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한 해적왕-56화 (56/77)

〈 56화 〉 55화 - 입신(立身)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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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은 이제 됐으니 본격적으로 경전을 공부해야 겠구나."

"어허! 아직 축시(새벽 1시 ~ 3시)밖에 안 되었느니라!"

처음 김시민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과 함께했던 일주일이란 시간은 짧지만 폭풍처럼 폭력적으로 지나갔다.

"그 오랜 세월동안 타지에서 힘들게 살아온 손자다. 양친의 정도 받아보지 못한 그 모진 세월을 보듬어주지는 못할 망정 왜 그렇게 모질게 학업으로 내모는 것이냐? 그만 하거라."

자신을 되찾은 손주라고 여겨 정을 주고 크게 귀여워해 주시는 김충갑(金忠甲) 어르신의 만류가 없었다면 김시민의 폭풍 갈굼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님,  아직 녀석은 더 공부할 여력이..”

“어허! 그만 하래두.”

주명은 그런 점에서도 그렇고, 진심으로 자신을 손자로 여겨주는 그분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이제 몸이 어떠십니까 할아버님?"

육친의 정을 되살려준 고마움 덕분인지, 또 집안의 어른인 그가 노구를 이끌고 자신을 보기 위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와 주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주명은 흔쾌히 10시간짜리(CP 10 포인트) 완전회복 명령어를 김충갑에게 사용했다.

"오, 이렇게 개운하다니! 참으로 신묘하구나."

하늘이 내린 수명을 어찌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달고있던 모든 지병과 잔병들이 모조리 씻어 나가는 그 시원한 느낌에 김충갑은 마치 새로 다시 태어난 듯한 청량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김시민이 왜 그렇게나 이 아이를 가문에 품어야 한다고 강조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처음에는 그저 허황된 낭설이요 괴력난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손자에게는 진짜로 하늘이 내려준 무언가가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신비한 힘을 지닌 손자는 큰 부상을 입은 병자나 심지어 신체의 일부를 전투에서 잃었던 부하들마저 치료하는 기적을 보여줬다.

자신에게 손자가 손을 대자 느껴지는 이 청량함과 함께 몸이 환골탈태라도 한 듯이 개운하고 가뿐해진 것을 보면서 이젠 스스로 체험까지 하게되니 더욱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런 기적을 행하는 손자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꺼려하는 기본적인 인간의 마음에 더해 이 조선이라는 폐쇄적이고 색안경 가득한 사회가 손자의 이런 신묘한 능력을 어찌 볼 것인가 하는 걱정이 더해졌으니까.

"나으리 드시라구 사람들이랑 몇주 전부터 만든 뱀술입니다. 꼭 드셔주십시오!"

하지만 이제는 1,000명 가까이 늘어난 이 녹둔도의 백성들이 마치 어버이를 따르듯 손자를 따르는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본래 가호수가 20여 호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의 인적이 사라지기 직전이었다는 이 녹둔도가 손자의 선정에 힘입어 무려 수백호로 늘어난 것도 대단하거니와,

그렇게 늘어난 백성들이 모두 한마음이자 진심으로 손자에게 감복하고 존경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손자에 대한 조선의 편견을 걱정하는 마음따윈 눈녹듯 사라졌다.

설령 다른 사대부가에서 손자의 출신을 비천하다고, 그 신묘한 능력을 괴력난신이라고 배척한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손자는 이미 거목이 되어 백성이라는 토양에 뿌리를 단단히 박은 이곳의 지배자였으니까.

주명을 왕처럼 떠받드는 녹둔도의 군민들은 마치 이곳이 요순시대의 그곳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로 진심이고 지극정성이었으니 어떤 말이 오가더라도 절대로 변심할 수 없을 터.

설령 조정과 기존 양반가에서 배척하더라도 이미 민심에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손자를 흔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내 손자는 만인지적이 아닌가? 어쩌면 그런 편견이나 배척같은 것 따윈 아무 상관이 없을지도.’

주명의 압도적인 무위는 아들로부터 듣기도 했지만 직접 보니 정말이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일전에 여진족을 쓸어버렸던 터라 공백지가 되어버린 녹둔도 북쪽의 땅.

