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4화 - 기반(基盤)(3)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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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이가 교수이자 사실상의 교장으로 있는 대한학교의 수업동.
웬만한 관청의 대청보다도 훨씬 넓은 규모의 그 공간에 5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수업을 하고있는 이는 다행히도 아이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 갈릴레이는 아니었다.
물론 갈릴레이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대학이라는 최상위 교육기관을 경험한 이가 갈릴레이밖에 없기도 했거니와, 그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분인지 다른 교사들은 그를 무척이나 어려워 했다.
고용주이자 이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주명에게 저명한 학자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의원 같은 중인출신이거나 장인 혹은 상인 같은 상민출신인 다른 교사들은 그의 신분이 지체높은 양반으로 여겨졌기에 더더욱.
당시엔 학자는 양반이나 귀족과 동의어였으니까 틀린 생각은 아니었고, 갈릴레이는 몰락 귀족이라지만 피레네 가문 출신이었으니 틀린 사실도 어려웠다.
어쨌든 교사들도 어려워 하는 존재를 학생들이 편하게 대할 수 있을 리 만무.
“그것도 이해 못하면서 이곳에 왜 있느냐!”
"그런 썩어빠진 사고방식으로 공부할 거면 때려쳐!"
심심하면 독설을 날려대는 그 괴팍하고 사나운 태도에 기겁한 나머지 그의 수업은 언제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오늘은 오장육부와 혈맥에 대해 배워 보도록 하겠다."
지금은 그 무서운 교수님의 수학과 각종 어려운 과목을 총 망라한 악마같은 난이도의 수업이 아니고 그나마 좀 듣기 쉬운 의학시간.
아직은 아이들이 관심분야별로 전공을 세분화하기에는 일렀을뿐더러, 교수인 갈릴레이를 제외하고는 엄청 심도있는 학문을 한 이는 없었기 때문에 50명의 아이들이 모두 같은 교육과정을 듣고 있었다.
그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눈의 띄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귀여운 외모에 특히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지닌 남자아이.
"역시 의술은 너무 재미있어. 가끔은 사부님에게 배우는 검술보다 더 재밌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야."
바로 옥현이었다.
다른 수업이라면 일과 후엔 빠지지 않고 검술 지도를 사부인 나미에로부터 받느라 피곤한 나머지 꾸벅꾸벅 졸았던 옥현이었지만 이 의학 수업은 달랐다.
근방에서 나름 명망있는 의원이었던 교사가 풍부한 식견과 경험을 들어 잘 가르치기도 했거니와 옥현에게 너무나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내용이었던것.
“역시 옥현이는 대단하구나!”
이해가 탁월했던 탓인지 수업을 따라가는 속도도 발군이어서 교사의 칭찬을 독차지함은 물론, 단지 두달을 배웠을 뿐임에도 이미 의술을 실제 베풀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
“...그 사슴뿔 달린 모자는 뭐냐?”
“이거 수업시간에 친구들이 만들어 줬어요 형.”
“음, 상태창이 갑자기 보고 싶어지네. 그럼 어디. 응?! 이런 빌어먹을 뭐 이딴 경우가?”
물론 옥현의 귀여움을 돋보이게 했던 사슴뿔 달린 모자를 보고 주명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여다본 상태창을 보고 뜨악한 나머지 에라 모르겠다며 지른 콘솔 명령어도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건 조작이 아니야. 이건 재능을 썩히기 아까워 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야....”
그 당시 주명이 한탄하듯 내뱉은 말을 옥현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군다나 정여수가 이제는 때가 되었다며 내려준 자(字)가 초파(超叵)라는 것을 들었들 때 주명은 참지 못하고 마시던 찻물을 뿜었었다.
어려움(叵)을 초월(超)한다는 게 그리 뿜을 일이었던가? 아님 그 발음에서 다른 무언가를 연상했던 것인가?
“얌마. 조선놈이 사무라이 된다고 왜색에 물들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젠 그 만화책 캐릭터 이름까지 따라할 줄이야. 후, 그나마 쉽게 불리는 호가 아니라 자라서 다행인가.”
