공장.

주명이 북병사와 친분이 있기도 했기에 판매처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북방에서 큰 수요가 있는 물품인 화살과 갑주 등 무구를 생산하는 곳이었다.

이제는 분업의 위용을 확실히 체험했으니 저 공장에는 주명이 당부한대로 전부 분업체계로 돌릴 생각이었다.

천부적인 장인이자 한때 양반신분의 무관이기도 했던 그의 위신은 장인들 사이에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이가 없었고, 연령도 제일 많은 연장자이기까지 하니 그가 하자고 하면 다들 따라줄 터였다.

정여수의 눈에는 상상도 못할 속도로 쏟아져 나오는 무구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근데 저렇게 많이 만들어 놓으면 그걸 사갈 사람이 있으려나?'

임진년까지는 2년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다.

***

주명이 세운 대한학교 중앙의 수업동에는 한 소녀가 언문으로 된 책자를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고작 10살의 소녀가 끙끙거리기에는 그 책자에 쓰여진 '기하학'이란 단어가 너무도 말도 안되는 무게감을 지니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소녀는 가끔씩 '아하'라는 탄성을 내뱉으며 뭔가를 이해하는 것 같은 모습을 내비쳤다.

소녀의 얼굴에는 포동하게 살이 올라 있었지만 평소 많은 고민을 해서인지 조금은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이곳의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푸른 색의 옷감으로 된 예쁜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 소녀와 책 사이의 대화를 끊은 것은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아이였다.

"윤아야? 같이 놀자!"

녀석이 누구인지를 확인한 윤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더니 다시 책으로 빠져들었다.

"윤아야..."

저렇게 단호하게 아무 말 없이 행동으로 거부할 줄은 몰랐던 아이는 상심한듯이 보였지만 윤아의 표정이 너무도 심각해 보였기에 풀이죽은 채로 밖으로 도로 나가버렸다.

"넌 가능성이 있구나."

독설을 너무 심하게 하는 나머지 아이들을 몇번씩이고 울린 전적이 있는 그 괴팍하고 무서운 교수님이 유일하게 딱 한번 칭찬한 게 그녀였다.

그때의 뿌듯함, 성취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윤아에게 놀이로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엄마, 아빠! 윤아는 아저씨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에요. 아저씨가 윤아는 정말 똑똑하다고 했어요."

부모의 무덤 앞에서, 부모의 무덤을 세워줄 수 있도록 해준 은인의 이름으로 약속한 바를 반드시 지키겠다는 결의는 10살 소녀를 공부벌레로 만들었다.

반드시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게 교수님은 학자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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