하지만 춘궁기가 다가오자 먹이를 노리는 승냥이처럼 북쪽에서 내려오는 야인여진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기에 아직은 위험한 땅이었다.

그래서 녹둔도에만 머물렀던 김충갑이 처음으로 손자의 무위를 견식할 기회가 생겼던 것.

바로 몇일 전 수십의 야인여진 기마대가 나타났고 그는 노구의 자신이 할 수 있는게 없었던지라 어쩔 줄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도 태연하게 일상을 이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에 놀랐을 때 그는 그 이유를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일기당천(一騎當千)이라는 말을 옛 송나라 시절의 고사에서 들었는데 그게 진짜 가능할 줄이야.

홀로 말을 몰고 나아가 수백의 인마를 모조리 도륙했던 그 무용이란 정말이지 늙은 자신의 심장도 격동하게 할 정도로 놀라웠다.

일기당천이란 말을 만들었던 금나라 기병들의 일화는 적어도 상대방 송나라군이 오합지졸에 보병이라서 가능했던 일일 터인데 저 날랜 여진 기병 수백을 상대로 홀로 수백을 상대했다면 이건 더한 수준이 아닌가.

"나도 경험치좀 올려야 겠다. 나도 12렙 찍어야지!"

그 당시 뛰쳐나가기 전 손자가 내뱉은 독백을 이해하긴 어려웠지만.

그정도까지만 해도 대단할 텐데 홀로 자신을 찾아와 손자의 학업에 대한 것을 말해준 아들 김시민의 말에 김충갑은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주명이가 사서삼경을 모두 완독(完讀)하였습니다."

이미 아들에게 들었던 '단 일주일만에 일자무식에서 소학까지 섭력했다'는 그 얘기만으로도 마치 녀석의 아비의 옛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흡족했는데, 무려 사서삼경을 단 일주일만에 외우고 습득하다니.

손자의 그 무서운 재능은 경악스럽기까지 했다.

완독이라는 말은 그저 읽어보기만 했다는 데 쓰이지 않고 적어도 그 글귀들을 모조리 외웠다는 것을 의미하니 이게 어찌 사람의 학습능력이란 말인가.

'내 손자지만, 가히 일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인망과 실력을 모두 갖춘.'

설령 영웅이 아니었더라도 자신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넷째아이의 아들인 주명에게 최대한 그동안 못받은 사랑을 내어줄 생각이었던 김충갑은 이미 영웅이 되어 돌아와준 손자의 모습에 미안하면서도 고마웠다.

가문은 손자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가문에 다시 받아들여지기 전부터 이미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게 자신의 손자였으니까.

또 앞으로 얼마나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지 상상도 되지 않는 거인이 자신의 손자였으니까.

문득 김충갑은 저 남쪽에 있는 함흥의 모습과 이곳 녹둔도의 모습이 겹쳐져서 보였다.

조선의 태조이자 고려말 난세에서 백성들을 구한 영웅이었던 이성계의 고향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일까.

이성계 역시 압도적인 무위로 새로운 시대를 연 초인이었는데 지금까지 바라본 손자의 능력이 과연 그와 비교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문도 들었다.

김시민이 입에 침이마르도록 칭찬한 저 해병대와 총병대라는 정예병력이 그의 가별초와 왠지 겹쳐보였고, 또 북로남왜라는 흉흉한 지금의 상황 역시 그때와 같아보였으니.

불경하다고 생각해 스스로의 뺨을 치며 자책하면서도 계속해서 드는 의문이 있었다.

지금은 난세인가 치세인가.

자랑스러운 그의 손자는 과연 영웅이 될 것인가 능신이 될 것인가.