역시나 주명의 한탄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옥현.
여기서 자(字)와 호(號)가 다른데, 자는 성년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새로운 이름이며, 호는 손쉽게 불릴 수 있는 일종의 별칭같은 거다.
피휘의 관습이 있었기에 본명과 자는 이름이라 여겨 손쉽게 부를 수 없었고 실제로 지칭어나 호칭어로 쓰이는 것은 호였다.
“그래 니가 해라 의사. 에혀.”
주명의 상태창 조작 덕분에 한층 진일보한 옥현의 의술은 이제 수십년의 의원생활을 했던 교사와도 필적할 정도였다.
그덕분에 가끔씩 나미에를 따라 들른 해병대 병영에서 대원들을 손쉽게 치료해 줬던 통에 마치 해병대의 마스코트처럼 귀여움을 독차지 하고 있었다.
실제 진료까지 하는 판인데 이론 수업은 말해서 무엇하랴.
“옥현이는 윤아와 다른 아이들을 봐주거라. 나는 이쪽 아이들을 봐줄 테니. 허허허 다들 옥현이 반만이라도 이해해 주면 좋으련만..”
의술 수업시간에도 최고 우등생인 동시에 조교 역할까지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옥현을 우러러보며 동시에 선생님을 대하듯 어려워 했지만 예외도 있었다.
“...나 혼자 해볼 테니 저리가.”
웃는 얼굴로 특유의 귀염상인 얼굴과 타고난 친화력을 뽐내며 도와주려 다가온 옥현을 냉정하게 쳐내는 또다른 우등생인 윤아였다.
‘기분나빠!’
교수님이 유일하게 인정한 재능이 바로 그녀 자신인데, 다른 모든 수업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자신인데 이 수업에서만큼은 그게 아니라는 게 너무 분했다.
저렇게 자신을 도와주려 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던 것.
주명 덕분에 그 재능을 살릴 수 있게된 천재과학소녀의 자존심은 절대로 동갑내기 소년이 한 과목이라도 자신보다 우위를 가져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윤아에 대해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옥현은, 그래서 가장 먼저 윤아에게 다가가 가르쳐 주려고 했던 녀석은 영문도 모르고 낙담해야 했다.
“알았어..”
풀이 죽은 강아지처럼 힘없이 알겠다고 대답한 옥현은 하는 수 없이 다른 아이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형, 나좀 도와줘요.”
“응, 일송이? 알겠어 하하 이 형님이 머리에 쏙쏙 박히게 잘 알려주지. ”
그래도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조금 기분이 풀렸다.
게다가 저 일송이라는 아이는 심성이 착하기도 했거니와 상업을 가르치는 수업에서는 그 윤아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성취를 보이는 총명한 녀석이기도 해서 성품과 능력 모두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혈맥과 오장육부가 뭐냐면...”
게다가 자신처럼 가족을 잃은 아픔을 경험한 저 녀석에게 공감이 가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에 최대한 친절하게 가르쳐 주려 했다.
일송이 녀석은 저 멀리 거제도에서 온 녀석이라는데, 본래는 더 내륙에 살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지어준 이이첨이란 은인을 따라 내려왔다고 한다.
내륙에서 살았을 때는 무척이나 힘겹게 살았고 어머니도 가난에 허덕이다 돌아가셨지만 주명을 만나 거제도에서는 풍족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옥현은 주명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에서도 동질감을 느꼈다.
녀석 뿐만 아니라 주명 덕분에 생계를 유지하는 유랑민이 당시 거제도에 많았다는데 그러다 주명이 백의종군을 하게 되자 다들 많이 울었다고.
하지만 녹둔도에 도착한 뒤 몇일 뒤, 놀고있던 함선들을 보고 혀를 찬 주명이 일부 해병대원들을 시켜 그들을 데려왔고, 일송이 녀석도 그들 무리에 섞여 올 수 있었기에 이렇게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것.