***

탕탕탕

쉴새없이 이어진 총성에 무참히 쓰러지는 기병대의 모습을 보며 김시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제는 아들이 된 주명과 함께 말을 타고 근방을 순시하며 아들의 무위로 인해 만들어지는 놀라운 광경을 많이 봤기에 이제는 어떤 걸 봐도 놀라지 않을거라 자신했다지만 그건 총병이라는 처음듣는 병과의 압도적인 위용을 보고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버님, 전장은 앞으로 이렇게 총기를 든 병졸이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겠구나. 아무리 뛰어난 팽배수(방패병)를 앞세워도 도저히 저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200명의 병력이 70명 정도씩 나누어 3단 사격을 하자 고작 몇 초 간격으로 총성이 이어졌고 수백의 기병대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전장의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운 법이니, 만약 저렇게 한 방향으로만 달려들지 않고 사방에서 동시에 들이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러면 저 해병대란 정예군의 창칼에 쓰러지겠지."

여진족들도 바보가 아닌이상 총병에 계속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나름 머리를 썼는지 300기의 야인여진 기병대가 병력을 나누어 삼면에서 들이치려 시도한 적도 있었던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하지만 총병대의 3단사격으로 일로(一路)의 기병이 삭제되고, 그 다음 지척에 다가온 이로(二路)의 기병들은 조준사격에 의해 다수가 무력화 되어버렸다.

물론 아직 온전하지는 않았어도 이로(二路)와 삼로(三路) 방향의 군세, 삼분지 이의 군세가 남아있었기 때문에 근접전에 취약한 총병대가 위기에 처했어야 했다.

하지만 총병대의 바로 뒤에 포진하고 있던 해병대가 긴 창을 들고 자리를 잡고 그들의 뒤로 총병대가 숨어버리자 기병돌격에 '콰직' 밟힌다는 식의 위기따위는 오지 않았다.

수백의 해병이 세워놓은 4m가 넘어가는 장창의 벽에 가로막혀 우왕좌왕 하다가 돌파력을 잃은 기병들을 향해 오히려 조준사격으로 하나둘씩 쏴 죽이는 총병대.

"돌격!"

마침내 완전히 기세를 잃고 말머리를 돌려 패주하려는 적들을 향해 해병대가 창을 내려놓고 칼을 빼들며 돌격하자 적 대다수를 죽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둔 것.

그 남자다운 돌격에 가슴이 뛰었던지 괜시리 총구에 대검을 착검했던 총병대원들만 민망해졌을 정도로 해병대원들은 그간 총병대에 가려져 있던 설움을 분풀이라도 하듯 적들을 압도적으로 쓸어버렸다.

그 위력에 도대체 이 전법이 무엇이냐고 묻는 김시민의 물음에 주명은 이리 대답했다.

"테르시오, 아니 태이서오(泰尔西奥) 방진이라고 합니다. 서반아(西班牙)란 곳의 진형이죠."

이미 스페인이 이 방진을 제대로 써먹고 있었기에 어차피 '한국인의 독창적인 전법' 운운하기에는 글러먹었으니 그들이 쓰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게 나았고, 한자 문화권에 속해 중국어를 기본으로 하는 음차 체계에 익숙한 조선인인 김시민의 이해를 돕기 위해 테르시오를 음차한 태이서오이라는 말로 설명했던 이 방진.

중세 유럽의 최강의 진형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화승총이 등장한 이후에는 스페인의 테르시오 방진을 꼽는다고 해서 이견을 제시할 이는 없을 것이다.

중세 최강의 진형이자 편제인 테르시오.

총병과 창병으로 이뤄진 최강의 공격진형이자 동시에 대기병 방어진의 정점!

사각(四角)으로 이뤄진 방진은 창병을 약간은 헐겁게 세워두며, 전방과 방진의 모서리에 각각 총병을 배치하여 사각(死角)이 없도록 한다.

특히 파이크(장창)를 든 창병들의 대열을 총병이 지나갈 수 있도록 헐겁게 유지하면서도 기병을 저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는 촘촘하게 대열이 서 있어야 했기에 그 적정한 공간배열이 중요했다.

적이, 특히 기병이 돌격해온다면 돌격해온 방향으로 총병을 집중하기 위한 진입로로 이용되며, 사격이 끝난 총병들이 창병의 뒤로 숨을 수 있는 퇴각로로 사용되니 말이다.

그런 총병의 유연한 배치가 가능했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총병의 화력이었다.

당시 신대륙을 개척하여 식민지로부터 막대한 재화를 얻을 수 있었던 스페인은 그 자금력으로 동시대 타국을 압도하는 화승총병 전력을 배치할 수 있었기에 이 테르시오가 가능했던 것이다.

적이 돌격해 온다는 상황을 가정하면 이 막강한 총병들이 유연하게 그 방향으로 집중하여 진형을 이룬 뒤 집중사격을 가한다.

집중된 총병의 막강한 일제사격에 대부분의 돌격해혼 적들은 대부분 이 단계에서 패퇴하나, 그래도 남아있는 적들이 있다면 총병이 창병의 뒤로 물러나며 일제히 세워지는 파이크의 창벽으로 저지하면 된다.

파이크 창병이 이루는 고슴도치 진형을 기병으로서는 뚫을 수 없었기에 적들은 우왕좌왕하다 말머리를 돌리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렇게 돌격력이 돈좌된 적들을 향해 장전을 끝마친 총병들이 다시 사격한다.

완전히 기세를 잃은 적들은 착검한 총병과 방진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창병의 돌격으로 끝장낸다.

거기에 총병들에게 대검을 쥐어줘 착검돌격까지 같이할 수 있다면 화룡점정.

이런 막강한 전술이자 편제이자 진형이었기 때문에 파비아 전투를 비롯해서 그 어떤 전투에서도 제대로 무장과 진형을 갖춘 스페인의 테르시오를 무너트린 적은 없었다.

그때 주명이 구현한 것은 보통 1개 연대급(3,000명)의 병력이 필요한 그 테르시오 방진의 축소판이었던 것.

'총병과 창병을 합쳐 고작 1천의 병력에 불과하지만 과연 지금의 조선군이 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

김시민 본인의 군재가 뛰어난 자였기 때문에 아들이 지닌 패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전장에서 얼마나 대단한 위용을 보여줄 수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17만의 조선군, 무차별로 모든 정남을 징병하면 30만이 넘는 대병력을 운용할 수 있는 그 조선의 국가전력 전체와 맡붙어도 아들의 한줌도 안되는 병력이 쉬이 질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주명의 그 하늘에 닿은 무위까지 더해진다면 정말로 조선군 전체와 싸운다고 해도 쉽사리 밀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김시민의 눈에 방금 전 일제사격으로 벌집이 되어 벌판에 말과함께 널브러져 있는 여진족의 모습이 들어왔다.

저 수십기의 여진족에게도 무참히 난도질 당하던게 이전의 무력했던 조선군이 아니었는가.

게다가 그 난도질당하는 조선군이 그나마 이 조선의 최정예 병력이라 할 수 있는 북방의 병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그 여진족들을 길바닥의 들개 사냥하듯 쓸어버리는 아들의 병력들의 위용이 너무도 잘 와닿았다.

지금 고작 일천의 병력으로도 그럴진데 만약 그 숫자마저 더 확충된다면 어떨지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김시민은 솔직히 주명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걱정이 들었다.

혹시 아들이 반역의 길로 들어선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아들이 만약 삼국지의 조조처럼 그 간웅의 길로 걸어가면 자신과 가문은 어찌될 것이며 또 어찌해야 하는가.

'부디 이 무서운 병력의 칼끝이 도성으로 향해서는 아니될 텐데.'

무거운 표정으로 눈을 감으며 상념을 이어가던 김시민은 이제는 아들이 된 주명의 목소리에 다시 현실로 눈을 돌렸다.

"아버님, 왜놈들이 몇년안에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비가 필요합니다. 아버님같은 분께서는 반드시 놈들의 무서움을 아셔야 합니다!"

마치 자신의 걱정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들은 다가오는 위협의 거대함을 말하며 지금 자신이 가진 엄청난 무력의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조정에도 숨겨왔던 그 무력을 굳이 자신에게 공개하는 이유도 함께 말이다.

아들은 왜인 출신으로 구성된 자신의 총병대와 해병대의 위력을 보여주며 말하고 있었다.

고작 200으로도 수백의 여진족을 쓸어버리는 총병대를 보면 수만정의 조총으로 무장한 왜인들이 얼마나 강하겠느냐고.

저 800의 해병대가 보여주는 출중한 기량을 보면 실전으로 단련되고 엄청난 단병접전 기량을 지닌 수십만의 왜인들은 또 얼마나 강하겠느냐고.