“근데 이름을 은인께서 지어 주셨다고?”
“응, 우리 집 뒷편에 있던 소나무를 보고 갑자기 우시더니 이름을 내려 주시더라고. 은인께서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셔! 그래서 아부지도 나도 그분께 이름을 받은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어!”
“맞어, 나도 네 얘기를 들으니 그분이 존경스럽더라고! 탐악한 아전을 응징하는 그 위엄 캬!”
그런 옥현의 여유로운 모습을 바라보며 골치아픈 의학 서적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윤아는 속상한 나머지 표정을 더욱 일그러트렸다.
‘재수없어.’
왜냐하면 너무나도 핵심을 잘 짚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는 옥현의 탁월함에 아까부터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여 경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녀석들이 잡담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양반의 핏줄은 과연 다른 것인가 하는 절망감마저 들 때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쥐던 의서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다.
‘내가, 내가 이길거야. 핏줄따윈 아무 상관없어. 반드시 내가 이길거야!’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동안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던 그 밉고 또 미운 양반따위, 반드시 실력으로 꺾어 보이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윤아는 그날의 마지막 수업이자 경쟁심에 불타는 와신상담의 시간이기도 했던 그 의술수업이 끝난 후 늘 하던 대로 그 언덕으로 향하기 위해 학교를 나섰다.
힘쎈 도깨비 아저씨의 명으로 항시 학교를 경비해 주고 있는 해병대 아저씨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발걸음을 재촉했다.
부모님과 동생이 쉬고있는 그 언덕.
이제는 마치 공동묘지처럼 다른 이들의 가족도 쉬고있는 그 언덕에 도착하자 윤아는 늘 하던대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가족들의 무덤 앞에서 재잘대며 늘어 놓았다.
"엄마, 오늘도 윤아가 가장 칭찬을 많이 받았어요. 그뿐인줄 아세요? 그 대단한 갈릴레이 교수님에게 오늘 두번째 칭찬을 받았다니까요? 그것도 천문학 시간에 말예요!"
아직은 늦은 오후라 보이지 않을 별들이 그녀의 눈에는 보이는 것처럼,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별이 있을 위치를 하나하나 가리키며 그녀의 천문학 성취를 자랑하는 윤아의 모습.
바람에 풀이 어지러이 날리는 가운데 아름다운 소녀가 하늘을 보며 별을 헤는 그림같은 광경이었지만 돌연 시커먼 이들의 등장과 함께 그 한폭의 그림에 먹이 번지려 했다.
"낄낄낄. 꽤나 반반한 계집인데?"
"이 더럽고 추운 북방에 이런 계집이 있다니 놀랍군. 크크크."
총명한 그녀였기에 가끔 나미에가 와서 가르쳤던 왜국의 언어를 이제는 어느정도까지 알아들을 수 있었고, 그래서 놈들의 역겨운 말이 이해가 되어 몸이 떨려왔다.
사실 저 흉악스러운 인상에 음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지껄이는 말이라면 설령 말을 이해 못하더라도 그 의도를 짐작하기에는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저, 저리가요!"
도움을 구하기 위해 최대한 크게 소리를 지른다고 질렀지만 떨리는 마음에 말까지 더듬게 되는 그녀.
뒷걸음질을 쳐 보지만 너무 두려움에 놀란 나머지 방향을 제데로 잡지 못하고 어머니의 무덤에 세워진 비석에 부딪혀 주저않아야 했다.
"흐흐, 일본국의 말도 할 줄 아네? 이거 더 흥분되는군."
"꼬마야? 이 아저씨들에게 극락을 보게 되면 야메떼(やめて)라고 계속 외쳐주지 않으련? 크크 그러면 더 멋진 극락을 맛보게 해주마 크하하!"
자신을 향해 슬글슬금 다가오며 음탕한 눈빛을 뿌리는 두 사내는 허리에 일본도로 보이는 검을 차고 있었던지라 그녀는 더욱 두려웠다.
저항하면 저 검에 의해 일어날 폭력이, 저항하지 않으면 그녀가 겪게 될 끔찍한 일들이 떠올랐다.