"예전에 너의 말대로라면 놈들이 17만이나 몰려오고, 그중에 왜놈들의 편제상 1할이 조총병이라고 한다면  최소 1만 7천이 되는 것이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답답하구나."

"물론 제가가진 총병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겠지요. 연사력부터 사거리, 정예도까지 말입니다."

당연히 아들의 저 정예한 총병대와 같을 리 없겠지.

만약 왜놈들의 총병이 모두 저 총병대와 같다고 한다면 솔직히 이 전쟁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진 전쟁이다.

어떻게 해도 절대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구식이라도 총은 총입니다. 대포를 축소한 대단한 물건이죠. 총병들이 퍼붓는 사격은 활과는 달리 갑옷마저도 꿰뚫습니다."

"..."

여진족 특유의 찰갑(挂甲)은 가벼우면서도 방호력이 대단해서 활로는 상대하기 어려웠다.

원래 활이라는 무기가 특별히 거대한 활과 무거운 화살을 쓰지 않는다면 갑옷을 관통하는 게 불가능한 물건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활을 잘 쏜다는 북방군마저도 여진족에게 고전하는 것이다.

활로 적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다면 천하제일의 강병은 조선군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조선군이 천하의 명궁이라지만, 활은 냉정하게 보면 전장에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게 고작이지요. 허나 조총은 다릅니다. 조총은 전쟁의 승패를 바꿀 수 있는 결전병기가 될 수 있습니다."

"..."

활에대한 애착이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로지 활 만능주의에 빠져 무과 과목 대다수도 활 위주로 되어있던 조선군의 현실을 아는 탓인지 저 말을 긍정하면 조선군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 같아 충직한 성품의 김시민은 차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총병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100년이 넘게 전쟁과 함께 살아온 저 왜인들의 강함은 해병대원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또 왜인들의 인구는 조선의 두배가 넘으니 병력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물론 총병대와 왜국의 조총수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모든 왜국의 병졸들이 해병대원 같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해병대원들은 굳이 비교하자면 왜인들 중에서도 최고의 무예와 정예도를 지녔을 터.

하나하나가 조선군의 내노라하는 무인들이 모여있다는 그 금군보다도 강맹한 기세가 느껴지니 말이다.

또 실전을 겪었느냐 안 겪었느냐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그로서는 밥먹듯이 전쟁을 일삼았던 실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병력이 몰려온다는 사실에 도저히 어떻게 막아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단병접전을 기피하는 민족성 때문에 팽배수는 거의 충원되지 않았을 정도로 취약한 조선군인데 저 날랜 왜인들의 검에 수수깡처럼 쓰러질 것이다.

"그 왜놈들의 침공에 과연 조선군이 버틸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할 것이다. 수성전이라면 혹시 모르지만 야전에서는 필히 패할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임진왜란 초반에 벌어진 야전에서 조선군은 모조리 털렸다.

탄금대 전투와 용인전투가 가장 대표적인 사례.

나중에 무수한 피를 흘리며 실전경험을 갖춘 병력이 상당수 갖춰진 다음에야 어느정도 맞상대가 가능해져 행주성 전투와 이치전투가 가능했던 것.

그리고 결정적으로 병력수가 문제인 것이 오랜 평화에 젖어 전시행정이 미비했던 조선은 전쟁 초기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최대 3만을 넘지 않을 것이니 숫자부터 밀려 야전은 말도 안된다.

하지만 개인의 기량이 큰 변수로 작용하지 못하는 수성전에서만큼은 조선군도 어느정도 선전했고 심지어 크게 승리한 적도 있었다.

고작 600의 병력으로 부산진 첨사 정발이 수성을 하며 이만에 가까운 고니시군에게 장렬히 맞서 싸우다 전사한 점은 고작 1,600의 일본군 병력에 팔만의 병력이 털렸던 용인에서의 야전과 너무나도 비교된다.

행주대첩은 공성전이라고 하기엔 약간 미묘하긴 하지만, 진주대첩과 행주대첩은 수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대표적인 사례였고.