"아저씨..도와줘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비석의 감촉을 느끼며 그녀는 애타게 자신을 한번 구해준 적이 있던 이땅의 지배자를 불러보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지금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고 있어 도저히 이 상황을 알아챌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부모님께 약속했는데.
갈릴레이처럼 훌륭한 학자가 되겠다는 꿈이 이렇게 끝나는 건가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재수없는 옥현이 녀석을 언젠가는 의술에서도 이겨 주겠다고 마음먹은 그런 마음들이 이제와 생각해 보니 부질없이 느껴졌다.
녀석을 떠올려 보면 나름 멋진 구석도 많은 괜찮은 녀석이었는데 좀 더 잘해줄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이제는 두 일본인 사내가 내뿜는 퀴퀴한 냄새가 느껴질 정도로 놈들이 지척에 다가오자 그녀의 떨리는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리고 그 눈물이 땅에 닿기 직전.
"그만!"
저 멀리서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검을 찬 소년이 뛰어왔다.
어린 소년의 속도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마치 바람을 타고 것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날 정도로 빠른 쇄도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소년이 검을 패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왜인 두명은 일제히 검을 뽑아 소년에게 겨누었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체구에 맞도록 맞춤형으로 제작되었는지 일반적인 일본도의 절반정도밖에 못 미치는 소년의 검을 보자 비웃으며 이죽거렸다.
"꼬맹아, 주제에 검을 차고 온 것은 가상하다면 더 까불면 이 아저씨들이 널 죽여버릴 수 있거든? 이 아저씨들은 무려..."
"쓰레기지. 왜? 주인도 못찾고 길바닥을 헤메는 들개새끼들 같은 그 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일 생각이었나?"
정곡을 찔렀는지 일순 말을 더듬은 왜인이었고 금세 분기에 차 씩씩거렸다.
"이 이새끼가?!"
"검을 쥔 꼬라지를 보니 사부님 말씀대로라면 길바닥에서 되는대로 검을 배운 근본없는 강아지새끼같은데?"
더이상 못참겠던지 이죽거렸던 왜인이 소년에게 뛰어가 검을 내리그었다.
어린 아이에게 무시당했다는 분노에 강한 힘이 실린 그 일격이 쏘아지는데도 소년은 눈은 침착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이 대련으로 상대해 봤던 이들은 저런 허접한 놈들 따위가 아니었거 저런 일격 따위는 너무도 느려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으니까.
해병대는 아니지만 순번 0번의 최고의 검사이자 소년의 스승인 나미에.
그리고 순번 1번이자 해병대 최고참인 동시에 총대장을 맡은 야마모토.
마지막으로 소년을 특히 귀여워하기도 했으며 소년의 스승인 나미에로부터 검술을 사사받은 은혜도 갚을 겸 자주 대련을 해 주었던 순번 8번의 히로시까지.
대마도에서의 그 몰이사냥, 그리고 그간 여진족을 쓸어버렸던 무수한 전투 덕분인지 해병대는 하나같이 훌륭한 검사가 되어 있었다.
"최하위 순번인 820번 녀석마저도 그럭저럭 봐줄 만하네. 그녀석, 아시가루(하급 무사) 정도는 홀로 상대할 수 있겠어."
무려 전원이 사무라이 수준 이상의 검술을 지닌 해병대 중에서도 최강의 두분과 최상위권의 한명에게 검술을 지도받은 옥현이 저런 허접한 낭인들의 검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다.
사선으로 쏟아져 내리는 검격을 반발짝 옆으로 물러나며 피한 옥현은 그와 동시에 겨누고 있던 검으로 놈의 손목을 베어버렸다.
"끄아악!"
피를 뿜는 손목을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 하는 놈을 뒤로한채 유효타가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윤아의 앞에서 검을 들고있는 또다른 낭인에게 달려간 옥현.
"어, 어어.."
마치 질풍처럼 쇄도하는 보법의 신묘함과 속도에 그놈이 어버버하는 그 짧은 당혹의 순간 이미 옥현의 공격인 놈의 손목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역시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낭인.
비명을 지르며 뒹굴고 있는 놈들을 차갑게 노려본 뒤 옥현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아에게 다가갔다.
'놀란 모습도 예쁘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소녀에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며 스스로를 잠시 자책한 옥현은 바들바들 떨고있던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
그리고 계속 그녀의 손을 잡은채로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뒤를 돌아보며 옥현에게 저대로 놔둬도 되냐고 눈짓을 했지만 옥현은 그저 앞만 바라보고 길을 갈 뿐이었다.
왠지 저 재수없는 녀석의 등이 듬직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윤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다시 경쟁심을 불태우려 했다.
하지만.
'따뜻해.'
내외를 따지는 이 시대임에도 대범하게 자신의 손을 잡고 이끌어준 저 녀석의 손이 너무도 따뜻하게 느껴져서.
그리고 주저앉아 있었던 그녀를 녀석이 일으켜 주지 않았다면 놀라서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자신은 계속 그런 상태였을 거라 생각하니 녀석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아마 저 왜인들의 목을 칠 수 있었음에도 손목을 베는 것으로 끝냈던 것 역시 피에 익숙하지 않을거란 생각에 그녀를 배려한 거겠지.
소년과 소녀는 한참이나 말없이 길을 걸었지만 잡은 손은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저 손목을 베여 무력화된 낭인들은 어찌되는 것인가? 설마 저런 놈들을 상대로 옥현이 자비를 베풀었던 것인가?
비명을 지르던 낭인 두놈은 눈앞에 나타난 누군가의 압도적인 기세에 고통도 잠시 잊고 입을 떡 벌려야만 했다.
우두둑
"이봐 들개들. 고작 그정도가지고 아파하면 안되지?"
뭔가 느낌이 안 좋다는 옥현의 말에 검술 지도를 해 주려다 말고 녀석을 따라왔던 해병대원이 한명 근처에 있었으니까.
누나가 겁탈당해 자결했던 아픈 경험이 있기에 저런 놈들을 무척이나 혐오해 마지 않았고 바로 튀어나가려 했지만 옥현과 소녀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 뒤 씨익 웃으며 네가 대충 무력화 하라고 등을 떠밀어 준 사내.
"내가 주군께 배운게 여러개지만, 그중에서 직접 몸으로 배운 게 하나 있는데."
퍽퍽퍽
"꾸에엑!"
"바로 구타술이지 훗."
왜구였던 시절 주명에게 빨갛다는 이유로 무참히 짓밟혔던 적이 많은 히로시였고, 그다지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건만 이제는 추억처럼 회상할 수 있게 되었을 정도로 주명과의 유대가 깊어지고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커졌다.
이제는 고수의 풍모를 완연히 내비치는 순번 8번의 해병대원이자 검사였던 그는 검은 뽑지도 않은 채 놈들을 개패듯 패기 시작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주먹이 잘 보이지도 않았으며, 놈들은 그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뱉으며 쳐맞고 쳐맞을 뿐이었다.
***
"내가 네 아버지다."
"네?!"
왠지 잘린 손목을 부여잡으며 너무나도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된 절망감에 "안돼에에에!"를 외쳐야 할 것 같아보이는 대사였지만 주명은 너무도 황당한 나머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갑자기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나가 봤더니 전에 봤던 김시민과 웬 어르신이었고,
"어흐흐흑. 시신(金時愼)이와 완전히 똑같이 생겼구나. 정말 고생이 많았단다 내 손주야. 어흑흑."
갑자기 그 어르신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더니 손을 부여잡으며 통곡하지 않나.
"아버님께서 손주를 위해 흔쾌히 나서 주셨음에도 가문에서 네 모친의 출신을 이유로 반대가 많았지만 네가 공신에 책봉되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반대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그래서 가문의 결론은..."