오로지 수성전만이 조선군에게 일말의 승리 가능성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뭐 치트공의 해전은 논외로 치고.

그건 원균의 칠천량만 봐도 그분이 특출난 것이니까.

"이제와서 병력을 정예하기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봤자 어차피 실전경험 때문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실전경험을 쌓자고 원정을 벌이는 것도 악수입니다. 따라서 남은 것은..."

"축성(築城)뿐이겠지."

쳐들어오기 전에 수전에서 격멸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직 이순신도 좌수사로 부임하지 않아 무척이나 빈약했던 조선 수군의 사정을 뻔히 알기에 그건 굳이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애초에 싸우지 않는 게 좋겠지만 싸워야 한다면, 압도적으로 높은 기량을 지닌 적이 놈의 강점을 쉽게 발휘할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워야 한다.

적의 목표는 분명 수도로 진격하여 왕을 사로잡고 이 나라를 빼앗는 것.

그 수도로 가는 주요 길목을 성벽으로 차단하여 놈들의 공격을 공성전으로 강제해야 한다.

높은 성벽을 끼고 활을 날리며 돌을 던지는, 허약한 조선군이 그나마 비벼볼 수 있는 방식으로 싸움을 강제해야 한다.

3만의 노업 딸피 마린이 풀업 저글링 15만과 2만의 풀업 히드라와 싸우려면 오로지 무한 벙커링뿐이다.

물론 3만 중에 7,000 ~ 8,000 정도 포함된 벌처를 믿고 탄금대를 지른 신가의 병신도 있기는 한데 '말달리자'의 결과는 역사로 잘 증명되었지 않던가.

임진왜란 초기의 그 무참한 패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는 경상도 전역에 미친 듯이 성을 깔아 최대한 야전을 줄이고 수성전 상황을 강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명은 주장하고 있었다.

사람을 정예하기 만드는 것은 어려우나 그저 농민들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성을 쌓는 것은 가능하니 이 조선에서도 무리한다면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어려울 것이다.'

전쟁 불가론을 외치고 있는 동인들이 건저의 사건(建儲議 事件) 이후로 단행한 선조의 환국 덕분에 집권한 상황.

거기다 역시나 전쟁을 원하지 않는 지역 사림들의 지지를 동인들이 등에 업고 있기에 그 세가 확고한 상황이니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축성을 위해 무리하고 원성이 자자한 축성 요역을 벌일 수 있을리가 없었다.

과연 조정이 지역 유림의 반발과 백성들의 반발을 누르고 대대적인 축성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고개를 저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김시민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져 갔다.

아비의 표정을 보지 않더라도 주명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말을 꺼낸 것은 나중에 조선군의 중진이 될 그가 조금이라도 조선군이 살아남을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뿐이었다.

부자지간이라는 인연으로 묶였기에 재앙이 다가온다는 것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고.

한동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이어가던 부자(父子)는 김시민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꺼낸 말로인해 그 분위기가 바뀌었다.

"주명아."

"예 아버님."

"네가 이제는 내 아들이라고는 하지만 핏줄이 이어진 친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이름은 작(金綽)이라고 하는."

"예, 할아버님께서 알려 주셨습니다."

실제로 주명에게 가문 구성원들에 대한 얘기를 김충갑이 해 주긴 했었다.

근데 그녀석, 아버지(?)의 피를 진하게 받았는지 어린 나이에도 싹수가 노란 개망나니라고 들었다.

녀석 얘기를 하며 한숨을 쉬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으니까.

"그 핏줄은 어디 안가는지..흠 아니 널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만. 어쨌든 녀석은 시신(金時愼)이 녀석과 마찬가지로 행동거지가 조금..조금 많이 어리석단다."

"...들었습니다."

갑자기 큰 부탁을 하듯이 자신의 손을 잡는 김시민을 보며 당혹해 하던 주명에게 그가 던진 말은,

"네가 사람좀 만들어 주려무나."

"네?!"

친동생(?)을 돌봐 달라는 부탁이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 팔다리만 붙어 있으면 뭐 제수씨도 불만이 없겠지."

그것도 두들겨 패서라도 말이다.

대체 얼마나 망나니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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