그저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거라면 크게 반대할 이유가 없을 텐데 그토록 반대했던 이유가 뭐냐면 바로 자신을 김시민의 양자로 삼겠다고 해서 그랬다는 것.
"혼인한지 십수년이 흘렀음에도 자식이 없었던 내가 너를 양자로 삼는 것을 모두 동의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얼을 양자로 삼는다는 것은 경국대전에서도 금한 일이라 불가능하다고 대다수가 반대했지만 외국인인 주명의 모친의 신분을 어찌 평민이나 천민으로 단정할 수 있느냐며 어거지를 부렸었다고.
물론 뼈대있는 양반가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안동 김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선조의 공신책봉 덕분이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한다.
그냥 자신과 같은 피를 일부 이어받는 비천한 신분의 외국인에서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유망한 인재로 말이다.
"본래 웃어른이 움직이는 것은 법도에 맞지 않으나 충은 효보다도 중한 일. 나라를 위해 국경을 지키는 너를 내 어찌 함부로 오라가라 할 수 있겠느냐. 여진인들이 날래고 교활하다는 것은 나도 아는 바이니 국경을 언제고 위협할 수 있는 놈들을 두고 휴가를 내라 마라 하기도 뭣하여 아버님을 모시고 내가 온 것이다."
"그렇단다 내 손주야. 콜록. 이제라도 널 찾게되어 너무도 기쁘구나."
병색이 완연한 몸으로 이 먼곳을 온 정성에 주명도 감복하였던 찰나, 갑자기 조부가 된다는 그분이 자신을 와락 껴않고는 가버린 아들 생각이 났는지 다시 통곡을 하시는 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주명을 향해 김시민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가문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으니 이제 중부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공신이 되었던 덕분에 김시민의 어거지가 먹혀서 정말 그의 양자가 되게 생겼다.
문제는,
"콜록."
"아버님은, 그러니까 네 할아버님은 수십년만에 찾은 손주를 보겠다고 편치 않은 몸을 이끄시고 이 먼길을 오셨느니라. 그러니 너는 그 정성을 잊지 말고 반드시...."
미친 듯한 고생길이 열렸다는 것.
"안동 김문의 이름에 걸맞는 훌륭한 선비가 되어야 하느니라! 지금까지 내가 당부해둔 공부는 충실히 해 두었느냐?!"
"그, 그게..."
"어허! 이럴 때가 아니다. 아버님만 따뜻한 곳으로 뫼시고 당장, 당장 공부를 시작해야 하겠다!"
공룡처럼 입에서 불꽃을 뿜으며 공부를 외치는 김시민의 박력에 압도당한 주명은 이제 자유로운 생활도 끝났다는 암담함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공부에 힘겨워 하던 윤아를 위로하기 위해 주었던 설탕을 이젠 자신도 먹어야겠다는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어허!"
딱
"아직 5회독밖에 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밤 2회독을 더 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할 줄 알거라!"
딱
"어허 감히 부친 앞에서 졸다니!"
"공부, 결단코 공부니라!"
"아범아, 손주 잡겠다. 그만하거라."
딱
"아닙니다 아버님. 이 녀석이 보기보다 튼튼하고 또 때려야 정신을 차리는 놈입니다!"
쳐맞고 또 쳐맞으면 못 외울 책이 없겠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불쌍한 주명.
'아니 용맹한 맹장이라던 분이 왜 이렇게 공부를 강조하는 거야?!'
혹시 저 공부, 또 공부를 시키는 악마같은 기세에 왜놈들도 공부가 싫어 진주성에서 학을 떼고 나가 떨어진 게 아닐까 하는 망상이 문득 주명에게 들었다.
어쨌든 정식으로 양반가문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으니, 조선이라는 폐쇄적인 사회에서 근본이자 기반이 생겨난 주명이었다.
***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갈게요."
"아닙니다. 귀인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알겠어요."
초희는 자신이 어디를 갈 때마다 그림자같이 붙어 경호를 하는 저 사내가 귀찮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더 컸다.
저자가 누구인가.
이제는 대마도 세력의 한 축이던 왜구들마저 제압하고 뒷골목의 주인을 넘어 사실상 대마도 전체의 거물중의 거물이 된 그 히데오가 아닌가.
이제는 대마도주마저도 눈치를 보는게 저 히데오였는데 마치 일개 경호원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며 이렇게 보호해 주다니.
이런 보호는 사실 꽤나 오래전부터, 히데오가 지금처럼 거물이 되기 전부터 그가 해오던 일이었다.
물론 그때도 히데오는 거물이었지만.
덕분에 주명이 떠난 이후 초희는 단 한번도 대마도에서 위험하거나 불편한 일을 겪은 적이 없었다.
여자라서 음심을 내비치는 놈들은 다음날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어와서 그 도게자(土下座)란 것을 하며 머리를 박고 빌었고,
조선인이라고 무시하던 상인들은 어느새부턴가 가게가 사라지더니 역시나 자신을 찾아와 제발 용서해 달라고 도게자를 했다.
아니 애초에 저런 경우가 생기는 경우가 드물었던 것이, 그녀의 등 뒤에선 히데오를 상대가 알아챈 순간 그 누구라도 예외없이 초희에게 극 공손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히데오가 그러는 이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분께서 부탁하셨겠지.'
안 그래도 요즘 유곽의 기녀들의 처우가 눈에 띄게 좋아지고, 대마도에 아직 남아있던 조선인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더군다나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는 왜구들을 상대로 큰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전쟁을 벌여 결국 승리했던 덕분에 요즘 조선의 바다는 너무나도 깨끗해 졌다는 놀라운 얘기까지 들려왔다.
'나도 빨리 그분을 돕고 싶어.'
그럴수록 은인에 대한 고마움에 어서 빨리 그분의 곁으로 갈 수 있도록 수련에 매진하겠다 다짐하곤 했던 초희.
하지만 은인에 대한 고마움을 갚기 전에 또다른 고마움을 먼저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뒤를 돌아 히데오에게 손짓했다.
그녀의 특이한 행동에 의아했지만 군말없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간 히데오.
말없이 히데오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작은 소리로 뭐라 읊조리자 놀랍게도 신령스런 푸르른 기운이 그녀의 손에 모여 히데오의 머리속으로 스며들어갔다.
"..! 이, 이것은?!"
수시로 머리에서 느껴지는 두통은 히데오의 고질병이었고 이제는 거의 삶의 일부로 여길 정도로 반포기 상태였는데, 그 두통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갑자기 히데오의 머리에서 손을 떼더니 초희는 그의 아랫배에 손을 가져갔다.
민망할 법도 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신령스러운 느낌에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고, 다시 그녀의 손에 모여드는 푸른 빛무리를 보게 되자 히데오는 온 몸을 휘감는 청량한 느낌에 부르를 떨었다.
"아이가 생기지 않았죠?"
벌써 30대 초반인 히데오에게 고민이 있다면 천생연분이라고 생각하여 결혼까지 할 수 있었던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녀 때문이라고, 본인을 내치고 새장가를 들라고 하지만 왠지 이유가 자신 때문일 거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럴수록 절망만 더 커져갔던 차였는데.
"오늘 그녀와 같이 보내세요."
마치 하늘의 선녀와도 같은 신령한 기운을 후광처럼 달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저절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히데오에게 초희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이를 가질 수 있을 거에요."
그 말을 듣고 눈을 부릅뜬 히데오.
마치 목석처럼 절대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표정이었는데도 지금 그의 입가에는 삶의 고통을 짊어진 후 언제 지어봤는지도 모를 밝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무릎을 꿇고 초희에게 극진한 감사의 표시를 하며 히데오는 다짐했다.
'만약 정말로 아이를, 후사를 볼 수 있다면...'
초희란 분은 결국 주명이 맡기고 간 귀인이며 주명의 발자취일지니.
자신에게 아이를 주신다면 반드시 모든 것을 내어드릴 것이라고 말이다.
만약 이 대마도를 원한다면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기필코 그분께 안겨드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